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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서정시
리훙웨이 지음, 한수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왕과 서정시》
2050년 가까운 미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앞둔 시인 ‘위원왕후’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료진의 견해로 보아 ‘자살’임에 무게 추가 기울지만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경찰이 조사에 착수 한다. 한편 주인공 ‘리푸레이’는 친구인 ‘위원왕후’가 죽기 전 자신에게 마지막 메일을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단절한다. 잘 지내길”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문장, 평소에는 거의 쓴 적 없는 ‘메일’로 이 메시지를 남겼다는 것, 전혀 낌새를 느낄 수 없었던 친구의 죽음에 주인공은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예감하고 그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한다. 소설은 주인공 ‘리푸레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위원왕후’죽음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미스터리 추리 형식의 SF 소설이다.
소설에는 그리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왕후의 친구이며 중앙국립도서관에 재직 중인 주인공 ‘리푸레이’, 왕후의 여동생 ‘위원란’,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 특별 조사국의 ‘류창’과 ‘리웨이’, 주인공의 추적으로 서서히 실체가 드러나는 회사 ‘제국문화’의 창립자인 ‘왕’과 그 관계자들. 소설은 인물들의 관계보다는 왕후가 남긴 단서 즉 그가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가 되게 한 서정시 ‘타타르 기사’와 주인공이 이를 추적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게 그려진다.
또 하나 소설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50년의 사회는 ‘의식결정체, 이동영혼, 의식 공동체’ 삼위일체의 시대다. 태어나 일정한 나이가 되면 머릿속에 ‘의식결정체’를 이식한다. 이는 뇌 속에 삽입되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수집, 기록한다. 그리고 이 결정체는 ‘이동영혼‘이란 기계를 매개로 ’의식공동체‘에 접속해 타인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데 현재의 SNS와 비슷하지만 좀 더 직접적이고 개방적이다. 소설에선 조금 복잡하게 그려지는데 자신만의 자유공간을 구축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업로드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를 검색하거나 직접 볼 수도 있다.
처음에는 ‘휴대전화기’ 기반의 SNS앱 ‘황제 펭귄’으로 시작해 성장한 회사는 결국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매개를 없애 버리고 앞서 언급한 ‘삼위일체’를 통해 개개인간의 직접적인 소통에 이르게 했다. 나아가 소설 속 제국문화는 궁극적인 목표 ‘인류의 동질화’를 위한 2, 3단계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으며(p261), 이 목표를 위해 가장 불필요한 요소 ‘언어’와 ‘언어의 서정성’을 제거하려하는 모종의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 모든 계획과 실현 방식이 드러나며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등장인물들 간의 철학적 대화의 장면이 펼쳐진다.
소설은 이렇게 모든 것이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언어와, 언어의 서정성의 역할에 대한 고민, 나아가 ‘의식’의 업로드를 통해 ‘영생’의 거대한 야망을 이루려 하는 ‘제국문화’의 실체를 통해 어쩌면 멀지 않는 시일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를 인류의 미래 조각을 보여준다.
소설은 다양한 관점에서 인류에게 닥친 미래를 고민하게 하고 참으로 많은 철학적 요소들이 뒤 섞여있다. 인류가 꿈꾸는 영생의 욕망은 ‘인식’의 업로드로, 인류를 인류이게 하는 ‘언어’가 사라지면 지구촌 모든 이들이 동일화가 될 수 있다는 상상, 권력자들이 이를 이용하려 한다면 우리 개개인은 순간순간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소설을 읽으며 영화 ‘트랜센더스’나 ‘공각기동대’가 떠오르기도 했고 ‘인식’이 무엇인가 하는 주제에 대한 철학적 고민, 언어가 인류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궁극적인 의문에 빠지기도 했다. 제국문화의 가공할 만한 계획에 대비되는 죽은 시인이 남긴 시 한편과 그 시에 그려진 대로 치러지는 초원에서의 장례는 너무나 ‘서정적’이었고 아름다웠다.
결국 작가는 ‘타타르 기사’의 ‘서정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도 게으름 피거나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고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행동(p324),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써 이를 증명한 시인의 모습으로. 철학적 소재, 추리, SF 등 다양한 요소가 등장하지만 적절하게 어우러져 천천히 곱씹으며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정말 멋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