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세계를 향한 사회운동의 전진”
2006 사회운동학교에 초대합니다


노무현 정권은 미국의 전략성 유연성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미 FTA를 체결함으로써 미국과의 포괄적 동맹을 강화하는 것만이 한국사회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짓 선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아울러 개혁 이데올로기와 인민주의적 선동으로 무장한 노무현 정권은 평택 미군기지 투쟁, 한미 FTA 반대 시위, 포스코 점거 농성 등 민중의 투쟁이 표출되는 사건마다 더욱 노골적으로 공권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은 현실에 대한 적합한 인식과 비판적 행동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지난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몰락이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드러난 것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운동의 실체가 극히 미약하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환언하면, 사회운동의 변혁 지향성이나 그것을 지지할만한 이념이 지극히 취약하며 운동의 지역적․대중적 토대가 점점 침식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이념적 지향과 운동의 토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사회운동의 객관적 조건으로 인식하고 사회운동의 이념, 변혁경로, 조직화 방식을 새롭게 혁신하자는 지향을 공유하는 경향으로서 대안세계화 운동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선거정치에 매몰된 좌파 정당과 코포러티즘을 수용하면서 계급대중을 분할하고 있는 노동조합 그리고 행정적 NGO로 포섭된 시민운동을 비판하면서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 세계화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IMF-DJ 체제 이후 신자유주의 비판에 적합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정형을 창출하기 위해 출범한 사회진보연대는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부로서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 세계화에 맞서 세계사회운동의 자율성과 연대성을 신장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회운동학교는 바로 이러한 사회진보연대의 운동노선을 심화, 발전시키는 한편 사회운동 활동가들과 교류․소통하는 장으로 위치지어져 왔습니다. 이에 올해에도 사회운동학교를 통해 대안세계화를 향한 사회운동의 구체적 과제를 모색하고자 하오니,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1. 토론 1 “복수노조, 산별 시대와 노동자 지역 사회 운동”

2007년 복수노조가 인정되고 민주노총의 산별노조로의 전환이 본격화되는 등 노동자운동에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인가? 현재로서 전망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복수노조와 산별시대라는 객관적 변화 속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노동자운동을 발본적으로 혁신하여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고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하고자 하는 ‘노동자 사회운동’의 문제의식을 더욱 구체화하여 실천적 과제를 수립, 실천해야 한다. 이번 사회운동학교에서는 노동자 사회운동의 ‘지역’적 차원의 전략과 과제를 모색해본다.
- 패널: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노동조합․사회단체․지역 활동가
- 질의/응답 및 분반 토론

2. 토론 2 “여성운동사 평가와 여성운동의 과제”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이 활성화되었지만 1980년대 이후 여성노동자가 주체가 된 투쟁이 조직되지 못했다. IMF 위기 이후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등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항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집단적인 여성노동자의 흐름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가 성별차이를 활용하여 여성을 착취하는 것, 여성의 가사와 육아 등의 역할과 부담이 그러한 착취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결합이란 무엇인가, 여성노동자 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우리의 관점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위해 단초로서 여성노동자 운동의 역사에 대한 평가, 노동운동 평가, 현재적 쟁점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 발제: 여성위원회
- 질의/응답 및 분반 토론

3. 강연 “이행기 논쟁과 대안세계화 운동”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및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조건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출현은 기존의 이념과 운동을 쇄신하는 유력한 계기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결국 ‘이행’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를 재개하기 위한 시도와 함께 그 지배적 통념의 개조라는 과제를 동시에 던진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행기 논쟁과 대안세계화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전개된 이행 논쟁, 특히 한국사회성격논쟁을 회고․반성하면서, 그에 대한 현재적 평가와 재해석을 시도해 보자.
- 강연: 백승욱 (운영위원, 중앙대 사회학과)
- 질의/응답

4. 종합토론 “대안세계를 향한 사회운동의 전진”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향후 정세를 전망하고 사회운동의 현황을 진단하여 사회운동의 과제를 도출한다.
- 발제, 질의/응답, 전체토론

5. 프로그램
□ 일시: 8월 26일(토)-27일(일)
□ 장소: 마리스타수사회교육관(마포구 합정동)
□ 일정
집결 15:00
토론 1 복수노조, 산별시대와 노동자 지역 사회 운동
- 발제 및 질의/응답(15:00-17:00)
- 분반토론 (17:00-18:30)
- 저녁식사 (18:30-19:30)
- 분반토론 종합 (19:30-20:00)
강연 “이행기 논쟁과 대안세계화 운동” (20:00-23:00)
아침식사 (08:00-09:00)
토론 2 여성운동사
- 발제 및 질의/응답 (09:00-10:00)
- 분반 토론 및 분반토론 종합(10:00-12:00)
점심식사 (12:00-13:00)
종합토론 (13:00-16:00)
폐회 (16:30)
저녁식사 및 뒤풀이 (17:00-)

□ 참가비: 30,000원 (수도권 이외 15,000원) *1박 3식 기준, 뒤풀이비 별도
□ 참가 신청
조직교육국 (02-778-4001), pssp@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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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8-0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있는 분들은 많이 참여해주시길 ...
 

 

'아랍세계의 분노'

 

"군사력에 의한 중동질서 재편은 실현불가능한 백일몽"

  2006-07-31 오후 7:26:06

  다음은 미 콜롬비아대학 아랍학과의 '에드워드 사이드 석좌교수'인 라시드 할리디(Rashid I. Khalidi)의 글 '아랍세계의 분노(Anger in the Arab World)' 전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중동지역 전문가로 '군사력에 의한 중동질서 재편'이라는 부시행정부의 야망이 가망 없는 꿈임을 설파해 왔던 할리디 교수는 이 글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단순한 테러단체로 보고 이의 분쇄를 시도하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백일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레바논사태에서 드러났듯, 중동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이들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으며, 당초 미국과 이스라엘 편에 섰던 사우디,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의 친미정권들은 이제 민심의 향배에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할리디는 교수는 지난 20년간 군사력 사용을 통해 중동정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편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시도는 번번이 그 반대의 결과만을 낳았다며 이제라도 평화적 방법에 의한 사태해결을 추구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 글의 원문은 미국의 진보적 시사주간지 <네이션> 최신호(8월 14일자)에 실려 있다.
http://www.thenation.com/doc/20060814/khalidi <편집자>
  
  아랍세계의 분노(Anger in the Arab World)
  
  이스라엘과 레바논, 그리고 팔레스타인 간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 정부, 두 정부를 위해 일하는 홍보기구들, 그리고 대다수 미국언론들은 한결같이 테러리즘을 분쇄하기 위한 한 국가의 노력이 중대한 시련에 봉착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테러분자들의 폭력'에 대응하고 있으며, 문제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빨리 상황을 장악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시나리오는 중동지역의 실제 상황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포위 및 레바논에 대한 무차별 폭격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헤즈볼라 '파괴'나 하마스 '근절'과 같은 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이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최면효과를 일으켜 중동지역의 실상을 망각하게 한다. 즉 이들은 헤즈볼라와 하마스가 (테러단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1967년 이후 지금까지) 및 남부 레바논 점령(1978~2000년)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돼 발전한, 아랍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은 대중운동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민간인들에게도 공격을 서슴지 않는 이 두 단체의 냉혹함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이 점에서는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세력들도 사실 할 말이 없다), 두 단체는 그동안의 선거에서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레바논 정부가 이스라엘의 소망대로 남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를 대체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헤즈볼라 군사력의 남부 레바논 장악에 대해서는 레바논 내부에서도 심각한 의견차이가 있었지만 이번 이스라엘의 전격적인 레바논 침공으로 그 이견은 급속히 해소되고 있다. 푸아드 시니오라 레바논 총리를 비롯해 나비 베리 국회의장, 사드 하리리(지난 해 2월 암살 당한 라피크 하리 전 총리의 아들), 미셸 아운 장군, 에밀 라후드 대통령 등 레바논 내 모든 정파의 주요 지도자들과 국민들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기간시설 및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물론 레바논에 대한 무차별 파괴와 살육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스라엘과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레바논 내의 목소리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방송에서 대다수 레바논 사람들의 고통에 찬 절규를 들을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세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그 실상을 뻔히 알고 있다.
  
  이번 분쟁의 결과로 헤즈볼라의 주요 후원세력인 이란과 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두 나라가 (이번 전쟁의 확산에 의해) 지역 차원의 전쟁에 말려든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9.11사태로 조지 부시가 카우보이식 외교를 전개한 이래 수 년간 미국은 이 두 나라를 위협해 왔다. 그러나 하마스 및 헤즈볼라에 대한 미국의 막무가내식 강압정책 덕택으로 이란과 시리아의 위상은 오히려 강화됐다. 이스라엘 병사 2명 납치라는 헤즈볼라의 덫에 빠진 이스라엘의 과잉대응은 이들의 위상을 다시 한번 한껏 높여주었다. 이란 및 시리아와의 전쟁, 또는 미국에 고분고분 하지 않은 두 나라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노력은 결국 이스라엘과 미국의 위상을 약화시키고 말 것이다.
  
  이번 레바논 위기와 관련해 (사우디,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의 친미정권들은 처음에는 멍청하게도 미국과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가 민심의 동향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뒤에는 당초 입장을 번복하느라 수선을 떨고 있다. 이들 국가의 민심은 정권의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독립적 방송인 <알자지라>의 시청률이 수직 상승한 반면, 사우디 정부가 운영하는 <알아라비야>의 시청률은 급전직하했다). 그나마 이들 국가가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점이 부시행정부와 이스라엘에게는 천만 다행이라 하겠다. 이번 사태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든 이들 친미정권의 약화를 가져올 것은 분명하다. 단기적으로 이들 친미정권의 미국에 대한 의존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러나 카이로든, 암만이든, 리야드든, 이들 정권의 위상은 사태 이전보다 약화될 것이며 반대파의 세력은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지난 20여 년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및 레바논에 대한 폭력행사를 강화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의 지역적 위상은 약화돼 왔다. 1982년의 레바논 침공을 시작으로 1987~90년 팔레스타인의 제1차 인티파다, 그리고 2000년 헤즈볼라에 의한 이스라엘의 남부 레바논 철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양상은 반복됐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이라크에서의 무자비한 폭력 행사로 중동지역에서의 미국의 위상은 형편없이 추락했다(적어도 현실을 직시하는 대다수 미국인들의 눈에는 그러하다. 자신들만의 망상 속에서 중동정책을 펴고 있는 미치광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2차대전 이후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위세와 영향력이 지금처럼 추락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이 시리아, 보다 중요하게는 이란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가자 및 레바논전쟁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면 그나마 중동지역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여론이 주요 변수다. 유럽의 여론이 현재 레바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얼마나 빨리 비판적이 되느냐에 따라 사태의 확산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을 피해 레바논을 빠져나온 수 만 명의 프랑스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등(이들 대부분이 이중국적 소유자다)이 현재 프랑스나 영국 TV 등에 나와 자신들이 목격한 참상을 전하고 있다.
  
  또한 이란과 시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어느 정도까지 감당하고 견뎌낼 수 있을 것인지, 팔레스타인인들이 현재 자신들의 내부적 곤경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현명한 대응을 할 것인지 등도 사태의 추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아가 백악관 주인이 제 성질을 얼마나 죽일 수 있을지도 중요하다. 만일 부시가 자신의 폭력적 충동은 물론, 미국을 믿고 날뛰고 있는 이스라엘 군 지휘자들을 자제시킬 수만 있다면 현재의 위기가 혼란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미국과 중동에 닥칠 것은 파국뿐이다.

   
 
  라시드 할리디/미 콜롬비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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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1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8-0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그때 본지가 엊그제 같은데 ...
또 1년 동안 격전을 치러야겠군요. 건강하고 잘 지내세요. :-)
 

 

http://info.ahnlab.com/securityinfo/info_view.jsp?seq=7937&category=15&email_nm=securityletter135&target_page_nm=aa003

PC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조회수   1148  
많은 사람들이 집이나 회사에 컴퓨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PC방 혹은 게임방을 찾아 게임이나 각종 컴퓨터 관련 일을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PC방에서 중요하며 보안이 필요한 일을 처리하지 않지만 이메일 서비스에 로그인을 하거나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 받거나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글을 올리는 일은 흔하게 한다. PC방 컴퓨터에 설치된 악성 프로그램에 의해 이런 과정이 기록되어 해킹에 이용되는 경우가 있다. 혹은 브라우저나 프로그램의 기본 설정에 의해 원치 않는 개인정보를 남기게 되는 경우도 있다.

불가피하게 PC방을 이용하게 될 때 개인정보 유출이나 해킹을 막기 위해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정리해 보았다. 이것은 PC방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컴퓨터를 이용할 때 모두 적용된다.

1. 은행권 사이트로 접속하기

백신 프로그램이나 안티 스파이웨어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보다 일단 은행권 사이트로 접속해 보자. 몇몇 은행권 사이트들은 단지 접속하기만 함으로써 해당 컴퓨터에 악성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는지 자동으로 확인해 준다. 해당 은행 사이트에 접속하면 하위 메뉴 (예를 들어 "인터넷 뱅킹" 메뉴)를 누르면 보안/백신 프로그램이 설치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회원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사용이 가능하다. 은행권 웹 사이트들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다른 몇 가지 백신 프로그램이나 안티 스파이웨어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한다. 일단 PC방에서 컴퓨터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은행권 사이트에 접속하여 이런 프로그램을 돌려 보는 것이 좋다.

일부 은행권 사이트는 개인 파이어월이나 키보드 후킹 방지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한다.

2. 브라우저 옵션 조정하기

PC방에서 웹 사이트를 방문하거나 로그인을 하게 될 경우 브라우저의 옵션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아이디와 패스워드 혹은 방문 사이트의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브라우저를 사용하기 전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옵션을 조정해 주는 것이 좋다. 방문기록을 삭제하지 않은 경우 어드민 주소와 같은 중요한 주소를 컴퓨터에 남기게 될 수 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묻지 않고 자동으로 저장하게 되는 경우 큰 위험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사용 기록을 한번에 삭제해주는 유틸리티를 이용해도 좋다. 무료로 제공되는 유틸리티 중 PCFree나 IEToy같은 프로그램을 추천한다.


[그림 1] 방문기록 삭제


[그림 2] 아이디, 암호 자동 저장 제거

3. 메신저 자동 로그인, 대화기록 저장 옵션

많은 사람들이 PC방에서 메신저를 사용하며 자신도 모르게 자동 로그인 옵션을 체크하는 경우가 있다. 메신저의 자동 로그인 옵션은 보안상 치명적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네이트온과 같은 경우 로그인을 하게 되면 이메일과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 저장해 둔 전화 번호 목록(주소록)도 접근할 수 있게 된다. MSN 메신저 또한 닷넷패스포트를 활성화한 경우 핫메일 계정으로 접근할 수 있다.

네이버 메신저의 경우엔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첫 로그인 화면에 "자동 로그인"이 체크되어 있다. 때문에 별 생각없이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여 처음 메신저를 사용한 경우, 다음 사용자는 메신저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전 사용자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할 수 있다. 네이버 메신저는 카페/블로그의 아이디와 동시 사용하기 때문에 메신저에 로그인을 하게되면 카페, 블로그, 이메일을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다. 때문에 PC방에서 메신저의 자동 로그인에 체크를 해 두는 것은 정보 노출을 위한 자살행위와 같다.


[그림 3] 네이버 메신저의 자동 로그인

한편, 대부분의 메신저는 대화 내용을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는 옵션을 제공한다. 보안에 치밀한 메신저의 경우 로그인하는 아이디에 따라서 대화 내용을 저장 여부를 계속 물어보지만 어떤 메신저는 한 번 대화 내용을 저장하도록 하면 그 이후 사용자도 자동으로 대화 내용이 저장된다. 자신이 대화한 내용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면 메신저의 대화 내용 저장 옵션을 활성화시켜서는 안된다.


[그림 4] 메신저 대화 자동 저장

4. 사용했던 프로그램 삭제하기

PC방에서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했던 프로그램은 그 자리를 떠나기 전에 삭제하는 것이 좋다. 몇몇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을 삭제하더라도 사용자의 로그인 정보나 패스워드를 남겨 두기도 한다. FTP 프로그램의 경우 실행 파일을 삭제하더라도 ini 파일 등에 사용 기록을 남겨 두기도 한다. 특히 회계 관련 프로그램이나 회사 내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 혹은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인트라넷웨어 등)에 보안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프로그램은 절대 PC방에서 사용해서는 안된다.

5. 새로운 프로세스 확인하기

이 방법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약간의 컴퓨터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겐 용이한 방법이다. 윈도2000 이상, XP 이상의 운영체제가 설치된 컴퓨터는 Ctrl+Alt+Del 키를 동시에 눌러서 "작업 관리자" 를 열 수 있다. 이것을 통해 현재 실행 중인 프로세스(프로그램)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윈도 시스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프로세스 외에 실행 중인 것을 발견하면 검색엔진에 프로세스 이름을 입력하여 상세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그림 5] 윈도 작업 관리자

윈도에 반드시 필요한 시스템 프로세스는 blog.naver.com/kickthebaby/20007714481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블루문 (ZDNet Korea 대화형 컨텐츠 아스피린 하우스 운영)

* 이 기사는 제휴 컨텐츠 제공업체인 ZDNet Korea의 대화형 컨텐츠 사이트 아스피린 하우스에 게재된 내용을 각색, 정리한 것이다. 문의사항이 있으면 블루문의 이메일 bluemoon@tracezone.com로 보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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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Unlimited

 

After the flood

Lebanon is once again torn apart by vicious strife. But when the bloodletting is over, the warring parties will have no alternative but peaceful co-existence

Brian Keenan
Saturday July 22, 2006
The Guardian


Dawn is cruel in Lebanon.
Rocket holes have gutted this place
Like a blunt blade
In the flesh of a fish.
In the suburbs
An unkempt forest of rushes sprout
Amid minefields
Fed on sewage
Watered by years
Of un-staunched pipes
The ghosts of night have no place
In this hallucinatory city
Here they are masters of the light
Made substantial in the sun.

Today,
L'Orient-Le Jour has a headline,
"Découverte Macabre"
A record of bodies discovered the previous day
Spills out,
Like the innards of a disembowelled animal.
One dawn, perhaps,
Such secrets may not be
The burdensome proof
Of this Lebanese earth.



I wrote that some 17 years ago after I had returned from my incarceration in Lebanon. It's a small fragment of a long narrative poem I was working on. In a very short time I had come to love the place and the people I lived and worked with before I disappeared for five years into the bowels of Beirut's hallucinatory nightmare. Until that moment I had kept a small notebook in which I recorded things that struck me about the place. Somewhere in the pages I had written a quote from William Blake: "The tigers of wrath are wiser than the horses of instruction." The ruined city and its people alternately surviving one day then suffocating under another salvo of rocket fire, followed by the defiant ranting of political and religious zealots, seemed to draw it out of me. It seemed an appropriate apocalyptic phrase for an apocalyptic city.

That was nearly 20 years ago, and I recently planned to go back. As you are reading this, I should have been packing my bags for a family holiday in Lebanon. Obviously, I am not now. No one in their right mind takes a holiday in Hades.

Only last year, a friend of mine called to say she was intending to holiday in Lebanon and asked my advice. Without hesitation, I encouraged her to go. "Lebanon is beautiful and the Lebanese are a delight. They are courteous in the extreme, and their hospitality is overwhelming. They love their country and are more than delighted to share this exuberance with strangers.

"You can go skiing in the mountains in the morning and sun yourself on the beach in the afternoon; and the food is to die for. If you can go to the mountains, sit a while under the magnificent cedar and just let the place soak into you. The vistas are sublime. Take a copy of Kahlil Gibran's Thoughts and Meditations, read it slowly under the great tree's shade and you will see beyond the horizon."

I rabbitted on, remembering only the beautiful flower that Lebanon was and completely forgetting the poison hidden in its petals. But then I had every reason to forget the bleak history of this part of the world. A bloody inheritance of betrayal, assassination and religious animosity. I had also forgotten the covert and heinous foreign meddling by America, and Iran, and the invasion and occupation by Syria and Israel. All of whom, it seems to me, cared little about Lebanon and its people. I had believed that these proxy wars fought on the killing fields of Lebanon had been eradicated like the canker in the rose.

I chose to believe in men such as Rafik Hariri who married individual vision with personal wealth and set about rebuilding the biblical cities of Lebanon, disinterring Beirut from the rubble of its past. Even when he was assassinated a year ago, but huge public protests led to the withdrawal of the Syrian army, I was convinced that the resurrection of Lebanon was assured. Beirut would rise from the ashes, garlanded with olive branches and flowers. This would be the reborn Beirut of gourmet restaurants, glitzy boutiques full of handsome young men and incredibly beautiful young women, shops and street-side cafes filled with people watching the world go by. Churches and mosques rebuilt side by side, and plazas and pedestrian walkways that opened up the city. There would be no more green lines that divided the city. No more areas you dared not walk at night.

If I had a dream of the promised land, it was one shared by thousands of ordinary Lebanese who wanted to share it with any who, like me, were willingly beguiled by it. "Call into the Mayflower Hotel and give them my regards," were my parting words to my friend.

Last summer, she made the trip to Lebanon. Her postcard to me confirmed that I had been right to insist that she went. She had also called at the Mayflower Hotel with my message. The owner was almost overcome, and told her he remembered "Mr Brian" with great affection and respect. She underlined these words. Some weeks after her card arrived, I received another written by the hotel owner himself. It was polite and graceful, the way the Lebanese are. Mounir respectfully invited me and my family to come and stay at his hotel. It would, he assured me, give him great pleasure and much delight. I knew the pleasure and delight would be all mine - I immediately scanned my diary to fix a date for this summer.

How could I have been so naive? I am old and experienced enough to know that dreams are fanciful things that disappear with the dawn, and in Lebanon, as I recall, dawn is a cruel time.

Among the many things my dreaming could not erase was the curse of cyclical violence, war and destruction that waits in the shadows to engulf this place with evermore bloody and disastrous consequences. In the past week, I have viewed the television coverage with sickening despair. I have listened to the empty rhetoric of politicians coming at me like an old echo. I have heard and seen it all before. It makes me cynical and angry, and I despise these feelings in myself. Sometimes, I feel myself choke up with tears. Above all, I feel robbed and betrayed.

And if I feel this from the comfort of my home in Dublin, how do my friends in Hamra and Raouché or in those tiny hill villages feel?

In Lebanon, curses are not like dreams. They do not emanate from some psychic other world. The demons in Lebanon are not mythical, they are real and they wear the guise of men. What did the students I taught do to deserve their future subjected to this manmade curse? What did the shoemaker at the end of the street I lived in do? What did my friend Mounir do? What did the old man who sat and peeled garlic all day in my favourite restaurant do? What did the 11 children who were blown to bits while swimming in a canal near Tyre do?

Noticeably, we no longer hear those hideous phrases "collateral damage" or "casualties of war". Everyone knows them for what they are: euphemisms for arbitrary but calculated murder. A leaflet dropped from a passing aircraft informing people to leave their homes or face the consequences redeems no one.

A week ago, I saw a photo of a man holding up a dead child he had just pulled from the blasted ruins of its home. It looked like a rag doll that had been pulled from a rubbish tip. In another context, the image could have been of a man holding up his daughter to receive a blessing. He could even have been handing the child to the care of a friend. But the face of the man holding up the infant confirms the worst. His features bear the emotional numbness of someone who has lived through this horror too many times; somewhere in his soul, he is as dead as the child he holds. His gesture simply asks us to bear witness, and perhaps, with what ever emotional life is left in him, he is also asking us to take this pain from him.

If a cataclysmic Pandora's box has been opened in Lebanon and that dire generational curse of death and destruction is passing over the land, why did we not see it coming? Maybe we did see it coming, but because we are used to it and expect such things from the Middle East, we are immune to it. Assuredly, the seeds were sown long before the poison erupted in the flower in the past few weeks.

A few months ago, the Irish Times carried a photo of a group of Palestinian youths fleeing through a crowd with the dead body of one of their friends, who had been shot for throwing stones at Israeli soldiers. The faces of the two boys carrying their friend are imprinted with shock, confusion, desperation and the urgent need to get away. Two other boys at the edge of the crowd stretch out their arms to touch the boy's corpse. They are drawn to partake in his death. Their faces are like a mask, contorted in a pernicious grimace. It is as if some psychotic power is transferred, through the boy's martyrdom, and passes into them. It is a dreadful, revelatory moment. Tomorrow, they will throw more stones; in a few years, they will be firing guns. In a few more years, as the contagion of hate develops, they may put on the martyr's vest and walk into oblivion trailing the remains of more innocent dead behind them. The question I asked myself was where will this cauldron of hate and violence take these children?

I should have paid more attention to this question, but I was still seeing another Lebanon. One where I wanted to take my family and say: "See, this country is not the evil place that imprisoned me and these people don't want to hurt anyone." I wanted to stand in this land and not be afraid because of what had happened. I wanted my children to know that evil does not endure. I wanted them to love this country as I do, and as the Lebanese do. Above all, I wanted them to grow up secure in themselves and passionate about the big issues in life: justice, freedom, happiness, equality and the human right to independent judgment. I wanted them to know, and remember when they are old enough to reason, that their dad took them to Lebanon for this purpose. More importantly, I wanted them to have a great time and meet great people there.

In this star-crossed corner of the world, we should have known, we were certainly warned. Whether you believe in the curse of recurrent violence or not, you have to accept that such events are not things of chance. Even as I write, the Israeli military has declared a timescale for their incursion in Lebanon. Whatever they might say about "de-fanging" the snake of Hizbullah, they are intent on the physical and psychological destruction of their neighbours. Every day, I read reports or listen to the apologists of this crisis accuse each other; Meanwhile, innocents die on either side of their debate. No wonder the curse returns - such mindsets are stuck in a time warp, and nothing less than a purging of the intellect and imagination will ultimately dispel it. But how can that be done?

Drawing on his clinical experience, Dr Nathaniel Laor, a psychiatrist from Israel, illustrates how hate damages psychic structures. Two factors play a crucial role: first, hate gives, or can give, a form of pleasure; second, and more importantly, hate is addictive. And it is contagious; a potential epidemic. Perhaps that is the poison at the heart of the flower. Maybe the protagonists who are butchering the country need to go for a long session of counselling with Dr Laor.

About a dozen years ago, I was an invited speaker at an international conflict resolution conference held in Derry in Northern Ireland. Ehud Olmert was also a guest speaker. In his address, he said: "Political leaders can help change the psychological climate which affects the quality of relationships among people." And he concluded: "How are fears born? They are born because of differences in tradition and history; they are born because of differences in emotional, political and national circumstances. Because of such differences, people fear they cannot live together. If we are to overcome such fear, a credible and healthy political process must be carefully and painfully developed. A political process that does not aim to change the other or to overcome differences, but that allows each side to live peacefully in spite of their differences." I can only ask my fellow contributor, now prime minister of Israel: "What happened, Ehud? How does the havoc and slaughter of your neighbours tally with your inspiring sentiments?"

During my life, I have come to accept that there are very good reasons why Jews hate Muslims and vice versa. Often, they are eloquent in their arguments and can convincingly document reasons for their antipathy and suspicion. Yet wholesale genocide is no solution - and both sides know it. They have no alternative but to coexist.

Coexistence is the minimal, least demanding way for people to relate to one another without violence. It is not the same thing as love, or even as friendship. On the contrary, it is an expression of distance, an acknowledgment that boundaries will remain. It is informed by an attitude of live and let live; that is precisely the message that neither side in the war in Lebanon wants to hear or declare.

It is an ideal without illusions. Its object is not the seamless union of opposites but a practical relationship of mutual respect. It does not deny difference; it disarms it, robbing it of its power to wound or kill. In a pluralist society, ethnic and cultural differences are not abolished. They are legitimated, while society strives to guarantee that the law will be blind to them. It is not easy to achieve but when there is no alternative, it is worth trying.

For now, I've put off my visit to Lebanon. But I might return to that poem and rework it. But then, I think cynically, what's the point? Nothing changes in this corner of the earth.

 

http://www.guardian.co.uk/syria/story/0,,1826371,00.html#article_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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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는 학계에서 … 비등재지도 지원해야
교수논평

2006년 07월 23일   조만형 한남대 이메일 보내기

▲조만형 한남대 ©
학문이나 연구를 주업으로 하는 학자들에게 논문은 자신의 지식을 창출해서 유통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는 동료 학자들의 심사(동료평가, peer review)를 거쳐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이다. 물론 지식은 전문학술지 외에도 다양한 매체로 유통될 수 있지만 학술지는 논문이 게재되기 전에 동료들로부터 비판과 검증을 받아 출판된다는 점에서 일반 잡지와 차별화되고, 학술지의 권위는 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의 우수성에 따라 결정된다. 학자들은 학문연구활동의 결과를 권위 있는 학술지에 발표하여 자신들의 연구업적을 평가받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발전과 국가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네이처’, ‘사이언스’,  ‘셀’ 등과 같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학술지들은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장기간에 걸쳐서 까다롭게 심사한 후 논문을 게재하기 때문에 거기에 실린 논문들은 누구나 학술적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한 논문들은 자연히 다른 학자들이 많이 인용하게 되어 소위 말하는 인용지수가 매우 높다.


모든 학회들은 회원들의 학술교류의 장으로서 학회지를 발간하고 권위 있는 학회지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에서 주관하는 국내학술지 평가사업도 궁극적으로 학회들이 우수한 학술지를 만들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지원한다는 취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항간에 학술지 평가에 대해서 이런저런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좋은 학술지를 만들기 위해서 학회와 국가가 공동으로 노력하자는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1998년부터 시작된 학진의 학술지 평가사업은 최소한 국내학술지의 형식적 완성도를 상당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물론 형식적 완성도가 내용적 우수성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학술지의 체계가 매우
열악한 우리나라에서 형식적 측면에서라도 어느 정도 학술지의 모습을 갖추도록 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학술지를 등재(후보)지와 비등재지로 구분하고 대학과 연구지원기관에서 등재지에 게재된 논문만을 연구업적으로 인정하면서 학술지 평가의 파장이 커지고 비판의 수위도 높아졌다. 논란의 초점은 ‘학술지 평가를 국가가 해야 하는가’의 원론적인 문제와 ‘등재지만을 연구업적으로 인정해야 하는가’의 활용적인 문제로 귀착된다. 먼저 학술지는 어떤 식으로든 평가될 수밖에 없는데 다만 평가의 주체가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학자 커뮤니티가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논란이 핵심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술지는 학자들의 내적 원리와 학문적 양심에 따라 학자 커뮤니티가 자체적으로 평가하는 게 바람직하다.


‘사이언스’지의 권위는 영국이나 미국 정부가 인정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거기에 실린 논문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학진에서 수행하는 학술지 평가는 학술 커뮤니티가 양심과 자율의 원리에 따라 권위 있는 학술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주는 보조적인 역할로서 사업의 의의를 가져야 할 것이다.


국내 학술지가 ‘사이언스’지처럼 정말 엄정하고 심도 있는 심사과정을 거쳐서 논문을 생산한다면 당연히 국가가 학술지 평가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 현실에서 솔직히 많은 학술지들이 각종 인연과 동정 때문에 논문 아닌 논문을 양산하고 있지 않는가.

등재학술지의 활용에 대해서는 활용하는 주체의 처지에 따라서 결정하면 될 것이다. 먼저 대학의 경우에 등재지만을 교수들의 연구업적에 포함시키는 것은 학진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 대학들이 자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대학들이 행정적으로 편리하기 때문에 또는 그래도 등재지가 어느 정도 검증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등재지만을 연구업적으로 인정해주는 것 같다. 그렇지만 모든 대학들이 그렇지는 않다. 내가 아는 K대는 연구업적을 평가할 때 논문의 숫자에 관계없이 대표적인 논문 2편을 제출받아서 외국의 저명한 학자에게 심사를 의뢰해서 평가한다. 대학에서 등재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대학이 결정할 사항이지 학진이 지시할 사항은 아니다. 문제는 학진처럼 연구지원기관에서 연구과제의 지원자격 조건으로 등재지 논문을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데 있다.

학진에서는 연구를 수행하려면 학자들이 지원하는 연구주제에 대해서 최소한 몇 편의 논문이 있어야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논문의 요구조건에 관한 논란은 논외로 하고 논문게재를 꼭 등재지에 한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학문영역에 따라서 학술지  형식은 다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학술적 능력이 표출되는 논문은 다양한 형식으로 발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재지는 획일적인 형식기준을 통과한 학술지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학문의 소통을 막을 수 있고 정보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지원기관들은 등재지를 포함해서 비등재지의 논문도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다양한 학문분야의 연구를 연구에 반영할 수 있고 새로운 학문영역이 등장하는 것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지 평가는 결국 학술 커뮤니티의 건전성과 신뢰의 수준에 비례하는 것 같다. 의학 분야의 학술지는 이미 학문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학술지를 평가하고 있다. 등재지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등재지를 만들려고 각종 서류를 조작하는 학회와 유령 논문을 투고하는 학자들의 행태도 바뀌어야 한다. 학진의 학술지 평가는 학자들이 생산한 논문을 대상으로 학자들이 직접 평가하기 때문에 학자들의 평가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학술지 평가와 같은 사업에 예산과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도 학술 커뮤니티가 자체적으로 학술지의 수준을 평가한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 시대가 가능한 한 빨리 왔으면 좋겠다.      


©2006 Kyosu.net
Updated: 2006-07-23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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