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퍼옵니다.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paper&id=9212&page=1)

생각해볼 만한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제안입니다. 한번씩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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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변인데

제목은 제가 편의상 붙여 보았습니다.

그 전에 오고간 대화가 궁금하신 분은

최원님 홈페이지(myhome.shinbiro.com/~spinoc)를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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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질문이 두 부분인데, 첫 번째 부분은 동북아 사회운동 포럼이 어떤 질적으로 구별되는 투쟁을 가능하게 만드는가였지요? 그러면서 동시에 "'한-미-일 이 동맹구조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하고, 함께 성명서를 쓰고, 함께 데모를 하고, 함께 여론플레이를 하고... 이런 식으로 기계적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기계적" 접근을 넘어서는 투쟁은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지요. 그런데, 사실 이 질문은 답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Q님도 지적하셨듯이, 우리에겐 기계적 접근 조차 거의 존재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라고 물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저는 Q님께서 말씀하신 "기계적 접근"이 과연 그렇게 "기계적"이기만 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는 말씀하신 것도 관점에 따라서는 상당히 많은 것이고, 전혀 "기계적"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여기 Q님께서 열거하신 것들을 보면 이것이 결국 어떤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적 비판', 그 비판의 표명으로서의 '성명서', 또 그에 따른 정치적 행동으로서의 '데모', 또 더 나아가서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많은 인식을 도모하는 '여론전'. 이것이 과연 그 자체로 "기계적"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왜냐하면 이것은 또한 그 진행여하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인식 내지 인식의 '지평'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투쟁들이기 때문입니다. Q님께서 "기계적"이라는 말을 할때, 제가 느끼기에 그 말은 기존의 인식들이 단순하게 반복되면서 답보되고 있는 상황을 지시하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물론 그러한 Q님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에 이러한 시도들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은 거의 동일한 싸움들을 진행함에 있어서조차 우리가 그것들을 또 다른 관점과 전망 속에 기입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또 다른 투쟁의 언어 및 상징을 발견하는 투쟁들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투쟁의 언어나 상징은 단순히 어떤 명민한 개인 내지 개인들의 머리 속에서 뚝딱뚝딱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다른 인식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정치적' 인식의 진전이라는 것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관조적인 성찰 내지 반성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집단적인 교통 및 논쟁의 방식을 새롭게 조직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즉 새로운 사고의 장(field)를 생산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미 존재하던 요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는 ...

당장 평택싸움만 놓고 생각해 봅시다. 얼마전에 오마이뉴스에 상당히 동의할만한 주장글(이태경, '대추리 프레임에 갇히다', 글 전문을 아래에 붙이겠습니다)이 실렸던데, 그 글의 주장은 현재의 논의가 반미-친북 대 숭미-반북의 대립으로 프레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대추리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쪽이 네티즌들에게 '진실'을 말한다 해도 그것은 네티즌들의 '숭미, 반북' 프레임을 거스르는 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모조리 튕겨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네티즌들의 살기등등한 폭력적인 반응들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고요. 이는 예전에 황우석 사태 때나 사실 매한가지 현상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도 초기에 mbc나 황우석 비판자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었던 것을 기억하시죠? 물론 이 문제는 비교적 정답이 확실하고 검증 가능한 어떤 것이었기 때문에 젊은 과학자들의 이성적인 논쟁을 통해 사태를 역전시키는 것이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지만(사실 여기서 기존의 운동진영은 거의 한 일이 없지요. 여기서도 사실 진정 효과적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젊은 과학도'와의 모종의 '동일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반미/숭미 친북/반북 의 대립은 그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더 완고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논쟁을 보다 열심히, 보다 객관적인 자세로 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욕하는데, 제가 보기에 한겨레나 경향신문이 우리의 맘에 완전히 흡족한 공정보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평택싸움 관련해서는 그래도 부족하나마 이런 저런 입바른 소리들을 하려고 상당히 애를 썼습니다. 동북아의 평화 문제와 관련지어 상당히 제대로 평택사태의 본질을 지적했던 사설도 그랬고, 또 사진화보집도 경찰폭력을 상당히 제대로 고발한 편이었고, 나중에는 조중동의 일방적 왜곡을 교정하려는 기사까지 내보냈었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한겨레 절독을 선언한 고대 총학이 약간 오버를 했다는 생각도 한 편으로 들었는데, 어쨌든 제가 지금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한겨레나 경향신문조차 그런 식의 '원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혀 현재의 투쟁이 전진하질 못하고 있는가입니다. 이는 제가 보기에 정말 모종의 프레임에 우리의 사고가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반동적 태도를 보이는 네티즌들뿐만 아니라 운동진영 자체가 갇혀 있는 어떤 프레임이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러한 '이성'이 작동할 수 있도록 '관점 그 자체'를 전환시키는 '재프레임화'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보기에는 동북아 사회포럼 내지 (전시될 수 있고 경험될 수 있는) 국제주의적인 운동의 조직화를 통해 가능할 것 같다는 것이고요. 즉 이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지평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는 투쟁이라는 것이지요.

한일의 반전, 평화세력, 게다가 북한과 중국과 미국의 반전, 평화세력이 동시적으로 이 싸움을 진행하고 더 나아가 평택에서(혹은 일본의 자마에서 혹은 또 다른 곳에서) 함께 대오를 형성, 연대 투쟁을 행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반미/친북에 대한 찬성/반대/비판적 지지'라는 스펙트럼으로 모든 논쟁을 환원할 수 없게 만들거나 혹은 적어도 그러한 스펙트럼 그 자체를 매우 곤란한 해석적 프레임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운동진영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부 쪽에서 봤을 때도 그런데, 더 이상 그러한 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적인 연대 투쟁을 단순히 '반미/친북'이라는 잣대로 재단하여 대중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이데올로기적인 전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운동진영 내부에서의 전투, 즉 운동진영 내의 '민족주의 경향'과의 쟁점 또한 끝나지 않는 '설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물질적이고 아주 실천적인 방식으로 극복되거나 '부차화'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는 마치 정신질환에서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환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지배를 부차화시킬 수는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혹시 어떤 분은 그 논쟁은 이미 우리가 벗어난 것이 아닌가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설전'에서 우리가 스스로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 뿐 실천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극복했다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당장 우리의 투쟁들이 지속적으로 반미, 친북 구도에 갇히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이를 깨고 나가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연대를 생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더 나아가서 '안전' 혹은 차라리 그것의 국가주의적 왜곡으로서의 '안보'를 질문의 성역지대로 만들어 지배계급이 진보세력 내지 좌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감행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역으로 그 성역을 직접적으로 공략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적인 연대를 생성시킴으로써만 가능해질 것입니다. 문제는 대중들에게 이러한 대안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상황에서 대중들을 비난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 없지요. 경계지대 내에 평화를 위한 새로운 (대항)제도들의 생성을 위한 고민들을 실제로 구체화시킬 수 있는 운동, 혹은 적어도 한미일 전쟁동맹에 대해, 한미일중의 평화동맹이 맞서는 상황으로 움직여 나가는 운동만이 과거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민족적 감정 및 냉전시대의 잔재들을 활용함으로써 전쟁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에 파열구를 낼 수 있게 됩니다.


두번째 질문은 국제주의 실천의 성공사례가 있는가...이를 위한 참조할만한 자료가 있는가...이것이었는데, 사실 말씀하신 것처럼 이러한 사례는 드물지요. 이는 이론적으로도 이유가 없지 않은데 마르크스의 노동자 국제주의는 사실 민족국가에 대한 분석을 행하지 못하고, 그 외부에 자리잡으려고 했던 관점이었고 따라서 한계가 많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사회주의가 일국 사회주의로 전화되는 등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발리바르가 말하듯, 노동자 국제주의는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어떤 눈부신 성공의 사례가 있긴 합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것은 다름 아닌 '전쟁'과 '제국주의의 야만'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관련된 것이었지요. 바로 레닌(과 짐머발트 좌파)의 국제주의 말입니다. 혁명적 패배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 이것의 성공 및 실패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편 현재 여기 저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의 사회운동 포럼을 모델로 삼아 우리의 사정에 알맞는 어떤 형태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불충분한 답변이지만, 그것이 현재 우리가 서있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위안삼으며 이만 줄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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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 프레임에 갇히다
[주장] 평택 사태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
이태경(red1917) 기자




▲ 평택 미군기지확장예정지에 주둔한 군인들이 9일 오전 시위대 진입에 대비한 교육을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평택 대추리에서 벌어진 유혈참극을 보면서 드는 느낌 중 단연 으뜸은 '공포'였다. 시위대의 10배가 넘는 군경이 벌판을 새까맣게 덮으면서 달려드는 장면부터 시작된 공포는 경찰이 시위대를 초주검으로 만들면서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진정 우리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 것은, 경찰의 잔혹한 진압방식이나 광주민중항쟁 이후 최초라는 민(民)과 군(軍)의 충돌이 아니라, 이른바 '평택사태'를 바라보는 상당수 네티즌들의 인식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각종 포털이나 인터넷 매체에 실린 '평택사태'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살기등등하기 짝이 없다. 범대위와 대추리 주민들에 대한 증오로 무장한 채 정부에 단호한 조치-심지어 일부 네티즌들은 '발포하라'는 극언을 하고 있다-를 요구하는 댓글을 쓴 이들은 대체로 범대위를 친북반미세력으로, 대추리 주민들을 토지보상을 더 받으려는 파렴치한으로 규정하며, 적법한(?) 공권력 행사를 방해하는 자들에 대해 가차 없는 응징을 요구한다.

'평택사태' 본질 외면하는 일부 네티즌

이들은 '평택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북한에 대한 전쟁억지력을 위해서라는데 왜 휴전선 근방이 아닌 평택에 대규모 미군기지가 들어서는지, 정작 주한미군은 줄어드는데 당초보다 훨씬 넓은 부지가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지 등과 같은 기본적인 물음조차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행동은 전부 친북, 반미주의에 물든 때문이고, 이는 국기를 위협하는 범죄이므로 엄단해야 한다는 논리만이 이들의 두뇌 속에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정부 하에서 자행되는 야만적 국가폭력도, 대추리 주민들의 절규와 눈물도, 장차 평택이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력충돌의 장(場)이 될 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이들의 안중에는 없다. 이들의 시야에는 오직 반미꾼들에게 매 맞는 군경들의 모습과 동요하는 한·미 동맹만이 들어올 따름이다.

평택사태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다양하지만, 상당수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여전히 숭미(崇美), 반북(反北) 프레임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었다는 점은 흔히 간과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범대위와 대추리 주민들에 대해 쏟아내는 섬뜩한 증오와 저주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중요한 기제가 바로 이 '친미, 반북 프레임'이다.

숭미·반북 프레임에 포획된 대한민국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진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부합해야 합니다. 만약 진실이 프레임과 맞지 않으면, 프레임은 남고 진실은 버려집니다."

숭미·반북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은 위에서 조지 레이코프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프레임과 충돌되는 사실은 배척하며 자신의 프레임과 부합하는 사실들만 흡수한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조차도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프레임에 맞지 않으면 기각당하는 것이다.

이미 숭미·반북 프레임의 지배를 받고 있는-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더딜 뿐만 아니라 노력에 비해 성과도 적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한 뼘이라도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숭미·반북 프레임의 허구성을 효과적으로 폭로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프레임을 새로운 언어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래서 시급하다.



기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에서 협동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대자보와 뉴스앤조이, 다음블로그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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