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거대한 감옥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 - 허창영 / 인권실천시민연대 간사

거대한 감옥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스라엘의 정책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나 ② - 정착촌과 고립장벽
허창영/ 인권실천시민연대 간사
[편집자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중동문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팔 분쟁 관련 국내 보도는 외신 등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미디어다음은 이 같은 점을 감안, 인권실천시민연대가 기획한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인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인권실천시민연대(www.hrights.or.kr)는 현지 활동과 해외 언론 모니터, 학술 연구 자료 조사 등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단체입니다. 미디어다음은 이-팔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다만 이 단체의 시각은 미디어다음의 시각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미디어다음은 이 시리즈에 대한 반론도 언제든 수용할 것임을 밝힙니다.

<게재순서> 1. 팔레스타인의 땅, 이스라엘 검문소
2. 이스라엘의 정책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나 ① - 학살, 강제구금, 고문
3. 이스라엘의 정책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나 ② - 정착촌과 고립장벽
4. 언론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왜곡하나
5. 반가운 평화무드, 도사린 긴장감
6. 한국도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에 관심 가져야

팔레스타인 문제의 핵심은 영토문제다. 이스라엘은 성서의 기록을 근거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팔레스타인은 2000년 동안 살아왔던 역사적 근거를 들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이라는 땅을 놓고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학살과 고문, 자살폭탄공격 등 우리가 말하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모든 것을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놀라운 변화
확장되는 이스라엘과 축소되는 팔레스타인. [사진=Health, Development, Information and Policy Institute(HDIP)]

팔레스타인 분쟁은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과 궤를 같이 한다. 19세기 말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를 시작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극히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국가 건설이라는 시오니즘의 주장이 서구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결국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입은 UN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6.6%를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56.4%를 할애하는 ‘분할안’을 채택한다. 유대인들은 국제사회에서 ‘유대국가’를 최초로 인정하는 이 결정을 환영하고 이스라엘을 건국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87.5%를 소유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은 이런 ‘분할안’을 거부한다. 이-팔간 입장이 어떻든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경계가 처음으로 그어진 것이다.

이후에도 소위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고 팔레스타인의 영토는 더욱 축소된다. 이스라엘은 1967년 이집트를 선제공격하는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 전쟁’을 통해 가자지구, 서안지구, 골란고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고 동예루살렘까지 합병하면서 기존 이스라엘 지역의 3.5배를 점령한다. 같은 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42호 결의를 통해 점령지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유엔의 결의를 ‘일부 지역에서의 철수’로 해석한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상이 있은 후 일부 영토는 반환했지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지금까지 분쟁의 씨앗을 낳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을 잠식하는 ‘유대인 정착촌’
1967년 전쟁을 통해 새로운 땅을 획득한 이스라엘은 점령지를 실 주거지로 만드는 ‘유대인 정착촌’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유대인 정착촌 정책은 팔레스타인 땅에 마을을 건설해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정책이다.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 정착촌’은 결국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으로 이어진다. [사진=The Grassroots Palestinian Anti-Apartheid Wall Campaign]
1967년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던 모세 다얀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찢겨진 도시를 재통합했다. 우리는 성지를 다시 찾았고, 이 성지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데, 이 선언이 상징하듯 점령 직후 당시 집권당인 노동당 정권의 정착촌 정책이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된 곳은 동예루살렘이었다.

이스라엘은 당시 3만명 정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던 동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기 위해 6000명 이상을 추방했다. 워싱턴DC의 '팔레스타인 정책분석센터'는 당시 이스라엘이 몰수한 토지는 동예루살렘에서 건축이 가능한 토지면적의 약 26%에 이른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유대인 정착촌 정책은 이후 점령지 전역으로 확대된다. 캠프데이비드 협상에 따라 철수한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 등을 제외하고도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가자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에 건설된 정착촌의 숫자는 분류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200개 이상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정착촌 정책을 활성화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을 정착촌으로 이주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비롯해 유럽, 미국,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까지 정착촌으로 이주해오고 있다. 또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들을 정착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사 비용 제공과 저리의 고액 융자, 저렴한 주택 구입 지원, 세금 7% 공제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의 정착민의 증가, [출처=이스라엘 통계청]


동예루살렘에서의 정착민 증가, [출처=Palestinian Academic Society for the Study of International Affairs(PASSIA)]

정착촌 정책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착촌 건설을 위한 토지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강압적 몰수이다. 1967년 이스라엘은 군포고령 58호를 통해 6일 전쟁 당시 피난을 떠난 모든 사람을 ‘부재지주’로 간주하고, 부재지주의 모든 재산은 ‘포기한 재산에 대한 이스라엘 관리인’에게 ‘양도’한다고 발표했다. 결국 1973년 총 431,333㎢에 이르는 땅이 이스라엘 정착민과 정착촌을 위해 ‘양도’되었고, 이후에도 정착촌 건설을 위한 토지몰수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양도는 1978년 10월 10일자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에 인용된 유대인 정착민의 증언처럼 법률로 명문화되고 제도화된 ‘강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되고 있다.

“여기 요르단 계곡에서 우리는 수㎢를 경작한다. 그 곳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토지이다. 6일 전쟁에서 요르단으로 피난한 나블루스와 투바스 주민인 이 사람들은 유대아와 사마리아(서안지구)로 되돌아 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 목록이 국경 검문소에서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착촌들을 연결하는 관통도로는 정착촌의 또 다른 문제다. 관통도로는 유대인 정착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이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작업장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도로들은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분할 고립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83년 공포된 이스라엘의 군포고령 50호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이 정착촌과 관통도로들로 이리저리 찢겨진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중동판 ‘게토’라 불리는 고립장벽
보안장벽인가 인종차별벽인가
이스라엘이 건설하고 있는 거대한 ‘장벽’도 이-팔 문제의 핵심이다. 서안지구를 중심으로 건설되고 있는 이 장벽에 대해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로부터 이스라엘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한 ‘보안장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과 국제사회는 ‘고립장벽’ 혹은 ‘인종차별장벽’이라며 건설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건설하고 있는 중동판 게토(중세 이후 유럽에서 유대인 차별정책에 따라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라는 비난도 일고 있다.

지난 2002년 6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이 장벽은 높이가 5-8미터에 이르고, 총연장이 730k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장벽 건설이 완료될 경우 서안지구 전체면적의 16.6%, 팔레스타인 사람들 약 23만7000명이 장벽 사이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완전히 고립되는 수도 16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장벽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동예루살렘 안에 있는 직장, 학교를 다니는 데 큰 불편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응급환자가 생겨 병원을 가야 하는 때에도 검문소의 ‘보안검색’에 막히는 경우가 있다. 팔레스타인 현지 활동을 벌인 홍미정 교수가 보고서에서 지적했듯 걸핏하면 검문소를 닫아 오가는 길을 막기 때문에 고용과 건강, 교육 전반이 위협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장벽은 팔레스타인을 ‘거대한 감옥’에 가두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사진=The Grassroots Palestinian Anti-Apartheid Wall Campaign]

장벽 건설은 또 다른 영토 확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모니터에 따르면 장벽이 건설되는 위치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으로 더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에 기여하고 있으며, 또한 경계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마을을 장벽 건설 부지로 이용하기 위해 가옥을 파괴하고, 농경지를 훼손하고 있다고 한다.

장벽 건설로 심각한 생존 위협을 느끼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단식투쟁을 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7월 9일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장벽이 “점령지 거주민들의 이동권과 직업선택권, 교육 및 의료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아울러 “장벽으로 피해를 입은 팔레스타인의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같은 달 20일 유엔총회 제10차 임시특별위원회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스라엘의 장벽 철거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더구나 이스라엘 고등법원도 보안을 내세워 마을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다 할 입장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국제사법재판소와 유엔이 팔레스타인 테러를 옹호하고 있다”며 장벽 철거를 거부했고, 장벽 건설을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살폭탄 공격 비판받아야 하지만...
이스라엘의 양보 없이는 평화도 없다
이스라엘이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난민으로 전락해 가지지구와 서안지구 난민촌을 비롯해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으로 떠돌고 있다. 유엔난민구호사업기구(UNRWA)의 통계에 따르면 2003년 6월 30일 현재 팔레스타인 난민수가 400 만명에 이르고 있다. 만화 저널리스트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자지구 자발리아 난민촌에는 2㎢의 땅에 65만명이 살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라고 보고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대부분 한국의 ‘달동네’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일부는 텐트에서도 생활하고 있다. 난민촌은 전기와 수도, 난방 등 사회기반시설이 전혀 확보되지 않은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 바로 옆에 있는 유대인은 정착촌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진=The Grassroots Palestinian Anti-Apartheid Wall Campaign]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정착촌과 고립장벽 건설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팔레스타인들의 생존영역을 파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적극적인 정책변화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영토 확장 정책과 이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이 있는 한 팔레스타인 평화는 요원하다.

세계 각지의 비판적인 여론을 보더라도 ‘점령군’인 이스라엘이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힘에 바탕을 둔 일방적 점령정책은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는 사실은 미국의 이라크전쟁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또 더 강한 억압은 더 강한 저항으로 되돌아오기 쉽다. 이는 생활환경이 가장 열악한 가지지구에서의 저항이 심하고, 정착촌 정책이 강화되고 고립장벽 건설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촉발된 2차 인티파다에서 팔레스타인이 ‘자살폭탄공격’이라는 극단적 저항을 투쟁방식으로 선택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무고한 민간인까지 희생양으로 삼는 ‘자살폭탄공격’이 비난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한 인권단체 관계자의 지적처럼 “고립장벽 건설을 중단하고, 일상적인 군사작전을 중단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지적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인 하마스도 샤론 총리와 압바스 수반의 정상회담 이후 이스라엘측이 정착촌과 고립장벽을 중단하고 팔레스타인 자치도시들에서의 군사작전 중지와 저항단체원들에 대한 추격 중단,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을 선행할 경우 얼마든지 휴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샤론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보수 세력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존재하는 베첼렘(B'Tselem, 점령지역인권을위한이스라엘정보센터), 구쉬 샬롬(Gush Shalom), 지금 평화(Peace Now)등의 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고립장벽 건설 반대 ▲가옥파괴 대응 ▲이스라엘군의 인권침해 증거 수집 ▲수로와 수도관 연결 지원 ▲팔레스타인의 올리브 수확 지원 활동에 대해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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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장애인 성(性)을, 말한다 희한한가

장애인 성(性)을, 말한다 희한한가


손이 없다고 밥 먹을 권리마저 없는가

책 제목은 <섹스 자원봉사>(아롬미디어·8500원)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가 부담스럽지만 부제를 보면 주제가 드러난다. ‘억눌린 장애인의 성’. 일본인이 쓴 이 책은 장애인의 성적 욕구 해결을 돕는 자원봉사(제도)를 제안하고 있다.

주장의 요지를 이해하는 것과 이를 수용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장애인에게 섹스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겐 ‘상상 밖’의 일이다.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이나 하단 말인가.

그 물음을 비웃는 듯, 책의 첫 장부터 충격적이다. 한 남성 자원봉사자가 신체장애 1급의 노인을 만나 인터뷰한다. 69살의 노인은 뇌성마비를 앓아 태어날때부터 장애를 짊어졌다. 그가 자신의 성에 대해 ‘생생한 고백’을 털어놓는다. 이어 자원봉사자가 노인을 ‘돕는다’. 노인이 말한다. “비록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지만… 성은 삶의 근원, 그만둘 수 없어요.”

담론밖 ‘낯선’ 주제에 대해
어느 일본인 자원봉사 제안
흥미롭거나 불편하게 들리지만
장애인 그들에게 성욕은 있다

곧이어 ‘성’을 말하는 장애인들이 속속 등장한다. 이를 접하는 일은 대단히 흥미롭거나 지극히 불편하다. 대립적인 이 두 정서, 흥미와 불편함은 오직 한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 이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거나 공개적인 여론의 주제가 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장애인온라인신문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칼럼니스트 조항주씨의 말이다.


이 책은 ‘낯선’ 주제로 한국 사회의 ‘경계’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일본에는 장애인들이 사랑의 짝을 찾는 공개 인터넷 사이트들이 있다. 여기에는 ‘자원봉사자’를 찾는 사람과 여기에 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희안한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 분야를 전문화한 성매매 업소가 있다. 지은이가 인터뷰에 한 바에 따르면, 업소 종사자들은 남다른 의미와 보람까지 느끼고 있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독자들은 윤리적·사회적 물음에 부딪힌다. 장애인의 성욕해소를 돕는 일과 성매매로 인한 여성의 소외문제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성적 소수자인 장애인을 위해 성매매를 허용하는 일은 여성의 성 상품화로 이어진다.

글쓴이는 정교한 결론을 내놓지 않는다. 장애인의 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고 이에 대한 세상의 은밀하고도 선정적인 관심을 이성적 판단으로 바꾸기 위해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적어 내려갈 뿐이다.

그러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해답은 ‘자원봉사’다. 장애인의 소외를 마음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장애인의 손과 발이 되는 것, 그럴 준비가 돼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회와 정부가 제도를 마련해주는 것이 그 뼈대다.

문제는 따로 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제안을 수용할 채비가 갖춰져 있지 않다. ‘장애인 섹스자원봉사’는 여러 면에서 윤리적·철학적·사회적 논란을 부추긴다. 서구 유럽에선 대단히 정책적인 문제지만, 한국은 윤리적·학술적 토론부터 거쳐야할 상황이다. ‘성적 소수자’ 문제가 진보담론의 지평을 넓혀가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성은 아직 담론 밖의 일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한국은 아직 ‘상상 밖’…소수에 의한 목소리만

지난해 12월 다큐멘터리 영화 <핑크 팰리스>(감독 서동일)가 발표됐다. 장애인의 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첫번째 한국 영화였다. 지난해 10월 서울 갈월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장애인 성 향유를 위한 성 아카데미’가 열렸다. 장애인들이 성을 ‘마음껏 누리고 향유하도록 돕는’ 강좌였다. 이보다 한달 앞선 9월에는 지체장애인인 사진작가 박지주씨가 전신마비 여성장애인 이선희씨를 모델로 한 예술누드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이들이 세상을 향해 말하려 했던 내용은 간단하다. ‘무성(無性)적 존재’로 치부됐던 장애인에게도 사랑과 연애, 성에 대한 욕구가 있음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선정적’ 눈길을 주었다가 ‘냉소적’으로 돌아섰다.

정신지체인의 성 문제를 연구해온 전용호 대구미래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의 성욕을 모른 척 했고, 장애인 스스로도 이를 억누르고 포기했다”며 “장애인의 성 문제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역시 이 분야의 몇 안되는 연구자인 윤가현 전남대 교수(심리학과)는 “손이 없다고 밥먹을 권리가 없는 게 아닌 것처럼, 인간 누구나 갖는 욕구와 권리의 문제로 장애인의 성욕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 문제에 착목한 학술모임이 아직 없다. 재활의학의 한 분야, 또는 특수교육학회 차원의 생활지도 문제로 장애인의 성을 다루는 정도다. 지난 1999년 보건당국 등이 시설에 수용된 지체장애인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시행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었던 일은 한국 사회의 ‘낮은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먼저 고민을 시작한 소수에게 떠맡겨져 있다. 장애인 성 문제를 다루는 온라인 매체 <폭시애이블>(foxiable.net)을 준비중인 조항주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조씨는 “장애인의 성을 성매매와 연관시켜 해결할 수는 없다”며 “결국은 봉사의 기본정신을 확대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 장애인 당사자의 당당한 요구와 정부의 적극적 제도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안수찬 기자


■ 장애인 ‘성의 천국’ 네덜란드

1970년대부터 자원 봉사
자치단체 시설 운영도

장애인의 성에 대한 사회적 관용의 ‘첨단’은 네덜란드에 있다.

1970년대부터 성혁명을 주창한 시민운동가들이 장애인을 위한 ‘섹스 자원봉사’ 활동을 벌였다. 이런 노력은 ‘선택적 인간관계 재단(SAR)’이라는 일종의 비정부기구 설립으로 이어졌다. 8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이 단체는 남녀 장애인의 성생활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우리는 돌이 아니다. 어떤 중증 장애인도 성적 욕구가 있다’가 SAR의 이념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장애인시설에는 ‘섹스 서비스 제공 매니저’가 따로 있다. 시설 내에는 장애인의 성생활을 위한 독립적인 공간이 있다. 시설 직원들은 장애인들끼리의 성행위를 돕기도 한다. 옷을 대신 벗겨주고 침대에 눕혀주는 등의 도움이다. 몇몇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들에게 성생활 지원금도 지급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성매매와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한 네덜란드 특유의 법 제도와 문화가 있다. <섹스 자원봉사>의 지은이는 이에 대해 “적극적인 사회보장이 (사회적) 자애를 낳고, 이것이 성에 대한 관대함과 특유의 휴머니즘으로 이어졌다”고 짚는다.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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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패 <다게>

다게례(茶偈禮) : 불교에서는 아침마다 부처님께 차를 달여 올린다. 의식에서 차를 올리며 아뢰는 게송을 다게라 하는데 각 전(殿)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출처 - 범패와 작법무(인천수륙재 보존회) http://www.bumpa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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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프랑스판 한승조, 골니쉬 교수의 종말

프랑스판 한승조, 골니쉬 교수의 종말

 

[해외리포트] 전후 프랑스의 꼴라보 숙청과 한국의 과거 청산

 

과거사를 부정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위험한 것은 과거사 부정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 속의 가해자뿐만 아니라 사실상 피해자에 속하는 이들 중에도 이런 부류들이 있어 우리를 당혹케 한다.

파리에 살고 있는 해외민주인사이자 심리학자인 이유진씨는 이들을 가리켜 '유치형 인격(幼稚型人格)의 소유자'라고 했다.

"자기의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잘난 부모를 동경하여, 자아소속감을 잃고 사고나 행위가 남의 영향을 받거나 조종되기도 한다. 아무튼 제 부모, 제 나라, 제 민족을 믿지 못하고 남의 부모, 남의 나라에 무조건 의존하는 가련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의 극우세력이 왼손으로 일장기를, 오른손으로 성조기를 흔드는 것은 바로 이 유치형 인격 때문이다."

고려대 한승조 명예교수의 '식민 지배 찬양' 발언과 유사한 경우가 프랑스에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도 교수였다. '교수였다'고 과거형으로 쓴 것은 문제의 교수가 지난 주 교수직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한창 한승조 교수 건으로 한국이 떠들썩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과거사 부정 발언 파문, 골니쉬 교수직 박탈

▲ 브루노 골니쉬 교수 홈페이지.
"(2차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에 사용된) 가스실의 존재여부는 역사학자들이 밝힐 일"
"정확한 희생자 수도 역사학자들의 자유토론에 맡겨야할 것이다."


장 물랭 리용 3대학에서 일본문명과 국제법을 강의하는 교수이자 프랑스 극우당 '국민전선(FN)'의 제2인자, '국민전선' 당수 장 마리 르펜의 오른팔이며 공식 후계자이기도 한 브뤼노 골니쉬의 발언이다.

지난해 10월 11일, 프랑스 리용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서 기자들로부터 받은 나치 집단수용소에 대한 질문에 골니쉬는 위와 같이 답했다. 이 발언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체 유럽 국가를 분노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도미니크 페르벤 프랑스 법무장관은 즉시 리용 법원에 조정을 의뢰했고 지난달 3일, 프랑수아 피용 교육장관은 앞으로 1년간 골니쉬의 대학 직무 정지를 결정했다.

리용 법원은 지난 1일 골니쉬가 제출한 무죄 청원을 기각하고 1500유로(한화 2백만 원 상당)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뿐만 아니라 골니쉬는 앞으로 2개월 후 '반인도범죄' 죄목으로 다시 한번 리용 법원에 출정해야 할 것이라고 자비에 리쇼 검사는 9일 AFP 통신을 통해 밝혔다.

이 일 이후 골니쉬의 강의가 열릴 때마다 '프랑스 전국 학생연맹(UNEF)'을 비롯한 각종 학생 단체의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리용 3대학 기 라보렐 학장은 안전을 이유로 지난해 12월 3일 골니쉬의 학교 접근을 금지했으나 1월 14일 최고행정재판소는 이를 취하했다. 그리고 지난달 2일 골니쉬는 경호원을 대동한 채 다시 강단으로 돌아왔지만 다음날 피용 교육장관이 골니쉬의 직무를 1년간 정지시킴으로써 재차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 3월 4일자 라디오 RTL 뉴스 홈페이지. 골니쉬 교수는 교수복 차림으로 징계위원회에 출두했다.
그러나 각계각층의 분노를 유발한 골니쉬 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월 3일 우리 대학 징계위원회는 장 물랭 리용 3대학의 브뤼노 골니쉬 교수를 5년간 추방할 것을 결정했다.'

지난 4일 라보렐 학장의 공식 성명을 통해 밝혀진 이 결정은 골니쉬의 망언에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현재 55세인 골니쉬가 5년간 교수직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앞으로 강단에 설 기회가 없다는 의미다. 60세는 정년퇴직할 나이이기 때문.

이어서 7일 특별 기자회견을 가진 라보렐 학장은 "책임을 통감한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과거사를 부정하는 네가시오니스트를 처벌한 유일한 대학"이라고 밝히고 "이번 사건을 거울 삼아 다른 대학에서도 네가시오니스트들을 엄중처벌 할 수 있기 바란다"고 말해 앞으로 발생하게 될 유사한 사건을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했다.

프랑스 전국 학생연맹은 이번 골니쉬의 대학 추방 사건을 가리켜 '네가시오니스트와 반유태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고 평가했다.

1990년 7월 베르나르 노탱 교수가 한 일간지에 게재한 '가스실 존재여부'에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문제 삼아 징계처분을 내린 이래 최근 20년 동안 리용 3대학이 징계위원회를 소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탱은 문제의 기사와 관련해 형사 처벌은 물론 1년 정직 처분을 받았으나 이 처분은 이듬해 고등교육위원회(Cneser)에 의해 취소됐다.

네가시오니스트란?

부정, 부인을 뜻하는 불어 네가시옹(negation)에서 나온 것으로, 네가시오니스트(negationniste)는 유태인 말살의 진실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부정한다. 네가시오니스트라는말도 이전에 통용되던 레비지오니스트(revisionniste, 수정주의자)라는 용어의 애매모호함을 지적하며 1987년 역사학자 앙리 루소에 의해 만들어졌다.

네가시오니스트들은 나치의 유태인 말살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동시에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네가시오니스트들은 ‘거짓을 무너뜨리고 신화의 거품을 빼고 진실을 복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치와 네가시오니스트 전문가 베르나르 콩트의 ‘나치학살과 네가시오니스트’라는 논문에 따르면 대표적인 네가시오니스트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1. 학살은 없었다. 살인가스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2. 단지 유태인들을 동유럽으로 추방하는 것이 나치 독일의 목표였다.
3. 네가시오니스트 학자 라시네르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 수는 1백만이었으며 그것도 폭격이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네가시오니스트 학자 포리송에 따르면 1939년 국제적 시오니즘이 히틀러에 전쟁을 선언했고 유태인 희생자는 5십만 수준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유태인 포로 5만명이 사망했으나 원인은 발진티푸스가 창궐했기 때문이다. 가스실은 해충 박멸을 위한 것이었다.
4. 유태인 말살은 연합군, 특히 유태인과 시오니스트들이 선전용으로 만들어낸 억지다. 전후 이스라엘이 전쟁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전쟁 유언비어’에 불과한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다른 집단수용 시설에 설치된 가스실은 수용자들의 의복을 소독하는 일에 사용됐다.

이 얼토당토 않은 주장에 대하여 일간지 <르몽드>는 1978년 12월 19일자와 30일자를 통해 포리송의 '가스실의 문제 혹은 아우슈비츠의 루머'라는 논문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처럼 위험한 주장은 종종 국제법에 의해 처벌됐고 때문에 네가시오니스트들은 이들을 처벌하는 게소법이 표현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다며 대표적으로 프랑스를 UN 인권위원회에 제소했지만 위원회는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골니쉬 지지자들 "프랑스, 표현의 자유 억압 말라"

골니쉬 추방에 따른 파장도 컸다. 골니쉬는 "단지 '2차대전 문제는 자유토론의 대상'"이라고 한 발언 때문에 법적, 직업적 희생양이 됐다고 주장,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이 같은 법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 징계위원회가 열리던 지난 1일, 리용 3대학 앞에서는 골니쉬 지지자들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우리 교수를 건드리지 마라' '프랑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라' '골니쉬를 돌려달라' 등의 주장이 적힌 플래카드가 전면에 배치됐다. 시위에는 '국민전선' 사무국장 칼 랑과 당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같은 날 저녁 6시에는 '反 골니쉬'를 표방하는 또 다른 시위도 전개됐다.

평소에도 갖가지 무책임한 발언으로 잡음을 일으켜온 '국민전선' 당수 장 마리 르펜이 한 마디 거들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르펜은 "이것은 진정한 마녀사냥"이라며 리용 3대학의 결정을 "불법적이고 부당"하다고 반박했다.

▲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 당수.
ⓒ2005 연합=AP
르펜도 이미 금년 초, 골니쉬와 같은 네가시오니스트적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프랑스에서) 독일 점령이 특별히 비인간적이지 않았다"는 것. 지난 1월 7일자 극우 주간지 <리바롤>과의 인터뷰에서 르펜은 2차 대전 당시 점령 독일군의 만행을 가리켜 "피할 수 없는 실수"라고 했던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실수는 있었다 해도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독일 점령이 특별히 비인간적이지 않았다."

르펜은 더 나아가 "게슈타포(나치 독일의 비밀경찰)는 프랑스에서 보호자 역할을 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44년 6월 10일 나치 친위대 SS에 의해 자행된 리무쟁의 오라두르 쉬르 글란 마을 주민 642명(여성 245명, 어린이 207명 포함)의 학살 사건이 철저히 왜곡됐다는 것.

르펜의 이 발언은 과거사를 부정해온 주간지 <리바롤> 독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한 논문에서 비롯된 것인데, 문제의 논문은 나치 친위대가 마을 주민 642명을 한 교회에 몰아넣고 불을 지르기 전 이미 레지스탕스들이 교회에 폭발물을 숨겨뒀고 그것이 직접적인 참사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르펜의 계속되는 망언... 그러나 반인도범죄·과거사 왜곡 처벌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러나 어디 점령 독일군의 만행이 이뿐이었을까.

1941년 10월 22일에는 샤또브리앙의 수용소에 억류됐던 27명의 정치범이 총살됐다. 낭트에서 발생한 레지스탕스의 독일군 살해 사건에 대한 복수였다. 튈르에서는 코레즈의 항독 조직에 의해 마을이 해방되기 하루 전인 1944년 6월 9일, 주민 99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점령 독일군의 양민학살은 다양하게 존재했다. 그런 독일군을 일러 "보호자 역"이라든가, 이같은 야만을 일러 "피할 수 없는 실수"라거나 이 역사적 비극을 두고 "진실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르펜은 태연하게 말해왔다.

이와 관련해 페르벤 법무장관은 "희생자와 그 가족, 옛 군인들, 집단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르펜의 공격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하며 즉시 파리법원에 문제를 상정, '르펜이 법정에서 진실을 밝힐 것'을 주문했다.

르펜의 주장은 또 다른 네가시오니스트 벵쌍 레누야르가 자신의 주장을 담은 비디오 '오라두르 쉬르 글란의 비극; 공식적인 거짓말의 50년' 내용과도 일치한다. 레누야르는 이 문제로 여러 차례 법정에 섰으며 마침내 지난해 6월 4일 '전범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24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르펜은 이처럼 나치를 향수하는 망언에 익숙하다. 1987년 9월, 나치의 '가스실'을 두고 2차 대전 역사의 '미세한 반점'이라고 말해 1991년 1월 11일 1만5244 유로의 벌금형에 처해진 바 있으나 1995년 12월 5일 뮌헨에서 이 주장을 되풀이하는 파렴치함을 보이기도 했다.

르펜은 "정말 여기저기서 독일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면 집단수용소는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는 류의 끊임없는 망언 행진을 벌였다. 르펜의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은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이 같은 망언으로 르펜이 지불한 벌금을 합하면 경치 좋은 시골의 전원주택 하나를 사고도 남을 것이라는 농담이 생겼을 정도다.

골니쉬 사건과 관련해 르펜은 "역사의 거짓말을 밝혀야할 것"이라며 인종차별주의와 반유태주의를 엄격히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플레벤 법, 게소 법, 를루쉬 법, 페르벤2법을 일제히 폐지할 것도 주장했다.

르펜이 언급한 법들은 일찌기 2차대전의 비극을 한가운데서 겪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반성에서 나온 것으로 과거사를 왜곡하거나 반유태적, 인종차별주의적 발언 혹은 행동을 엄격히 처벌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게소 법의 경우 1945년 나치 전범을 심판한 뉘른베르그 국제재판소에서 처음 적용됐고 때문에 뉘른베르그는 반인도범죄를 처벌한 첫 법정으로 기록됐다. 뉘른베르그 국제재판소의 판결은 암살, 학살, 노예 문제, 집단수용소를 비롯한 전쟁 전후의 모든 비인간적 처사를 행한 개인과 집단을 끝까지 추적해 처벌한 첫 사례였다.

전후 프랑스의 꼴라보 숙청과 우리나라의 반민특위

올해 2005년은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과 함께 종전 60주년이 되는 해다.

1942년 6월부터 프랑스에서는 괴뢰정부 비시 정권과 결탁한 게슈타포들에 의해 75000명의 유태인이 집단수용소로 강제 이주튼?그 중 2500명만이 살아서 다시 프랑스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전후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프랑스는 가해자, 아니 민족 배신자 숙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꼴라보(대독협력자, 프랑스판 친일파) 발본색원 및 숙청이었다.

꼴라보 숙청은 비시 정권의 국가수반 페탱 원수(元帥)를 비롯한 라발 부수상, 장관, 고급공무원, 판검사, 장성, 경찰, 언론인, 문인, 예술인 등과, 친독 의용대, 악질 간수, 게슈타포의 앞잡이, 밀고자, 드골 장군의 망명정부와 국내의 항독 레지스탕스를 비방한 자 등등 모든 민족반역자들을 그 대상으로 했다. 꼴라보 숙청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피의 목욕(le bain du sang)'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을 정도라 한다.

대표적 예로, 브라지야크를 들 수 있다. 이씨에 따르면, 브라지야크는 재능 있는 작가였으나 여느 작가들과 달리 내재된 신념으로 나치 독일의 앞잡이 노릇을 착실히 했다가 해방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아까워한 모리악(항독 레지스탕스에 참가한 원로문인), 사르트르, 까뮈를 비롯한 문인들이 드골 대통령에게 죽음만큼은 모면시켜 달라고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드골 대통령은 "조국 프랑스의 민족정기를 위하여 살려줄 수 없다"며 결국 사형을 집행했다.

또 반인도범죄와 관련된 프랑스의 대표적인 예로는 모리스 빠뽕(92)을 꼽을 수 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지롱드 도청 사무국장을 지낸 빠뽕은 2차 대전 당시 어린이를 포함한 1만1000명의 유태인을 집단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 대독 협력 사실이 발각돼 반인도범죄 명목으로 보르도 중죄재판소에 회부됐다.

1997년 10월 8일 시작된 이 소송은 1999년 10월, 빠뽕이 10년 형을 선고받으며 마무리됐지만 이것은 당시 87세의 빠뽕에게는 종신형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프랑스 사상 처음으로 국가 고위관료를 심판했다는 사실과 함께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후에 법의 심판을 받은 사례로 기록돼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도범죄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프랑스처럼 타국의 지배를 받은 닮은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과거사 청산 작업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해방 후 1948년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이하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총 취급건수 682건 중 기소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 40건으로, 체형은 고작 14명에 그쳤다. 실제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으며,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 <디지털 말> 2004년 5월3일자 홍갑표씨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은 원안의 복원에 그치면 안된다' 중

전후 프랑스는 어떻게 꼴라보를 숙청했는가

▲ 파리에 살고 있는 해외 민주인사이자 심리학자인 이유진 씨
ⓒ박영신
이유진씨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전후 프랑스가 숙청 대상으로 지목한 인물들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했다.

해방 직전 레지스탕스에 의해 무더기 약식 처형, 해방 후 합법적 재판에 따른 공민권 제한으로부터 종신형, 사형 등의 유죄 판결,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는 반인도범죄 기소와 재판 등 프랑스의 민족 배신자 숙청 방법과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분류된다.

그러나 “숙청된 꼴라보들의 숫자는 아직도 논의가 분분하다”고 밝힌 이씨는 “숙청하기에 분주해서(특히 해방 직전의 무더기 약식 처형의 경우) 그때그때마다 공식적으로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전국의 방방곡곡, 각계각층에서 합법과 비합법의 숙청이 동시에 진행되었으니, 정확한 기록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 이씨가 제시한 자료 중 해방 전후 무더기 약식 처형(총살)된 꼴라보들의 수에는 먼저 10만5천명 설(티에), 6만명 설(레미), 3만~4만명 설(아롱), 1만명 설(노빅, 해방 직전인 1944년 5200~6700명과 해방 직후 4100명~4400명 선) 등 대충 4가지 주장이 있다.

훼이장의 주장을 보면 12만5243건을 취급한 가운데 4만787명이 공민권을 제한받았고, 4783명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을 포함해 3만7169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48년 12월 31일자의 재판소 통계기록에 의하면, 4397명(궐석)과 264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 중 791명의 사형집행이 있었고 2777명이 종신징역 강제노동형, 1만434명이 유기징역 강제노동형, 2173명이 독방감금형(너무 늙었거나 중병 때문에 강제노동에 종사할 수 없는 경우), 2만4116명이 징역, 4만8486명이 공민권 제한 판결, 8929명이 공민권 제한판결의 집행유예(공민권 제한의 판결을 받았으나 항독 레지스탕스에 적극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경우)의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행정기구에서 추방된 자들이 1만1343명에 이르고, 육군에서 쫓겨난 장교들이 5천명이다. 각 정당의 자발적 자가숙청도 뒤따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각 노조, 사회단체, 교회, 아카데미 프랑세즈(4명의 학사원이 쫓겨났다) 등에서도 축출이 행해졌다.

 

2005.03.10/박영신 기자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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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3-1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디나 있는 것 같아요.

데메트리오스 2005-03-12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과거사 문제를 빨리 처리해야 할텐데 말이에요 ㅡ.ㅡ;;

balmas 2005-03-1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사 처리 문제도 급한 문제는 급한 문제인데,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발호는 별도의 쟁점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흐음 ...

데메트리오스 2005-03-12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페이퍼 추천하고 퍼갈께요^^

balmas 2005-03-12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감사합니다. 추천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앗, 그런데 이 글은 자명한 산책님께 추천해주셔야 하는데, 이런 ...
 

 

 

 

독일인 할아버지가 흘린 눈물의 저편

독일, 그 7년의 기억들 <1>"어머니~!"

 

조미경 <>
          
이웃이 잔디에 물 주는 시원한 광경을 바라보며, 망울 터트린 꽃들의 속삭임을 바람에게서 살짝 엿들을 수 있는 날들이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마지막 햇살을 잡겠다며 노을 속으로 달려가던 해질녘.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아오를 때면, 미뤄둔 일거리 때문에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도 마침내 나서곤 했던 짧은 자전거 여행….

독일에서 보낸 7년의 기억은 늘 이런 유쾌한 영상들과 함께 떠오른다.



▲ 우리나라 70~80년 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은 슬라이드 필름을 꺼내 보며 할아버지는 지금도 한국을 추억하고 계시리라.  ⓒ 조미경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독일인 노부부의 집에 여름 방학 때마다 찾아가 정원 일과 집안일을 도와 드리면서 시작했던 독일 생활이 어느덧 십여 년 세월 속으로 멀어져 간다.

그 동안 그 곳에서 만났던 독일인들의 인생살이를 들으며 울고 웃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복지가 잘 된 부자 나라에서 태어난 그들이기에 한없이 편하고 행복하고 화려하기만 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던 내가 그 생각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자녀를 키우며 가장 역점을 두는 자립심 교육은 그러나, 외롭고 쓸쓸한 노후를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 또한 낳았다. 일찌감치 둥지를 떠난 자식들은 명절 때나 찾아오는 선물세트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부모 자식간의 냉담한 관계가 독일인을 비롯한 유럽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식 가족문화에 익숙한 나는 그런 그들의 외로움을 삐딱하게 볼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자식들 혼수비용 대느라 집 기둥뿌리 뽑아주고, 이미 시집 장가간 자식들까지 바리바리 챙기고, 속옷까지 벗어줄 양 물심양면 자신을 희생하며, 기꺼이 자식들을 위한 '소모품'이 될 각오로 살아온 우리네 부모님들의 지나친 자식사랑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럽인들, 그들은 중년에 접어들어서야 그네들의 문화에 빈 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내가 생면부지인 이 독일인 노부부에게 환영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빈 틈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만났던 독일인 노부부는 정이 넘치는 한국인들의 그 촌스러운 투박함과 수줍은 온정을 그리워하셨다. 30 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1970년대 초, 동방의 작고 가난한 나라 코리아에서 만났던 한 가족을 평생 잊지 못한다는 얘길 독일인 할아버지께서 해 준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한국에 계실 때 함께 일하던 직장의 동료가 저녁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다 한다. 좌식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께서는 미리부터 걱정을 하긴 했지만, 평소 인정 많고 성실한데다 유달리 할아버지께 친절했던 그 한국인 젊은이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정장을 차려 입고 동네 어귀에 들어설 때부터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할아버지의 코에, 뺨에, 가슴에, 다리에, 엉덩이에 꽂혔다. 몇몇 '용감한' 개구쟁이들은 노랑머리 외국인의 옷을 냅다 손으로 훑고는, 어디론가 달려가 숨은 채 계속 지켜 보기도 했단다. 그 낯선 이방인이 신기하게 보이면서도 무서웠는지, 어른들 틈새로 빼꼼히 내다보는 코흘리개 아이들…. 정말이지 마을은 마치 저 옛날 사당패라도 왔던 때처럼 '구경거리'가 난 것이다.

가슴 저 깊은 곳에 오십 평생을 묻어두었던 그 애잔함 감정을…

예상치 못한 '환영식'을 치르고 동료의 집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또 한 번 그 집 아이들에게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임을 증명해 보이셔야 했다. 막내둥이는 이 요상하게 생긴 독일인을 보고 울어대기 시작했고, 아이 둘은 벌써 어미 치마폭으로 숨어 벌벌 떨고 있었던 거다.

그래도 나머지 두 아이는 신기한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할아버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준비한 사탕봉지와 빵을 내어놓았을 때야 이 어수선한 상태가 진정되었다. 담벼락과 대문에는 조막만한 동네아이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이 '선택 받은' 아이들에게 선망의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쿠션도 없이 얄팍한 방석이 깔린 딱딱한 구들장에 앉아 다리를 어떻게 둬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청년의 다섯 아이들이 노는 냥을 보고 있었다.

식탁 앞에서는 세 살배기 아이에게도 어른들의 예절을 강조하는 독일문화권에서 그런 야단법석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손님이 와 있는 식사 자리라면 예쁘게 차려 입고 얌전하고 반듯하게 앉아 부모들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독일 아이들이다.

그 규칙을 어겼을 때는 여지없이 부모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들은 손님이 보는 앞에서도 자식이 잘못하면 엄하게 꾸중을 한다. 그것이 식사 시간을 불쾌하게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식을 잘못 키워 아이의 버릇을 나쁘게 했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건 독일인에게는 끔찍한 수치다.

그런 문화에 익숙한 할아버지가 한국인 동료의 아이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가뜩이나 '책상다리'가 불편해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르는데다, 장난을 걸어오는 녀석들에게 즉각즉각 응수하느라 할아버지는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할아버지는 보았다 한다. 아니 느낌이었을 지도 모른다. 가슴 저 깊은 곳에 오십 평생을 묻어두었던 그 애잔함 감정을….

할아버지는 젊은이의 아내가 그 아수라장인 좁은 방에 앉아 젖먹이 막내에게는 젖을 먹이면서, 응석받이 넷째가 서툰 숟가락질로 음식을 흘리면 닦아내 주고, 머리채를 휙 잡고 달아난 둘째 녀석에게는 꽥 소리를 지르고, 그런 와중에도 손님 반찬의 빈 접시를 채워놓고 바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걸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혼돈 속의 평화…. 북새통 속에서 무엇인지 모르게 잔잔히 스며드는 따스함….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도, 금새 더 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

할아버지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셨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그 무엇이 할아버지의 가슴 속을 후벼 파고 있었다. '어머니…!'

의아해 하는 젊은 부부내외와 장난치고 보채는 아이들 앞이었지만, 민망하게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정말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날 이후 한국마니아가 되셨다. 유엔에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수십 년 돌아다녔지만, 한국에서만큼 그런 진한 인간의 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시단다. 우리나라 70~80년 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은 슬라이드 필름을 꺼내 보며 할아버지는 지금도 한국을 추억하고 계시리라.

그 분은 우리나라가 70~80년대 한참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 하면서 개발 일변도로 내닫던 어수선한 시기에 한국에 오셨고, 우리나라 역사에 오래 기억될 큰 일을 하고 독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그 분과의 만남은 내게는 지나간 내 나라의 역사와의 대면이기도 한 것이다.
2005/03/08
조미경 님은 계명대학교 외국어문학대학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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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3-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크, 퍼오면 안된다는데 자꾸 퍼오네 ...

2005-03-09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