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헌재의 권위는 누가 지켜주는가-다리미

1. 이번 헌법재판소의 인용(위헌)결정은 역사적으로 선례가 있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유방임주의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적극적인 정부개입정책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초초초 극보수 성향의 미국 대법원이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습니다.  정부개입은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헌법재판소가 없고, 대법원이 법률의 위헌심사권을 가집니다.) 이에 당하고 당한 행정부 쪽이 사법부에 대해서 초강경 대책을 준비하자, 화들짝 놀란 사법부가 그때부터 고개를 숙이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1937년인데, 그 이전의 꼴보수 사법적극주의 시절의 법원을 old court라고 부르고, 그 이후의 상대적 진보입장의 사법소극주의 법원을 new court라고 부릅니다.  (진보, 보수의 입장과 사법적극,소극주의는 크게 관련은 없습니다.  서로간에 상대적으로 결정될 문제입니다.)
 
이번 헌재의 인용결정도 대공황시기의 꼴보수 미국 대법원과 꼭 닮아 있습니다.  사법적극주의 중에서도 초초강경 사법적극주의로 기록에 남을 것입니다.  정부 추정 50조 관련예산 100조가 넘고, 시행기간만 20년이 넘을 것이라는 국가정책에 대해서, 국회 3분의 2이상의 동의를 얻어서 통과한.. 그 법률안에 대해서 헌재가 위헌판결을 내리다니...  그것도 관습헌법이라는 전혀 듣도보도 못한 헌법논리를 들고 나와서 말입니다.
 
사법적극주의가 옳으나, 사법소극주의가 옳으냐는 간단히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둘다 일장일단이 있고, 서로간에 적절히 보완해서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느쪽 입장을 지지하건 간에,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사법적극주의의 한계는 "권력분립"입니다.  사법부는 특히 입법작용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권력을 남용할 경우, 이는 사법부가 직접 법률을 제정하는 수준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성문법을 우선시하는 해석을 해야 합니다. 법조문만 들고파는 법조인들을 답답하게 여기지만, 함부로 법조문을 무시할 경우 이는 입법권을 침해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깐깐하고 보수적인 태도는 칭찬받을 점도 있습니다.
 
사법소극주의의 한계는 "국민의 기본권"입니다.  명백히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률에 대해서 침묵하고,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만 할때, 이는 사법소극주의의 한계일탈입니다.  이제 곧 역사적 산물이 될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하면서 대단히 적극적으로 이를 행사해온 법원은 이런 의미에서 또한 사법소극주의의 한계 일탈로 그 권력적 임무를 방기해 온 것입니다.
 
이번 헌재 판결은, 사법적극주의의 한계일탈 가운데에서도 가장 초극단적 방법으로 입법권을 침해하였습니다.  이번 헌재판결에서 위헌 이유로 제시한 것이 바로, "관습헌법의 존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법원이 법률제정권을 침해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헌법제정권까지 행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헌법재판소에 관습헌법권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습니까?  어느 누가 수도서울이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것이 관습헌법적 사항이라고 규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법률의 위헌판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져야 할 가치도 아까 제시한 두가지입니다.  바로 권력분립과 기본권 보장입니다.  헌법재판소는 권력분립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국회의 입법권을 존중하면서 법률의 위헌성을 판단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헌재나 법원이 법률의 위헌판단권이 아닌 법률제정권까지 가지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함 때문입니다.  기본권 보장은 다른 편의 가치기준입니다.  아무리 입법권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명백히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판단이 나올 경우, 이를 더이상 존중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그 두가지 가장 중요한 가치를 양쪽에서 한꺼번에 날려 버렸습니다.   입법권 정도가 아니라 헌법개정권력에 대한 무지막지한 침해를 통해서 스스로 관습헌법 제정권을 부여받고, 이로써 존재하지도 않는 국민투표권을 혼자 상정하여 실질적인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처사입니다.  아, 한번의 판결로 두가지 가치를 이렇게 철저히 박살내는 판결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주 오랫동안 역사에서 기록될 것입니다.
 
2. 헌법재판소의 정당성 확보.
 
헌법재판소의 정당성확보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첫째로 헌법재판소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구성은 9인의 재판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9인의 재판관 중 누구도 국민의 투표 등을 통한 직접적인 의사개입이 없습니다.  3인은 행정부(대통령), 3인은 국회, 3인은 대법원에서 지명을 하고, 형식적으로 9인 모두를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이처럼 그 임명방식이 투표를 통한 선거방식을 거치지 않은 경우, 민주적 정당성이 떨어진다고 표현을 합니다.  아무리 헌재의 권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음으로서 간접적으로만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대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선출방식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다른 국가기관(대통령, 국회)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법원이 그 권력적 기반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다른 권력기관의 자발적 동의와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특히 헌법재판소는 집행력이 없습니다. 법원의 경우.  판결문이 나오면, 이걸 가지고 사람을 감옥에 집어 넣을 수도 있고, 집달관을 시켜서 압류를 해버릴 수도 있고, 물건을 경매에 붙여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당장 어떤 법률을 위헌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부가 막무가내로 시행을 한다손 치더라도, 헌재는 이를 막을 실질적인 힘이 없습니다.  (헌재에 군대나 경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달관이 있는 것도 아니까요.) 
그러나, 이런 사태가 정말로 발생한다면 국가의 권력적 기반이 정당성을 몽땅 잃어버리는 사태가 될 것이므로 이는 최대한 자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행력이 없는 헌법재판소가 자기정당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히 보장하는 방법에 의해서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위헌판결이 난 법률안을 강행하는 행정부가 있다면 국민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민주주의적 공감대가 있을 때에만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오늘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바로 지난 10여년간 헌법재판소가 쌓아온 자기정당성을 자기손으로 박살내는 일입니다. 
 
도대체 누가 헌법재판소에 이러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까?  대통령 선거공약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는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 국민들이 이를 동의하여서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승인하였고,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하여서 또한 민의를 대변한 바로 이 사안에 대하여, 그 두가지 민주적 정당성을 한방에 깨어버릴 만한 힘이 헌재에 과연 있는 것입니까?   대통령 선거와 국회에서의 승인, 더 나아가 총선에서 다시한번 행정수도 이전을 내건 정당을 원내다수당으로 뽑아준, 이 국민적 의사를 이렇게 개무시할 수 있는 정당성이 헌재에 있는 것입니까?  이는 민주주의 위반입니다.  이제 헌재는 반민주주의적 집단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지난 10여년간 헌재가 스스로 쌓아온 그 민주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수었습니다.
 
이번 헌재결정문에 대해서, 도대체 어떻게 일반국민들이 이를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관습헌법이라는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이론을 끌고 들어와서 위헌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주장에 대해서 누가 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겠습니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는 재판부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헌재의 권위는 법전에다가, 헌재의 권위를 존중해 주세요~ 제발요~ 라고 적어 둔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헌재 스스로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항해 싸워 줄때, 국민들이 이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저부터도 헌재의 판결문에 대해서 싸늘한 냉소를 보낼 터입니다.  이렇게 식어버린 헌재에 대한 기대를 어떻게 회복하실 것입니까? 
 
사법부의 독립은 사법부 혼자 독립하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독립시켜 주는 것입니다.  정파적 이해에 복속되지 않고, 헌법과 법률과 자신의 직무적 양심에 기대어 소신있는 판결을 하고, 이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줄 때, 바로 그 때 주권자인 국민들이 사법부의 독립을 인정하고 그 권위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판결처럼 그 스스로 헌법제정권자임을 선언하면서 거드름을 떨며, 정파적 이해에 휘말려 헌법을 무시하면서 반민주주의적 판결문을 써 내릴때!!  도대체 누가 어떻게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이렇게 당신들에게 냉소보낸다 할때, 당신은 나의 태도에 대해 또다시 위헌이다~ 하고 호들갑을 떠시겠습니까?  우리는 주권자이며, 헌법제정권자이며, 이나라의 주인입니다.  우리의 기본권을 위해 당신들이 존재하는 것.  우리의 권력을 위해 모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존재하는 것.  이것을 망각하는 국가기관에게 던져줄 동정의 권위는 없습니다.
 
오늘의 냉소는 내일의 분노가 될 것입니다.  주권자가 왜 주권자인가는 역사적 경험이 말하는 것 그대로가 될 것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요.  저 낡은 건물안에 쳐박혀 옹알거리는 헌법재판소 판관 나으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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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숨어계신 님, 이렇게 좋은 자료를 그렇게 살짝 저에게만 보이도록 숨겨놓으시면
제가 미안하죠.^^ 제가 공개적으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데리다가 타계한 뒤 지난 열흘 동안 4개의 추모글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국내에 데리다 전문가가 드물다보니 저같은 문외한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군요. 오늘 마지막 글을 써보내면서 일단 한숨은 돌렸는데, 급하게 여러 편의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고 중첩되는 내용들도 좀 있고 해서, 후련한 게 아니라 꺼림칙합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주제로 여러편의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까 ... -_-;;;

그 글들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분량도 많은 것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가을산님이 데리다 번역본들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절이 좀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만간 보충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지난 10월 8일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철학자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는 프랑스가 배출한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인물이지만, 국내에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始祖)이자 매우 난해한 책들을 쓴 철학자라는 것,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매우 특이한 철학 사조를 창안했으며,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일 국내의 신문들이 쏟아내는 추모 기사들, 때로는 상생(相生)의 철학자로, 때로는 ‘반골 철학자’로, 또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그를 치켜세우는 기사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길래 지성과 사상에 인색한 국내의 신문들이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그를 추모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

 

데리다는 난해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라는 얼마간 그릇된 제목으로 번역되곤 하는) 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곧 음성이야말로 참다운 매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루소,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론: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서의 정의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전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ㆍ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의 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에서 이러한 유령들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하며,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그렇다면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간주하거나 생뚱맞게 상생의 철학자로 치켜세우는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처럼 엉뚱한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작들 중 제대로 번역된 책들이 매우 드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8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들 중 10 종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심지어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데리다 특유의 현란한 언어유희나 섬세한 논의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삶이란 저작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 데리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박탈당한 유령, 환영이었던 셈이다.

  빼어났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데리다는 실제로 유령, 망령이 되어 그의 저작들, 그의 기록들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서 허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쫒는 대신, 데리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그의 기록들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부름에 귀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작품들

 

 데리다는 80여권의 저서 및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수백편의 논문들 및 인터뷰 등을 남겼을 만큼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국내에 번역된 책도『입장들』(솔, 1991)『마르크스의 유령들』(한빛, 1996),『다른 곶』(동문선, 1995),『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시네 퐁주』(민음사, 1998),『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 등 10여종이 훨씬 넘고, 그에 관한 해설서도 여러 권 나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들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비전공자들이 마구잡이로 번역하곤 해서 대부분의 데리다 저서들이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번역도 괜찮고 읽을 만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상당히 난해한 데다가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데리다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입장들』은 초기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며, 『에코그라피』는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개관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리고 『다른 곶』『법의 힘』『테러 시대의 철학』은 유럽 공동체, 법과 정의, 테러와 민주주의, 주권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데리다의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이다. 

  데리다 해설서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는 데리다 사상 전반을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이며,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니체, 하이데거 철학과 데리다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데리다 철학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및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을 추천할 만하다. 좀더 쉬운 입문서를 원하는 독자들은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 2003)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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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는 읽었어요~하하하(우쭐, 해도 되는 건가?)
혹시『시네 퐁주』(민음사, 1998)는 번역에 문제가 많나요?(문제가 많으면 좋겠다-_-) 제가 퐁주를 좋아해서 예전에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가 장렬히 전사한 적이 있어서...

에레혼 2004-10-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리다를 추모할 권리는 하나도 없지만...ㅠㅠ
그래도 데리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오래 전부터 그의 저명한 이름만 알고 정작 그를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과 추모의 마음을 가졌었지요

이 글, 찬찬이 읽고 님이 추천한 입문서부터 하나씩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제 방에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 봐도 될까요?

balmas님, 첫인사를 이렇게 드리네요

2004-10-21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4-10-2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퍼가기 미안해서....

3910033

어느새 1만이 넘으셨네요.


biosculp 2004-10-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인데요. 철학을 전공한분인 강유원님의 사이트에서 이런글을 쓰셨더군요.

언젠가 데리다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학생이 있었다.
초록 발표회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데리다를 학적 연구의 주제로 삼을 수 있을까. 요즘
프랑스에서 나온 것들은 일견 에쎄이 수준 아닌가."

"프랑스가 수필의 전통이 깊지 않습니까"

"하긴 빠스칼부터..."

"에쎄이"를 연구해서 논문을 쓰는 이들을 보면
꽤 오래 전의 이 대화가 떠오르곤 한다.

이 분은 헤겔로 학위하셨던데 독일과 프랑스의 학풍이 다른것인지. 독일철학자들을 전공하신분들은 요즘 프랑스철학자들에게 사시눈을 뜨는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balmas 2004-10-2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biosculp님, 제가 그런 말에 대해 굳이 논평을 해야합니까?^^
'철학 동네'에 있다 보면 그 정도 이야기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데,
대개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하는 이야기들이니 거기에 정색 하고 나서서
뭐라고 대꾸한다는 게 그렇죠.
더욱이 제가 직접 듣거나 본 이야기도 아니고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다가
강유원 씨는 이름은 여러번 들어봤지만 글은 별로 읽어보지 못해서
가타부타 함부로 말하기가 무엇하군요.
말씀하는 걸 보니 강유원 씨는 헤겔로 박사논문을 쓰고
아마 프랑스 철학사까지 꿰뚫고 계신 분 같은데,
직접 가셔서 궁금한 점을 여쭤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balmas 2004-10-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주인에게만 말씀하신 분께는, 좋은 점을 지적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데리다에게 관한 제 (독자적인) 견해를 물으셨는데, 아직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 할 만한
견해를 밝힐 수 있을 만큼 데리다를 잘 알고 있는 처지도 아닌 데다가,
데리다는 일단 좀더 정확히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그나마 갖고 있는
약간의 견해도 아껴두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우선 읽을 만한 주요 저서들이 네댓 권은 되어야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생각입니다.
어쨌든 님 덕분에, 앞으로 데리다에 대한 제 견해를 세워봐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네요.^^
앞으로도 좋은 말씀 좀 많이 해주세요.

balmas 2004-10-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자명한 산책님과 라일락와인님, 가을산님께 답글다는 걸 잊어버렸군요.
자명한 산책님, 저도 [시네 퐁주] 번역본은 조금 읽어보다가 말았는데, 번역이 별로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더군요. 이 책 자체가 언어유희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워낙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책입니다. 좀 위안이 되셨나요?^^
라일락와인님은 처음 뵙는군요.
퍼가신다면 저야 고마울 따름이죠, 뭐.^^
앞으로 종종 뵙기를 ...
가을산님, 글쎄 어느덧 조회수가 10000회를 넘어버렸네요. 1만회에서 이벤트를 하나 할까
했는데, 요즘 경황이 없다 보니, 좀 미뤄야 될 것 같네요.
어쨌든 캡처도 해주시고 고맙습니다.^^

2004-10-22 0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나나 2004-10-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글이었지만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 balmas님께서 나중에 꼭 좋은 데리다 연구서를 하나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강유원 선생님이라는 분의 이야기는 그분의 뛰어난 학식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더 황당하네요. 그분과 대화를 직접 나누어 보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balmas님의 데리다 해설은 초기 저작 부터 후기의 윤리 정치적 저작까지 다 포괄적으로 그 핵심을 설명해주고 있어 앞으로의 balmas님의 작업에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번역 글 부탁드립니다.

2004-10-22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어계신 분이 또 한 분 오셨군요.^^
[글쓰기와 차이](동문선)은 [불량배들]보다는 낫지만 같은 동문선에서 얼마 전에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보다는 못한 수준입니다. 답답하겠지만 원서나 영역본 같은 책을 놓고 같이 읽는다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목소리와 현상]은, 한 달여 전에 [단상들]에서 한번 말한 적이 있지만, 프랑스에 유학중인 제 후배가 지금 번역하고 있습니다. 초판 번역은 다 끝나서 지금 교열을 보고 있는 중이니까 내년 중에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은 읽기 쉽게 써놓은 책이지만, 논변이 좀 단순하고 느슨한 편이죠. 그러니 이런 책을 굳이 번역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야 우리도 충분히 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데리다에 관한 해설서를 번역한다면, 그 책보다 훨씬 좋은 책들이 더 많으니까 그런 것들을 번역해야죠. 제 생각에는 Geoffrey Bennington과 Derrida가 공저한 [Jacques Derrida]야말로,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책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데리다 해설서는 당분간은 지금 나온 몇 권의 책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데리다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먼저 번역되(고 개정되어)야 할 듯합니다.

나나나님은 처음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가쉐 교수에게 배우고 계신다구요? 가쉐 교수에게는 모든 데리다 연구자들이 큰 빚을 지고 있죠. 언젠가 사진으로 봤더니, 백발의 수염이 덥수룩한 게 도인같은 풍모를 풍겨서 좀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가쉐 교수처럼 세련된 글을 쓰는 양반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이야 ...^^
격려의 말씀은, 앞으로 번역을 좀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알겠습니다. 아야!
ㅋㅋ

딸기 2004-10-2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 글 허락도 없이 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www.ttalgi21.com)에 퍼갔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데리다의 ㄷ의 한 획도 모르는 제가 '테러시대의 철학'을 서평이랍시고 써서 발마스님께 보인 걸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자판을 두드리는 저의 손을 덜덜거리게 만드는군요.

balmas 2004-10-24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허락도 안받고 옮기시면 안되는데 ...

딸기 2004-10-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안 되는 거였나요?
그럼... 원고료를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엔화 결제도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 카드...
...크리스마스 때 카드 보내드릴께요...

허락없이 퍼가놓고 농담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퍼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얘기해주세요. 지울께요.

balmas 2004-10-2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 퍼가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렇지만, 굳이 원고료를 주시겠다면 사양하진 않습니다. ㅋㅋ
 

 


 

 
 
교수논평-로스쿨 도입, 어떻게 할 것인가

2004년 10월 19일   기자 

▲김세균 / 서울대 정치학과 •전국 민교협 상임대표 ©
지난 10월 5일 사법개혁위원회(이하 사개위)는 그간 사법개혁 차원에서 논의해온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 방안을 최종 확정•발표했다. 그 방안의 골자는 2006년까지 로스쿨로 전환할 법학대학을 선정하고 2008년부터 로스쿨을 설립하며, 매년 1천2백명 선에서 입학생을 뽑아 3년 교육과정을 거쳐 이들을 법률전문가로 양성해 배출한다는 것이다.

사개위의 로스쿨 도입 방안은 법조계의 이해를 졸속으로 봉합하고, 로스쿨 설립이 가능한 대학의 이해만을 반영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오늘날 한국의 고등교육체제와 학문체제가 지닌 문제점들을 새롭게 확대재생산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무엇보다 조건을 갖춘 10개 대학에게만 로스쿨 설치를 인정하는 것은 로스쿨을 유치한 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간의 격차를 심화하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주로 수도권의 명문대학들이 로스쿨 설치 자격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경우 지방인재들의 수도권 집중이 심화되고 지방대학의 황폐화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사개위 안대로 로스쿨을 도입할 경우 로스쿨 등록금이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가난한 집안 자제들의 로스쿨 입학을 봉쇄하고 법조인으로서의 활동을 돈벌이를 위한 활동으로 전락시키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게다가 입학생 정원을 1천2백명으로 하는 것은 오늘날 법조인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을 최대한 유지시키려는 방안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로스쿨 도입의 긍정적인 측면은 이른바 ‘고시낭인’을 없애고 기초학문과 응용학문 간에 상생구조를 창출함으로써 대학이 ‘고시학원’으로 변질하는 것을 막으며, 인문사회과학적 소양을 닦은 법조인을 양성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로스쿨은 거기서 더 나아가 공공성의 확보, 대학서열화의 타파, 지역간 균형발전에의 기여와 같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대학개혁의 다른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도입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로스쿨을 기존의 대학이 아니라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하고, 교육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수익부담원칙을 적용할지라도 로스쿨 학생이 국립대 대학원 학생이 부담하는 수준 이상을 부담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로스쿨 도입이 대학 서열화 해소와 지역간 균형발전에 기여하도록 전국의 대학을 권역별로 나누어 로스쿨을 ‘권역별 국•사립대 통합네트위크’ 소속으로 하고, 입학생 정원의 많은 부분을 해당 네트워크 소속 국•사립대 학생들에게 배정해야 한다. 아울러 학부성적을 로스쿨 입학에 가장 많이 반영하고, 로스쿨에서 배출하는 법조인의 수가 매년 2천명 이상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로스쿨이 법학자 양성이라는 일반대학원 기능도 아울러 맡도록 하고, 로스쿨의 설치와 더불어 전국의 모든 법대를 없애는 동시에 법학전공 교수 전체를 해당 권역의 로스쿨 교수로 이적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 학부과정에서의 법학 관련 기초과목은 이들 교수들이 출강해 강의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로스쿨 도입이 향후 행정대학원, 경영대학원, 교육대학원 등을 도입하고 의학대학원을 재편하는 등 대학의 학문•교육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추동하는 진정한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난항을 겪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다시피, 한번 잘못된 법이나 제도를 일단 도입하고나면 그 피해는 실로 막중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로스쿨 도입이 일정에 오른 지금이야말로 그 도입이 올바른 대학개혁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게 하기 위한 대학구성원 모두의 비상한 관심과 적극적인 개입이 요청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가 주관하는 로스쿨 도입방향에 대한 공청회가 오는 26일 개최될 예정이다. 이 공청회가 새로운 대안적 로스쿨 도입 방안을 확정하고 그 방안을 관철하기 위한 본격적인 운동 전개의 시발점이 되도록 많은 교수가 이 공청회에 참석해 적극 의견을 개진하고 뜻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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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6일 (토)
제 2676 호
발행처 : 인권운동사랑방

 

<논평> '현대판 골품제'의 반 쪽짜리 진실

 

'고교등급제'라는 '유령'이 대학을 배회하고 있다. 고교등급제를 실시한 한 대학의 경우, 강남권 학생은 지원자 87명 중 28명이 합격했지만 비강남권 학생은 53명의 지원자 중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사회가 비강남권 학생들에게 선사한 '절망'이라는 높은 벽이었고, 학생들은 '출신성분'을 원망하며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대변하듯, 소위 '명문대학' 진학을 통한 계층 상승은 모든 가난한 이들의 '꿈'이었다. 하기에 '논 팔고 소 팔아서 공부시킨다'는 말이 빈말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교등급제라는 '현대판 골품제'는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꿈'을 박탈하고 부의 가치만이 사회적 명예와 지위를 보장해준다는 천박한 가치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 교육관련 사회단체가 "고교등급제는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서울 강남이 아니면 '명문대학'에 원서조차 쓸 수 없도록 하는 반인권의 극치"라며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고교등급제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단체의 그러한 주장은 반 쪽짜리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고교등급제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그나마 '명문대학'에 원서라도 쓸 수 있는 '우등생'이며, 우등생과 열등생 역시 부모가 가진 경제·문화적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공교육이 '포기한' 학생,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 등록금 문제로 대학의 꿈을 접어야 하는 학생 등 많은 학생들은 여전히 고교등급제 논쟁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그들에게 교육은 빈곤을 재생산하는 처참한 현실을 확인하는 '절망의 벽'일 뿐이다.

다시, 문제는 '교육의 공공성'이다. 누구나 원하는 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류가 개척한 진리의 지평을 확대하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것. 이는 '학교' 현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는 우리에게 소중한 영감을 주는 살아있는 역사다. 벤포스타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 공부를 하는 대가로 오히려 돈을 받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학교 밖에서 '삶을 배운다'.

세계인권선언 역시 '무상교육의 점진적 도입'으로 모든 사람이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져야 함을 인권의 원칙으로 밝히고 각국 정부가 세부실천계획을 실행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이제 정부와 국민이 결심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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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소설은 죽었는가 - 카를로스 푸엔테스


소설은 죽었는가?


카를로스 푸엔테스 / 김태중 옮김




I


    1954년 처음으로 글을 발표할 때부터 “소설은 죽었다”란 불쾌한 말들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이러한 예언이나 비문(碑文)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나, 이러한 선언들은 단지 입문하는 소설가를 고무시켰을 뿐이었다. 나와 같은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주어졌던 그 이유는 첫째로 소설은 이제는 더 이상 소설의 근원처럼 새로움을 전달하는 기능을 갖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소설이 얘기했던 것은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은- 오늘날엔 영화, 텔레비전, 신문 그리고 역사, 심리, 정치, 경제소식 등을 통해서 더욱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옛 영역은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세계에 의해 병합되고 말았다.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이미 소설가의 것이 아니다. 열정과 호기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세기 반 전 만해도 군중들이 디킨즈의 소설 『골동품 창고』의 최신판을 구하러 부두에 모여들었었다. 요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 T.V. 연속극인 《달라스》의 악한, J.R.에게 누가 총을 쏘았는지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난다. 국내에서는 《단지 마리아였을 뿐》, 《부자도 눈물을 흘린다》 혹은 루이스 라파엘 산체스의 말대로 “마리 셀라와 호르헤 보스칸의 인기도에 따라 휘청거리는 나라”일 뿐인 것이다.

    조오지 오웰은 정보체계가 모든 것 위에 폭군으로 군림할 것이라 예견했다. 좀 더 날카롭게 올더스 헉슬리는 이러한 전횡적 정보체계가 무한 정보망에 대한 끝없는 욕구를 통해 다가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정보시대는 활자 없이 다가 설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구텐베르크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유형지」의 전체주의적 악몽처럼, 문자 그대로 피범벅이 된 문자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문자가 아니고 문자가 매개하는 것 - 보드리야르가 의미의 내파(內破, implosión)와 함께 정보의 폭발(explosión)이라 부른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서 끊임없는 유희를 제시하기 위해 피 대신 네온 가스의 기포를 사용하는 문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정보 그 자체의 증식은 힘들이지 않고 편히 최적 상태의 정보를 입수케 한다. 정보는 우리가 찾을 필요 없이 스스로 다가들며 더욱이나 산출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우리 시대의 쓰고자 하는 욕구를 좌절시키지는 못 하였다. 단 한번도 정보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며, 제대로 정보교환도 하지 못했으며, 즉각적인 관계 망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골방에 혼자 처박힌 채 불완전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역설적으로 정보의 단식상태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했다.

    가족에 대한 추억들 중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금세기 초에 매달 베라크루스 항구에서 프랑스발 소포를 정확하면서도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이 소포를 통해 토마스 하디, 폴 부르제, 아나톨 프랑스의 최근 소설과 더불어 최신 정보와 유럽의 도해(圖解) 잡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문학적 취향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고 단지 그의 매월 성마른 환상 뒤에 존재하였던 알고자 하는 욕망과 노력 그리고 강요되었던 단절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옛 식민시대에 형성된 문명의 중심지였던 원거리의 유럽과 식민지란 주변문명사이의 정보소통을 위해 노력을 해야만 했다. 이점을 이해하며 인정한다. 하로초(역주: 멕시코 베라크루스 주(州)나 사람의 별칭)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밀짚모자를 쓰고 부둣가에서 지팡이를 집고서 나의 어린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소식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모습이 항상 남아있는데, 그때 이들을 사로잡았던 열정을 나로서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엔 베라크루스의 농장들까지도 위성 안테나가 즐비하다. 이로 인해 가장 못 사는 촌부까지도 전 세계 텔레비전 방송국의 80여 개의 채널과 대처수상에서부터 치치올리나에 이르는 여성스타에 이르는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러한 현상이 베라크루스의 사탕수수 재배인에게 끼치는 선과 악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진 않지만 종종 그들은 T.V.수상기는 있지만 식수는 없는 경우도 있다.

    짧게나마 정보의 편이성, 풍요함에 비해 삶의 빈곤함과, 결합된 유럽 공동체 부자 나라들 간의 무지를 비교하고 싶은데, 예를 들면 영국인들은 프랑스에 일어나는 문화적 행위들을 무시하고 있으며 프랑스인들은 스페인 문화를 무시하는 반면에 스페인들은 스칸디나비아 문화를 역시 무시하고 있으며 이들 스칸디나비아인들 아마도 이미 언급한 포르노 배우 출신의 국회의원의 활동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이태리 문명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정보, 데이터, 토픽 그리고 폭력, 즐거움, 테러, 휴가의 테러 혹은 테러의 휴가에 대한 이미지들은 있다. 그러나 상상력은 거의 없다. 구조 없는 일시적인 데이터와 이미지들이 대량으로 반복되며 계속 이어 진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지식으로 변모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상상력이란 말인가?  또한 이러한 변환은 시간, 정지, 욕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즉 “신과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이 전지전능할 때”이었던 1909년, 베라크루스 항구의 선창가에서 손을 잡고 있는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멈춰진 시간과 욕망들처럼 말이다. 

    레나토 레둑(Renato Leduc)이 재미있게 분류한 혁명 전의 우리의 과거는 다행스럽게도 모든 사람에게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문화가 항상 존재해 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들은 작가로서 그리고 또한 작가이기 위해서 언제나 고립되고 불완전하고 소외되었던 프루스트, 대중으로부터 연극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곧 버림을 받았던 플로베르와 제임스, 고립된 생활로 파멸한 포우 그리고 광고와 돈의 세력에 대해 즐겁게 대항했던 발자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간을 구별해주는 두 가지의 변별적 특징이 있다. 첫째는 계몽된 서구의 환상이었던 환멸적인 전체주의이다. 그 환상이란 끊임없이 문명이 승리하리란 꿈과 인류의 끝없는 완벽성 그리고 진보를 향한 제어할 수 없는 행진이었다. 아우슈비츠와 룰락은 이러한 환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누렘베르크, 스와스티카(역주: 나치의 문장),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집단 수용소 등과 같은 근대적 폭정의 가장 명백한 기호를 좀 더 미묘하게 만들기도 했다.   포스트모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폭정은 정보와 권력의 연맹이라고 주장해왔다. 다시 한 번 보드리야르를 인용하면, 타자의 존재 이유를 강조하면서도, 대답 없는 일회적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으로 발신자와 수신자를 동일시하면서 집단적 유통이 설정되는 양자의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수많은 사건들에 음으로 양으로 직면해 있는 나와 동시대의 작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작가에게는 그 사건들이 사회 속의 작가라는 조건의 속성이 되는데 반해, 다른 작가들은 우리 시대의 특수한 폭력 앞에 위험스럽게 노출되어 있어, 문제가 "소설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동되었다는데 있다. 어떠한 모든 경우에도 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러면 정보매체가 말하지 못 하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란 말인가? 이것이 내가 선호한 반대 공식은 아니다. 확실히 내의 관심을 자극하는 것은 현대 정보체제에 대한 멸시나 증오가 아니라, 그 활용 방법에 대한 걱정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특히 느슨하고 정착적인 시간에 사는 작가들은 더욱 그러한데, 행복한 정보는 우리 작가들을 거부하지만 소설의 글쓰기와 책읽기는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설령 자신의 실패를 인지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비역사화하고 비사회화하는 과정에 반대할 수 있을까? 비록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정보와 권력의 순환적이고 가상적인 폭정에 맞서 예외적인 것을 퍼뜨리기 위해 서사적(narrativa)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한다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더 양질의 그리고 더 자유로운 정보 수단과 더불어, 문학이 사회에 의해 창조되고 수행되는 문화현실이 사회에 봉사하고 그 반대가 되지 않는 제도들의 구조를 결정하는 점증적이고 민주적이며 비판적인 사회화 과정의 질서에 기여할 수 있을까? 시간. 시간과 욕망. 정보를 경험으로 그리고 경험을 지식으로 변환하기 위한 멈춤. 탐욕, 권력의 일상적 남용, 망각, 경멸 등이 야기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시간. 상상력을 위한 시간. 삶과 죽음을 위한 시간. 마리아 삼브라노(Maria Zambrano)(역주: 스페인의 철학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안티고나(Antigona)는 홀로 있다고. 죽음을 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삶을 종식시키기 위한 시간 역시 필요하다.

    설령 단 한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도, 단 하나의 신문도, 단 한사람의 역사가나 경제학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소설가는 쓰여지지 않은 영역에 대처하면서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역은 일상적 정보의 풍요나 절제를 넘어서는 것이며 또한 이미 쓰여진 영역보다 훨씬 더 무한하기 때문이다. 트리스트람 샌디(Tristram Shandy)는 이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의 문제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삶을 담기 위해 살아온 것보다 십배 이상 더 빨리 쓰는 것이었으며 살고 있는 것보다는 백배 이상 더 빨리 쓰는 것이었다. 이렇게 노예처럼 글을 썼으며 삶을 멈췄다.  그러나 현대의 어떠한 시민이라도 잘 알고 있는 것은 정보와 정치의 일상적 담론에서 침묵의 소리가 떠도는 말이나 그릇된 말보다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II


    이상의 논의로 이 글의 두 번째 논점이며 50년대에 우리에게 던져졌던 질문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멕시코와 중남미에서, 어느 선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질문은 3가지의 단순한 답을 요구하는 불필요한 3가지 분리형태로 행해졌는데, 이것들은 소설의 고유한 잠재성을 파괴하는 권위적인 장애물로 군림해 왔다.


1. 환상 그리고 상상력까지 반대하는 리얼리즘

2. 세계주의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3. 형식주의, 예술지상주의 그리고 무책임한 모든 문학형식을 반대하는 참여주의


    편한 대로 이리저리 결합된 허구적 분리 그리고 알리바이와 정치적 검은 술수.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마키아벨리즘이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4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엔 다른 것들과 함께 이러한 것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이러한 것들을 재고해보는 일도 가치가 있는 일인데, 이는 문학적 위생을 위해서도 물론이거니와 한번도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일종의 주술적 행위로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1954년 단편집 『가면의 날들』(Los días enmascarados)을 발표한 후 쓰여진 몇몇의 텍스트를 돌이켜 보면서 이러한 형식들을 환기시키려 한다. 필자의 첫 작품인 단편집은 앞서 지적한 협박에 잠재한 여러 이유로 인해 비판받았다. 즉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었기에 그러했고 국가에 등을 돌린 세계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책임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정치적 참여를 수행하지 않았고 더욱이나 냉전의 양측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비꼬았기 때문이었다. 이쪽, 저쪽에 아무런 조건 없이 속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죄였다.

    그러나 필자의 두 번째 작품이며 첫 번째 소설인 『가장 투명한 지역』(La región más transparente)은 똑같이 반대적 이유로 비판받았다.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생생하며 폭력적이란 이유로 말이다. 국가를 말하지만 단지 헐뜯기 위하여 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정치적, 검증적 그리고 비판적인 참여에 대해서는 차마 반혁명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비생산적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훗날 내 친구가 된 중남미의 한 좌익 정치인은 필자가 멕시코 혁명을 비판함으로서 양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으며 대륙의 혁명적 열기를 식혔다고 썼다.

    자문해 본다. 하느님 맙소사! 진리는 어디에?  지극히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소견이지만, 필자의 두려움은 양극화되고 역설적인 이런 식의 과도한 요구사항들이 어느 한 젊은 작가를 파멸시킬 수도 있고 시켜왔다는데 있다. 객관적 세계뿐만 아니라 개성과 집단의식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세계가 환상, 꿈, 헛소리에 대한 공포와 현실적 규범을 이탈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상상력도 현실도 없는 얄팍한 기록 문서에 의해 얼마나 많이 우리 사회에서 희생되어 왔는가? “국가를 비판하는 행위는 낙관주의의 한 형태이다”는 월레 소잉카(Wole Soyinka)의 건전한 충고는 망각한 채, 민족주의는 일련의 국경일이며 문자(역주: 문학)의 발 아래에는 단 한 송이의 꽃도 없이 동상의 발 밑에만 화환을 바치는 날이라고 수없이 믿어오지 않았던가? 침묵은 단지 패배주의자의 것이며 그래서 비판은 사랑처럼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던가? 선의의 승리로 이해된 정치적 참여가 과연 몇 번이나 있었단 말인가? 볼리비아 광부의 억압을 고발하는 한 편의 소설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전 세계의 광부를 해방시키는데 충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소설은 광부나 문학을 구하지는 못했다. 광부는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 구해지며, 문학은 도시의 요구를 예술적 요구에 결합시킬 때 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요구 중 가장 우스꽝스런 질문은, 한때 멕시코에서도 열렬히 환영받은 바 있는 스탈린주의자였던 불란서의 한 비평가가 행한 “왜 카프카는 화형되어야만 하는가?”이다. 그 당시에 카프카는 “반 사실주의”와 동의어였으며, 한 국내 정치가는 카프카가 멕시코인이었더라면 풍속작가이었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오늘날, 카프카가 20세기의 가장 사실적인 작가이며 가장 왕성한 상상력과 참여의식 그리고 진리로 우리시대의 사진 없는 여권처럼 보편화된 폭력을 묘사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20세기의 법, 도덕, 정치, 혼란, 고독과 악몽, 이 모든 것이 프란츠 카프카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소설 속에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희망도 담겨있다. 그러나 비극적 경고도 담겨있다. 하지만 우리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유럽, 세계는 그것을 알고 있다. 50년대의 융통성 없는 규범론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때로는 좋든 싫든 지쳐버린 박애라는 규범을 상속받았다.

    사실주의자의 요구는 소설이란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 되어야만 했으며 이로써 책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충분하여야 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예술이란 사회, 정치, 사상의 진보와 물질적 발전과 함께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문학은 발견(anagnorisis), 감성, 미래에 관한 환상 그리고 역사의 행복한 약속 등으로 차려진 만찬의 후식이어야만 했다. 19세기의 소설가들은 이렇게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파괴시켰다. 누구보다도 도스토예프스키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과 미래의 함수관계는 별로 신통치도 않았고 진보와 역사의 동일화 작업이 20세기에 국가간의 구별도 없이 무차별하게 파괴되자, 지난날의 강요 사항들은 3가지의 새로운 요구사항으로 대체되었다.

    첫째, 폭력으로 중첩된 폭력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소설을 억압시키려 했으며 전체주의적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 둘째, 경박성의 극단적인 반대로는 라이트 밀즈가 말하는 “즐거운 로봇” 즉 죽을 때까지 웃고 즐길 자세가 되어 있는 소비 사회의 즐거운 로봇을 부양하는 유희 기능을 소설에 부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무주의적인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감히 소설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 속엔 텅 빈 거울만이, 즉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체는 빈 공간이었다. 베케트의 한 인물이 말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행위는 명백하다” 일찍이 바슐라르 가스통은 문학은 문학이 아니고 다른 것이라는 철학, 정치, 사회적인 강요를 간파해 냈다.

    이러한 강요는 곧 정보매체의 강요와 유사하게 나타나, 문학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정보로 전환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왜 이러한 강요가 있는 것일까? 바슐라르는 이러한 강요를 문학에 대한 경의(敬意)의 표시로 보았다. 과학, 철학, 정치, 윤리와 정보는 근원적이며 심층적인 의미에서 언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문학은 예술이다. 그러나 과학, 철학, 정치, 정보가 가능해 지는 장소인 말하는 존재의 근원에 위치한 기능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바슐라르는 문학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끈질긴 요구의 원인을 보았으며,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던 마르크스는 “물질생산의 발전과 예술생산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관계”를 말했다. 그러나 “한 작품이 어떤 사회 형태의 단순한 반영으로서 시간을 초월하고 역사가의 이해에 이바지한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미학적 기쁨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그 스스로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요즘에 체코의 철학자 카렐 코직은 각각의 예술 작품은 “분리될 수 없는 통일체 내에 이중의 특성을 지닌다”는 말로 질문에 답하려 했다. 예술 작품은 현실의 표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고 불가분하게 작품의 앞이나 옆도 아닌 바로 작품 자체 내에서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현실에 전에는 없던 무엇인가를 덧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다시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현실은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객관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주관적 현실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난 문학의 제3의 차원인 '집단적 주관성'(subjetividad colectiva)을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잘 인지될 수는 없지만 가장 동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관성이 우리의 집단성 즉 우리의 문화를 구체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창살사이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볼 수 있는 감옥이다. 반대로 예술의 자유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데에 있다. 작가와 예술가는 알지 못한다. 단지 상상할 뿐이다. 그들의 모험은 무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있다. 상상력은 문학과 예술에 있어 안다는 것의 이름이다. 실제 자료만을 쌓는 자는 세르반테스나 카프카처럼 보이지 않지만 나무, 기계, 몸처럼 실제적인 현실을 보여주지 못한다. 소설은 세상을 보여주거나 드러내지 않고 세상에 무엇인가를 더해준다. 세상에 대한 언어적 부가물을 창조한다. 그리고 시간의 영혼을 항상 반영하지만 이와 동일하지는 않다. 역사가 소설의 의미를 고갈시킨다면, 시간과 더불어 소설을 잉태시켰던 긴장된 순간들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소설은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단테를 기벨린당(黨)과 교황당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축소해버린다면, 몇몇 사가들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를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 유태교 문제나 애인관계 등 단순히 컨텍스트적으로 이해하려 했을 때에도 카프카의 문학을 즉 그가 반영한 것이 아니고 덧붙인 것으로서의 문학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보화 과정은 소설의 목소리에 부정적, 긍정적인 양면을 다 지니고 있다. 리얼리즘과 환상주의간의 인위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소설을 국경 너머 저 멀리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으로 내몰아, 소설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소설의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냈다.  교황당도 기벨린당도 아닌 소설 나라의 시민들이 예고된 소설의 죽음에 저항해 가장 빛나는 시대를 건설한 것이다. 영어권의 윌리엄 스타이런, 조앙 디디언, 토니 모리슨, 나딘 고디머, 네이폴, 살만 루쉬디 그리고 줄리안 반즈. 스페인어권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후안 고이티솔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페르난도 델 파소 그리고 훌리안 리오스. 유럽의 이탈로 칼비노, 밀란 쿤데라, 귄터 그라스, 토마스 베른하르트, 기오르기 콘라드. 아프리카의 나기브 마푸즈, 소날라 이브라힘, 치누아 아체베,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 아시아의 코보 아베, 아니타 데사이, 베이 다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통해 소설은 영원히 잠재적이며 비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즉 가능성과 절박함으로서의 소설, 현실을 창조하는 소설이 된 것이다. 현실과의 투쟁은 시학적으로 극복되었다. 『백년간의 고독』, 『돈 훌리안 백작의 복권』은 보이는 현실을 받아들여, 쓰여지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현실을 구성했다. 소설의 공동의 땅에는 50년대의 이분법적 갈등구조도 해결된다. 예를 들면 그 어느 누구도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쿤데라를 그들의 국적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소통가능성과 뛰어난 상상력 때문에 읽는 것이다. 현대소설의 보편성은  두 가지를 상실함으로서 더욱 가열되었다.

    하나는 특정 계급과 특정 지역 -유럽의 계몽된 중산 계급- 의 정의였던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개념의 상실이다. 데이비드 흄이 “우리의 이성의 능력과 취향과 감성은 동일하며 변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비코는 역사의 다양함과 문화 다원주의를 들고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다인종적이고 다문화적인 오늘날의 세계는 18세기에 그들만의 보편성이었던 유럽인의 이성과 계몽계급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들, 모두에게 다원적 보편성으로 만든 개별화된 세계이다.

    두 번째 상실은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다. 헤르데르(Herder)가 역사적 삶은 유럽에서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대도시문화나 동질의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구체적일 때만 보편적이 되며, 중심이 없이 우리 모두가 주변인이 될 때 실제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에서, 나이지리아나 인도에서 민족주의적 소설가에게 문학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민족적 정체성과 표면적인 연대기를 강요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50년의 멕시코의 한 비평가는 프루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몸을 파는 일(역주: 프루스트의 로마식 철자 Proust와 창녀를 뜻하는 prostituta가 서로 비슷한 점을 이용해 신조어 proustituirse를 만들었음)이라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보르헤스, 레예스(역주: Alfonso Reyes, 1889-1959 멕시코 출신의 중남미문학계의 거장), 레사마리마(역주: 쿠바 시인), 파스, 코르타사르를 포괄하는 세대는 가장 보편적일 때만 민족적일 수 있다는 레예스의 말에 따라 우리를 가르쳐 왔다. 또한 레예스는 멕시코 문학은 멕시코가 아닌 문학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상상력과 언어를 제외하고 작가는 무엇을 국가에게 제공할 수 있단 말인가? 국가는 상상력이나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20세기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작가가 사라졌을 때 국가는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말을 잃어버렸을 때 상상력은 사라져 버렸다. 말을 억압했던 정치적 구실들은 이성과 정통성 그리고 효율성을 상실한 “음향과 분노” 속에서 결국 자신들을 억압해가며 끝장났었다. 나치즘의 독일, 소련 그리고 군사정권하의 아르헨티나가 그 좋은 예이다. 그밖에도 우리의 잔인한 20세기는 수많은 예들로 넘친다. 다음 세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종말이 불의한 사회를 종식시키지도, 제도와 문화를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화합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50년대의 또 다른 문제였던 정치적 참여와 작가의 무책임성간의 첨예한 대립도 역시 잠재소설이란 새로운 목소리에 굴복하였다. 남아프리카의 나딘 고디머, 검은 아프리카의 아체베나 헝가리의 기오르기 콘라드를 생각해보면, 한 소설가가 첨예한 정치적 투쟁에 참여할 때, 그의 정치적 참여가 언어와 상상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문학적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정치적 투쟁이 없다고 해서 한 작품의 정치적 사회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학적 가치가 클수록, 밀란 쿤데라가 정의한데로, 소설은 인간의 수족을 묶고 벙어리로 만들어 기존 이데올로기의 해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인간을 항상 탐구해야 하는 대상으로 재 정의하는 폭넓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소설이 미학적, 사회적 기능과 일치하는 점은 보이지 않는 것, 말하지 않은 것, 소외된 것, 쫓기는 것들을 발견할 때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고, 공적 가치와 계속되는 정치적 논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상승으로서의 진보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예외적인 발견에 있을 수도 있다. 반대가 아니라 예외적인 것이다. 고전시대와 아직도 진보적 근대성의 규범이 되었던 권력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과 작가와의 연합은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돈키호테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독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실재로 존재하며 언어는 복합적이다. 트로이에서 더블린에 걸친 긴 여행에서 율리시즈는 승리를 거두었다. 일상세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은 세계는 일상적이다. 오딧세이는 멕시코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파노아메리카의 문학, 만차의 문학(역주: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델 라 만차』에서 유래한 말로 세르반떼스의 문학 전통을 계승하는 문학), 잡(雜)소설, 혼합픽션은 얄팍한 리얼리즘, 선전식 민족주의, 독단적인 참여문학이란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보르헤스, 아스투리아스, 룰포, 오네티 이후 중남미문학은 리얼리즘과 그의 코드를 극복해 왔다. 각자의 글쓰기를 통해 표현되는 다른 역사를 창조해 왔다. 또한 동시에 상처받은 공동체를 재창조하기 위한 계획도 수립해 왔다. 근대세계는 이러한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소설 『허물벗기』(Cambio de piel)은 이 상처받은 공동체에서 태어났다. 이 소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나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중남미 소설과 연관을 짓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투명한 지역』도 『미완의 크리스토발』(Cristóbal Nonato)도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반도시적 언어, 『팔방놀이』(Rayuela)를 생각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중남미 작가는 문학의 본질적 역할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희망의 뿌리이다. 언어를 배반하는 일은 우리 존재의 가장 긴 그림자이다. 언어의 창조로서 아메리카의 유토피아는 광산과 장원에서 자리를 잡았으며 그곳에서 다시 헐벗은 계곡으로 빈민촌으로 잃어버린 도시로 옮겨갔다. 밀림에서 판자촌으로, 광산에서 움막으로 유럽의 언어, 원주민의 언어, 흑인의 언어, 물라토의 언어, 메스티소의 언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흘러갔다. 중남미 소설은 이러한 언어가 풍습과 망각과 침묵에서 빠져나와 혼탁하고 바로크적이며 갈등적이면서도 종합적이고 다문화적인 언어 형태를 수용할 수 있는 역동적인 은유로 변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중남미문학 전통이 되어버린 이러한 요구는 신발가게의 쇼윈도우 앞에서 기웃거릴 때, 미장원에 들어설 때, 이름 모를 야생 엉겅퀴를 노래할 때, 애인과 밀회를 가는 도중에 그만 산 후안 거리의 교통체증으로 초조해진 루이스 라파엘 산체스가 어쩔 수 없이 F.M.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연속극과 열대의 리듬에 매달리게 될 때의 파블로 네루다의 『지상의 집』(Residencia en la tierra)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문명과 픽션을 잇는 소설의 관계는 아르투로 아수엘라, 구스타보 사인스와 호세 아구스틴처럼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존재에서, 엑토르 리베르테야, 세사르 아이라처럼 너무도 사실같은 부재에서, 비오이 카사레스처럼 형이상학적이지만 구체적인 것에서, 루이사 발렌수엘라나 오스발도 소리아노처럼 치명적인 것에서, 엑토르 아길라르처럼 상처받은 자에게서, 앙헬레스 마스트레타처럼 우아함에서, 세베로 사르두이처럼 환희와 탐닉 속에서, 훌리오 코르타사르처럼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점에서, 알프레도 브리세 에체니케(Alfredo Bryce Echenique)의 책명, "마르틴 로마냐의 과장된 삶"에서 보여주는 창조적 아이러니에서 유래한다. 삶을 소설화할 때 브리세는 삶이 원치 않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추가하며 과장한다. 그의 삶에는 넘쳐흐를지라도 과장, 거짓, 진실, 잠재성이 없이는 빈곤해지는 언어적 상상력이란 부가물을 추가한다. 소설은 과장한다. 덧붙이고 펼치고 늘여 지속토록 한다. 언어가 일상생활을 되찾는 영웅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모범적으로 소설을 쓰는 루이스 라파엘 산체스는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란 공동체적 존재의 유일한 가능성으로 상상력과 소설적 언어의 공유를 들고있다. 그의 사소한 것에 대한 열정은 부족적 열정이다. 『다니엘 산토스라는 이름의 중요성』(La importancia de llamarse Daniel Santos)에서 산체스는 그를 부인하고 우리를 부인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루이스 라파엘처럼 대중적이며 상업적인 문화를 언어적 욕망과 썩어 문드러지는 언어(verbo erosionador) 즉 언어의 부식작용(腐植), 다시 말해서 사랑을 꿈꾸는 언어(verbo-eros-soñador)로 통합시킨다면, 이 문화도 우리에게 해롭지 않다. 리얼리즘, 민족주의, 현실참여문제는 다른 어떤 지역에서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멕시코와 중남미에서 호된 시련을 겪었다. 결국 시학적 불모성으로 판가름 난 독단론에 근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환멸도 곧 겪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만의 현실이나 민족주의 그리고 정치논리는 소설을 불가능하게 한다. 소설은 국가, 언론매체, 정당들 (혹은 이들 셋의 이념주의자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50년대에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들 각자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추구하려 했던 국가적 문화로 이루어진 선택적이며 비판적이고 상상력과 시학적 관점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3가지의 독단론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들의 삶을 죄고 있다. 룰포, 보르헤스, 코르타사르의 복잡한 현실은 졸라식의 자연주의엔 들어 먹히지 않았다. 국가 정체성 확립의 문제로 특히 상처받은 칠레와 아르헨티나란 두 나라의 작가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호세 도노소, 후안 호세 사에르, 마르틴 카파로스의 국가에는 민족주의식 좁은 개념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다. 원주민, 흑인, 유럽인, 스페인인, 유태인, 아랍인, 지중해, 혼혈인, 물라토들로 구성된 우리의 거대한 문화에 똑같이 탐욕적이고 지배적이며 폭력적인 미국과 소련이란 살인자 집단의 배타적인 2개의 이데올로기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과테말라, 칠레, 헝가리, 폴란드, 니카라과, 체코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미국과 소련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멕시코의 1968년 사건은 객관적 제도권과 이러한 제도권에 수용되지 않는 다양한 방향으로 끓어오르는 불만족스러운 주관과의 거리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50년대부터 많은 작가들은 관료화되고 기념비적인 국가의 담론을 공식행사로 파묻힌 국가에 대한 상상력의 담론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멕시코 혁명의 예언자적 대발견, 끊임없이 갈등하는 기억들과 다양한 기호로 이루어진 일상의 삶, 꿈과 악몽이 반복되는 잠재적 계획, 반권위주의적 계획 그리고 모든 역사가 함께 공존하는 나라에 대한, 특히 내 나라처럼 거대한 복합문화를 지닌 국가에 대한 담론을 추구해왔다. 보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데 실패한 근대성(modernidad)은 몇몇에게 행복을 보장해 주기 위해, 그러나 적어도 거의 모든 이의 입을 막기 위해 결국 권위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요구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의 결과로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 (La muerte de Artemio Cruz)이 잉태되었다. 한 국가는 권력보다 훨씬 크다. 즉 진정한 국가가 이루고 유지하는 문화가 훨씬 큰 것이다. 아메리카에 유고나 구 소련식의 분열이 없는 이유는 국가적 차이가 공식적인 민족국가를 넘어 민중의 부단한 노력으로 문화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야 벌린이 지적한데로 모든 민족주의는 한 사회에 부과된 상처이다. 이런 점에서 중남미 소설은 상처와 그 흉터의 담론이다.  게다가 우리의 감상적인 조국은 보르헤스가 지적한 대로이다.  나의 조국은 기타의 박동소리요, 검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와의 약속이며, 초저녁의 버드나무 기도소리이다. 이런 말이 남겨주는 감상적 상처는 우리의 시골 촌부들의 가슴을 후려내는 외과의사,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의 시 「고상한 배반」(Alta traición)에 의해 곧 치료된다.


    나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소. 그의 추상적인 광채는 붙잡을 수가 없소이다.

    그러나 (불쾌하게 들릴지라도) 내 목숨을 바치리라.

    조국의 10개의 장소를 위해, 어떤 사람을 위해,

    항구를 위해, 소나무 숲을 위해, 요새를 위해,

    버려지고, 회색 빛의 괴물 같은 어떤 도시를 위해,

    역사상의 인물들을 위해,

    산을 위해,

    (그리고 3 내지 4개의 강을 위해).



III


    리얼리즘? 돈키호테가 살과 뼈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나요? 환상이라고요? 먼저 상상하고 원치 않는 현실이 있단 말이오? 참여예술이라고요? 읽고 바라보는 대상에 참여하지 않는 예술이 있기나 한단 말이오? 순수예술이요? 매일 샛노란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할지라도 배제와 망각, 욕망과 회상의 색으로 물들지 않은 예술이 있나요? 현실의 경험을 어떤 특수 형식으로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는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있을까? 모든 소설의 역사는 역사와의 상응이라기보다는 역사를 환기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의 현실, 한 나라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담론, 일차적 역사를 가능케 하는 이차적 역사를 언어로 창조하는 소설의 임무는 첫째, 다양한 테크닉 개발, 둘째, 열림을 향한 의지, 셋째, 창조와 전통에 대한 의식에 있다.

    첫 번째로 테크닉 개발이다. 『몽유병자』와 『베르질리우스의 죽음』과 같은 소설은 카프카를 화형시키려했던 대중의 합창 앞에 선 우리들에게 일찍이 어떤 기준을 마련해 주었으며 또한 프루스트에 빠져들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 헤르만 브로흐(Herman Broch)는 자신의 소설에 서사양식, 수필, 철학, 사회학, 정치와 시를 삽입시켜 등장인물의 가능성을 넓혀 독특한 개성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리얼리즘양식의 소설을 종식시켜, 환멸적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단순한 무(無)로부터 소설을 구출하여 시간의 전달자인 역사적인 다리로 전환시켰다. 브로흐는 카프카가 발견하고 베케트가 확인한 자아의 빈 공간을 메웠다.

    이론적인 면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미하일 바흐찐보다 새로운 양상의 소설을 더 잘 정의할 수 없다. 즉각적인 정보와 세계경제의 통합 그리고 넘치는 통계수치와 표피적인 지식으로 건설된 갈등적 언어들의 시대에서 소설도 역시 이런 언어들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은 이러한 이질적인 언어들을 한곳으로 불러모으는 경기장이 되어야 한다. 소설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언어의 만남의 장소이며, 다른 방법으로는 관계 맺을 수 없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과 문명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필자가 『우리의 땅』(Terra Nostra)을 집필할 수 있었던 판단기준이었다.

    두 번째로는 열림의 의지이다. 문학은 미래와 과거에 열려있어야만 바슐라르의 "말하는 존재의 근원"과 부단한 접촉을 가질 수 있다. 미래를 향한 열림. 물론 소설은 항상 미래를 주시하고 있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형식은 『오디세이』에서 『돈키호테』와 『롤리타』에 이르기까지 서술체의 속성이었다. 바흐찐과 오르테가는 서사시와의 차별을 강조했다: 서사시는 종결된 세계를 다루는데 반해 소설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를 다룬다. 소설은 창조되는 과정에 있는 세계를 대변하는 목소리이다. 이러한 소설의 역동적인 개념은 소설 고유의 특성인 장르의 비완전성이다. 아무도 마지막 말을 뱉지 않은 말의 싸움터인 것이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정의의 왕국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소설은 존재가 아니고 과정이다. 난 항상 소설을 개인의 삶과 사람들의 역사와의 교차로로 보아왔다.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과 『늙은 그링고』(Gringo viejo)는 어느 목소리도, 인물도, 시간도 진리를 독점하거나 담론을 선점하는 경우가 없는 교차로의 미학을 실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우리의 땅』, 『먼 가족』(Una familia lejana), 『캠페인』(La campaña) 등 필자의 다른 작품들은 세 번째 제안인 전통과 창조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소설이 완전히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은 과거를 향해 열려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죽어버린 과거 위에 활기찬 미래는 없다. 과거는 살만 루쉬디를 처형하기 위해 율사가 불러들인 엄격하고 신성해서 만질 수 없는 전통이 아니다. 이와는 모든 것이 반대다. 전통과 과거는 현재의 시학적 상상력으로 다루어질 때만 실제적인 것이다. 엘리어트는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현재가 과거에 의해 좌우되듯이 과거는 현재에 의해 변형된다고 상상했다. 이는 바로 문학은 기존의 사건이 아니며 대리석에 후세를 위해 영원히 새겨진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문학은 과거와 현재가 상호간섭을 통해 끊임없이 변형되는 지속적인 사건인 것이다. 단 하나의 문학작품도 역사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영원히 결정된 적은 없다. 또한 그리된다면 읽혀질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을 창조하는데 필요한 그 어떠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수탉이 울었다, 주전자가 끓었다, 나의 아버지는 폭군이다, 나의 어머니는 경박하다, 내 조국은 분단되어있다, 매주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가 싫다. 파리가 날았다 등- 중요한 점은 읽힐 수 있는 사건으로서의 작품의 지속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있다. 소설의 지속성은 한스 로베르토 야우스가 말한 대로 수용성에 달려있다. 또한 수용성은 영향력을 행사해 작품을 동적으로 지배하는 해석에 달려있다. 언어적 상상력으로 미래와 과거를 향해 동시적으로 여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이 얘기하고 다른 방법으로는 얘기 못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것이야말로 로렌스 스턴과 이탈로 칼비노, 데니스 디디로와 밀란 쿤데라,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후안 고이티솔로가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즉 소설은 쓰여지기를 바라는 언어적 탐구인 것이다. 이 언어적 탐구는 양적이고 계측적이며 알려지고 보이는 현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고 덧없고 알려지지 않았으며 혼란스럽고 소외되어 있으며 때로는 비관용적이며 속임수를 쓰며 충직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다.

    루쉬디를 회교도 율법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처단하는 것은 소설의 주제가 즉각적인 통신세계(다양한 언어의 격투장)에서 우리와 타자간의 갈등이었던 『악마의 시』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두 명의 힌두인이-그들 중 한사람은 봄베이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상영했던 영화 속의 코끼리 신 가면을 쓰고 있다- 비행중인 제트비행기에서 “파괴된 미로”같은 보르헤스의 “알레프”의 시선으로 본 도시, 런던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루쉬디의 인물들은 곧 현재사의 가장 보편적인 한 사건을 수행한다. 동양과 남반구의 굶주린 도시로부터 서양과 북반구의 기름진 도시로의 대량이민이란 사건을 말이다. 이렇게 모든 현대 사회의 심장을 통째로 삼기고 있는 은밀하지만 명백한 굶주림을 고발하고 있다.

    루쉬디는 신화, 제의, 욕망, 밑바닥의 삶, 시와 저속한 시, 연극과 웃고 울리는 연속극으로 이루어진 갈등적인 문화의 가방과 함께 이민자들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쌍방간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방은 동시에 종교의 신성함과 독단론 그리고 꿈과 악몽을 담고 있다. 이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타자와의 만남에서 파생되는 필연적인 비판적이며 상상적이고 유머스럽기까지한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한 개인이 가져오는 과거의 문명과의 만남에서 우리 자신들의 미래가 결정되리라. 이것은 말해져야 하며 소설이 말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말하고 있는 서술양식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광대하며 갈등적이고 관대한 개념의 소설이 말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관계는 근본적이다.

    필자가 인용한 모든 작가들은 쓰여지기를 바라는 것을 쓰지만 아방가르드에서 행했던 것처럼 단순히 새로운 것만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옳고, 종교적으로 수용할 수 있고, 민족적으로 영광스러우며, 감정적으로 편안한 것들,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 그렇다. 다시 한번 돈키호테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소설은 가능성의 보편성을 선언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잠재적이며 갈등적인 문학은 쓰여지지 않았고 읽혀지지 않은 세계를 말하려 한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잘 이해했던 것처럼 과거의 걸작들은 미래의 한 부분인 것이다. 항상 처음으로 읽히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돈키호테』나 『트리스트람 샌디』는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과거에 쓰여졌지만 현재에 읽히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똑같이 신소설도 과거가 가장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픽션들』)에서 한 텍스트를 새로 읽는 일은 첫 번째 독자와 다음 독자간에 일어난 모든 일과 함께 텍스트를 새로 쓰는 일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했다.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에 몰입토록 한다. 소설 없는 시간은 있었다. 그러나 시간 없는 소설은 단 한번도 존재치 않았다. 보르헤스는 무한의 시간을 「두 갈래 오솔길이 있는 정원」에서 “확산, 수렴 그리고 평행하는 시간”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들은 타자의 시간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간청을 무시했기에 타자가 되어버린 시간이다. “모든 것이 현재야, 이해하겠니? 어제는 내일 끝날 것이며 내일은 만년 전에 시작했지.” 이것들은 개인의 의식 속에서 전통과 창조를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유지하는 시간이다. “세기의 무게를 떨쳐버리지 않고서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요”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파도』에 적고 있다. 소설 『파도』는 새로운 창조를 고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전통은 없으며 전통에 자리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는 창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다 죽었다고 간주했던 장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던 잠재적이고 비판적이며 잡식성의 소설의 교차점은 글쓰기행위 시간과 독서행위 시간의 혼합에 있다. 글쓰기의 시간은 유한하다. 그러나 독서의 시간은 무한하다. 그래서 책의 의미는 우리의 뒷전에 있지 않다. 책의 얼굴은 앞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 피에르 메나르처럼 우리 각자는 돈키호테의 작가이다. 각각의 독자는 유한 행위이지만 잠재적인 글쓰기를 무한 행위이지만 언제나 현재적인 독서로 각자의 소설을 쓰는 것이다. 소설은 답을 구하기보다는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다. 동시에 소설은 질문의 예술이며 예술의 질문이다. 인간은 소설 예술보다 더 포괄적이고 창조적이며 외적, 내적이며 객관적이며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인 비판의 도구를 알지 못한다.

    이렇듯 소설은 먼저 자기 자신을 비판하기 때문에 세상을 비판할 자격을 얻는 예술이다. 그리고 가장 저속하고 구태의연하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비판한다. 언어는 모든 사람의 것이거나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영원한 질문, 소설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답은 취약한 독서에서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폭넓지만 다른 답과 쉽게 동화되고 대립되는 취약한 답에서 말이다. 자유는 영원히 도달할지도 모를 자유에 대한 탐구이며, 그 탐구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에 대한 탐구, 이차역사에 대한 탐구, 다른 언어에 대한 탐구 그리고 상상력에 기초한 지식에 대한 탐구는 결국 독자와 독서에 대한 탐구이다. 이는 벌을 받지 않는 해악이라고 독자를 창조하는 소설을 존경하는 앙드레 지드는 말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더 좋아하도록 가르쳐 주는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황홀한 대화를 나누도록 가르쳐 주는 이기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이 글의 출처는

http://www.latin21.co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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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서 읽기는 좀 길긴 하지만, 좋은 글이군요.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스티글러의 [에코그라피]의 논의들을 상기해봤습니다.
대강 읽어본 것에 불과하지만, 진지하고 신랄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좋은 에세이인 듯합니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읽어봐야지 ...

balmas 2004-10-19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아일합운빈현님께 출처를 문의했더니 가르쳐주셨습니다.

http://www.latin21.com

한번 가봤더니, 정말 좋은 자료들이 많군요.

릴케 현상 2004-10-1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사이트를 알게 되었네요...

balmas 2004-10-2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