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박사 배출 외국대학 서울대 ‘1위’

 

지난 5년간 1655명 배출
“미국화 현상 심각”지적도

미국 대학을 뺀 외국 대학 가운데 ‘미국 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은 우리나라의 서울대학교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라면서, 이른바 ‘한국사회의 총체적 미국화 현상’에 대한 성찰적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대학신문>은 10일 미국 고등교육전문 주간신문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을 인용한 기사에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가 모두 1655명의 미국 박사를 배출해, 외국 대학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이 조사는 미국 시카고대가 국립과학재단과 교육부 등의 후원으로 지난 5년 동안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의 출신 학부를 분석한 결과다.

이는 미국 대학들을 포함시킨 전체 순위에서도 버클리대(2175명)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것이며, 대만국립대(1190명·2위)와 중국 베이징대(1153명·3위)보다도 훨씬 많은 규모다.

서울대말고도 연세대(720명·5위), 고려대(445명·8위), 한양대(323명·18위) 등 한국의 주요 대학 네 곳이 20위권 안에 들었다.

나라별로는 중국이 4854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한국이 3143명으로 2위, 대만(1436명)과 인도(1177명)도 1천명 이상의 미국 박사를 배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크로니클은 “미국 박사학위자의 출신 학부 중 가장 비중이 큰 대학은 버클리대이지만 두 번째로 박사를 많이 배출한 대학은 한국의 서울대”라며 “이번 조사 결과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는 “심지어 군인들도 출세하려면 미국을 갔다 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총체적 미국화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라며,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미국 유학파의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이재성 기자 san@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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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1-1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겠지만,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할 사람도 상당수 있을 것 같은데 ...

balmas 2005-01-10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미국 유학파의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 정말 공감이 가는 지적이다.

딸기 2005-01-10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연구는 필요하지 않았나요. 학자들은 왜 그런 연구를 안 하는걸까요.

balmas 2005-01-1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예요.

막연하게나마 추측해 보자면, 그런 연구를 할 만한 사람들(많은 숫자는 아니겠지만)은 진보적인 사회과학자들일 텐데, 그들에게는 이런 류의 주제가 중요한 연구과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데올로기(또는 "거대담론") 지향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죠.

balmas 2005-01-1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기사의 [조선일보] 판본입니다.

정말 조선일보다운 제목달기, 윤색하기의 기술이군요. 정말 뿌듯해할 사람들이 많을 듯...

 

서울大 출신 미국박사 美제외 세계대학중 1위
연세·고려大도 10위권내


[조선일보 박중현 기자]
전 세계 대학 중 미국 대학을 제외하면 서울대 학부 출신자가 미국 박사학위를 가장 많이 취득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내 대학 학부 출신자를 포함하더라도 세계 2위다.

미국 외 대학 순위에서 연세대(5위)·고려대(8위)·한양대(18위)도 미국 박사 배출 20위권에 들었다. 한국 대졸자의 해외 유학이 많은 데다 유학 대상 국가가 미국에 집중됐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보인다.

미국 고등교육 전문 주간신문인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은 지난 7일자 지면에서 시카고대가 미 연방정부의 후원으로 1999∼2003년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를 출신 학부별로 분석한 결과 서울대가 1655명으로 해외 대학 중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미국 대학들을 포함시킨 전체 순위로 보면 서울대가 버클리대(2175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박사를 배출했다.

연세대는 720명으로 5위, 고려대는 445명으로 8위를 차지했다. 10위권 내에는 한국의 3개 대학 외에 베이징대 등 중국의 4개 대학, 대만·태국·터키 각 1개 대학씩이 포함됐다.

(박중현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j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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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1-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똑같은 걸요, 양쪽 기사가.

딸기 2005-01-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저의 '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기자 공채에서 서울대 출신 가장 많이 뽑는 곳(비율로 봐서)은 한겨레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편견인가 -.-a

balmas 2005-01-1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조금 과민했나요?

아마 업계에 계신 분이 더 잘 아시겠죠.

어쨌든 미국 유학파의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는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릴케 현상 2005-01-1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는 그냥 소개에 그친다면 한겨레는 비판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나요?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엔 이런 점은 차이점인 것 같은데...

사량 2005-01-1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꿋꿋이 이 땅을 지키고 계신 발마스님(스님?-_-)과 '토종' 박사님들께 경의를!

MANN 2005-01-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어, 뿌듯해 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 같네요 -_-;;

미국 내 대학까지 포함해도 두 번째라니 대단;;;

balmas 2005-01-13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님, 예, 그런 점은 있죠.^^ 딸기님 말씀은 아마, 조선일보에서 윤색까지 한 건 아니지 않느냐는 뜻인 것 같습니다.(맞나??^^)

사량님, ㅋㅋ, 그런 말씀 하시면 낯뜨겁죠.^^

사실 외국박사냐 국내박사냐 하는 것보다는 국내 고등교육이 아직도 제대로 재생산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해방 이후 60여년 동안 진행된 근대화 과정에 비추어본다면, 고등교육 분야, 특히 철학(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다른 학문들은 괜히 덤터기 씌우는 게 아닌지 모르겠지만^^) 분야는 가장 뒤떨어진 분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철학 분야에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서양 철학의 경우 국내 대학원은 "외국 유학 준비반"과 다를 바 없거든요. 그렇다고 지난 50여년 동안 꾸준히 유학생을 배출해서 뭔가 구조적인 기반을 마련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고등교육을 남의 나라에 이렇게 전적으로 위탁해 놓은 채로, 우리나라의 지식생산 및 유통, 소비의 구조가 고도화되기를 기대하는 건 어렵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하기야 그걸 자랑으로 아는 사람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판이니 ...

사량 2005-01-1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논문을 마치고 진학을 고민하는 석사과정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유학을 권하는 교수들이 그렇게 많다고 해요. 국내 박사는 설 자리가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만, 명색이 교수라면 자기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이 녀석만은 훌륭한 학자로 성장시켜야겠다'라는 오기, 아니 의무감을 가져야 하지 않나요? 그래야 학생들도 '이분을 따르면 내가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공부하는 방법을 확실히 배울 수 있겠다'라는 믿음을 갖지 않겠습니까? 해방 이후 어떻게 만들어온 학자양성시스템인데 교수들이 '나서서' 그것을 붕괴시키려 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르칠 자신이 없나? 책임 회피 그 자체입니다. 발마스님 같은 분들이 많아져야 할 텐데요...

릴케 현상 2005-01-1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회사 동료들 중에 대학원 안 나온 사람이 나밖에 없는 분위기여서(몇 명 안 되니까 그런 게지만^^) 저도 대학원 좀 가면 좋을까요? 하니까 다들 '비추천'이라고 하네요^^ 역시 돈이나 벌어야 할까봐...

딸기 2005-01-1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멍청함에 대한 산책님의 지적과 발마스님의 변호... 헤헤 무안하여요...

balmas 2005-01-1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님,

아마 그 분들 중에는 선의로 그런 말씀 하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국내의 교육 여건도 마땅치 않거니와 교수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장래 취직 문제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보겠습니다.

자명한 산책님, 그럴 겁니다. 대학원에 비싼 등록금 내고 가봐야 배우는 건 별로 없으니 그럴 만하죠. 석사학위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지 이미 오래인 데다가 그 돈보다 훨씬 적은 돈을 내고서도 그만한 내용을 공부할 수 있는 곳도 여럿 있잖아요.
 
 전출처 : 바람구두 > 책의 판형

책(문서)의 판형을 결정하려면 종이규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ISO/JIS 규격

ISO 규격은 A, B, C 세 종류가 있다.
cf.
[WWW]International Standard Paper Sizes
JIS 규격은 A 규격은 ISO와 같고 B 규격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B사이즈를 지칭하면 일반적으로 JIS 규격이다.

A B C JIS B
0 841x1189 1000x1414 917x1297 1030x1456
1 594x841 707x1000 648x917 728x1030
2 420x594 500x707 458x648 515x728
3 297x420 353x500 324x458 364x515
4 210x297 250x353 229x324 257x364
5 148x210 176x250 162x229 182x257
6 105x148 125x176 114x162 128x182
7 74x105 88x125 81x114 91x128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이는 종이 규격

우리나라에서는 46전지(788x1090)와 국전지(939x636)를 가장 많이 쓴다고 한다. 46전지의 크기는 JIS B1 사이즈와 유사하고 국전지는 ISO A1 사이즈보다 조금 크기 때문에, A 사이즈로 작업한 것은 대부분 국전지를, B 사이즈로 작업한 것은 46전지를 얹게 된다.
1연의 종이에서 전지 500장, 2절 1000장을 얻을 수 있다.

4x6판/국판

4x6판 국판
전지 788x1090 636x939
2절 545x788 468x636
4절 394x545 318x468
8절 272x394 234x318
16절 197x272 159x234
32절 136x197 117x158

책의 판형

종이를 이와 같이 사용하더라도 책의 판형은 관행상 다음과 같이 불린다. 종이를 자르는 방법이 다양하므로 변형판도 최근 많아지고 있다.

판형명칭 크기 대응판형 사용종이 전지1매당페이지수
국판 148x210 A5 국전지 32 교과서, 단행본
국배판 210x297 A4 국전지 16 잡지
국반판 105x148 A6 국전지 64 문고
타블로이드 257x364 B4 4x6전지 16 정보신문
사륙판 128x182 B6 4x6전지 64 문고
사륙배판 182x257 B5 4x6전지 32 참고서
신국판 152x225 * 국전지 32 단행본
크라운판 176x248 * 4x6전지 36 사진집
30절판 125x205 * 4x6전지 60 단행본
3x6판 103x182 * 4x6전지 80 문고

일반적인 전지에는 국전지(A전지)와 4X6전지(B전지)가 있다.
현재 시중에서 통용되고 있는 국전지는 (636X939mm)이며, 4X6전지는 (788X1,090mm)이다.
전지 500매를 1연(ream)이라고 하는데, 이를 흔히 영문의 첫글자를 따서 : R"로 표기하기도 한다.
즉 1연을"1(R)"로도 쓴다.
판형이란 책의 크기를 말하는데 크게 표준판형과 변형판형으로 나눈다.
여기서 표준판형은 국전지, 혹은 4X6전지를 종이의 낭비없이 출판하고자 규격화 시킨것이다.


국배판형
국전지를 8절 크기로 잘라 만든 판형으로 크기는 210X297mm이다.
크기가 커서 소지하기에는 불편함이 따르나 지면이 커서 시원한 느낌을 준다.
여성지나 종합잡지들이 이 판형을 선호한다.


국판형[A5판형]
국전지의 16절 크기로 잘라 만든것을 국판형, 혹은5x7판형이라하며, 그 크기는 148x210mm이다.
이판형으로 만들어진 책은 갖고 다니기에 적절하다. 문예물잡지들이 주로 사용한다.


국반판형[A6판형]
국판형을 2등분(32절)하여 만든 책의 판형을 말하며, 크기는 105X148mm이다.
소지가 간편하여 가볍게 읽을 책의 판형으로 알맞다.


타블로이드판형[B4판형]
4X6전지를 8절로 잘라 만든 책을 타블로이드판이라고 하며 크기는 257x364mm 이다.
신문이나 혹은 화보위주의 잡지를 제작하는데 많이 사용된다.


4X6배판형
타블로이드판의 반(4X6전지의 16절 크기)만한 규격의 책인데 크기는 188X257mm이다.
대부분 이 판형으로 제작되고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는 판형이다.


4X6판형
4X6배판형 크기의 반, 즉 4X6전지를 32절 크기로 잘라 만든크기로(128X188mm)이다.
가볍게 읽을 책이나 잡지, 혹은 각종도서 목록집에서도 이 판형을 선호하고 있다.
예로서 월간지인 "샘터"나 "리더스다이제스트"가 이에 속한다.


4X6반판형
4X6판형에 비해 반만한 크기의 책을 4X6반판형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91X128mm이다.
단어 암기장이나 간단한 물품안내 책자 등에 사용된다.


신국판형
표준판형 이 외에 자주사용하고 있는 변형판형을 보면, 국판과 같은 절수(국전지16절)로
만들어 내는 "신국판형"이 있는데 크기는 국판형에 비해 가로의 길이는 똑같으나
세로의 길이가 큰것으로 148X225mm이다. 일반소설류 출판물은 물론 사회과학 도서,
각종 전문 도서에서 흔히 볼수 있는 판형으로 4X6배판형과 함께 대단히 많이 사용되고 있는 판형이다.


그밖에도 크라운판/신서판형(3X6판형)/다이아몬드판형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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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1-0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판형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balmas 2005-01-0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옙~~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궁금한 거죠. 여러 가지 판형 이름이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왜 이런 판형들이 나왔는지, 우리나라책과 외국책의 판형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 등등, 뭐 그런 거죠.^^

릴케 현상 2005-01-07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판할 때 국이 일본 천황의 국화문양을 뜻한다더군요 일본 천황가의 공식 종이 판형이 우리한테 아직 남아 있다나... 그래서 국제기준과 달리 우리 책 판형은 일본판형을 따르는 거라고...한겨레 문화센터 강연에서 들었는데 그 선생님이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하면 곤란한데|^^

balmas 2005-01-0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국판"이라는 명칭에 그런 비밀이 숨어 있었군요 ...
 
 전출처 : 딸기 > 만델라의 연설문 (3)

만델라 법정진술 뒷부분. 사회주의권 국가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것에 대해 정권이 이데올로기 공세를 가할 것을 우려, ANC의 자금 문제를 해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술의 마지막 부분은 만델라가 생각하는 '인종주의를 넘어선 이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백인 '민족주의' 정권은 숫적으로 우세한 아프리카인(흑인)들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이들의 공포는 또다른 '공포정치'로 이어졌다. 만델라는 철권통치를 휘두르면서 내면에서는 공포에 사로잡힌 백인들을 향해, "우리의 이상은 인종주의가 아니다"라고 담담히 말한다. 한 가지 피부색이 다른 색깔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일은 이제 끝날 것이라고.

1994년 대통령 선거에서 만델라가 90%가 넘는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흑인의 수적 우세와 흑인들 사이에서 만델라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컸다는 점, 둘째로 백인들조차도 '흑백 통합'이 갓 시작된 시기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할 인물은 만델라 밖에는 없음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
만델라 정부는 집권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무지개 국가(Rainbow Country)'로 정의했다. 흑인, 백인, 흑백 혼혈계, 인도계, 중국계 등 다양한 '피부색'과 문화를 가진 집단들의 연방, 게다가 흑인들이라 해도 !쿵족(부시맨)과 같은 토착민과 14세기 이후 북쪽에서 도래한 반투족 등 여러 종족들이 섞여 있다. 남아공은 이렇게 다종다양한 '혼합집단'들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임을 인정하고, 이 다양성을 발전의 토대로 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무지개 국가'를 필두로 보츠와나 등 주변국가들이 공존공영하는 '아프리카 르네상스' 운동을 일으켰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운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할 터이지만, 여기서는 생략.)

참고:

만델라의 이 법정 진술 원문은 여기(http://www.anc.org.za/ancdocs/history/rivonia.html) 에.
만델라의 biography는 여기(http://www.anc.org.za/people/mandela.html) 에.

 

+++

나의 생각은 서구와 동구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 모든 것에 힘입어 나는 정치적 타개책을 찾을 때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사회주의를 제외한 어떤 특정한 사회체제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서구로부터도 동구로부터도 최상의 것을 차용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이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외국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의 정치투쟁이 언제나 내부의 금전적 지원으로 수행되어 왔다는 점, 즉 우리 동포와 우리의 지지자들이 모은 자금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운동을 벌이거나 중요한 정치재판, 가령 내란음모사건 같은 재판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공감하는 서방 국가들의 개인과 조직들로부터 금전적 원조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금 제공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하지만 1961년에 '국민의 창'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단계의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그 투쟁이 우리의 빈약한 재원에 과중한 부담을 줄 것이며 부족한 자금 때문에 활동 규모가 제약받게 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1962년1월에 해외로 나갈 당시 내렸던 지침들 중 하나는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해외에 있는 동안 아프리카의 정치운동 지도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당시까지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지역의 지도자들은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서방 국가 뿐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도 온갖 형태의 지원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몇몇 非공산국가인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리고 심지어는 반공산주의 국가들까지도 그와 비슷한 원조를 모두 받아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흔히 남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잘 산다는 식으로 비판에 답하곤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나라들의 생계비 지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과연 어떤 비교를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우리 아프리카 동포들에 관한 한 그 점은 부적절합니다. 우리의 불만은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하여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나라에 사는 백인들과 비교하여 가난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법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인들이 겪고 있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은 백인 우월주의 정책의 직접적 산물입니다. 백인 우월주의는 흑인 열등주의를 내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백인 우월주의를 지키기 위해 고안된 법률로 인해 더욱 확고해집니다.

아프리카인들이 원하는 것은 남아프리카 전체를 공유하자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안정과 우리의 몫을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평등한 정치적 권리들을 원합니다. 그런 권리가 없다면 우리가 영원히 무력한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평등한 정치적 권리라는 이 말이 이 나라의 백인들에게는 혁명적으로 들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흑인이 다수 유권자가 될테니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백인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두려움 때문에 모두를 위한 인종적 조화와 자유를 보장해 줄 유일한 해답에 이르는 길이 가로막혀서는 안 됩니다. 모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면 인종적 지배라는 결과를 낳을 거라는 추측은 사실이 아닙니다. 피부색에 바탕을 둔 정치적 구분은 그 모두가 인위적인 것이며 그것이 소멸하면 어느 한 가지 피부색이 다른 색을 지배하는 것도 끝이 날 것입니다. ANC는 인종주의에 맞서 싸우며 반세기를 보냈습니다. ANC가 승리한 후에도 그 정책은 변치 않을 겁니다.

ANC의 싸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진실로 민족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통과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아프리카 동포들의 투쟁입니다. 그것은 살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투쟁입니다. 나는 평생을 아프리카 동포들의 이 투쟁에 바쳐왔습니다. 나는 백인 지배에 맞서 싸워왔고, 흑인 지배에 맞서 싸워왔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아 함께 조화롭게 사는 자유민주사회의 이상을 소중히 여겨왔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목적으로서 내가 삶 속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이상입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의 목숨을 바칠 이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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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만델라의 연설문 (2)

어제에 이어서... 만델라의 법정 모두진술. 앞부분에서 만델라는 자신과 ANC 지도부가 생각했던 '폭력전'의 형태를 네 가지(사보타주/게릴라전/테러리즘/공개 혁명)로 요약하고, 첫번째 사보타주 단계에 들어간 배경을 설명했다.

뒤이은 부분에서는 공산당과의 연합에 대한 ANC의 공식 입장, 그리고 맑스주의에 대한 만델라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다. 만델라가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과 오랜 세월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만델라와 카다피의 관계를 비난했을 때, 만델라는 이렇게 응수했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밑에서 힘겨운 투쟁을 벌일 때 우리를 도와준 것은 미국보다는 리비아였다"고. 

물론 만델라 할아버지는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연설문에서 보이듯, 만델라는 사회주의자/공산당과의 연합을 어디까지나 전술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고, 통일전선을 벗어난 사상적 일체감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만델라의 시선에는 '애정'이 묻어난다. 그 애정의 바탕은 카다피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드러냈던 것과 같은 '동지적 친밀감' 혹은 '연대감' 같은 것이다.

특기할 점은, 이는 남아공 백인정권의 '반공적' 성격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남아공 백인정권은 국내에서는 흑백 차별로 악명높은 정권이었지만, 냉전 체제 내에서 보자면 아프리카 대륙 전반에 불어닥친 사회주의적 흑인 민족주의 바람에 맞서 미국을 대신해 '반공주의의 보루'로도 기능했었다(미국-남아공-이스라엘의 삼각 협력구도). 백인정권은 반공을 내걸고 보안기구들을 강화해 흑인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일쑤였고, 따라서 공산당과 흑인 운동가들의 이해관계는 '정권에 의해'서도 일치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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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제기한 주장 중 또 하나는 ANC와 공산당의 지향과 목적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점과 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정부측은 틀림없이 내가 ANC에 맑스주의를 도입하려 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장은 거짓입니다. ANC의 이념적 신조는 예전부터 늘 그래왔듯이, 아프리카 민족주의입니다. 그것은 "백인을 바다 속에 처넣어라!"라는 절규에 표현된 극단적 개념이 아닙니다. ANC가 대변하는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모든 이들의 자기실현과 자유이며, 그것은 결코 사회주의 국가의 청사진이 아닌 우리의 자유헌장에 소중히 담겨 있는 그대로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토지의 재분배를 요구할 뿐 국유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국유화의 대상은 광산, 은행, 독점기업입니다. 이는 현재 한 인종이 거대 독점기업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까닭에 정치권력이 분산된다 하더라도 이 기업들의 국유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인종적 지배가 영구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내가 그들의 정책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맑스주의의 원칙에 입각한 국가의 건설을 표방합니다. 공산당은 백인 우월주의가 낳은 문제들을 해결할 단기적 처방으로서 자유헌장을 위해 일할 태세가 되어 있지만, 그들은 자유헌장을 자기 강령의 시작으로 여길 뿐 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ANC의 주요 목적은 아프리카 동포가 완전한 정치적 권리와 단결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반면, 공산당의 주된 목표는 자본가들을 제거하고 그들을 대체하여 노동자 계급의 정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계급간의 차이를 강조하려 했지만, ANC는 계급간의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이 점이 특히 중대한 차이점입니다.

ANC와 공산당이 종종 서로 긴밀히 협력했던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협력은 공동의 목적-이 경우에는 백인 우월주의의 철폐-이 존재한다는 증거일 뿐, 이해관계가 같은 완전한 공동체였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세계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예들은 수도 없습니다. 그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히틀러에 맞서 함께 싸웠던 영국, 미국, 그리고 소련간의 협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누구도 그러한 협력에 대해, 처칠 혹은 루스벨트가 공산주의자라거나 공산주의의 도구가 되어버렸다거나, 영국과 미국이 세계 공산화를 앞당기려고 노력했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협력의 또다른 예를 바로 '국민의 창'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창'이 창설된 직후 나는 일부 조직원들로부터 공산당이 우리 조직을 지원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실로 나타났고, 시간이 더 흐른 단계에서는 공개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식민지 국가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언제나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믿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의 단기적 목표들이 자유운동의 장기적 목표들과 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공산주의자들은 말레이 반도, 알제리, 인도네시아 등과 같은 나라들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들 중 어느 나라도 지금 공산주의 국가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공산주의의 가장 지독한 적 중 한 명이라 할 장제스조차도 지배계급에 맞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협력하여 싸웠고, 그 투쟁으로 인해 1930년대에 중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 비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협력 양식은 남아프리카의 민족해방 운동에서도 되풀이되었습니다. 공산당이 보안관찰 처분을 당하기 전에는 공산당과 ANC가 모두 참가한 공동 운동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프리카 공산주의자들은 ANC의 회원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 되었으며 일부는 민족위원회, 지방위원회,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민족위원회 간부로 활동한 이들로는 공산당 서기를 지낸 아버트 은줄라, 마찬가지로 서기를 지낸 모지스 코타네, 그리고 공산당 중앙위원이었던 J.B. 막스가 있습니다.

내가 ANC에 가담한 것은 1944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ANC가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실행하고 특정 이슈들에 대해 이따금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함으로써 결국 남아프리카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희석시키고 말 거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ANC 청년연맹의 일운으로서 ANC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자고 제안한 그룹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 제안은 압도적 반대로 거부당했는데, 반대표를 던졌던 이들 중에는 가장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지닌 분파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존의 정책을 옹호한 이유는, ANC가 애당초 같은 경향의 정치적 견해를 가진 단일 분파가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수용하면서도 민족해방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통합되는 아프리카인의 의회로 건설되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그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해 뼛속 깊이 편견을 지니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백인들로서는 경험이 풍부한 아프리카 정치인들이 대체 왜 그리도 기꺼이 공산주의자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는지를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억압에 대항해 투쟁하는 이들 사이의 이론적 차이란 구입하기 부담스러운 사치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자들만이 지난 수십년간 남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인들을 인간 대접하고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할 준비가 되어 있던, 즉 우리와 함게 앉아서 먹고,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고,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와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던 유일한 정치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몫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인들과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던 유일한 정치집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오늘날 남아프리카에서는 많은 이들이 자유와 공산주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믿음을 고무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민주 정부와 아프리카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은 누구든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버리고 (공산주의자가 아닌) 그들 중 상당수를 공산주의버으로 탄압하여 보안관찰 처분을 내리는 입법부입니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우리의 대의를 지지하는 이들 중 하나라고 여기는 것은 국내 정치에서만이 아닙니다. 국제적으로 보아도 공산 국가들은 늘 우리를 도와왔습니다. 유엔과 그외 국제조직에서 공산권은 식민주의에 대항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투쟁을 지지해 왔고, 일부 서구 강국들보다 우리의 어려운 처지에 더 공감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전세계가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합니다만, 공산권은 대부분의 백인 국가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솔직하게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고 잇습니다. 상황이 이렇고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는 사람은 1949년의 나처럼 경솔하고 성급한 정치가 뿐일 것입니다.

이제 제 입장에 관한 애기로 방향을 돌려보겠습니다. 나는 그간 내가 공산주의자임을 부인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지금은 내 정치적 신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 자신을 아프리카 애국주의자라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나는 계급 없는 사회라는 사상에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사회의 매력은 부분적으로는 맑스주의 서적을 읽은 경험에서, 또 부분적으로는 이 나라에 있던 초기 아프리카 공동체들의 구조와 조직을 향한 내 존경심에서 솟아난 것입니다. 그때는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가 부족의 소유였습니다. 부자와 빈자가 따로 없었고 착취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맑스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간디, 네루, 은크루마, 나세르등 다른 지도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약간의 사회주의적 형태를 통해 우리 국민이 세계의 선진국들을 따라잡고 대대손손 내려오는 극단적 빈곤을 극복할 필요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공산주의자라거나 맑스주의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나는 공산당이 우리의 특수한 현 정치투쟁 단계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종 차별을 철폐하고 자유헌장을 토대로 민주적 권리들을 획득하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과제입니다. 공산당이 그 과제를 촉진하는 한, 나는 그들의 도움을 환영합니다. 나는 모든 인종을 우리의 투쟁에 나서게 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공산당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습니다.

맑스주의 문헌을 읽고 맑스주의자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바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서양의 의회체제를 비민주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반대로 그러한 체제를 옹호하느 사람입니다.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 그리고 권리장전 등은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이 숭상하는 문헌들입니다. 나는 영국의 정치제도와 그나라의 사법체계를 대단히 존경합니다. 나는 영국 의회를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제도로 여기고 있으며, 내게 그 나라 사법체계의 불편부당함과 독립성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입니다. 미국 의회나 그 나라의 권력분립 원칙, 그리고 사법부의 독립도 역시 내게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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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만델라의 연설문 (1)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만델라 할아버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미래형이냐면 아직 내게 그렇게 물어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자니아의 검은 거인, 반투 스티브 비코'를 읽고 있다. 재미있는데 책장이 잘 안 넘어간다. 이 책이 중간중간 '슬플' 것임을 알고 있다. 다 읽고 나면 슬픔의 과정은 기쁨의 결말로 바뀔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떤 측면에서 비코의 이야기는 희망이 예정돼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떤 측면에선 '슬픔의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 읽을 때까지 나는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이 흑인, '검둥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언한, 젊은 나이에 숨져간 '아자니아의 검은 거인'의 압도적인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를 위협하고 있단 말이다. 강력하고 흥분되는, 좀 들뜨게 만드는 위협이다.

책 중에 할아버지의 연설문(최호정 번역)이 나온다. 1964년 4월20일자 법정진술. 할아버지는 1962년 구속돼 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으며, 이듬해 반역죄 등으로 재차 소추됐다. 할아버지와 동료들에 대한 반역죄 재판이 이른바 '리보니아' 재판이며, 이 재판에서 할아버지는 종신형을 언도받고 로벤 섬 교도소에 투옥돼 1990년까지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 연설(법정진술)은 28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앞두고 만델라가 남아공 국민들을 상대로 했던 사실상 마지막 발언이었다. 진술 첫머리에서 만델라는 ANC의 '폭력노선'에 대해 설명한다. (만델라가 처음 ANC를 주도할 당시에는 폭력투쟁을 선호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 샤프빌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백인정권의 흑인 학살사건을 계기로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무장투쟁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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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첫번째 피고입니다. 나는 학사학위를 땄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올리버 탐보와 동업하여 여러 해 동안 변호사 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허가없이 이 나라를 떠났다는 죄목과 1961년 5월 말에 사람들에게 파업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5년형을 살고 있는 기결수입니다.

모두(冒頭) 발언을 통해, 나는 재판 개정 초반에 정부측이, 남아프리카의 투쟁에 외국인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행사되고 있다고 시사한 내용은 전적으로 틀렸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동포의 지도자로서 내가 행한 모든 것은 남아프리카에서의 내 경험과 아프리카인으로서의 내 이력에서 비롯된 것이지 어떤 제3자가 말해준 것 때문이 아닙니다. 트란스케이에서 보낸 젊은 시절에 나는 나이드신 분들이 옛날 우리 부족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을 새겨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선조의 땅을 지키기 위해 벌인 전쟁담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우리 동포에게 봉사하고 자유를 향한 그들의 투쟁에 나 자신을 바칠 기회가 내 삶에 주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내가 이 재판에서 받은 모든 혐의와 관련하여 내가 한 행동은 모두 그러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폭력이라는 주제를 다루어야겠습니다. 지금껏 법정에 전해진 것 중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사보타주를 계획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계획한 것은 경솔한 판단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폭력을 좋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백인들이 우리 동포에 대해 독재를 행하고,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한 수많은 시간 동안 발생했던 정치적 상황을 차분하고 진지하게 평가한 결과 그 사보타주를 계획한 것입니다.

나는 내가 '국민의 창'(ANC의 무장조직)의 창설에 조력한 이들 중 하나이며 1962년 8월에 체포되기까지 그 조직의 사업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던 점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나 그리고 그 조직을 시작했던 이들이 그같은 일을 했던 이유는 두가지였습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아프리카 동포의 폭력은 정부 정책의 결과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책임있는 지도부가 우리 동포의 정서를 조절하고 인도하지 않으면 폭발적으로 테러리즘이 일어나 이 나라 여러 인종들 사이에 지금까지의 전쟁에 의해서도 생기지 않았던 극렬한 적대감과 비참한 감정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폭력이 없이는 아프리카 동포들이 백인 우월주의 원칙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 원칙에 반대를 표명할 수 있는 합법적 방법들은 모두 법률에 의해 폐지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열등한 상태를 영구히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정부에 맞서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법에 맞서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법을 위반하였습니다. 그 방식을 처벌하는 법률이 생기고 정부가 자신의 정책에 대한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는 것에 의지하자, 그때서야 우리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폭력은 테러리즘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의 창'을 조직한 우리는 모두 ANC의 일원이었고, 우리의 뒤에는 정치적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비폭력과 협상을 사용한다는 ANC의 전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아프리카가 어느 한 집단이 아니라 백인이건 흑인이건 그 안에 사는 사람 모두의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간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견디기 힘든 사실은 50년간의 비폭력이 아프리카 동포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곤 점점 더 억압적으로 변해가는 법과 점점 더 줄어드는 권리 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네 가지 형태의 폭력 즉 사보타주, 게릴라전, 테러리즘, 공개혁명이 고려되었습니다. 우리는 첫번째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그 방법을 더이상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다른 어떤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습니다.

최초의 게획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주의깊게 분석한 바에 기초했습니다.우리는 남아프리카의 외국 자본과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발전소들을 계획적으로 파괴하고 철도와 전화 통신에 장애를 초래하면, 겁먹은 자본이 이 나라에서 빠져나가려 할 것이고, 상품들은 산지에서 항구로 일정에 맞춰 도착하기가 더 어려워져, 결국에는 국가 경제 전반에 심각한 누수 현상이 생기게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의 유권자들이 자신의 입장에 대해 재고해보지 않을수 없게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경제 기간시설에 대한 공격은 정부 건물들 및 다른 인종분리정책의 상징들에 대한 사보타주로 이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한 공격들은 우리 동포들을 고무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공격들은 폭력적 수단의 채택을 촉구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출구를 제공할 것이었고, 우리는 우리의 지지자들에게 우리가 이전보다 더 강경한 노선을 채택하여 정부의 폭력에 맞대응하여 투쟁하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대중적 행동이 성공적으로 조직되고 그래서 그에 대해 대량 보복이 가해진다면 다른 나라들도 우리 대의에 공감하기 시작할 것이고, 남아프리카 정부는 크나큰 압력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계획이었습니다. '국민의 창'은 사보타주를 실행하기에 앞서 성원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작전의 계획 혹은 수행 중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다면 정부가 우리 동포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남아프리카 땅이 이미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의 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무력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력 사용을 장기적 과제로서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만일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우리 동포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하에서 그 싸움이 진행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측에 가장 큰 승산을, 그리고 양측에 가장 적은 인명 손실을 초래할 것으로 보이는 싸움은 게릴라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우리가 하게 될지도 모를 게릴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백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지만 아프리카인들은 아무런 훈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릴라전이 시작될 경우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훈련받은 핵심 인물들을 양성하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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