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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잔디에 물 주는 시원한 광경을 바라보며, 망울 터트린 꽃들의 속삭임을 바람에게서 살짝 엿들을 수 있는 날들이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마지막 햇살을 잡겠다며 노을 속으로 달려가던 해질녘.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아오를 때면, 미뤄둔 일거리 때문에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도 마침내 나서곤 했던 짧은 자전거 여행….
독일에서 보낸 7년의 기억은 늘 이런 유쾌한 영상들과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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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70~80년 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은 슬라이드 필름을 꺼내 보며 할아버지는 지금도 한국을 추억하고 계시리라. ⓒ 조미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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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독일인 노부부의 집에 여름 방학 때마다 찾아가 정원 일과 집안일을 도와 드리면서 시작했던 독일 생활이 어느덧 십여 년 세월 속으로 멀어져 간다.
그 동안 그 곳에서 만났던 독일인들의 인생살이를 들으며 울고 웃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복지가 잘 된 부자 나라에서 태어난 그들이기에 한없이 편하고 행복하고 화려하기만 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던 내가 그 생각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자녀를 키우며 가장 역점을 두는 자립심 교육은 그러나, 외롭고 쓸쓸한 노후를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 또한 낳았다. 일찌감치 둥지를 떠난 자식들은 명절 때나 찾아오는 선물세트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부모 자식간의 냉담한 관계가 독일인을 비롯한 유럽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식 가족문화에 익숙한 나는 그런 그들의 외로움을 삐딱하게 볼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자식들 혼수비용 대느라 집 기둥뿌리 뽑아주고, 이미 시집 장가간 자식들까지 바리바리 챙기고, 속옷까지 벗어줄 양 물심양면 자신을 희생하며, 기꺼이 자식들을 위한 '소모품'이 될 각오로 살아온 우리네 부모님들의 지나친 자식사랑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럽인들, 그들은 중년에 접어들어서야 그네들의 문화에 빈 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내가 생면부지인 이 독일인 노부부에게 환영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빈 틈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만났던 독일인 노부부는 정이 넘치는 한국인들의 그 촌스러운 투박함과 수줍은 온정을 그리워하셨다. 30 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1970년대 초, 동방의 작고 가난한 나라 코리아에서 만났던 한 가족을 평생 잊지 못한다는 얘길 독일인 할아버지께서 해 준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한국에 계실 때 함께 일하던 직장의 동료가 저녁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다 한다. 좌식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께서는 미리부터 걱정을 하긴 했지만, 평소 인정 많고 성실한데다 유달리 할아버지께 친절했던 그 한국인 젊은이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정장을 차려 입고 동네 어귀에 들어설 때부터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할아버지의 코에, 뺨에, 가슴에, 다리에, 엉덩이에 꽂혔다. 몇몇 '용감한' 개구쟁이들은 노랑머리 외국인의 옷을 냅다 손으로 훑고는, 어디론가 달려가 숨은 채 계속 지켜 보기도 했단다. 그 낯선 이방인이 신기하게 보이면서도 무서웠는지, 어른들 틈새로 빼꼼히 내다보는 코흘리개 아이들…. 정말이지 마을은 마치 저 옛날 사당패라도 왔던 때처럼 '구경거리'가 난 것이다.
가슴 저 깊은 곳에 오십 평생을 묻어두었던 그 애잔함 감정을…
예상치 못한 '환영식'을 치르고 동료의 집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또 한 번 그 집 아이들에게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임을 증명해 보이셔야 했다. 막내둥이는 이 요상하게 생긴 독일인을 보고 울어대기 시작했고, 아이 둘은 벌써 어미 치마폭으로 숨어 벌벌 떨고 있었던 거다.
그래도 나머지 두 아이는 신기한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할아버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준비한 사탕봉지와 빵을 내어놓았을 때야 이 어수선한 상태가 진정되었다. 담벼락과 대문에는 조막만한 동네아이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이 '선택 받은' 아이들에게 선망의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쿠션도 없이 얄팍한 방석이 깔린 딱딱한 구들장에 앉아 다리를 어떻게 둬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청년의 다섯 아이들이 노는 냥을 보고 있었다.
식탁 앞에서는 세 살배기 아이에게도 어른들의 예절을 강조하는 독일문화권에서 그런 야단법석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손님이 와 있는 식사 자리라면 예쁘게 차려 입고 얌전하고 반듯하게 앉아 부모들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독일 아이들이다.
그 규칙을 어겼을 때는 여지없이 부모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들은 손님이 보는 앞에서도 자식이 잘못하면 엄하게 꾸중을 한다. 그것이 식사 시간을 불쾌하게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식을 잘못 키워 아이의 버릇을 나쁘게 했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건 독일인에게는 끔찍한 수치다.
그런 문화에 익숙한 할아버지가 한국인 동료의 아이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가뜩이나 '책상다리'가 불편해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르는데다, 장난을 걸어오는 녀석들에게 즉각즉각 응수하느라 할아버지는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할아버지는 보았다 한다. 아니 느낌이었을 지도 모른다. 가슴 저 깊은 곳에 오십 평생을 묻어두었던 그 애잔함 감정을….
할아버지는 젊은이의 아내가 그 아수라장인 좁은 방에 앉아 젖먹이 막내에게는 젖을 먹이면서, 응석받이 넷째가 서툰 숟가락질로 음식을 흘리면 닦아내 주고, 머리채를 휙 잡고 달아난 둘째 녀석에게는 꽥 소리를 지르고, 그런 와중에도 손님 반찬의 빈 접시를 채워놓고 바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걸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혼돈 속의 평화…. 북새통 속에서 무엇인지 모르게 잔잔히 스며드는 따스함….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도, 금새 더 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
할아버지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눈물을 흘리셨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그 무엇이 할아버지의 가슴 속을 후벼 파고 있었다. '어머니…!'
의아해 하는 젊은 부부내외와 장난치고 보채는 아이들 앞이었지만, 민망하게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정말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날 이후 한국마니아가 되셨다. 유엔에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수십 년 돌아다녔지만, 한국에서만큼 그런 진한 인간의 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시단다. 우리나라 70~80년 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은 슬라이드 필름을 꺼내 보며 할아버지는 지금도 한국을 추억하고 계시리라.
그 분은 우리나라가 70~80년대 한참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 하면서 개발 일변도로 내닫던 어수선한 시기에 한국에 오셨고, 우리나라 역사에 오래 기억될 큰 일을 하고 독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그 분과의 만남은 내게는 지나간 내 나라의 역사와의 대면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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