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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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당신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 당신이 진리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면 매번 속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예수는 이것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로 전하려고 했다. 예수의 이 말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직접적으로 진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잘못 해석하면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예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존재, 모든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존재인 그 생명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 신비가들은 그것을 ‘내면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진아), 즉 내면에 거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 차원과 연결될 때—그 차원과 연결되는 것은 당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이지 특별히 기적적인 성취가 아니다—당신의 모든 행동과 관계들은 당신이 깊은 내면에서 감지하는 모든 생명과의 일체감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라고 성 어거스틴은 말했다. 언어로는 이것 이상으로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삶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우연 같은, 뿐만 아니라 무질서하게 여겨지는 일련의 일들 배후에는 더 높은 질서와 목적이 숨어 있다. 이것을 선에서는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눈이 내릴 때, 모든 눈송이가 저마다 정확히 자기 자리에 내린다.” 생각을 통해서는 이러한 더 높은 질서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용물에 대한 것인 반면, 더 높은 질서는 형상 없는 의식의 영역, 우주 지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는 있고, 더 나아가 그 질서에 우리 자신을 맞춤으로써 그 더 높은 목적이 펼쳐지는 데 의식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으로 들어갈 때, 생각에 지배되는 마음에게는 주위 사방에 있는 무질서와 혼돈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삶—좋은 것—과 죽음—나쁜 것—조차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완전히 썩은 부패한 물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에 오직 고요만이 자리하고 생각이라는 소음이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곳에 숨은 조화가 있고 신성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모두가 완벽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방식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더 큰 질서를 알아차리게 된다.

-생각에 지배되는 마음에게는 조경이 잘된 공원이 더 편안하다. 공원은 자연스럽게 무성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통해 계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질서가 있다. 원시림의 질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는 혼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좋고 나쁨이라는 마음의 분류를 넘어서 있다. 생각을 통해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생각을 내려놓고 고요히 깨어 있으면, 또한 이해하려고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으면, 감지할 수 있다. 그때 처음으로 숲의 신성에 눈이 열릴 것이다.

-숨은 조화와 신성을 감지하면 자신도 그 일부임을 알 수 있고, 그것을 깨달을 때 당신도 그 조화의 의식적인 참여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자연은 당신이 삶의 전체성과 다시 연결되도록 돕는다.

-꿈이 있고, 그 꿈을 꾸는 자가 있다. 꿈은 형상들의 일시적인 놀이이다. 그것이 이 세계이다. 상대적으로는 실재하지만 절대적으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 꿈꾸는 자, 절대적 실체가 있다. 그 안에서 형상들은 왔다가 간다. 꿈꾸는 자는 개인이 아니다. 개인도 꿈의 일부이다. 꿈을 꾸는 자는 그 안에서 꿈이 나타나고 꿈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우주의 실체를 구성하는 두 부분, 즉 물체와 공간, ‘어떤 것임’과 ‘어떤 것이 아님’은 당신 자신의 실체를 구성하는 두 부분이다. 분별 있고, 균형 잡히고, 결실 있는 삶은 실체를 구성하는 이 두 차원인 형상과 공간 사이의 춤이다. 많은 사람들은 형상의 측면에, 감각 지각과 생각과 감정에 너무도 동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숨은 절반은 그들의 삶에 누락되어 있다. 형상과의 동일화 때문에 에고 속에 계속 갇혀 있는 것이다.

-전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세상 또는 우주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미생물에서 인간, 은하에 이르기까지 실제로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물체들이나 독립된 존재들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다차원적인 그물망의 일부입니다. (...) 이 전체성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호연결성보다도 더 깊은 차원이 있습니다. 더 깊은 그 차원에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입니다. 그것이 ‘원천’이며,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지성으로, 그것이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우주라는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전체는 사물의 존재와 ‘순수한 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형상으로 나타난 것과 나타나지 않은 것, 세상과 신으로. 그러므로 전체와 연결될 때, 당신은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전체의 상호연결성의 일부가 되고, 전체의 목적의 일부가 됩니다. 전체의 목적은 의식을 이 세상에 등장시키는 일입니다. 그 연결의 결과로, 자발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들, 기회를 제공하는 만남들, 우연들, 동시에 일어나는 다발적인 일들이 훨씬 더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칼 융은 이 동시성을 ‘비인과적 연결 원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라는 표면 차원에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에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표면의 세계 밑바탕에 존재하는 지성이 외부로 나타난 것으로, 마음의 이해를 뛰어넘는 깊은 연결입니다.

-어떤 생각도 전체의 무변광대함을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실체는 통일된 전체이지만 생각은 그것을 조각들로 잘라 놓는다. 이것이 근본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개별적으로 분리된 사물들과 사건이 있다거나 이것이 저것의 원인이라고 믿는 것이다. 모든 생각은 어떤 시각을 담고 있으며, 모든 시각은 그 본질상 한계를 담고 있다. 한계를 담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적어도 절대적인 진리는 아님을 의미한다. 오직 전체만이 진리이지만 그 전체는 말해질 수도 생각되어질 수도 없다. 전체는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해한 것이다.

-세상 속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회귀하는 것, 즉 확장과 수축은 우주의 보편적인 두 가지 운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나감과 집으로 돌아옴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심장의 끊임없는 팽창과 수축, 호흡의 들숨과 날숨처럼 우주 전체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다. 그 운동은 잠과 깨어남의 순환 속에서도 반영된다. 매일 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의 상태로 들어갈 때 당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지 않은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며, 그런 후에 아침이 되면 기운을 보충해 다시 나타난다.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는 충격을 받고 이해할 수 없으며 절망하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동안 삶이 그들을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의미와 목적은 축적, 성공, 세움, 보호, 그리고 감각적인 만족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외부적인 운동이고 형상과의 동일화, 즉 에고와 관계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외부적인 운동보다도 더 깊은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 지금까지는 개인의 삶 속으로 영적 차원이 들어오는 것은 대개 늙음과 상실과 개인적인 비극을 통해서였다. 말하자면 내면적인 목적이 나타나는 것은 외부적인 목적이 무너지고 에고의 껍질에 금이 가서 열리기 시작할 때뿐이다. 그러한 사건들은 형상의 소멸을 향한 회귀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형상 차원에서의 잃음은 본질 차원에서의 얻음이다. 고대 문명과 전설에 등장하는 ‘눈 먼 예언자’와 ‘상처 입은 치료사’ 같은 전통적인 인물을 보면 형상 차원에서의 크나큰 상실이나 장애가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형상의 불안정한 본성을 직접 경험하면 다시는 형상을 과대평가하지 않게 되고, 맹목적으로 형상을 추구하거나 형상에 집착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형상의 소멸, 그중에서도 특히 늙음으로써 나타나는 깨달음의 기회는 현대 문명에서는 이제 막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 한 개인의 삶에서 에고가 회귀 운동과 자신을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으면 늙음이나 다가오는 죽음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는다.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늙어 가면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그들의 쇠약해져 가는 형상들은 투명해져서 의식의 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지구에서는 늙음이 인간 개인의 의식이 꽃피어나는 높은 가치를 지닌 시기로 인식될 것이다. 그 시기는 아직 삶의 외부적인 환경들 속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늦은 귀향의 시기이고,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에 눈을 뜨는 시기이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늙음의 시기는 깨어남의 과정이 강렬해져서 마침내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될 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지고 에고에 삶을 지배당하지 않게 되면 늙음이나 개인적인 비극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축소되거나 붕괴되지 않아도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에 눈뜰 수 있다.

-에고의 기능장애로 인해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은 우주 지성의 외부 팽창 주기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 창조의 추진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형상의 창조에 의식적인 참여자가 된다. 창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를 통해 우주의 지성이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며, 따라서 행위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반발력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행위는 모두의 선을 목표로 한 것들이다. 그런 행동은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분리시키지 않고 합친다. ‘나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나의’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 속 의식의 등장을 위해, ‘나의’ 종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자연 전체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행위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다. 행위는 필요하지만 우리의 외부 현실을 나타나게 하는 데는 이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창조의 일차적인 요소는 의식이다. 아무리 활동적이고 아무리 많이 노력해도 우리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 상태이다. 내부 차원에서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행동해도 차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형태만 다른 똑같은 세상을, 에고가 밖으로 투영된 또 하나의 세계를 몇 번씩 재창조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깨어 있는 행동은 외부적인 목적—무엇을 하는가—과 내면적인 목적—깨어남과 그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것—이 조화를 이룬 행동이다. 깨어 있는 행동을 통해 당신은 외부로 향한 우주의 목적과 조화를 이룬다. 당신을 통해 의식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의식은 당신의 생각 속으로 흘러들어 와 생각들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가 행동을 안내하고 힘을 부여한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당신의 운명을 실현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 의식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그렇게 해서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당신이 삶을 우주의 창조적 힘과 연결시키는 세 가지 방식이다. 여기서 방식이란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와 당신의 행동을 깨어 있는 의식과 연결하는 밑바탕의 에너지 주파수를 의미한다. 이 세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는 일은 기능장애적이고 에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은 의식의 특정한 진동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셋 중 하나가 작동하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의 어느 상태에도 있지 않다면,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받아들임의 상태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당신이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평화로움은 미묘한 에너지 파동으로 당신이 하는 일 속에 흘러든다. 겉에서 볼 때 받아들임은 수동적인 상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다. 왜나하면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평화, 그 미묘한 에너지 파동이 의식이며, 그 의식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방식 중 하나가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것이다. 항복은 받아들임의 한 측면이다.

-즐거움은 ‘순수한 있음’의 역동적인 측면이다. 우주의 창조적 힘이 자신을 의식할 때, 그것은 기쁨으로 나타난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그 행위를 할 때, 그리고 그 행위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닐 때, 그것이 어떤 일이든 즐거울 것이다. 사실 즐거움은 당신이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한 살아 있음의 느낌이다. 그 살아 있음은 당신 자신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은 실제로는 ‘순수한 있음’의 기쁨을 역동적인 측면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열정은 삶(생명)과 하나이며, 열정에 의해 움직이는 행동이 아무리 역동적이어도 당신은 그 행동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 회전하는 바퀴의 중심에는 늘 고요하면서 강렬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 있다. 모든 활동 한가운데에 평화로운 중심부가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원천인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 형상의 소멸을 향해 돌아가는 운동이 시작되면, 열정은 더 이상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는다. 열정은 외부로 향하는 삶의 주기에 속한다. 오직 받아들이는 항복을 통해서만 돌아가는 운동, 즉 집으로 가는 여행과 자신을 맞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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