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때리다님의 질문

회폐의 책을 읽다가 (지금 순수이성비판 부분만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뜻을 모르는 구절이 나와서 질문드려요.

"모순율은 분석적 판단으로 보아진다. 반면에 직관의 공리, 지각의 공리, 지각의 예취, 경험의 유추(예컨데 인

과원리), 그리고 경험적 사고의 요청은 종합적 판단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직관의 공리, 지각의 공리, 지각의 예취, 경험의 유추(예컨데 인과원리), 그리고 경험적 사고의 요청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질문에 대한 답변

ㅎㅎㅎ 자꾸 때리다님, "지각의 공리"라는 말은 잘못 넣으셨네요. 회페 책에는 원래 없는 말인데, 자꾸 때리다님이 문장을 옮기면서 집어넣으신 것 같네요. ^^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복잡한 체계로 되어 있는데, 크게 보면 인식의 요소들(직관, 개념, 이념)을 다루는 “초월적 요소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과 사유의 훈련, 규준, 건축술, 역사 등을 다루는 “초월적 방법론”(transzendentale Methodenlehre)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요소론은 “초월적 감성론”(transzendentale Ästhetik)과 “초월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으로 구별되죠. 그리고 이 중에서도 초월적 논리학은 다시 “초월적 분석론”과 “초월적 변증론”으로 구별됩니다. 또 초월적 분석론은 “개념의 분석론”과 “원리의 분석론”으로 나뉘어지죠. 또 원리의 분석론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은 “지성의 순수 개념의 도식론”이고, 2장은 “순수 지성의 모든 원리의 체계”, 3장은 “모든 대상을 현상계와 가상계로 구별하는 근거”입니다. 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취, 경험의 유추, 경험적 사고의 요청은 2장에 나오는 것으로서, 각각 순수 지성의 원리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분류를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I. 초월적 요소론


1. 초월적 감성론


2. 초월적 논리학


1) 초월적 분석론


(1) 개념의 분석론



(2) 원리의 분석론


① 지성의 순수 개념의 도식론

② 순수 지성의 모든 원리의 체계

(1. 직관의 공리, 2. 지각의 예취, 3. 경험의 유추들, 4. 경험적 사고의 요청들)

③ 모든 대상을 현상계와 가상계로 구별하는 근거


2) 초월적 변증론



II. 초월적 방법론



그러니까 자꾸 때리다님이 질문하신 문장의 뜻은 이런 겁니다. 우리의 판단은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으로 구별되죠.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모든 분석 판단의 토대를 이루는 지성의 최고 원리는 바로 모순율이며, 모든 종합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최고 원리가 바로 이 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취, 경험의 유추, 경험적 사고의 요청이라는 뜻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분석 판단이 아니라 종합 판단을 문제 삼고 있는데, 이 네 가지 원리는 우리의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려주는 원리들입니다. 따라서 자꾸 때리다님이 인용한 문장에서 회페는 {순수이성비판}의 원리의 분석론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간단하게 지적한 셈입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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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09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무지 자세하게 써 주셨네요. 감사 감사 ㅜ^ㅜ

저 근데 이 단어 자체의 의미는 잘 모르겠네요
1. 직관의 공리, 2. 지각의 예취, 3. 경험의 유추들, 4. 경험적 사고의 요청들

툭히 예취라는 단어는 국어 사전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네요...헐.

balmas 2006-07-0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조금 복잡한데 ...
책을 좀더 읽어가다보면 이 항목들에 대한 설명이 나올 텐데요. 아닌가? 지금
회페 책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확인해드릴 수가 없네 ...

한 가지만 말하자면, "예취"는 영어로 하면 "anticipation", 곧 "예상" 또는 "선취"라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그러니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안나올 수밖에요 ... ^^;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를 써서 외국 용어를 번역하는 건 참 문제가 있죠.

어쨌든 위의 용어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좀 어려우니까
책에 이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그냥 그런 게 있나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는 게 좋겠네요. 나중에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읽든가
아니면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본격적인 해설서들을 읽으면 이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을 겁니다. :-)

비로그인 2006-07-0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종현 선생님의 순수 이성 비판이 나왔던데 본문을 읽지는 못하더라도 주석을 참고해봐야 겠네요 발마스 님 답변 감사드려요.
 

 

 

[인권문헌읽기] 칼 마르크스,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1844)

‘인권의 이중성’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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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숙 
인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꺼려한다. 일체의 반론 없이 그저 존중하고 아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단어를 같이 쓰더라도 사람과 사회에 따라 아주 다른 뜻으로나 다른 목적으로 쓰고 있고, 따라서 그 기능도 다를 때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인권은 그저 좋은 것이니까 이론을 따지지 말고 그저 실천하자는 심정으로 매달리다가도 현실에서 튕겨져 나오는 인권에 대한 거부를 맞닥뜨리게 되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은 좋은 것이요, 불가침의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불가양의 것이요…. 인권을 옹호하는 문서의 바다에 언제나 띄워져 있는 이런 표현들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낀다면 한번쯤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가장 신랄하다 할 수 있는 인권비판론이다.

마르크스가 근대적 인권론과 시민사회론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대표로 하는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들과 인권담론의 이중성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근대인권론의 이상과 허구를 잘 보여준다.
근대인권론의 정수로 알려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989)은 그 제목에서 나타나듯 ‘인간’과 ‘시민’을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담긴 기만성과 소유권의 불가침성에 대한 비판은 ‘평등주의자들의 음모’로 잘 알려진 바뵈프 등이 먼저 제기했다. 바뵈프는 “재산과 노동의 불평등한 분배가 예속과 공공의 불행의 끝없는 원천”이라고 지적하면서 “프랑스의 전 재산의 소유권은 유일하게 그 배분을 결정하고 변경할 수 있는 프랑스 인민에게 본래적으로 귀속된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바뵈프의 비판을 이어받아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공민(시민)권과 구별되는 이른바 인권이란 시민사회 구성원의 권리, 다시 말해서 인간들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이기적 인간들의 권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인권과 시민권은 왜 구별되는가? 마르크스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국가)를 구별하여 말한다. 시민사회에 속한 인간은 생산활동의 주체로서의 인간, 즉 “지상에서의”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이다. 이 개인은 이기적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자신의 도구로 간주하면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나홀로’ 개인이며, 인간의 결속이 아닌 분열에 기초한 개인이며, 비사회적이고 비정치적인 개인이기 때문이다. 비사회적인 ‘자연적’ 인간의 권리를 얘기하기에 여기서는 자연권이 인권이다. 자연권이기에 무조건적이다. ‘인’권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자본을 소유하고 사적 소유의 자유를 추구하는 부르주아의 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적 소유의 권리를 자연권으로 인정함으로써 그것은 불가침의 권리가 된다.

반면에 정치사회에 속한 인간은 어떠한가? 국가는 공민들의 영역이다. 즉 정치적으로 해방된 국가에서는 시민들이 모두 평등하고 법 앞에서 같은 권리를 지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로운 환경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인간은 정치적으로 조직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고, 정치권력을 공유하는 인간이고, 인류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다. “지상에서의” 자본주의 관계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경쟁자이자 적대자이며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분열하지만 “천상에서의” 삶에서는 공동존재이다.

둘 간의 관계에서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이기적인 시민사회이다. 여기서는 시민의 권리와 구별된 사람의 권리가 “이기적 인간의 권리”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사적소유라는 인권”으로 수렴된다는 것이 지적됐다. 나아가 “시민은 이기적인 인간의 하인이라고 선언되고, …결국 공민인 인간이 아니라, 부르주아(시민사회의 일원)인 인간이 본래적인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보편적’이라고 한 인간의 자유는 사실상 자본가의 자유이고, 기본적 인권은 재산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의 향유가 궁극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된다. 결국 시민의 권리가 부르주아지 손에 내맡겨지고, 실제로는 사람의 권리까지도 그들이 제한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기의 인권선언과 헌법에 표현된 인권은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편적으로 선언하고 있지만 진실은 일부 계급의 권리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글에서 마르크스는 “본문에는 자유를, 각주에서는 그것의 폐지를”이라고 비판했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인권 자체가 아니라 사실상은 인권의 폐지를 가능케 하는 인권담론과 그 모순이라고들 말한다. 오늘날 마르크스 식으로 인권과 시민사회를 파악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인권의 보편성과 인간해방의 실현이 지울 수 없는 꿈이기에 우리의 인권 분석과 비판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칼 마르크스,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1844)
[…] 
완성된 정치적 국가는 그 본질상 인간의 물질적 삶과 대립해 있는 인간의 유적 삶이다. 이 이기적 삶의 모든 전제는 국가영역 바깥에 있는 시민사회 속에 머물면서 시민사회의 본성으로서 존재한다. 정치적 국가가 자신의 진정한 발전형태에 도달한 곳에서는 인간이 사상과 의식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과 생활 속에서도 천상의 삶과 지상의 삶이라는 이중의 삶을 살아간다. 그 하나는 정치적 공동체 속에서의 삶인 바, 여기에서는 인간이 자신을 공동존재라고 간주한다.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 속에서의 삶인 바, 여기에서는 인간이 사적 인간으로서 활동하며 타인을 수단으로 간주하고 자기 자신까지 한낱 수단으로 격하시켜 낯선 힘의 노리갯감으로 전락시킨다. 
[…] 
인권은 그 자체로서는 공민권과 구별된다. 공민과 구별되는 인간은 누구인가? 시민사회의 구성원 이외의 어느 누구도 아니다.  
[…]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공민권과 구별되는 이른바 인권이란 시민사회 구성원의 권리, 다시 말해서 인간들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이기적 인간들의 권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 
그러나 자유라는 인권은 인간과 인간의 결속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구별에 기초한다. 자유는 이 구별의 권리이며, 제약된, 자기 자신에게 한정되어 있는 개인의 권리이다.  
자유라는 인권의 실천적 유용화가 곧 사적 소유라는 인권이다.  
사적 소유라는 인권의 근간은 무엇인가? 
 
(1793년 프랑스 헌법)제 16조: “사적 소유의 권리는 각자의 재화와 수입, 각자의 노동과 근면의 과실을 자기 의지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모든 시민의 권리이다.” 
 
사적 소유라는 인권은 타인과의 관계는 일체 단절한 가운데 사회와도 무관하게 자신이 재산을 마음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즉 자기만의 이용의 권리이다. 앞서의 개인적 자유와 함께 그 자유의 이러한 유용이 시민사회의 기반을 형성한다. 시민사회에서 만인은 타인에게서 자신의 자유의 실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의 제약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무엇보다 먼저 
 
각자의 재화와 수입, 각자의 노동과 근면의 과실을 자기 의지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인권을 선언한다. 
[…] 
그러므로 이른바 인권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이기적 인간,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즉 자기에 매몰되고 자신의 사적 이익과 사적 의지에 매몰되어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을 초극하지 못한다. 인권 속에서는 인간이 유적존재로 파악되기는커녕 오히려 유적 삶 그 자체 곧 사회가 개인의 외부에 있는 영역, 개인의 본원적 자립성에 대한 제약으로 나타난다. 자연적 필연성, 욕구와 사적 이익, 각자의 재산의 보존과 각자의 이기적 인격만이 개인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끈이다.  
[…]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이 추상적 공민을 자신 속으로 환수하고, 개별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경험적 삶, 개별적 노동, 개별적 관계 속에서 유적 존재가 되어 있을 때, 그리고 인간이 자기 ‘고유의 힘’(forces propres)을 사회적 힘으로 승인하고 조직하며, 따라서 그 사회적 힘이 더 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때, 이때 비로소 인간해방이 완성된다.
인권오름 제 11 호 [입력] 2006년07월05일 0: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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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님의 질문

 

사정상 저번 스터디가 해체되고, 이번에 다시 [법의 힘]을 읽고 있습니다.
1부를 다 읽었는데요. 세번째 아포리아 부분이 되게 어렵더군요;
그래서 관련 질문 드립니다.

데리다는 정당한 결정의 긴급성 혹은 환원불가능성을 "'언어 행위들'에, 그리고 정의나 법적 행위들 같은 행위 일반의 수행적 구조에 귀속"(57)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진술문과 수행문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술문 역시 정확성이라는 의미에서는 정당할 수 있지만, 정의라는 의미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한 수행문은 오직 관습들, 따라서 다른 수행문들-묻혀 있든 아니든 간에-에 기초를 둠으로써 정의라는 의미에서 정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자신 안에 모종의 파열적 폭력을 지니고 있다."(57)

여기서 어떤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두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이 문장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모순되는 건 아닌지 헷갈리네요.

 

질문에 대한 답변

 

무영님의 질문의 초점은 마지막 단락에 있는 것 같군요.

"여기서 어떤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두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이 문장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모순되는 건 아닌지 헷갈리네요. "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둔다는 말은, 우선 행위의 결정은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지식의 체계, 규범적 원칙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령 규칙의 판단중지에 관해 말하는 첫번째 아포리아에서 데리다는 판사의 판결을 예로 들고 있죠.

판사의 판결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법전이나 판례를 단순 적용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책임 아래

법의 원칙에 대한 새롭고 자유로운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죠.

따라서 판결과 같은 언어행위는 이론적, 규범적 규칙이 아니라 다른 수행문들, 다른 언어행위들에만

의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데리다가 말하는 다른 수행문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죠. 하나는

창설적인 수행문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기존의 관습, 관레와 같은 것들이 있겠죠. 데리다가

보기에 이 양자는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구별될 뿐입니다. 이 양자는

이론적인 지식, 어떤  타당한 근거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론적인 법칙이나 진리와 달리

자기 자신의 권위 부여 구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논점은

혁명과 개혁, 또는 정초와 보존의 이분법적 대립을, 수행성의 관점에서 해체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혁명적인 것이든 관례적인 것이든 수행문, 수행적인 언어 행위는  어떤 진리나 공리,

불변적인 원칙에 근거를 둘 수 없으며, 결정 주체의 행위, 결정에만 의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지식이나 계산, 또는 법적 규범의 체계를 모두 거부하지는 않죠. 이는 무엇보다도

결정의 수행적 성격은 어떤 불변적인 원리에 근거를 둘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최악의 결정, 최악의

판단, 최악의 결과를 낳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새로운 어떤 것, 창설적인 어떤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감수해야 할 위험입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위험을 최대한

축소하는 길은  결정이 낳을 수 있는 위험한 결과들, 도착들에 대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숙고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죠.

정리하자면,  수행문의 정당성은 다른 수행문들에 의존한다는 말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

 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일관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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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lesas 2006-07-0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 드릴께요. 여기서 데리다가 진술문과 수행문을 분리시키는 가정(1)에서 출발해서,그 구분을 해체(2)하고 있기에 제가 좀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1)에서 데리다는 진술문의 사실성과 수행문의 정당성이 명확하게 분리된다는 전통을 따르다가도, (2)에서는 진술문의 사실성 또한 자체 안에 이 진술은 타당하다 라는 정당성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이거든요. 그래서 다음 장에서는 "진리는 정의를 전제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즉 어떤 법, 법적 규범이나 규칙이 진술적인 형태로 사실성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정의의 정당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정당한 결정의 수행성이란 곧 법적 규범과 규칙(더 이상 진술적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의 자기 해체와 동시적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매번 규칙과 규범을 재창설 해야만한다 라는- 요컨대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궁금하네요;

balmas 2006-07-08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무영님의 이해는 옳은 것 같습니다. :-)

cplesas 2006-07-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국이 어지러운데 주변에서 계속 책 질문만 하려니 속상하네요-

[법의 힘] 68페이지의 두 문장 입니다.

(1) "게다가 벤야민은 1921년에 이미, 근원적 악과 타락(벤야민에게 이는 언어가 표상으로 타락하는 것을 의미한다)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더욱더 표상/대의의 질서에 잘 저항하는 이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과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언제든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아무리 이 문장을 뜯어 봐도 이해되지 않네요 그러니까 데리다는 벤야민이 1940년에 사망했지만, 1942년에 가결된 나치의 유대인 학살 방안인 '궁극적 해결책'을 미리 사유할 수 있었다는 맥락에서 나오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다음에 연결되는 위의 문장은, 벤야민은 과 방법은 이라는 두 가지 주어가 한 문장 내에 있는 것 같아서요. 추측하면 이 문장의 뜻은 1940년에 벤야민이 죽었더라도~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만을 생각했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있다- 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가설을 지지할 수 있는 이유는 벤야민이 언어가 표상으로 타락하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 같고요. 그래서 "근원적 악과 타락에서 ~ 잘 저항하는"은 [벤야민이 아니라]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을 수식하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수고스럽지만 확인 좀 부탁드릴께요.

(2) "우리가 그의 담론의 지속적인 논리를 신뢰한다면, 여러 징표들로 미루어 볼 때 벤야민은, [1942년에 채택된] '궁극적 해결책'이었던 게 될 이 표상 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담론 및 문학, 시가 불가능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은 제가 벤야민의 언어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대목인데요. 앞 문장에서는 궁극적 해결책이 표상적 언어에 저항한다 라고 정의했고, 그래서 "이 표상 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이름들의 언어 및 명명의 언어가 도래할 수 있다는 맥락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게는 궁극적 해결책이 타락한 언어(표상적 언어)와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게 되네요; 아니라면 아렌트가 그랬듯 악이란 "사고의 결여"라고, 그래서 생각 속에 떠올릴 수도 없는 무엇이기에 표상 불가능하다 라고 보아야 하는 건지요. 발마스님은 궁극적 해결책이 구체적으로 무슨 사건인지 역주에 달아놓으셨지만, 이것이 데리다가 벤야민을 읽는 과정에서 특히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관련해 어떻게 파악되고 있는건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 또 좌절. OTL


balmas 2006-07-1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조금 있다가 답변해드릴게요. :-)

balmas 2006-07-1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영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

(1)번 질문은 문장 전체의 주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집약되는 것 같은데, 이 문장 전체의 주어는 “방법은”입니다. 따라서 무영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겠죠.

(2)번은 사실 어려운 문제를 잘 파악한 질문이군요. 어쩌면 이 문제가 이 책에서 데리다가 제기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데리다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자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다른 글들에 담겨 있는 벤야민의 사고는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추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것은 나치가 실제로 추진하고 집행했던 역사적인 궁극적 해결책과 다른 것이고 가장 대립적인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모든 인간적인 사고와 판단의 지평을 초과하고 심지어 대학살, 대대적인 폭력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시도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것 역시 최악의 것과 공모할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데리다가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지시하는 것을 나치가 추진한 실제의 역사적 정책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타락한 언어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죠. 하지만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것을 역사의 타락, 인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방법, 예컨대 혁명적인 폭력이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일반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표상 불가능한 차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죠.

cplesas 2006-07-1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음,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 문장은 좀 수정될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2) 그렇다면 이 '공모'를 어떻게 '선별' 하느냐가 문제되는 거겠군요.. 그래도 이런 선별은 궁극적 해결책을 표상하거나 표상하지 않거나 로 단순 수렴될 행위는 아니니까, 제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다는 것에는 큰 변화가 없네요;;

balmas 2006-07-18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은 문장이 너무 복잡하죠? ^^; 한번 더 생각해보죠.
(2)가 선별의 문제라는 건 옳은 지적입니다. 어려운 문제지요. :-)

cplesas 2006-07-2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감탄으로 읽어가고 있습니다. ^-^

다름 아니라, 혹이 발마스님이 법의 힘 관련해서 남겨놓은 코멘트가 있을까 해서 뒤적였더니, 문장상이나 번역상에 약간 문제되는 부분이 있으면 리플로 올려주시라고 하길래, 물론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얘기지만 뒷북삼아 책도 읽으면서 찾아낸 거 걍 올립니다.

 

"벤야민의 글이 부분에서 괄호 속의 문장은, 전쟁-평화의 쌍에서, 전쟁 역시 비자연적인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평화의 의례라는 점을 강조한다. (91)"

- 벤야민의 글의 이 부분에서 ?

분명 우리가 사형을 공격할 때, 우리는 여러 형벌 중 중 하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기원, 법질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95)

- 중 자가 두 개 -_-

경찰 다만 그 집행자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는 법을 경찰 자신이 생산하도록 인도해온 것 바로 근대의 정치·기술적 상황에 처한 근대 경찰이다. (101)

- 선생님 이건 제가 몰라서 그러는데, 문법상 하자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이해에 되게 불편하다면 제가 좀 글을 모르는 건가요; 앞단어의 경찰은 -> 경찰이 가 된다면 더 매끄러운 듯 싶어서요-

 

참 그리고, [법의 힘] 다음으로 [에코그라피]를 읽으려고 하는데

제가 알아본 인터넷 서점은 죄다 품절이더군요ㅠ

같이 읽는 분이 책이 없으셔서 그런데

어디에 재고가 남았는지 혹시나 알고 있으신가요?

(민음사에 또 멜 보내야되나...)


balmas 2006-07-2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잘하셨어요.
지난 번 2쇄 찍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대충 몇 가지 보이는 것만 고쳐서
냈는데, 다음 번에는 좀더 꼼꼼하게 읽고 고쳐서 내야겠어요. :-)

리브로나 몇몇 서점에서는 계속 팔았는데, 이제 정말 다 떨어졌나보네요. -_-

cplesas 2006-07-2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독립 선언들]만 읽으면 [법의 힘] 다 읽겠네요!!
책을 음독해본 건 이번이 첨인 거 같네요;

후-기를 읽고 나니, 궁극적 해결책과 관련해 발마스님이 남겨주신 리플이 다시금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하여간 엄청난 책이더군요-

그렇지만 어쨌든 교열될 문장들은 올려야지요-

반대로 예컨대 어떤 슈미트는 (119)
-> 어떤?

나치즘은 자신의 한계인 '궁극적 해결책'으로 논리적으로 귀결되기 때문에(130)
-> 으로, 으로

balmas 2006-07-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수고했네요. ㅎㅎㅎ
지적해준 대목들은 나중에 고쳐보죠. :-)
 

경향신문

 

 

“경찰서로 같이 갑시다” 반강제 ‘임의동행’ 불법

입력: 2006년 07월 06일 18:21:04
 
대법원은 6일 피의자의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거나 경찰서 등에 간 뒤에 피의자가 자신의 뜻에 따라 임의로 경찰서를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임의동행은 불법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이 경찰의 임의동행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다.

대법원 제2부(주심 손지열 대법관)는 6일 경찰의 임의동행 요구에 응해 조사를 받다 긴급체포된 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한 혐의로 기소된 박모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박씨에 대한 경찰의 동행이 거절할 수 없는 심리적 압박 아래 행해진 불법 강제연행에 해당하고, 긴급체포 또한 불법이어서 도주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임의동행은 수사관이 동행에 앞서 피의자에게 동행을 거부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거나 동행한 피의자가 언제든지 자유로이 동행과정에서 이탈할 수 있었음이 인정되는 등 오로지 피의자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었음이 객관적 사정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된 경우에 한해 적법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현재도 피의자 등이 수사기관의 임의동행 요구를 거부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경찰의 ‘같이 가자’는 요구를 피의자들이 거부하기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임의동행은 체포영장 없이도 피의자 등의 신병을 신속하게 확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돼왔다.

경찰관직무집행법은 경찰관은 수상한 행동을 하거나 범죄와 연관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고, 이 질문이 당사자에게 불리하거나 교통에 방해가 될 때에는 부근 경찰서나 지구대로 동행을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경찰의 관행적 임의동행은 궤도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자발적 동행이 아니라면 적법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우므로 충분한 증거수집 등을 통해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는 것이 판결의 취지이기 때문이다.

현행범이나 뚜렷한 혐의가 있다면 영장없이 긴급체포도 가능하지만 이는 48시간 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못하면 석방해야 한다는 점에서 수사기관으로선 다소 부담스러운 방법이다.

경찰은 2004년 9월 현금·수표 절도사건을 수사하던 중 훔친 수표를 사용한 박씨 누나로부터 ‘동생이 수표를 줬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경찰관 4명을 보내 10시간 잠복 끝에 새벽에 귀가하던 박씨를 연행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경찰은 당시 수표 절도 관련혐의를 부인하던 박씨에게 “경찰서에 가서 확인해보고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냥 돌아가도 좋다”고만 얘기했을 뿐 “동행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알리지 않았다.

재판부는 또 박씨가 경찰서에서 화장실에 갈 때도 경찰관 1명이 따라와 감시했다고 진술한 점 등에 비춰 임의동행된 이후 임의로 퇴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결국 조사과정에서 박씨의 누나가 거짓진술을 한 사실이 드러났고 박씨의 누나에게만 점유이탈물 횡령 혐의로 징역 6월이 선고됐다.

〈권재현기자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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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속의 ‘도시’ … 동네 골목길 연상
건축비평_렘 쿨하스의 ‘서울대미술관’

2006년 07월 04일   최재석 한라대 이메일 보내기

리움미술관의 ‘블랙박스’로 새로운 건축철학을 보여줘 화제가 됐던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축을 1년 반이 지난 지금 서울대미술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가 1996년 5월 서울대 현장을 방문하고 설계에 착수했으니, 꼭 10년 만에 준공된 셈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양호한(?) 자연림을 보호해야한다는 관악구청의 견해와 입장을 달리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된 바 있다. 2년 후의 1998년 설계안에서는 조경림도 보호하고 지형적 특성을 살려 작은 언덕과 언덕을 연결하는 브리지 컨셉을 모토로 했고, 4년이 지난 2002년에는 또 다른 수정안이 제안됐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올해 완공된 형태는 그 세 번째 제안이었다.


기본 컨셉은 대학과 지역사회와의 커뮤니티 관계의 설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건물 전체로 보면 단순한 직육면체의 매스(mass)를 지형의 형세(현 부지는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은 지형임), 인간의 동선, 그리고 내부공간의 확장을 고려한 변형 프로그램으로 원래의 자연환경과 건축이라는 인공물이 부담없이 겹쳐지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시도는 외벽의 솔리드(solid)한 부분과 창문의 보이드(void)한 부분의 적절한 프로포션으로 파사드의 흐름을 통해 자연과 인공의 통합을 꾀했다. 뿐만 아니라, 건축물로의 접근에 대한 고려에서 건축물이 가지는 수직면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건축물의 매스 일부를 지상에서 띄워, 자연과 건축물이 교차되고 이곳에 인간의 흐름을 아우르는 공유공간이 형성되도록 배려했다.


미술관의 내부를 들여다보자. 외부에서 풍기는 흐름은 내부로도 이어져 있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캔틸레버(cantilever: 발코니와 같이 한쪽 끝이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보) 하부의 경사로를 따라 안으로 유도되고, 안에서는 계단과 경사로가 적절하게 분배되어 이를 통해 관람객들을 전시관 상부로 끌어올리고 있다.


건축물은 중심 코아에서 각 방향으로 튀어 나온 구조물의 힘을 받도록 집중돼있고, 외관은 H형강의 틀에 불투명한 U-glass를 덧씌워, 틀과 유-글래스의 절묘한 중첩이 옛 여인네의 속치마를 연상케 할 정도로 부드러운 멋을 지니게 했다. 이런 광경은 3층에서 관람을 끝내고 중정의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이곳은 벽 표면의 요철(凹凸) 스크린에 천창의 빛이 반사되면서 미묘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4개 층이 통으로 오픈된 중정은 코아에 접해 있으며, 이곳으로 모든 기능이 통합돼있다. 중정의 천창으로부터 유입되는 자연채광은 지하실까지 비추고 있는데, 다만, 빛을 가장 가까이에서 받고 있는 3층 전시공간은 천창으로 유입되는 빛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미술품을 감상하기에는 집중력이 떨어져 산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통로의 전시공간은 그림을 감상하기에 좁고,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다가도 이동거리가 짧아 아쉬운 점이 남아 있다.


렘 쿨하스는 바로 이러한 것을 노린 것일까. 관람객과 미술품으로 한정된 기존의 전시공간보다는 뭔가 불안정하고 블특정한 다수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러운 공간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또한 일상성의 재미와 특정한 미술품 감상이라는 이중적 코드를 융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1층에서 3층으로 이동하면서 2층의 다목적홀을 통과하게 된다. 다목적홀은 캔틸레버의 실내공간으로 이곳에 계단형의 불규칙한 오픈 스테이지를 만들고 경사로를 따라 3층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다. 필자가 방문할 당시 이곳에서 두 여학생이 천창의 밝은 빛을 받으며 마주앉아 즐겁게 퍼즐게임을 즐기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런 모습은 3층의 전시공간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기존의 획일적 수평공간이 중층공간으로 변형되면서 다양화되는 추세라 하겠다.


또한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하나로 오픈된 중정은 감싸는 듯한 계단과 경사로, 그리고 그 내부로 다시 한번 감싸 도는 중층적 접근으로 유기적 통합이 이뤄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렘 쿨하스의 공간적 특징은 ‘건축 속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우리 동네의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내부공간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으면서 서로 이어져 있어 미로와도 같다. 한참 이동하다보면 이곳을 본 곳인지 아닌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근대적 공간구조와 사뭇 다른 양상이 존재한다.


이러한 렘 쿨하스의 건축적 접근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클라이언트와의 상호이해에 있다. 자칫 클라이언트와 부딪칠 수 있는 것들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건축가의 의지를 살려가는 여유를 볼 수 있고, 두 번째는 대지가 갖는 특성을 그 지역의 시간과 분위기라는 역사성에 인위적 건축물의 개입으로 인한 단절을 흐름이라는 지역적 맥락에서 접근하려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부공간에서 시선과 빛을 의식하면서, 필요에 의한 공간을 흐름으로 연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의 전개가 가능하도록 배려했다.


렘 쿨하스는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선생님의 건축철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나의 철학을 갖는다는게 비생산적인 일이죠. 변화하는 사회에서 철학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의 건축언어를 통해 과거지향보다는 시대를 인식하고 그 곳의 역사를 함축하는 현실에 더 무게를 두고 도시 건축적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정신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최재석 / 한라대·건축공학

필자는 일본 橫浜國立大에서 ‘되오 반 두스부르흐와 ‘더 스테일’ 건축운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네덜란드 근대건축’ 등의 저서가 있다.


렘 쿨하스(Rem Koolhaas, 1944~ )는
하버드대 건축학부 교수인 렘 쿨하스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저널리스트인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30대에 협동설계조직인 OMA를 설립하고 ‘정신착란증의 뉴욕’(1978)을 출판해 작가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최근에는 프리츠커 건축상 (2000)과 RIBA 금메달(2004)을 수상했다. 주요 건축물로 ‘중국국영방송본사사옥’, ‘미국 로스엔젤레스박물관’, ‘리움미술관’ 등이 있다.


©2006 Kyosu.net
Updated: 2006-07-0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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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7-0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렘 쿨하스의 작품이었구만. 어쩐지 투박스럽게 보인다 했더니 ... ㅋㅋㅋ

(농담입니다 ;;;)

그나저나 이 사람 글 중간중간에 영어 섞어쓰는 것 좀 봐라, 참 가관이다.

"직육면체의 매스(mass)"

"외벽의 솔리드(solid)한 부분과 창문의 보이드(void)한 부분"

"중심 코아에서"

"클라이언트와의 상호이해"

......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