아이 낳아 길러보니 아이에게 해가 될 만한 일에는 본능적으로 온 신경이 곤두서고 반면에 아이와 무관하게 여겨지는 세계에 대해서는 호기심과 탐구욕이 예전만 못해 간다. 한때 두 눈 반짝였던 것들에 대해 나 스스로 아연할 정도로 심드렁하다. 내 눈이 반짝이는 건 사실 아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을 때 뿐인 지도. 낯선 풍경을 봐도 제대로 마음에 담아지지 않고 기껏해야 잠시 한눈팔기 수준. 풍경뿐이랴. 예전처럼, 도박꾼처럼, 판돈을 모두 걸고 금방이라도 이글대는 불구덩이로 뛰어들어가 버리려는 태도를 지니기 쉽지 않다. 뛰어들어가 버리면 아이는 어쩔 건가. 아이의 생존과 안전과 번영을 중심으로 뇌가 완벽하게 소성가공되어버린 모양. 이 무슨 해괴한 트랜스 상태란 말인가. 대자연의 농락이란 말인가.
전락할 대로 전락했다는, 지금 바로 여기가 최후의 지점이라는 강력한 확신 가운데서,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더 이상 그 어떤 개선과 발전의 희망도 갖기 어려움을 인정하고 정신적 개인 파산을 (감히) 선언한 후, 마치 회계를 마감하고 이월 작업을 진행하듯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했건만, 아이를 기르다 보니 미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 자신이 한층 더 매섭게 전락할 수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겠다. 아니 어쩌면 진정한 전락은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도. 그 기미가 한층 뚜렷해진 생물학적 쇠락과 더불어. 어쨌든 이 모든 변화를 겪고 있자니 밀려드는 회한- 아이가 생기기 전에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오만한 줄도 모르고 어쩜 그리도 흰소리를 방자하게 지껄여댔는지. 부끄럽고 또 부끄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