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말]

 

 

마이크로소프트 아성 무너지나

모질라 불여우 1.0, 100시간 만에 100만 다운로드 돌파

 

이정환 기자 blue@digitalmal.com

 

마이크로소프트 독점 왕국의 아성이 무너지는 것인가. 최근 1.0 미리보기 판을 출시한 모질라 재단의 대안 웹 브라우저, 불여우(파이어폭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9월 14일에 첫 선을 보인 불여우 1.0 미리보기 판은 출시 6일째 되는 날에, 시간으로는 100여시간 만에 다운로드 횟수가 100만을 넘어섰다. 첫날 31만2천명이 이 프로그램을 내려받은데 이어 22일까지 모두 150만6200명이 불여우 쓰기 운동에 동참했다. 당초 모질라 재단이 공언했던 10일 100만 다운로드 목표를 일찌감치 넘어선 셈이다. 이런 속도라면 10일 동안 200만 다운로드도 가능할 전망이다.

불여우는 1990년대를 풍미했던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의 계보를 잇는 100% 무료 프로그램이다. 넷스케이프가 아메리카온라인에 인수됐다가 지난해 8월 결국 독립해 나오면서 불여우로 이름을 바꾸고 소스 코드를 모두 공개했다. 소스를 공개했다는 건 프로그램의 내부구조가 모두 공개돼 있어 누구나 저작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고쳐쓰거나 무료로 배포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다.

불여우를 개발하고 있는 모질라 재단은 100%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재단이다. 60여명의 개발자와 2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한글 불여우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 근무하고 있는 윤석찬씨를 비롯해 이정민, 박상현, 신정식씨 등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다.

불여우가 주목받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여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불여우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비교할 때 속도나 안정성, 보안 등에서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대부분의 웹 사이트가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최적화 돼 있어 불여우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페이지가 많다는 단점이 있다.

이번 1.0판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호환성이 크게 강화했고 라이브 북마크 기능과 비밀번호 암호화 기능 등이 추가됐다. 라이브 북마크는 RSS(웹 페이지 정보 수집, Really Simple Syndication)를 제공하는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오른쪽 아래 상태 막대에 아이콘이 나타나는 기능이다. 즐겨찾기에 추가하면 새로운 글의 목록을 읽을 수 있다. RSS를 지원하는 웹 브라우저는 불여우 1.0판이 최초다.

비밀번호 암호화는 관리자 암호를 입력해야 암호 자동입력 기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다. 여러명이 쓰는 컴퓨터에서 유용하다. 검색도 편리해졌다. 검색어를 입력하면 페이지 안의 모든 검색어를 한꺼번에 표시해주는 기능도 있다. 보안이 필요한 페이지에 접속할 때는 주소창이 밝게 표시되는 기능도 있다.

이밖에 이미 0.9판 때부터 제공됐던 팝업 창 차단 기능과 탭 브라우징, 검색 툴 바 등도 불여우의 차별화된 매력이다. 무엇보다도 용량이 4.5메가바이트로 작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보다 훨씬 빠르다는게 가장 큰 강점이다.



정보기술 전문 잡지'이위크(EWEEK)'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점유율은 지난 석달동안 1.8% 줄어들어 현재 93.7%에 이른다. 불여우는 1.7% 늘어나 5.2%에 이른다. 역시 정보기술 전문 웹사이트 '시넷'에 따르면 이 사이트 방문자 가운데 불여우 사용자의 비율이 지난 1월 8%에서 9월 둘째주에는 18%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동안 인터넷 익스플로러 사용자의 비율은 84%에서 75%로 크게 떨어졌다.

불여우 사용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지난 7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보안 결함이 발견되면서 부터다. 모질라 재단의 대변인, 바트 디크램은 "불여우 열풍은 사람들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디크램은 "일시적인 현상 아니냐는 우려도 있지만 우리는 이런 변화가 계속될 거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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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9-24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목이 좀 거창하긴 한데,
혹시 모르죠 ...^^
 

 

 

판사님, 판사님, 길들여진 판사님…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948년 대한민국 출발 때 3부 중 가장 깨끗하고 똑똑했던 사법부가 가장 처절하게 망가진 이유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최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활약이 눈부시다. 두 기관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수구적인 결정을 연달아 내놓아, 철없는 ‘좌경 정권’ 때문에 이 나라가 결딴날까봐 노심초사하는 ‘애국세력’에게 천군만마의 힘이 되어주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8월26일 국가보안법의 말 많고 탈 많은 고무찬양죄에 대해 재판관 9명의 전원 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같은 날 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하는 현행 병역법에 대해서도 7 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뒤질세라 대법원은 9월2일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겨냥해 “나라의 체제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국가의 안보에는 한치의 허술함이나 안이한 판단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주류 중의 주류!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라는 자리에 오른 분들이 보수적이라는 점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로 새삼 놀랄 일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세속의 정치적 일에 초연한 척 지내온 점잖은 분들이 작심을 하고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입장에 서서 보면 이해할 만도 하다.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 자리가 넘어갔다. 1960년 4월부터 1년여 동안의 짧은 에피소드를 빼고는 대한민국 수립 이래 처음으로 정치권력이 바뀌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른바 ‘주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 5년만 참자.”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면서 5년은 흘러갔다.


△ 1971년 7월 사법 파동 당시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형사지법 판사들의 사표를 모아들고 있다. 사법부가 철저히 길들여지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2002년, 다시 대선의 계절은 왔다. 그런데 또 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책임져야 할 환란위기도, 이인제로 인한 적전분열도 없었고, 정몽준은 선거 전날 밤 노무현과 결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진 것이다. 김대중은 비주류 내에서는 그래도 주류였지만, 바보 노무현은 비주류 내에서도 비주류였다. 기득권층인 ‘주류’로서는 이런 노무현에게 져서 앞으로 5년을 더 보내야 한다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되어 영원히 정권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탄핵이었다. 의회 다수의석의 힘을 빌려 잃어버린 대통령 자리를 되찾으려는 무모한 시도는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갖고 탄핵을 밀어붙인 거대야당이 거대여당의 출현을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주류’는 행정부에 이어 입법부마저 ‘비주류’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국가의 3부 중 주류에게는 이제 사법부 하나가 남은 셈이다. 대통령이 넘어가고, 입법부도 넘어가고, 종이신문의 영향력은 방송과 인터넷 매체에 치여 위축됐고, 게다가 사법부 내의 사정도 옛날 같지 않다. 사법개혁이니 뭐니 해가며 지난 수십년간 굳어져온 법관 서열 대신에 대법관 인사청문회를 하질 않나, 시민단체가 후보를 추천하거나 검증하겠다고 하질 않나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또 여태까지 아무 탈 없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1만명을 감옥에 보내왔는데 갑자기 하급심에서 무죄 판결이 떨어지지 않나,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이라며 국가보안법의 사활을 걸고 몰아붙인 송두율 교수가 핵심적인 부분에서 무죄를 받아 풀려나지를 않나, 주류권력의 마지막 보루가 된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나라 전체가 정말 위기 상황에 빠진 꼴이다.

<한겨레21>에서도 얼마 전 특집으로 다루었지만, 이제 모든 것은 헌법으로 통하는 세상이 되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과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니 바라는 대로 인권의 최후 보루가 될 것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주류’ 기득권층이 그래도 끝까지 장악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계속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젊은 법관들이 고뇌하며 내린 하급심의 전향적 판단을 모조리 퇴짜 놓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법부의 역사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1948년 대한민국이 출발할 때 그래도 3부 중에서 가장 깨끗했고 제 기능을 수행했던 사법부가 어쩌다 저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정치깡패가 판사를 협박하던 50년대

1950년대는 정치깡패의 시대였다. 1958년 7월2일 유병진 판사는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된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게 예상을 깨고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사흘 뒤 법원은 단체손님을 받았다.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고 부르짖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애국청년’ 수백명이 법원에 난입한 것이다. 경찰은 이런 때면 늘 어디 가서 딴 짓 하다가 한 시간쯤 흐른 뒤에 나타나는 법이다. 유병진 판사는 이에 앞서 4월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보에 ‘무산대중의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무시무시한 부제 아래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갈구한다’라는 치기 어린 글을 기고한 유근일- <조선일보>의 바로 그 유근일이다- 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6월23일에는 용산중학 교감으로 재직 중에 간첩 혐의로 기소된 이태순 피고 사건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때는 비록 김병로 대법원장은 퇴임한 직후였지만, 그가 일궈놓은 전통에 따라 많은 판사들이 법대로 판결하고 있었다. 5척 단구의 조그마한 보수주의자 김병로는 이승만 시대의 무지막지한 외풍으로부터 사법부를 지켜낸 든든한 거목이었다.

1960년대 전반에도 법원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권력의 주구들은 법원으로 몰려갔다. 한-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1964년 5월21일, 이번에는 정치깡패가 아니라 정복을 입은 군인들이었다. 법원이 박정희가 내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벌인 시위 주동학생들의 구속영장을 대부분 기각하자 수경사 소속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하고 심지어 판사의 집까지 찾아가 당장 구속영장을 발부하라며 행패를 부린 것이다.

자기를 천황쯤 되는 초월적 지위에 놓고 싶어했던 박정희는 3권분립을 원리로 삼는 민주주의을 경멸했고, 가끔 행정부를 견제하려 드는 사법부를 극도로 불신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1962년 5월14일 대법원장에게 보낸 ‘지시각서’ 5호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박정희는 “혁명 이래 일부 법관이 아직도 새로운 세계관의 확립 없이 돈과 술에 팔리고 정실과 야합”하고 있으며, 중대한 국가적·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땅을 치고 우는 약자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도 없이 마치 법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완전히 사단장이 밖에서 술 먹다가 사고치고 들어온 초임 법무관 야단치는 어조였다. 박정희에게 모든 국가기구는 통치권자가 세운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해야 하는 존재였지만, 사법부는 여기에 역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도 꿈꾸지 못한 사법기구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박정희 시대에는 가인 김병로나 권승렬, 최대교같이 늘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권력에 맞서 외풍을 막아줄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검찰총장에 임명돼 벼락출세한 신직수(왼쪽). 그와 환상의 콤비를 이뤘던 법무장관 민복기(오른쪽).

1963년 12월7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차장 신직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 그의 학교나 고시 동기들은 대개 평검사였고 15년에서 2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검찰총장이 되었으니 벼락출세도 그런 벼락출세가 없었다. 오죽하면 심기가 불편한 고검장들이 집단으로 검찰총장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신직수가 벼락출세를 한 비결은 박정희가 5사단장 시절, 그가 사단 법무참모를 지낸 인연 때문이다. 육사 출신이 주도한 군사정권과 판검사들의 야합을 육법당(陸法黨)이라 불렀는데, 아마 신직수가 법당의 초대 당수쯤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검찰개혁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검찰이 연공서열에 따른 인사를 하는 것이 봉건적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나 역시 이 비판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저 험한 군사독재 시절에 연공서열에 따른 인사에 나름대로 상황에 따른 합리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자격 없는 권력자가 자격 없는 대상자를 검찰총장이나 다른 요직에 인재 발탁이란 미명하에 끌어올리는 것을 막으려면, 조직 전체가 똘똘 뭉쳐 “서열대로 합시다”라고 할 수밖에. 가끔 장관이나 고위직 인사를 보면 ‘왜 저런 사람을 저런 자리에 앉히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뜻밖에 큰 감투를 쓰게 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권력자 원하는 대로 진흙탕에서 뒹구는 일도 마다 않고 하는 것이지, 자기가 잘나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뭐 빚진 게 있다고 무리수를 두겠는가? 이런 게 박정희의 용인술이었다.

신직수는 무려 7년 반을 검찰총장 자리를 차지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장수 총장이 되었는데, 그의 총장 시절 검찰은 완전히 독재권력의 충실한 시녀가 되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64년 8월의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인 6·3 사태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된 지 얼마 뒤 중앙정보부는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의 각본을 다 짜서 서울지검으로 송치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 이하 검사들이 아무런 증거도 혐의도 찾을 수 없다며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나선 것이다. 이에 법무장관 민복기는 “상명하복의 검찰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공안부장 이용훈 등 3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몹시 분개했고, 중정 차장으로서 그를 모셨던 신직수가 총장으로 있던 검찰은 이용훈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 사건을 거치면서 검찰은 1970년대를 풍미한 참고서의 이름마냥 박정희 체제에 ‘완전정복’되었다. 신직수는 이후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사법살인으로 악명을 떨친 2차 인혁당 사건을 처리했다.

‘양심에 따른 기소거부’를 아십니까

조직을 장악할 때는 당근도 같이 주는 법. 법무장관 민복기, 검찰총장 신직수, 이 환상의 콤비는 대법원이 전체 법조계를 대표하기 위해서 대법원 판사에 검찰 출신도 들어가야 한다는 궤변을 내세워 마침내 대검차장 출신의 주운화 등이 검찰 대표로 대법원 판사가 되는 길을 연다(이런 이상한 관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주운화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맡아서 역시 법대로 일부 피고의 간첩 혐의의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유병진 판사 때나 1964년 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 때처럼 직접 법원에 ‘애국청년’들이 몰려온 것은 아니고, 벽보를 붙이는 수준이었지만, 거기 사용된 표현은 과거의 두 사건보다 훨씬 거칠었다. 담당 재판장 김치걸이나 주심 주운화 등은 ‘김일성의 앞잡이’로 ‘법관의 가면을 쓰고 도사린 붉은 늑대’이며 사법부는 ‘북괴의 복마전’으로 규탄됐다. 이 사건을 만들어낸 정보기관의 간부는 인책 사임했다는데, 사법부 보호를 위해서 공작 자체에 책임을 물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너무 졸렬해서 역효과 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하에서 사법부가 철저히 길들여진 계기는 역시 1971년 7월 말에 시작된 사법 파동이었다. 박정희는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 신승하고 7월에 3선 임기를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 대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위헌심판권을 행사하여 군인과 군속의 손해배상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을 위헌이라 판결했다. 그리고 학생시위로 구속되거나 반정부 논문을 기고했다가 반공법으로 기소된 문인들이 잇달아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에 박정희는 격노했다. 새로이 법무장관으로 승진한 신직수에게 사법부 길들이는 과업이 부여됐다.

판사들이 집단사표를 낼 정도였으니…

1971년 7월28일 서울지검 공안부(이때 공안부장은 1964년 인혁당 사건 때 공안부 검사로는 유일하게 사표를 쓰지 않은 최대현이었다) 는 무죄 판결을 많이 낸 재판부의 하나인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이범렬 부장판사와 배석 최공웅 판사 등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 사실은 재판부에 할당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갔을 때, 피고인의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피고인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것은 잘못이지만, 공식 출장비가 거의 책정되지 않는 현실에서 이는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다. 형사지법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없다고 영장을 기각하자 검찰은 증거를 보강하여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보강된 증거란 두 판사가 출장가서 ‘객고’(客苦)를 푼 것에 관한, 좀 쑥스러운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누가 보기에도 명백하게 법관 길들이기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보수적이고 집단 행동을 안 하기로 소문난 판사들도 집단 사표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판사들은 이번 집단 사표가 단순히 동료를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법권 독립’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1) 반공법,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법관을 용공분자로 취급하여 협박하고 신원조사를 했다, 2) 판사실에 도청장치를 했다, 3) 무죄선고가 나면 법관이 부정한 재판을 한 듯 비난하면서 예금통장을 조사했다, 4) 판사들을 미행, 사찰하고 함정수사까지 했다 등등 그동안의 사법권 침해 사례 7개항을 공개했다.

일선판사들의 집단 행동이 이어지자, 대법원 판사들은 회의를 열고 대법원장(인혁당 사건 당시 법무장관인 민복기가 대법원장이 되어 있었다)이 대통령을 만나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대법원장의 대통령 ‘알현’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결국 영장을 청구한 공안부 라인을 문책성 전보인사를 하는 것으로 법관쪽에 약간의 퇴로를 제공했고, 법관들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사건 한달 만에 스스로 사표를 철회했다.

사법 파동이 일어난 1971년 여름은 유난히 큰 사건이 많았다. 파동이 한창 진행 중에 광주대단지 폭동, 남북이산가족찾기와 남북 적십자 회담 발표, 실미도 사건 등이 일어났고, 뒤이어 교련반대 데모로 위수령이 발동되고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사법 파동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 음모인 10월유신을 앞두고 걸림돌이 되는 각 집단을 각개격파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유신헌법이라는 황당한 헌법 아래 법관 재임용제도가 도입되어 대통령은 법관의 임명권마저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73년 3월 법관 재임용에서는 전체 법관의 10%가 넘는 48명의 법관이 법복을 벗어야 했다. 1971년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에서 위헌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 9명을 포함해, 학생들을 무죄 방면하거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들도 대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에게 신군부가 원한 내란목적살인죄 대신 단순살인이라는 소수의견을 제시한 대법원 판사 6명은 모두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살아남은 판사들은 길들여져갔다. 이제 사법부(司法府)는 행정부의 한 부서인 사법부(司法部)라 불리더니 급기야는 사법부(死法部)라 조롱받게 되었다. 10·26 사건 김재규에게 신군부가 원한 내란목적살인죄 대신 단순살인이라는 소수 의견을 제시한 대법원 판사 6명은 모두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이영섭은 신군부의 외압에 마음고생을 하다 입이 돌아갈 정도였다. 그가 퇴임사에서 한 말, 자신의 대법원장 시절은 오욕과 회한의 역사였다는 말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형사지법 수석부장 시절 검찰의 영장청구를 기각하고, 사표를 쓴 판사들을 대표해서 성명서를 읽던 유태흥은 대법원 판사가 된 뒤에는 김재규 사형 판결에서 적극적 역할을 했고, 결국은 대법원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유태흥은 법관 인사의 난맥상을 비판하는 글을 한 법조신문에 기고한 판사를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부임 하루 만에 울산지원으로 전보시켰다가 2차 사법 파동을 초래하고, 대법원장에 대한 사법 사상 최초의 탄핵 발의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렇게 처절하게 망가져간 사법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대법원에서 그나마 소수 의견을 가장 많이 낸 판사가 이회창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회창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

지난번 탄핵 사태 때 사람들은 혹시라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인용하면 어쩌냐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3월13일 광화문의 촛불시위를 다녀온 뒤 나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느긋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뭘 믿고 그러냐”며 설마 헌재 재판관들의 양심을 믿느냐고 힐난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순진하지는 않다면서 ‘그들의 양심은 나도 안 믿지만 거기까지 올라온 그들의 눈치만큼은 믿어줘도 된다’며 촛불이 꺼지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답해 같이 웃었다. 그런데 이제 헌재는 그 눈치를 벗어버리고- 어떤 재판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나를 놀라게 했는데, 정작 헌재 결정에서는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용감하게 수구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어떤 법원장은 자못 비장하게 시민단체의 개입으로 사법부의 독립이 훼손되고 있다는 퇴임사를 남겼다. 설마 군사독재 시절을 나름대로 고통스럽게 살아낸 저분들이 말하는 사법부의 독립이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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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chika > 김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김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호인수 신부, 보안법 필요성 주장한
김수환 추기경 비판

“그리스도교인이 성경과 신학의 관점에서 말해야지 정치적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라고 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형제를 적으로 삼아 박멸하라고 했습니까. 온 땅에 평화를 증거하라고 했지 갈등과 전쟁을 부추기라고 했습니까. 하느님이 주신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라고 했지, 인권을 능멸하고 유린하라고 했습니까. 성직자라면 북한이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았다느니 하는 견강부회식 정치적인 요인들을 앞세울 게 아니라 성경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화통일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교계 지도자들을 생각하면 호인수 신부(우리신학연구소 소장·57)는 한숨부터 나온다. 성직자 옷만 걸쳤지 정치인이나 다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지도자들 속에는 김수환 추기경이나 존폐 논란 속에서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며 내심 보안법 존치에 힘을 실어주는 가톨릭 지도부는 물론이고 기독교감리회 예장통합 한기총 등 개신교 단체들도 포함돼 있는 듯하다.

“인권유린을 허용하는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는 신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법은 싸워서라도 없애야 한다는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성직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지 정치적 판단에 따라 살아선 안됩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이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하셨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쥐고 세상을 호령하는 자들과 함께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들은 지금 가진 자들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이 성경과 신학의 관점에서 말해야지 정치적 입자에서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라고 했습니까”

호 신부는 국가보안법 필요성을 앞장서 주장하는 김 추기경이 안쓰럽다.

“김 추기경이 바뀌었다고들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김 추기경은 옛날부터 매우 귀족적이었요. 정치적이기도 하고요. 독재정권과 싸울 때도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과 이돈명 유현석 변호사 등 원로 평신도들이 잘 이끌었기에 본래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추기경의 ‘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는 적지않다. 직선제 개헌투쟁때 적전분열을 야기하고 전두환 정권에 유착했던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를 두고 김 추기경은 “참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이런 사람이 돼야 나라가 편해진다”고 상찬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지극한 애정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없는 비판정신을 보였다. 최근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때 이회창씨를 열심히 지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인들처럼 언론에 거론되지 않으면 심심한가 봅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발언도 그런 차원 같아요. 김 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김 추기경은 1988년 서경원 의원이 밀입북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을 범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단 며칠간이라도 감옥 생활을 했다면 요즘처럼 엉뚱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신부도 있다.

호 신부는 성직자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평신도의 책임도 크다고 말한다. 성직자를 똑바로 세우는 것은 평신도의 몫인데, 평신도들이 ‘어리석은 백성’으로 남아 성직자의 말에 충실히 따르기 때문이다. 호 신부가 10년째 우리신학연구소에 공을 들이는 것도 평신도 운동 차원이다. 평신도가 신학을 제대로 알아야 성직자가 엉뚱한 소리나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 신부는 믿는다. 이 연구소는 평신도들이 운영하고 연구하고, 다른 평신도들의 신학 공부를 도와준다. 성직자의 성경 및 교리해석에 대해 반론을 펴기도 한다.

호 신부는 76년 서품했다. 인천교구에서 고잔동, 부평1동, 북주안, 주안5동 성당에서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격동의 80년대를 노동자와 재야 청년운동가들 속에서 생활했다. 인천교구 가톨릭노동청년회를 맡는가 하면, 김정택 목사, 제정구, 이명준씨 등과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을 결성해 이끌었다. 지금은 인천 상동성당 주임신부를 맡고 있다.

곽병찬 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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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님의 "증여,순수증여,교환"

프랑스 이론가들 중에 이런 방면의 작업을 한 사람들이 꽤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는 아직 소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제일 주목할 만한 사람은 장-조젭 구(Jean-Joseph Goux)나 모리스 고들리에(Maurice Godelier) 같은 사람들이죠. 장-조젭 구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Marx et Freud](1972) 같은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종합하려는 매우 야심적인 책인데, 일본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에도 이 책을 번역해서 소개하면, 시의성도 있고 인문사회과학 연구에 상당히 기여를 할 수 있을 듯한데, 아직 번역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모리스 고들리에는 장-조젭 구에 비하면 좀더 인류학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초기에는 마르크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많은 주목을 받았죠. 최근에는 마르셀 모스에서 레비-스트로스, 데리다에 이르는 증여이론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선물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책이 잘 번역돼서 소개되면 좋을 텐데, 이른 시간 내에 번역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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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하나 하겠습니다.

한국서양근대철학회에서 펴낸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창작과비평사)이 엊그제 출간되었습니다. [서양근대철학](창작과비평사, 2001)에 이은 두번째 공동저작인데, [서양근대철학]을 재미있게 읽은 분들은 이 책도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서양근대철학]이 인물 중심의 철학사인 데 비해, 이 책은 열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근대철학을 다루고 있어서,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서양근대철학의 전반적인 면모를 이해하고 싶은 분들께는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읽으시고 서평들도 많이 써주시기를 ...^^(자기는 안쓰면서-_-;;;)

 

[목차]

 

첫번째 쟁점: 물질과 운동
자연현상을 물질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두번째 쟁점: 방법
지식 획득의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세번째 쟁점: 지식
지식은 어디까지 정당화되는가

네번째 쟁점: 지각
수동적인 감각인가, 마음의 능동적 행위인가

다섯번째 쟁점: 실체
세계는 하나의 실체로 설명되는가, 다수의 실체로 설명되는가

여섯번째 쟁점: 자아
무엇으로 자아존재의 확실성을 증명할 것인가

일곱번째 쟁점: 정념
원초적인 것인가, 파생적인 것인가

여덟번째 쟁점: 도덕과 자유의지
도덕의 기초는 감정인가 이성인가, 그리고 자유의지는 도덕의 필수조건인가

아홉번째 쟁점: 개인과 사회
인간은 원자적 존재인가, 공동체적 존재인가

열번째 쟁점: 신과 종교
선한 신과 악은 양립 가능한가

 

[내용 소개]

 

왜 쟁점 중심의 근대철학인가
2500년 서양철학사를 살펴보면 시대마다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많은 철학자들이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근대철학은 그 문제의식에서 현대와 맞닿아 있다. 근대 철학자들이 다루었던 철학의 주제들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관심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400년전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이 쟁점으로 삼았던 문제들은 여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논의될 필요가 있다.
2001년 창비에서 발간된 ?서양근대철학?이 서양근대철학을 인물 중심으로 집대성한 것이라면 이 책 ?서양근대철학의 열가지 쟁점?은 근대철학을 꿰뚫어볼 수 있는 방법으로 쟁점 중심 접근을 채택했다. 인물별, 연대기별 서술방식에 집중되었던 기존의 철학서 체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참신한 기획이자 새로운 시도인 것이다. 근대 철학자들이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열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주제별로 깊이있는 탐구의 깊이를 더하면서 진지하고 치열한 근대철학의 세계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집필한 '서양근대철학회'는 르네쌍스부터 칸트 이전의 유럽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철학학회이다. 단순히 서양의 근대철학을 소개하거나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것으로 소화 흡수하여 독자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2002년 가을에 기획된 이 책은 26명의 국내 중견 소장학자들이 쟁점별로 팀을 구성하여 2년 동안 매달 쎄미나를 통해 공동집필하고 독회를 거듭하면서 완성해낸 역작이다. 서양근대철학에 대한 연구성과를 우리의 학자들이 우리의 언어로 정리한 것으로서 학계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근대철학 속의 쟁점들
첫번째 쟁점: 물질과 운동 근대는 과학이 세상을 보는 눈을 크게 바꾸어놓고 합리적인 사고와 삶의 기준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과학혁명의 시대였다. 베이컨, 데까르뜨, 홉스, 라이프니츠 등 과학자이기도 한 근대 철학자들은 2천년 동안 서양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학의 핵심이 되는 두 축인 물질론과 운동론을 극복하는 새 자연철학의 원리, 즉 물질의 운동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기계론의 전통을 세워 근현대 학문 발전에 초석을 마련했다.

두번째 쟁점: 방법 근대 과학과 철학에서 말하는 방법이란 새로운 철학적 원리 혹은 자연학적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따라야 할 절차를 말한다. 근대 철학자들은 중세의 스콜라철학적 학문관과 그 방법론을 극복하고 회의주의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과학의 의미분석 작업의 일환으로 방법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험론자들이 자연주의적이며 귀납론적 방법을 택하였다면, 합리론자들은 선험적 원리를 인정하고 지식을 존재적 원리나 우주론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방법을 적용하였다.

세번째 쟁점: 지식 가톨릭교회의 전적인 권위에 문제를 제기한 교회개혁운동과 고대 회의주의의 일파인 퓌론주의의 부활을 계기로 인식론에 대한 열렬한 관심이 생겨났다. 근대 철학자들은 지식과 신앙을 구별하고 확실한 지식을 찾는 일이 철학자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앎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앎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앎의 한계는 어디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번째 쟁점: 지각 고대철학에서도 지각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지적 기능이 우월하다는 확신 때문에 지각에 대한 관심은 아무래도 부차적이었다. 합리론자들은 대체로 외부 사물을 지각할 때 생기는 오류 때문에 지각을 신뢰하지 않고 지적 직관에 의존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반해 지각에 대한 체계적이고 충실한 관찰과 분석은 경험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각표상설(데까르뜨)과 주관적 관념론(로크, 버클리), 현상론(흄), 상식적 실재론(리드)과 프랑스 감각주의 철학(꽁디약, 멘 드 비랑)이 근대철학의 대표적인 지각이론이다.

다섯번째 쟁점: 실체 근대철학에서는 목적론적 자연관이 폐기되고 기계론적 자연관이 확립됨으로써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세우기 위해 실체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합리론자들은 실체를 존재론적 탐구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실체의 존재론적 위상이 무엇이며 다른 존재론적 요소들(우연성, 힘, 속성)과 어떤 원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규명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하였다. 이에 반해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실체문제를 전혀 다른 인식론적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대체로 실체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거나 정당성이 결여된 것으로 생각했다.

여섯번째 쟁점: 자아 근대철학이 서양의 지성사에 기여한 공로는 바로 '자아의 발견'이다. 인간 자신이 바로 앎과 삶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한 기준이 되었다. 그것은 신 중심 사회인 중세라는 역사적 배경과 '자아의 발견'이 대두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 인격, 자율성, 자발성 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은 특히 뉴턴과학과 명예혁명을 성취한 근대 영국에서 강하게 일어났으며 경험론이 그 중심부 역할을 했다.

일곱번째 쟁점: 정념 근대 철학자들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다양한 감정론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대이다. 합리론자들 중 데까르뜨와 말브랑슈는 심신이원론에 기초하여 정념론을 전개시켰으며, 스피노자는 코나투스 이론을 통해 정신과 일체를 일원적으로 통합했다. 반면 경험론자들에게 정념의 문제는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념이란 행위를 위한 의도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작용할 수 있는 의지와 작용당할 수 있는 정념을 구분한다.
여덟번째 쟁점: 도덕과 자유의지 근대의 철학자들은 신적 의지나 자연적 본성이나 목적에 근거하여 선과 도덕을 이해했던 과거의 사고방식과 규범들이 더이상 실천적 지침으로서 적절치 못함을 지적했다. 근대 도덕철학의 핵심적 관심은 도덕적 사고의 규범과 기준을 새로이 정초하는 것이었다. 또한 단순히 도덕적 덕목을 탐구한 고대와 달리 도덕적 사고의 가능성과 근거 그리고 규범의 당위성을 탐구하는 데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근대 도덕철학은 덕윤리가 아니라 규범윤리의 특징을 지닌다.

아홉번째 쟁점: 개인과 사회 종교적 권위와 이에 근거를 둔 권력과 제도, 질서가 점차 영향력을 상실한 근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자들은 더이상 신의 권위나 종교적 교리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 마끼아벨리, 홉스, 로크, 루쏘, 칸트, 헤겔 등은 도덕이나 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는 이기적인 개인이 군집상태인 이른바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이로부터 어떻게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가를 탐구하였다.

열번째 쟁점: 신과 종교 전능하고 지선한 사랑의 존재인 신이 어떻게 세상을 이토록 시련이 많은 곳으로 만들어놓았는가 하는 물음은 신비와 신앙으로 모든 의문을 묻어버리던 고대인이나 중세인들보다는 이성의 눈을 뜨고 좀더 확대된 세계를 목격했던 근대인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 속에서 신의 존재를 계시가 아닌 이성의 힘만으로 논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악의 존재와 선한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도록 변론하는 문제 역시 중요한 철학적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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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9-2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개하신 책에서 발마스님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전에 나온 서양근대철학과 함께 구입해서 보면 근대철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당장은 아니지만 찜해두었으니 언젠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을산 2004-09-23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도 공동저작에 참여하셨다면 당장 주문이구요, 아니면 년말에 주문입니다.
.... 아니구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balmas 2004-09-2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근대철학]과 함께 보시면 더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저도 글을 하나 쓰긴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궃은 일에는 쏙 빠져서 공동필자라고 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더욱이 제가 제일 막내뻘되는 데 말이죠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