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처럼 맑은 물, 그리고 '오물'의 맛

 

한스와 함께 하는 바이칼 여행 <3>멋있는 곳, 맛있는 곳
윤희만 <imhans89@hanmail.net>
          
▲ 노을 지는 바이칼 호수. 출처 http://nature.baikal.ru  

바이칼은 남부 시베리아 산지에 있는 호수이다. 호수의 길이는 636㎞, 면적은 3만1천500㎢(네덜란드의 넓이)로 세계 호수 중 면적으로만 8번째로 꼽는다.

하지만 물의 깊이와 수량을 따진다면 바이칼 호수는 어떤 호수도 따라올 수 없다. 평균 깊이는 730m, 가장 깊은 곳은 1620m, 수량은 23만㎡이다. 이는 러시아에 있는 전체 담수양의 80%, 세계 전체 담수양의 20%를 차지하는 엄청난 양이다.

호수 해안선의 총 길이는 2100㎞이다. 재미있는 것은 336개의 하천이 바이칼 호수로 들어오고 있으며, 오직 하나의 강만이 바이칼에서 나간다.

바이칼 호수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부럇트 민족인데, 현재도 이 곳에 하나의 공화국으로 존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들에게 바이칼 호수는 매우 신성한 곳이었다. 부럇트 민족은 돌 하나라도 함부로 바이칼 호수에 던지거나, 그 위치를 바꾸는 것을 금기시했다.

바이칼 호수로부터 빠져나가는 강은 오직 하나, 앙가라 강인데 이 강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 바이칼 호수에서 빠져나가는 앙가라 강. 이 강은 이르쿠츠크 시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오른쪽이 리스트뱐까 마을이다.
출처 http://baikal.irkutsk.ru  

전설에 의하면 바이칼은 늙은 아버지이며, 앙가라는 그 딸이다. 아버지의 성격은 매우 잔인하고 무정했으나, 외동딸인 앙가라를 무척 사랑했다.

어느 날 앙가라는 아버지 바이칼이 잠든 사이 야반도주를 감행하여, 젊은 청년인 예니세이에게 도망간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아버지 바이칼은 크게 분노했다. 그의 분노로 하늘과 땅, 산맥과 호수가 어두워지고 천둥과 바람이 몰아쳤으며 바위들이 날아다녔다. 바이칼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커다란 바위를 앙가라에게 던졌고, 그 바위는 앙가라의 목에 걸렸다. 앙가라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빈다.

앙가라는 “아버지, 바위 때문에 아무것도 마실 수가 없어요, 제발 물 한 모금만 마시게 해주세요”라며 빌었지만 아버지는 매정하게 답했다.
“너에게는 물 한 모금도 줄 수 없고, 단 내 눈물만 줄 수 있다.”

그래서 현재도 바이칼에서 앙가라 강으로 빠지는 호수 어귀 가운데를 보면 바위 덩어리가 올라와 있다. 그 바위가 바로 바이칼이 딸에게 던진 바위라 하고, 앙가라 강은 계속 가다가 러시아의 유명한 강 중 하나인 예니세이 강으로 빠지게 된다.

▲ 나무 아래 물을 퍼가는 구멍이 있다.  ⓒ 윤희만

근데 차로 가다가 그 바위를 본 한스는 바위가 생각보다 작아 의아해했다.
한스: 흠…저 바위가 목에 걸렸다니.. 별로 안 큰데.
운전기사: 물 위로 올라와 있는 건 작지, 물 속에 있는 부분은 얼마나 큰데.
한스: 글쿠나….

예로부터 샤머니즘을 믿는 부럇트 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장소들은 바이칼 호수 곳곳에 있다. 현재도 부럇트 족이건 러시아 현지민들이건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동전, 담배 등을 던져놓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우리랑 같이 다니던 기사 아저씨도 차를 세워두고 담배 한 개피씩을 던져놓았다.

겨울 바이칼은 장관이었다. 전설처럼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바이칼 호수는 러시아의 국립공원이기도 하고, 유엔에서 정한 자연보호지역이기도 하다.

처음에 어렵게 묵었던 집은 바로 바이칼 호숫가에 있었다. 집을 찾을 때는 구경할 여유가 없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호수 얼음 위에 있는 조그마한 전나무들이었다.

▲ 바이칼 호수의 얼음 조각. 먹어도 된다. 입이 꽁꽁 얼지만.  ⓒ 윤희만

호수는 전체가 얼어 있었다. 육지와 가까운 얼음 위에 중간중간 있는 전나무의 정체는 일종의 우물이었다. 사람들이 그 곳에 얼음을 깨고 나무를 세워놓는다. 왜냐하면 다음 사람이 물을 뜨러 올 때 표지판이 되는 것이다. 깬 곳은 약간 살얼음이 얼어 있으므로 삽 자루로 톡톡 두들겨서 깨고 물을 떠간다. 그 물은 식수다. 그냥 호숫물을 떠먹는다. 워낙 깨끗하니까.

얼음 위를 처음 걸어갈 때 겁도 났다. 혹시 깨지면 어떡하지? … 어떤 곳은 얼음이 매끈하게 얼어서 속이 다 보였다. 나중에 한 친구한테 얘기했다.

한스: 얼음이 너무 깨끗해서 속이 다 보이더라. 너무 신기했어.
친구: 뭐가 보였는데?
한스: 물이 보이던데.
친구: ……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곳에서 물고기도 낚는다. 바이칼에 가기 전에 갔다 온 사람들은 '오물(омуль)'이라는 생선을 꼭 먹어보라고 했다.

▲ 바이칼 얼음 구멍에서 잡혀 올라오는 오물.  ⓒ 윤희만

▲ 금방 훈제된 오물, 싱싱하면서도 담백한 오물 맛을 한 겨울에 맛보는 것,추위도 잊게 된다!

  ⓒ 윤희만

한스: 오물이라는 물고기를 꼭 먹어보래요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요?
일행: 오물? 뭔 쓰레기를 먹으래??
한스: 헉!

발음이 좀 그렇지? 아무튼 간 날부터 계속 오물만 먹고 다녔다. 영하 20-30도에서도 호수가에 나와 나무를 지펴 훈제구이 한 오물 맛은 정말 일품이다. 그 외에도 ‘씩(сиг)’이라는 생선도 먹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생선들이 있는데, 너무 생소한 이름이라 사전을 보니 하나같이 '시베리아에서 나는 연어의 일종'이라고만 나온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물고기들은 대개가 바이칼에서만 나는 종류이고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단다. 참 신기하지?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은 물개다.
민물에 물개가 산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는가? 특히 바이칼에 사는 이 물개를 '네르파'라고 부르는데,

▲ 바이칼에 사는 민물 물개, 네르파. 출처 http://nature.baikal.ru  

친구: 물개가 다 있어?
한스: 응.
친구: 어떻게 물개가 호수에 있냐?
한스: 그러게 말야..
친구: 봤니?
한스: 아니….

사실 이 네르파라는 물개를 보려면 북쪽으로 상당히 올라가야 한단다. 사람이 없는 오지에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야생동물이라, 우리가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어쨌든 우리는 바이칼에서 맛있는 오물을 열심히 먹었다.


200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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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2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있는데,
게으른 나는, 직접 여행을 떠날 엄두를 내지는 못한다 ...;;;

로드무비 2004-10-2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개의 눈이 너무 슬프고 예쁩니다.
저는 오늘 아침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을 보고 알래스카에 가고 싶어
여기저기 뒤져봤거든요.
그런데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어 주옥같은 글쓰기를 포기했다는......
그런데 발마스님, 느림 님께 날렸다는 추천이 어디 있나요?^^

balmas 2004-10-2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꼭 구슬같군요.^^
ㅋㅋ
다시 가서 추천했답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전선기자 정문태 : 타인의 고통 속에서 찾은 믿음

종군기자와 전선기자의 차이

처음엔 그저 "정문태 선생"이라고 하자. 내가 처음 그를 불렀던 호칭이 그러했으니 리뷰를 올린다 하더라도 역시 처음 불렀던 호칭 "선생"을 빼는 것도 이상할 듯 싶다. 나는 그와 몇 년 전 전화통화로 그리고, 이 메일을 통해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지면에 특집으로 "전쟁없는 21세기를 위하여"를 기획하며 그의 글을 싣고자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의 사진들과 그에 담긴 사연을 글로 적는 일종의 "포토에세이" 형태의 글로 급하게 전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정문태 선생의 깐깐함이랄까, 고집스러움이라는 일종의 자기 검열 덕에 일하기는 힘들었지만 마음은 한껏 고양되는 경험을 했다. "포토에세이"라 하면 자동 연상되는 사진작가는 유진 스미스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유진 스미스는 매우 고집불통의 사내였고, 종종 자신을 고용한 언론사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는 알프레드 슈바이처를 취재한 사진을 놓고 "라이프" 편집진과 불화를 일으켜 결국 "라이프"와의 계약을 파기(다른 말로 '쫓겨나는')하기도 했다.

사진이란 기껏해야 하나의 나지막한 목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또는 여러 장의 사진이 이루는 전체적인 조화가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여 지각으로 매개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어떤 사진들은 그것들이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이나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성의 소리를 듣게 만들고, 이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며, 때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찾아내도록 인도해 갈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생활방식이 그들에게 낯설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와 연민을 느낄 것이다. 사진은 하나의 작은 목소리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진은 잘 구성하기만 하면 그 소리를 들려줄 수가 있다. - 유진 스미스

우리에게 익숙한 "종군기자"란 표현 대신 정문태는 "전선기자"라는 신조어를 대체어로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한 정문태의 정의는 "종군"이란 말은 군대에 종속된, 군을 따르는 존재를 의미하고, 이는 다시 "복종한다" 거나 "거역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의미이므로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생명으로 삼아야 할 기자가 영원히 군대에 복속당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어 하나에도 집착하는 그의 이런 고집스러움과 자기 검열 과정이 지금의 정문태를 있게 한다. "전선기자 정문태!"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이라면 이 책의 부제는 "전쟁 취재 16년의 기록"이 될 것이다. 개정 헌법에 의해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제로 규정되었으니 그가 전선을 누빈 16년 성상(星霜)에 대통령이 세 번 이상 교체되었다. 노태우에서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에 이르는 시간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 격변의 시간이었다.

정문태가 경험한 20세기의 전쟁, 학살, 분쟁

20세기의 전쟁사를 나는 시기적으로, 역사적인 의미에서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하나로 묶어 파악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주전장은 유럽이었고, 이 기간동안 유럽은 그야말로 한 세대가 전멸해버리는 전쟁을 체험한다. 그리고 잠시의 휴식기를 거쳐 인류는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다. 혹자에 따라 이에 대한 평가나 규정이 다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두 번의 세계대전은 크게 보아 하나의 전쟁으로 생각한다. 잠시 휴식기를 거쳤을 뿐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는 뒤이어 벌어질 전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원인이 소멸되지 않았을 뿐더러 전후 처리 과정에서 다음 전쟁을 위한 뇌관을 고스란히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0세기 인류사에서 벌어진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에 벌어져 1945년 8월 15일에 끝난 30년 전쟁이었다. 세계대전의 원인은 유럽 중심의 세계통합 과정에서 소외된 신흥공업국들과 왕조 중심의 유럽 정치 질서의 붕괴라는 과도기 속에 자각하기 시작한 민족주의 의식이 맞붙으면서 세계대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자체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배제하며 힘을 축적해왔고, 유럽 내부의 충돌로 말미암은 몰락과정에서 유럽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패권을 차지한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오랫동안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이라 할지라도 힘의 일정한 비축을 전제로 한 참여를 통해 유럽의 질서를 조율해 오던 대영제국이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하고, 전력투구한 결과 유럽 중심의 세계질서는 급격히 붕괴하는 과정에서 벌어진다. 이런 힘의 공백은 그간 유럽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놓여 있던 피식민지 민족의 민족적 자각과 맞물려 식민질서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고, 더이상 식민지를 직접 운영할 수 없게 된 유럽의 힘이 물러가는 틈새에서 수많은 전쟁, 분쟁, 내전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폭력상황들이 발생한다. 우리가 직접 당사자였던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같은 국지전, 제한전쟁, 냉전의 이해당사자인 동서의 대리전 양상을 띤 열전들이 그것이다. 유럽의 패권이 밀려난 상황에서 그 힘의 공백을 둘러싼 각축에서 민족과 종교, 지역 등 복잡한 이해관계를 지닌 집단들을 선정해 동서 양대 진영의 이념적, 동지적 지원을 통해 전쟁을 치렀다.

세 번째 단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군비경쟁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해체 이후 일어난 힘의 공백 속에 주도권 다툼을 통해 벌어진 내전들이 될 것이다. 이 전쟁들은 모두 서로 밀접한 인과율 속에서 때로는 우연처럼, 때로는 필연처럼 서로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정문태가 목숨을 걸고 전선을 누빈 지난 16년의 역사는 바로 이 세 번째 단계의 전쟁들이었다. 나는 그가 40여 곳의 분쟁 혹은 전선의 현장을 다녔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많은 곳이 현재 전쟁 상황인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부록으로 "세계분쟁지도"를 만든 기억이 나서 다시 그 지도를 펼쳐보았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 많은 신생국가들이 생겨난 것처럼 소련의 해체 이후에도 마치 도미노처럼 수많은 신생독립국가들이 생겨났거나 만들기 위한 전쟁이 일어났었다. 지난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발생한 분쟁 지역만 하더라도 "멕시코(사파티스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아이티, 콜롬비아, 페루, 파푸아뉴기니, 티모르, 아체, 캄보디아, 버마, 스리랑카, 카슈미르, 펀잡,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아제르바이젠, 체첸, 쿠르드, 그루지아, 몰도바, 키프로스,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얼스터, 이라크 시아파,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예멘, 소말리아, 알제리 투아레그, 차드, 서부 사하라, 카사망스,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토고, 앙골라, 르완다, 수단, 에리트레아, 모잠비크" 등이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아프리카에 이르는 지구상 전 지역에서 연일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학살의 공포 속에서 살았다.

90년대 이후라고는 했으나 이들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난 원인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분쟁의 첫 번째 단계, 두 번째 단계의 전쟁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의 전쟁인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이 누린 평화는 그들이 오늘날 누리는 풍요와 복지의 혜택은 이렇듯 그들이 뿌려낸 원죄의 씨앗을 미국이 지원하고, 발아시켜 타지역에서 대신 추수하는 덕에 누리는 것들이다.

20세기 후반의 국지전들
- 피, 학살, 인종청소 그리고 미국

이 책은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전선의 꽃, 전선의 부랑아들"은 그의 기자관, 취재관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종군기자의 의미와 그가 어째서 전선기자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자신이 어째서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취재해야 하는 어려운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 소개하고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정문태 자신이 스스로가 일반에게 영웅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얼마나 경계(자기검열)하고 있는지 잘 살필 수 있다. "혈액형 G의 논리"에서 그는 스스로 고백하길 "여행지"로서 전선을 택했고, 그렇게 한 번 두 번 전선에 머물면서 "전선 중독" 현상이 나타났다고 고백한다.

피를 본 전선이 다시 그 피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내게 숨어있던 들짐승과 같은 속성이 드러났다. 전선에서 느끼는 공포, 분노, 전율 같은 격렬한 감정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극단적인 쾌감으로 다가왔다. <본문 20-21쪽>

만약 그가 기자가 아니라 직업군인이었다면 이것은 일종의 전후증후군으로서 치료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병사가 평화로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평온하고 일상의 생활이 전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을 때, 전역한 병사는 이것을 평온이나 평화로 느끼지 못하고 이 모든 것을 거짓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병사가 아니라 기자였다.

그러나 전선이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건 '역사적 현장에 내가 서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게 아니었던가 싶다. 그 역사가 굴러가는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는 대가로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다. 사람들이 사지로부터 빠져나오는 전선을 거꾸러 기어들어면서 나는 늘 내 존재를 역사 속에 집어넣었다. 그게 나를 위로하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착각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본문 21쪽>

나머지 5개 장은 그가 실제로 경험한 전장의 기록들이다. 일부는 이미 다른 책이나 기사를 통해(나 역시 이 책에서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몇몇 사진들도 볼 수 있는 드문 경험을 하긴 했지만) 공개된 적이 있는 것들이다. 첫 경험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그에게 "버마학생민주전선"의 경험이 그렇다. 그는 이 책의 2장 "나의 혁명, 나의 해방구"를 통해 버마의 마너플라우에서 경험한 학생 전사들과의 인연을 다소 감상적이기까지 한 필치로 회고하고 있다.

매복병에게 걸려 나자빠진 5분여, 나는 인생을 스무 바퀴도 더 돌고 돌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지루했다. 극적인 순간에 사랑하는 이들을 곧잘 떠올리곤 하던 영화나 소설도 내것이 아니었다. 내 거친 숨소리를 내가 들으며, 내가 의지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오직 내 뇌가 정상인가 아닌가 의심해 보는 일뿐이었다. <본문 75쪽>

나는 이 책을 통해 앞서 말했던 20세기 전쟁사의 후반부를 조합해 볼 수 있었다. 3장 "끝없는 전쟁"에서는 동서양의 중요 교통로로 탈라스 전투를 이끌었던 고선지도, 인도로 가는 길을 걸었을 혜초도 머물렀을 발자취가 남은 아프가니스탄을 다룬다. 중요한 길목이란 하나의 이유로 역사상 수없이 많은 외침과 내분을 겪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20세기 막바지, 21세기 초엽의 지배자는 미국이다. 그는 이를 다소 낭만적인 표현을 빌어 "아프가니스탄의 천년전쟁"이라 말하고 있으나 천지사방이 지뢰밭이자 클러스터 폭탄(집속탄)의 불발탄들 때문에 놀 곳이 없어 공동묘지에서 뛰어 놀다 탈리반에게 학살당한 꼬마 천사들에겐 잠시 머물다간 지상의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외에도 남과 북이 이념으로 갈라져 있다가 1국 2체제의 형태로 잠시 통일되었던 남북예멘이 결국 잠시의 통일 기간을 거쳐 다시 전쟁으로 불거진 예멘 전쟁, 카슈미르 분쟁을 다루고 있는 제4장 "멀고 먼 전선"이 주는 교훈은 1국 2체제의 통일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다.

제5장 "비밀전쟁" 편에서 그는 20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분쟁의 숨은 얼굴들을 드러낸다. 그것은 유럽을 대신해 새로운 전쟁의 씨앗을 뿌리고 가꾼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얼굴이다. 그는 "끝나지 않은 전쟁, 미국의 라오스 침공"이란 해묵은 과제들을 끄집어 낸다. 그리고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세계적 석학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한 인물을 호명한다. 그는 바로 닉슨 행정부 시절 대통령보좌관 겸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한 헨리 키신저였다. 그는 취임 이후 국무부의 통상적인 외교경로를 무시하고, 이른바 ‘키신저외교’를 전개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의 이런 비밀 외교는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키며 성과를 높였다. 그러나 키신저의 비밀 외교가 늘 평화로왔던 것만은 아니다. 일찌기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뒤 전술핵무기의 한정적 사용을 주장했던 그 답게 키신저는 베트남 전쟁의 배후 기지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목하고 이들 지역에 대한 폭격을 국회의 승인도 없이 비밀리에 실시했다.

우리가 시드니 쉔버그와 디스 프란 사이의 감동적인 우정으로 기억하는 킬링 필드의 실제 주역은 바로 헨리 키신저와 닉슨 행정부였다. 그들은 라오스에 1964년부터 197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200만 톤에 이르는 각종 폭탄 700만 개를 라오스 상공에 투하했다. 당시 라오스 총인구는 400만명이었으니 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통계 방식을 빌자면 국민 1인당 1.75개의 폭탄 0.5톤씩을 선사한 것이다. 참고로 미국이 한국 전쟁 당시 사용한 폭탄의 총량은 49만 5천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공격에 사용한 폭탄이 65만 6천 톤이었다. 라오스에 대한 비밀 폭격은 1973년에 끝났지만, 라오스에서는 오늘도 아이들이 죽어간다. 당시 미군이 뿌린 폭탄의 저주들이 거듭거듭 자라나는 씨앗들을 거두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문태는  전세계 언론 가운데 어디에서도 주목하지 않는 라오스의 비밀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캄보디아. 우리는 캄보디아에 대해 두 가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왕가위의 영화 "화양연화"로 우리에게 새삼스레 주목받게 된 "앙코르 와트" 유적과 크메르 루주에 의한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킬링 필드". 미국은 롤랑 조페의 감동적인 영화 "킬링 필드"를 전세계에 내보내면서 캄보디아에서 그들이 행한 잔혹한 폭격의 진구렁에서 살짝 비껴가고 싶어한다. 무려 20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캄보디아 대학살은 2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기인 1969년에서 73년 동안 미국의 폭격으로 60만에서 80만의 캄보디아 민간인들이 죽었고, 제2기인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크메르 루주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만약 책임을 따지자면 미국 역시 전범재판에 회부되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미국은 제2기에 벌어진 학살만을 문제삼는다. 물론 제2기에 벌어진 학살의 원책임을 묻자면 크메르루주의 지도자들에게 있겠지만, 미국의 폭격과 쿠데타 지원으로 말미암은 혼란이 없었다면 정글의 소수 게릴라 세력에 불과했던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보도를 통해 본 언론의 자율성과 독립성

마지막 6장 "가슴에 묻은 이야기들"에서는 그가 첫 정을 주었던 버마의 마너플라우 함락 과정과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총을 들었던 버마의 소수 민족들과 학생들, 그리고 게릴라 지도자들의 최후와 내부 분열이라는 아픈 소식들을 들려준다. 소련의 최정예 군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판쉴의 사자"라는 칭호를 얻었던 아프가니스탄의 게릴라 전사 마수드의 암살과 얽힌 의혹들과 그가 추측하는 암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는 이유를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동티모르 이야기는 목숨을 걸고 역사의 현장을 누볐던 그만이 누릴 수 있는 가슴벅찬 감동이었을지 모르겠다. 무수한 희생을 뒤로 하고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고, 구스마오 동티모르 초대 대통령은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으니 말이다. 그는 기자로서 흘리는 마지막 눈물임을 다짐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전선기자가 되었든, 종군기자가 되었든 글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칼 한 자루를 지니고 산다. 그 칼은 "장자"의 일화에 등장하는 천민 백정 포정의 칼처럼 뼈와 살을 발라내듯 쓰일 수도 있고, 에밀 졸라의 칼처럼 "나는 고발한다(J'accuse!)"의 거꾸로 흘러가려는 역사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묵직한 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든 글을 써 세상에 알릴 때는 마음속에 지닌 칼을 꺼내 휘두르는 자객의 심정이 된다. 사마천이 실패한 자객들의 이야기를 사기열전에 포함시킨 것은 아마 그런 뜻일 게다. 정문태가 지니고 휘두르는 칼이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베트남 전쟁을 통해 전쟁의 최고 상층부에 존재하는 이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태를 고발한 언론은 이후 군부와 정치, 보수화된 대중의 뭇매라는 반동을 경험한다. 그들은 자본과 검열이라는, 드러나지 않는 제약과 살해의 위협 속에서 더이상 과거의 힘을 보이지 못한다.

CNN은 알 자지라를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 언론에서 헨리 키신저는 여전히 세계적 석학이고, 아흐마드 야신은 여전히 극악한 테러리스트로 포장된다. 베트남전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언론길들이기에 나섰고, 미국 언론은 겉으로는 여전히 최고의 자유를 구가하는 듯 보이나 보이지 않는 검열과 통제에 질식해 버렸다. CNN은 연일 뉴스를 현장에서 보도하지만 진실만큼은 교묘하게 편집한다. 그들은 걸프전의 최첨단 정밀폭탄을 통한 "깨끗한 전쟁"만을 강조하느라 패전 후 후퇴하다 학살당하다시피한 이라크 군대와 오폭으로 숨진 민간인 피해를 눈감아 버린다. 군대의 브리핑을 앵무새처럼 받아 적으며 군대의 뒤를 졸졸 따르며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의 주방에서 발견한 밀가루를 흔들며 마약을 찾았다고 소리 지르는 미군 병사를 화면 가득 보여준다. 우리는 도덕교과서에서 언론 보도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화신으로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일화를 배웠다. 그들은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의 대포와 탄환에 불량이 많고, 불발탄이 많다는 보도를 내보냈고, 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런 보도를 내보내 결국엔 이를 관철시켰다고 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것과는 늘 다른 이면을 갖는다. 내가 알기로 데일리 메일은 영국의 보수신문이고, 그들은 1896년 창간 이래 일관되게 보수 논조로 일관해왔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고, 2월 27일 밤 베를린 제국의회의사당 화재 사건이 일어난 뒤 나치가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유태인까지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보내자 그들은 "나치의 젊은 전사들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파수꾼이다"라는 기사로 나치에 힘을 실어 주었다. 네덜란드 소년 한스와 아무도 현장에 있지 않았음에도 마치 현장에서 이를 본 듯 전해준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란 말처럼 진실은 종종 현실에 압도당해버린다. 연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을 것인가(정문태의 기사를 국내 신문들이 받아주지 않는 것처럼 이 책을 서평으로 다룬 신문사 역시 "한겨레"뿐이었다) ?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최소한 정문태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끝으로 사족 한 마디를 더 달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으며 전쟁보도란 것이 과연 전쟁을 줄일 수 있을까?  전쟁보도로 잔인한 장면이 TV와 매스미디어에 홍수처럼 실리는 일은 과연 우리에게 전쟁을 멈추는데 이바지할 수 있을까? 혹시 그것이 도리어 전쟁을 뭔가 낭만적인 것으로, 타지에서 누군가는 죽지만 나는 살아남았고, 계속 살 수 있다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은 아닐까? 반문해보게 된다. 이에 대해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후, 2004)"을 바라보면서 연민을 느끼는 행위, 살아남은 혹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이 우리가 보도를 접하고, 본의 아니게 소비하는 자의 입장에서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에 대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잔 손탁의 이 말은 값싸든, 비싸든 "연민"하는 행위, 그 자체를 거부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바로 "전쟁과 악랄한 정치"를 그대로 둔 채 연민만 보내는 행위의 가증스러움을 거부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논리 없는 연민""자기 연민"이고, "연민 없는 논리"는 잔인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연민과 논리를 동시에 지녔으되 행동에 옮기지 않는 것은 비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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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티토 :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

뛰어난 전기작가의 세 가지 덕목

오늘날 전기작가가 주는 인상은 힐러리 클린턴이나 마돈나 같은 인물의 뒤꽁무니를 추적해 이들이 구태여 감추고 싶은 것들을 파헤쳐 가십거리를 양산해내는 옐로우 페이퍼를 연상하거나 아니면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에게 고용된 대필 작가들이 쓰는 자서전 형태의 전기들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나 유명 인사들의 사생활은 일반 대중의 흥미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소위 잘 알려진 이들의 배꼽 아래 이야기와 같이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들에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 탓인지 우리 사회에서 전기문학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런 인식에 변화를 주게 된 것은 "체 게바라 평전"의 성공 이후 일어난 변화이다. 체 게바라에 대해 쓰여진 여러 종의 책들을 읽어 보았으나 지난 번에 성공을 거둔 "장 코르미에" 판 체 게바라 평전이 거둔 인기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흡함이 많은 책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의아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까닭이 책 자체가 주었던 것이라기 보다는 "체 게바라" 자신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탓이 더 크다고 여긴다.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당시 게바라의 행적만을 무미 건조하게 추적했을 뿐, 게바라의 활동이 가진 사회적 의미나, 당시의 시대 상황이 게바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의 대응이 빚어낸 결과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부족한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인식의 한계를 꼬집곤 하는데,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에 대해서는 전문가일지 모르겠으나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 못한 전기 작가의 저술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기작가들, 예를 들어 "플루타르코스""스테판 츠바이크" 같은 일급 전기작가들은 역시 일급의 역사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 다루려고 하는 역사 속 인물들을 단지 개인의 삶을 추적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그네들의 삶과 역사를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듯 서로 긴밀하게 결합시킨다. 뛰어난 전기작가는 문학가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뛰어난 취재기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전기 혹은 평전과 같은 장르에 대해 우리 문학계는 거의 전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관심이 없다. 한국에서 문학은 시와 소설만을 의미한다. 에세이 역시 일부 삶의 여유가 있는 이들이나 즐기는 시중한담으로 치부된다. 이래서는 철학적 에세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에세이는 힙합이 그러하듯 한국에 와서 그저 미셀러니 수준으로 격하되며, 기자들의 르뽀 문학 역시 문학비평은 다루지 않는다. 잭 런던이나 조지 오웰의 르뽀가 서구에서는 정식 문학 장르 안으로 포용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다. 심지어는 작가나 시인이 저술한 산문집도 문학비평에서 제외되는 협소한 장르가 문학이다.

시와 소설만이 문학의 순수성을 담보해주는 장르로 머무는 동안 한국 문학은 계속 외국 이론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 상황에 놓일 것이고, 폐쇄적인 학문사회가 서로 인접한 학문의 교차를 금지하는 것처럼 서로의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노벨문학상의 역대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라). 한국에서 소위 일급 문학가들이 집필한 전기문학들은 문학적으로는 평가받을지 모르나 역사학자들에게는 고증의 가치조차 없는 것들로 평가받기 십상이다. 이는 문학가들의 전기문학인 탓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전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급 사료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있으나 유고슬라비아 국민은 없다

우리의 근대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미완의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남과 북은 그들의 태생만큼이나 상이한 체제를 구축했고, 북의 정치 지도자 김일성의 행보는 호치민식 민족주의, 티토의 비동맹외교노선, 카스트로의 반미와 일부분은 겹치고, 일부분은 다른 그들만의 모습을 보여왔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은 냉혹한 국제질서의 격동기 속에서 각기 다른 민족과 극심한 분열 속에 놓였던 유고가 어떻게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와 그의 리더십을 통해 봉합될 수 있었던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시기적으로 구분하자면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요셉 브로즈가 유고 공산당의 정치지도자로 부각되는 단계, 2단계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숙청을 피해 유고지도자가 된 티토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우스타샤, 체트니크의 협공으로부터 승리하여 유고의 실질적 지도자로 인정받는 단계, 3단계는 스탈린의 공격으로부터 유고 지도자의 지위를 지속시키고 유고의 독립성을 수호하는 단계, 4단계는 외부적으로는 비동맹 외교의 중추적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들로 부터 유고식 사회주의를 지켜내는가로 구분된다. 이렇듯 20세기 가장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정치지도자 티토에 대한 평가가 단지 위대했다는 한 마디만으로 규정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가능하다.

제1단계는 티토가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는가를 살피는데는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을 준다. 과거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1892년 5월 7일 크로아티아 쿰로베츠 계곡에서 태어난 요시프 브로즈는 그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 이르까지 그가 진짜 요시프 브로즈가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북의 김일성이 진짜가 아니라는 소문처럼 말이다. 우리가 흔히 "티토"라고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사실 무수히 많은 가명을 지닌 사내였고, "티토"라는 이름 역시 그의 무수히 많은 가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에 불과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티토가 통치하던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나라는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진정한 의미의 유고슬라비아 인들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티토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 몬테네그로인, 코소보인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지명 속에 살고 있는 각기 다른 민족들인 이들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경계선상에서 종교적으로도 가장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었다. 거기에 비잔티움 제국을 함락시킨 투르크 제국과 기독교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종교간의 대립 양상을 한층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

"제스퍼 리들리"가 집필한 "요셉 브로즈 티토"의 평전은 매우 뛰어난 전기작품이자, 나에겐 그간 궁금했으나 충분한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었던 지난 역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담긴 책이었다. 우리에게 유고슬라비아는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제3세계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자 시금석 역할을 해주는 나라이지만 이에 대한 접근은 통제되고 있었다.

내가 지닌 여러 궁금증 가운데 하나인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파시즘에 저항한 주된 세력은 좌파였으나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까닭과 그렇게 되기 까지의 과정은 총체적으로도 궁금한 부분이었으나 각국의 사례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총론적 접근방식으로야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책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 발칸 반도와 그 인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각론적 접근이 가능한 책은 현재도 태부족인 상황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그리스"를 우리는 오로지 "신화의 땅"으로만 이해하지만 그리스 올림푸스에는 제우스와 아프로디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에 저항한 수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뛰어난 활동을 보인 다수는 좌파였으며 이들은 전후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복귀한 그리스 왕정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하여 많은 수가 유고슬라비아로 탈출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된 세계질서 속에서 과거의 강대국들 영국과 프랑스, 미국들은 그들의 정치체제에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은 반면, 신흥독립국들이나 약소국가들은 대개 두 가지 혹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의 발전 양상을 보인다. 이것을 유럽이라는 지역으로 한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와 같이 좌파의 몰락이 기존 정치체제의 부활로 이어지고, 이것이 표면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태로 전이되었다가 군부쿠데타와 연이은 파시즘적 군부독재로 이어졌다가 다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가는 형태이거나 폴란드,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과 같이 이전의 정치체제가 파시즘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소련공산주의 체제로 갔다가 소련의 몰락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이되는 양식이다. 

물론, 제3의 방식엔 과거 동서 냉전 시절 비동맹외교를 주도했던 네루의 인도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가 있다. 이들 두 국가의 발전 양태나 정치 체제, 외교는 이 두 정치 지도자의 과거 행적의 차이만큼이나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이들 두 사람이 오랫동안 구금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만큼이나 흡사하다.

티토는 공산주의자였는가?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 이후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만든 코민테른의 악명 높은 실책들만 엮어도 책 10권은 족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티토를 비롯해 당시 혁명에 가담했던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신념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 생각했고, "사회주의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위한다"는 믿음을 위해 기꺼이 동지의 손에 죽어가는 길을 택했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나치즘이 소련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것이라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침묵했고, 중국에서는 마오쩌뚱 대신에 장개석을 유일한 중국 내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갖가지 이유로 학살당했지만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를 죽인 나라는 다름 아닌 소련이었고, 그들은 레닌의 사후, 트로츠키의 몰락 이후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공산주의 이념을 이용했다.

티토는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뒤 내분에 휩싸여 있던 모스크바로 간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고 장담한다. 그러자 기업가들이 수많은 정치 헌금을 헌납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실제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기 위해 테러에 나서자 독일 공산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하인츠 노이만은 공산주의자들도 앉아서 당하지 말고, 파시스트를 공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1931년 여름 노이만이 스탈린을 만나 나치에 대항하는 공산당의 활동을 설명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게 되면 서방세계를 휩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 소련이 한숨 돌리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노이만은 하는 수 없이 한 발 물러났다. 이 무렵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큰 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밀어낸다면 그 틈을 노려 프랑스를 압박해 동맹체제를 구축할 요량이었다.

티토는 그 시절 국제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 그가 소련에서 머무는 동안 스탈린의 후계자로 추앙받던 키로프가 암살되는(실제로는 스탈린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한 혐의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숙청당한다. 숙청은 이 두 사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에 와 있던 국제공산주의자들에게도 시행되었다. 비밀경찰들이 밤마다 이들이 묶고 있던 숙소로 들이닥쳐 체포해간 뒤 이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아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훗날 이 때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범죄 행위를 저지른 스탈린과 소련을 지지한 이유를 묻자 티토는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했을 법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르주아들의 형무소에서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한 경험이 있던 소수의 골수 공산주의자들은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소련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중략>... 우리는 오랫동안 낮에는 강제노동을 하고, 밤에는 고독이 엄습하는 숨막히는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 때 우리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 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과 우정이 충만하며, 성실성이 인정받는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했지. 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심금을 울리는 그의 이런 말을 대신하여 생각해볼 만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해보면 티토에게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무렵 만약 소련과 스탈린을 거부한 혁명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최악의 경우 트로츠키처럼 멕시코 산골의 오두막에서 스탈린의 자객이 보낸 피켈에 정수리를 찍혀 죽거나, 아니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정치적 위상과 활동 공간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국내의 현실에서 죽산 조봉암이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뒤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무렵 공산주의를 포기한 많은 이들이 훗날 파시스트가 되어 더욱 가혹한 억압자로 나선 것을 생각해볼 때 티토의 이 말은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코민테른을 신뢰하지 않은 티토는 스탈린의 시선 밖에 머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침묵했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켰고, 벨기에, 네덜란드 , 프랑스를 함락시켰고,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유고 공산당에서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다면서 다른 공산당원들의 숙청을 실시했지만, 티토는 "불만 당원이라도 교화시키면 됐지 죽일 필요는 없다"며 이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했다.

그에 대해 내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단 하나 그들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짜르 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단 하나의 목적, 러시아의 패권 유지"란 차원에서 국제공산주의를 이용했다. 책을 읽는 내내 티토에게 쏟아내는 스탈린의 증오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이런 형편 없는 나라가 70여년 동안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도리어 의문스러웠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본래 러시아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인민의 대의를 위한 그들의 이상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혁명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 우울하고 슬픈 역사 아닌가. 티토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도살자인가? 유고 통합의 지도자인가?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에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을 포용하는 유고 내부의 유일한 정치 세력이기도 했다. 티토 자신은 크로아티아 출신이었고, 그는 파르티잔 세력 못지 않게 모두의 미움을 받은 이슬람 교도들을 포용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파르티잔 세력 안에는 유고 내부의 잡다한 민족구성과 이념적 다양성을 두루 포괄하고 있었다. 그런 티토조차 전후엔 우스타샤와 체트니크 세력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내전을 경험했다. 북의 김일성은 신흥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신흥학살의 역사적 진실은 북한군이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신흥의 우파 세력이 들고 일어나 좌파들을 숙청하면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이후 다시 북한군이 남하하면서 우파를 다시 제거하는 피의 악순환이 벌어졌지만, 김일성은 신흥 학살 사건을 미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일소해버린다. 내부의 적 대신에 외부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적으로는 왜곡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티토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다. 우스타샤와 체트니크의 악행이 워낙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데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파르티잔 집단이 이들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티토 역시 이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이후 서구에 의해 티토의 공격에 종종 이용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블라소프와 코자크인들의 경우 그들이 영국의 관할 지역으로 넘어왔으나 그들은 영국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되돌려 보내졌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국제정세의 미묘한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의 일화를 보자.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한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랴나를 입양한다. 미랴나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냉혹한 인종청소로 악명 높았던 밀로셰비치가 바로 이 사람이다. 티토가 죽은지(1980년) 10여년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가혹한 내전을 경험하며 분열된다. 유고가 다른 동구 국가들이 걸었던 공산화의 길과 다른 공산화의 길을 걸었던 것을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빚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소련이 건재할 당시 이들의 위성국가였던 알바니아나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는 소련의 몰락 이후 그나마 국가의 분열이나 인종청소와 같은 갈등을 겪지 않은 반면에 당시로서는 서구와 동구 사이에서 그네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유고가 티토의 사망 이후 동구 해체 과정을 겪으면서 나토(NATO)와 미국의 집중 폭격을 받을 만큼 가혹한 해체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여러 방면에서 가능하다. 우선 평전인 만큼 요셉 브로즈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만 치중해서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티토가 궁극적으로 보냈던 충성의 대상이었던 공산주의 혁명의 전개 과정을 따르는 것이 가능하고, 영화화되기도 했던(리처드 버튼이 1971년 티토 역을 맡은 영화) 그의 파르티잔 시절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비동맹 외교에 집중할 수도 있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이 책이 티토의 개인적 삶은 물론이고, 역사를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전기 출간붐을 타고 판매되는 수많은 평전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이 책을 단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책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도 몇 가지 단점이 보인다. 우선 이 책의 저자 제스퍼 리들리는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란 부제를 통해서도 이미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티토에 대한 존경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티토의 모습이 객관성이 결여된 그에 대한 상찬으로 거듭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는 오해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저자가 티토에 대한 존경을 보내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는 장점에 어긋나는 몇몇 부분들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흐루시초프가 집권 이후 티토와 유고 공산당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럴 개연성도 있지만, 그것이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전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유고가 유럽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고와 티토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까지 영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해두고 싶다. 미국과의 관계 부분이 상대적으로 미약해보인다. 그 이외에 이 책은 번역이나 기타 편집 부분에서 역자인 유경찬 선생(그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도 번역했는데)의 깔끔한 번역 솜씨에 힘입어 흡족한 수준이지만, 무려 53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 그것도 21세기 초엽인 제1차 세계대전부터 20세기 말엽에 이르는 기나긴 시대를 다루는 책에서 책 말미에 인명, 지명 찾아보기가 없다는 점과 편집자주, 옮긴이 주와 같은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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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이 책은 내가 알라딘 서재에 올리는 200번째 리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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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수들은 침묵하고 있을까

고교등급제 파문에도 양심선언 하나 없어…소수 통제 가능한 교수들만 평가 참여

▣ 강성만 기자/ 한겨레 사회부 sungman@hani.co.kr

지난 3년여 동안 소문과 의혹으로만 떠돌던 고교등급제의 실체가 확인되자 서울 강북이나 지방의 학생·학부모·교사들은 경악했다. 믿고 싶지 않았던 일부 사립대와 강남 그리고 특목고의 ‘검은 유착’이 한순간 그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교육부식 표현에 의하면 “고교등급제를 일부 적용한 것으로 보이는” 이화여대와 연세대, 고려대는 물론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출신 고교와 지역이 아니라 학생 개인의 학업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대학의 올 1학기 수시 합격생 수의 분포를 보면 항변은 설득력이 없다.


△ 전교조 등 교육단체와 학부모단체들은 이번 파문을 계기로 대학의 학생선발권에 대해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사진 / 김진수 기자)

학교별 가이드라인 마련해 활용했다

교육부는 서초와 강남, 그리고 송파 등 서울의 3개 구 출신 합격생 비율과 강북·지방과 함께 비교한 자료를 내놓았다. 부동산업계쪽에서는 강동까지를 이른바 강남권역으로 치지만 대학쪽에서는 강동 지역 학교를 강남에서 제외한다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3개 구의 일반계 고교 학생 수는 전국 대비 5% 정도에 불과하다.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이에 따른 교육열을 감안할 때 합격생 비율이 전국 대비 2~3배 정도 높지 않겠느냐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었다. 최대로 늘려 잡아도 20% 이상은 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실제 국감 자료를 보면 지난해 고려대의 수시 1학기 합격생의 9.5%가 서초와 강남 지역 학생이었다.

하지만 교육부 실태조사 결과 드러난 연세대와 이화여대의 올 수시 1학기 강남 학생 비율은 이런 상식을 여지없이 짓이겨버렸다. 이화여대와 연세대 입학생 가운데 36.1%와 35.3%가 전국 대비 5%에 불과한 강남 학생들이었다. 고교등급제를 하지 않았다는 이들 대학의 반박의 허구성은 실태조사 대상에 오른 서강대와 성균관대, 한양대 등 다른 대학의 강남 학생 비율을 살펴보면 확연해진다. 세 대학은 각각 11.4%, 8.3%, 12.6%의 비율을 보였다. 이대·연대의 강남 학생 비율과 3~4배의 차이를 보인다.

이들 대학의 부인에도 교육부는 왜 이대 등이 고교등급제를 적용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평준화 체제에서 고교간 학력차가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각 고교들은 2000년 이후 각 고교의 수능성적과 당해 대학 입학생 수 등 학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을 축적해놓고 있다. 실제 이번 조사로 등급제 적용 의혹을 털어버린 한양대의 최재훈 입학관리실장도 “고교별 특성을 분석해놓은 자료를 모으고 있으며 입학제도개선 연구팀에서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즉,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수시 전형의 서류평가 등에 참여하는 교수들에게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화여대와 연세대는 고교별 학력차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이런 자료들을 교수 평가위원들에게 직접 전달해 평가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는 게 교육부 설명이다. 교육부는 이번 조사에서 고교 유형과 지역별로 서류 평가 때 각각 어느 정도의 점수 차이를 둘 것인지 명시하는 구체적인 지침 등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이들 대학이 학교별 점수 차이를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활용했으리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등급제 적용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그것까지 까발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화여대의 경우 자기소개서 평가에서 특목고와 강남, 강북 등 학교 유형과 지역별로 일정한 점수대가 형성되어 있고 같은 학교 출신 지원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점수차가 나지 않았다. 자기소개서는 학생별로 천차만별일 텐데 특정 특목고의 경우 지원자 모두 80점 이상을, 특정 비강남고 지원자는 모두 70점 이하였다는 것이다. 학교를 차별하라는 문서상의 지침이나 구두 지시가 없었다고 부인하더라도 실제 드러난 결과가 확증이 되는 셈이다.

평가위원 교수의 수도 밝혀내지 못해


△ 고교등급제 파문은 교육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사진 / 김진수 기자)

지난 8월30일 <한겨레>의 ‘고려대 고교등급제 적용 시사 파문’ 기사가 나가면서 물 위에 드러난 ‘고교등급제’를 취재하면서 가장 큰 의문은 “왜 교수들은 침묵하고 있을까”였다. 대입 전문가들이나 교사들은 연세대와 이화여대 등의 고교등급제 적용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분야에 오래 종사했고 전문가일수록 그 확신의 강도는 셌다. 그런데도 연세대 교수사회 안에서는 어떤 양심선언이나 제보도 없었다. 서류 평가 등에 상당수 교수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는 교수들이 몇명은 있지 않겠느냐는 상식적 판단이 배반당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교육부쪽은 나름의 판단을 제시했다. 학교별 차이를 일사분란하게 적용한 이화여대의 경우 자기소개서 평가에 전·현직 입학처장이나 대학의 통제가 가능한 교수 몇명 등 핵심 소수만이 참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연세대의 경우도 이화여대에 비해 다소 많지만 다른 대학들에 비해서는 현저히 적은 교수만이 참여했을 것이라는 게 교육부 판단이다. 이화여대에 비해 많을 것이라는 예측은, 같은 고교 지원자 가운데도 서류 평가 점수차가 나는 등 일부 평가위원들은 자료를 일률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재량을 발휘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교육부쪽은 아울러 두 대학이 각기 축적해놓은 자료를 공유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교육부는 이번 조사에서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교수의 수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물론 구체적인 교수 명단도 확보하지 못했다. 대학쪽에서 대외비라는 이유로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실태조사 발표 뒤 뒷말이 가장 많이 나온 학교는 고려대다. 이 대학의 수시 1학기 강남 학생의 비율 18.2%가 말해주듯, 이화여대와 연세대에 비해 ‘학교 차별’의 정도는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연대·이대와 비슷한 수준의 제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대학은 서류와 내신 석차 백분위 평가 때 최대 2점까지 학교에 따라 다르게 가산점을 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산점의 규모가 크지 않아 실제 강남이나 특목고 학생들을 끌어모으는 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학교에 따라 차등 배점한 증거는 세 대학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다. 이를 두고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고대스럽다”는 표현을 썼다. 반면 자료를 주고 교수들 재량에 맡긴 연세대를 두고는 “지능적”, 빈틈없이 학교를 차별한 이화여대에 대해선 “단순하다”는 수식어를 달았다.

교육부는 애초 세 대학의 재정적 제재 수위를 거론하면서 ‘수도권 대학 특성화’ 지원금 20% 삭감안을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2년 전 한양대가 본고사형 지필고사를 치른 사실이 적발됐을 때 지원금의 15%를 삭감했다. 20%면 올해 이화여대의 특성화지원금 36억원 가운데 7억2천만원이 삭감되는 것이다. 사회를 뒤흔들어놓은 중대 사안이었음을 감안하면 왠지 액수가 초라해 보인다. 교육부는 실태조사 발표 뒤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 뒤 추후 결정하며 전액 삭감도 가능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 이번 파문은 입시생과 학부모들의 줄소송으로 번질 전망이다. (사진 / 김진수 기자)

가장 큰 책임은 거짓말 방조한 교육부

이번에 적발된 세 대학은 교육부 발표 이후 “고교간 학력차가 엄존하는데 그 차이를 무시할 수 있겠느냐”는 판에 박은 항변을 제기하고 있다. 일부 대학에선 본고사 불가피론까지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 주장의 정당성은 제쳐놓더라도 이번 조사 결과는 이른바 명문 사학이 수험생을 상대로 ‘앞과 뒤가 다른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탄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연세대는 수시 전형 요소로 내신(60%)과 서류(20%) 그리고 면접(20%) 등 세 가지를 내세웠다. 내신은 지역별로 큰 차이가 나지 않음을 감안할 때 외형적인 요강만으로는 강북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연세대는 은밀히 고교별 자료를 활용해 학생들의 서류 평가를 왜곡함으로서 강북이나 지방 학생들을 차별한 것이다. 구체적인 전형 기준 등을 비공개로 했기 때문에 대학쪽에선 “거짓말한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강북·지방 수험생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시간과 돈을 탕진하는” 피해를 입었다. 아울러 고려대는 명시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한겨레>가 이 대학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고교간 학력차 자료를 수시 전형에 활용해왔다고 보도하자 며칠 뒤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자료만 축적했을 뿐이라고 반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교육부에 있다. 고교등급제와 본고사, 기여입학제를 금한다고 말만 했을 뿐 이를 강제하기 위한 어떤 실효적인 노력도 해오지 않았다. 언론과 전교조 등의 문제제기로 쟁점화하자 뒤늦게 칼을 빼든 교육부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대의 등급제 시행 의혹이 제기되자 교육부는 고려대쪽에 사실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함에도 손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부인하는 해명 자료를 내놓도록 재촉했다.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유도한 셈이다. 학수고대하던 해명 자료가 나오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던 교육부 당국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학의 사회적 신뢰를 땅으로 내팽개쳐버린 고교등급제 파문은 그동안 ‘사회적 합의’로 간주해온 대학의 학생선발권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교육계 안팎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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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아마존에서 책주문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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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eapesttextbooks.com/index.cgi?store=cheapesttextbooks

출처 : 숱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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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2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유용한 정보라서 냉큼 퍼오긴 했는데,
이걸 보니 또 책사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는 ... -_-;;;

2004-10-26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6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다시 좋은 정보를 주신 님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도 볼 수 있게 하시지 그러셨어요.

싸이런스 2004-10-2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존보다 엄청나게 싼 값에 인문, 사회, 자연 과학등 각종 책을 미국에서 살 수 있는 싸이트
http://www.labyrinthbooks.com/
책을 받는데 시간이 걸려도 괜찮으신 분은 선박으로 배송 주문하면 정말 싸게 살 수 있답니다.
함 둘러 보세요.

balmas 2004-10-27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기저기서 좋은 정보들이 많이 들어오는군요.
조금 있으면 공짜로 책 얻는 곳도 알아낼 수 있을 듯.
ㅋㅋ

릴케 현상 2004-10-27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몇 군데 순방하면서 안 쓰는 외서들을 슬쩍해 오면 공짜 책이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