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의 문화’ 보급 나선 동문선 출판사 신성대 사장
인문서적만 만드는 뚝심의 출판인 사무실
한켠에 무예수련장 만들고 국군전통의장대에 십팔기 가르쳐
[조선일보 조민욱기자]
“칼로 싸우다 지면 깨끗이 승복하는데, 말(言)로 지면 앙금이 남습니다. 요즘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입니다. ‘문(文)의 문화’가 대세가 되면서 ‘무(武)의 문화’의 장점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찾아야 합니다.”
서울 인사동의 중견 출판사 ‘동문선’의 신성대(辛成大·52)대표는 괴짜들이 몰려든다는 인사동에서도 터줏대감이 되기에 손색없는 ‘왕괴짜’다. 그는 600여 종의 인문서적을 줄기차게 펴낸 출판인으로도 이름 있지만, 여기까지만 알았다면 그를 반도 못 안 것이다. 신씨는 37년째 전통무예 십팔기(十八技)에 정진하고 있는 무인(武人)이기도 하다. 그는 출판사 대표인 동시에 ‘십팔기 보존회장’이며 ‘동양무예연구소장’이다.
출판사 사무실 한쪽엔 아예 무예 수련공간을 꾸며 놓고는 종종 칼을 들고 수련한다. 4년 전부터는 십팔기 시범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고 있으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90여 차례 공연한 공로로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외부 활동도 문무 두 영역을 넘나든다. 어느 날은 대진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출판·편집 실무’를 강의하고, 또 다른 날엔 국군전통의장대 무예십팔기 지도사범 자격으로 병사들을 호령한다.
남이 쓴 책을 출간만 해 주던 그가 생애 첫 책을 써 냈다. 최근 나온 ‘무덕(武德)-무(武)의 문화, 무의 정신’(동문선)은 한마디로 그가 무예를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얻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신씨에게 무예 수련이란 단순한 신체단련의 차원이 아니다.
그는 “문이 사유(思惟)하는 철학이라면 무는 행동하는 철학”이라면서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을 숭상하고 무를 푸대접함으로써 바람직하지 못한 국민성을 형성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씨는 “가령 옛날 500원 지폐엔 이순신 장군 초상과 거북선이 있었지만, 요즘 우리 돈에는 세종대왕·퇴계·율곡 등 문(文) 쪽의 인물 일색 아니냐”고 했다.
“특히 현대사에서 군사독재의 어두운 역사 때문에 ‘무’(武)가 더 폄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 변함없는 항심(恒心), 신의(信義)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무의 정신과 에너지는 이어받을 가치가 큰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은 선비 정신이 만든 게 아니라 우리 혈관 속에 흐르는 기마민족의 진취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그는 “내가 돈 안 되는 인문서적을 고집스레 출판하는 것도 무인의 뚝심 때문”이라고 했다. 굴곡 많은 인생길을 헤쳐온 힘도 무예로 닦은 정신력이다. 경남 마산에서 상경한 10대 시절의 신씨는 무예는커녕 동네 왈짜패들에게 괴롭힘을 받던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싸움 기술이나 익혀 보려고” 도장을 찾았다가 십팔기의 유일한 전승자인 해범(海帆) 김광석 선생을 만나 평생 제자가 됐다. 젊은날엔 전공(해양대 부설 전문대 기관과)을 살려 외항선 마도로스가 되어 오대양을 누비기도 했으나, 한 친구의 동업 제의로 출판에 뛰어들었다. 첫 작품으로 이외수씨 책을 낼 땐 동업자가 신씨 돈을 갖고 잠적해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다행히 이외수씨가 사정을 듣고는 ‘쓰다가 버린 파지’라며 건네준 원고가 ‘말더듬이의 겨울 수첩’이라는 베스트셀러 산문집으로 히트해 화려하게 데뷔했다.
“말라카 해협서 해적을 만났을 때, IMF를 맞아 출판사가 부도 직전에 갔을 때에도 저를 버티게 해준 것은 무예입니다. 칼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한순간 한순간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살 길이 생긴다고 믿었죠.”
그가 무예 대중화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십팔기는 어느 한 문중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만든 무예로 세계에서 유일한 것입니다.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 무인으로서의 저의 사명입니다.”
(조민욱기자 [ mwch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