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문제설정

 

 

이러한 지적,제도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의미를 좀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출간된 1979년의 프랑스는 매우 첨예한 갈등이 지배한 시기였다.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좌파 내부에서도 유로공산주의의 지지자들과 이에 대한 비판자들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구조주의 진영 내부에서 신철학파를 둘러싸고 푸코와 들뢰즈가 결별하고, 구조주의자들(특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격렬하게 제기되고, 다시 알튀세르에 대한 마오주의적 비판(바디우를 중심으로 한)이 체계적으로 전개되는 등 여러 전선에 걸쳐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슈레가 속해 있던 알튀세르의 노선 내부에서 보면 이 시기는 60년대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가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르크스주의의 개조 노력이 실패로 귀결되는 시기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도래했음을 선언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개조의 시도와 다른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일반화하려는 새로운 문제설정이 막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마슈레와 발리바르는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헤겔 또는 스피노자』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이론적 정세에 대한 개입의 시도로 읽어야 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기본 화두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구분되는 유물변증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데 있다.

마슈레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헤겔 자신에 의해 재구성된 스피노자의 모습을 검토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헤겔이 재구성한 이 이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세 가지 측면에 따라 비춰진다. 첫째는 수학의 형식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함으로써, 지성의 관점의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둘째는 시초에 절대적으로 충만하게 정립되어 더 이상 역동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재적인 속성의 관점에 따라 추상적으로 반성되고 있는 실체 또는 절대자의 한계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초의 절대자로부터 속성으로, 다시 여기서 양태로 점점 더 퇴락해가는 유출론적 체계의 모습인데, 이는 스피노자가 순수한 부정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것의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마슈레는 이처럼 헤겔의 재구성에 따라 제시된 이 세 가지 쟁점, 곧 기하학적 방법의 문제와 속성의 문제,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정식의 문제를 2부에서 4부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검토를 통해 마슈레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헤겔식의 변증법과 구분되는 새로운 변증법의 가능성이다. 곧 헤겔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궁극적인 잠재력을 끝까지 전개하지 못했으며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마슈레는 이러한 비판은 헤겔 자신의 무의식적 가상에 따라 투사된 상상적인 스피노자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헤겔은 스피노자라는 이 유령, “헤겔 자신의 체계를 의문시하는” 어떤 사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리고 이 사상에 의해 드러난 자신의 체계의 한계를 상상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상상적인 스피노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슈레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 나타나는 위계적 종속관계에서 이러한 쟁점을 해명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한다. 곧 헤겔에서 사유는 “자신의 총체화의 운동 안으로 다른 모든 질서를 결집하고 흡수하는 절대적인 합리적 질서”이며, 이러한 질서 안에 통합된 모든 요소들은 종국적인 목적을 향해 전진하는 시간적,논리적 관계에 따라 위계화된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을 스피노자에 거꾸로 투사하여, 스피노자의 체계는 절대자를 시초에 정립하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퇴락해가는 유출의 체계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헤겔이 보기에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스피노자의 개념은 바로 속성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모순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곧 이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에 의해” 그처럼 지각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속성이 실체의 본질일 수 있는 것은, 지성이 그처럼 지각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절대자인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유한한 인간의 지성에 의해 조건화될 수 있는가? 헤겔은 바로 여기서 스피노자의 비일관성의 징표를 발견한다.

 

그러나 마슈레에 따르면 헤겔의 주장은 텍스트상의 전거도 희박할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독창적인 속성이론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마슈레가 특히 강조하는 점이 속성들의―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외연적 무한의 중요성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사유”와 “연장”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한다. 왜 이 “무한하게 많음”이 중요할까?

 

  1) 이는, 헤겔이 해석하듯이 속성들의 관계를 외재적 대립의 관계로 간주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겔은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사유”와 “연장” 두 가지만이 존재하며, 이것들은 지성이 실체를 반성하는 추상적 형식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속성들이 이렇게 이해되면, 절대적 실체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자신의 외재적 본질들로 분산되고 해체되어 버리며,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자의 통일성은 추상적이고 외양적인 통일성에 불과한 것이 된다. 하지만 속성들은 무한하게 많기 때문에,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두 가지 대립물의 관계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이처럼 각각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음”은 『윤리학』 1부 정의 6에서 말하고 있듯이, 일체의 부정을 제거함으로써 실체를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 만들며, 따라서 실체를 절대적 통일체로 만들어준다.

 

  2) 또한 이러한 외연적 무한성은 우리가 실체에 대한 인식에서 수적 관점을 배제할 수 있게 해준다. 곧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유일”하며 이 “유일성”은 실체의 한 특성을 이루지만, 이를 원인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수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실체가 유일한 것은 실체의 절대적 무한성, 절대적 역량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체계를 “일원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실체의 통일성이나 속성들의 상이성은 하나나 둘, 여럿 같은 숫자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이는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파악하는 적합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유출론적 “이행”의 관계도 “위계적 종속”의 관계도 아니며, 게루 같은 사람이 주장하듯 “구축construction”의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스피노자 자신이 강조하듯 “구성constitution”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구성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슈레가 제시하는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동일성이라는 테제의 의미를 정확히 해명하는 게 중요하다. 이 테제는 속성들의 “실재적 상이성”과 동시에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통일성”을 뜻하는데, 이러한 난해한 주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마슈레는 2부 정리 7의 이른바 “평행론” 정리, 곧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하다”는 정리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우선 피해야 할 오해는 이 정리가 주장하는 것은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평행성, 그리고 두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곧 관념들과 물체들 사이의 일치나 합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정리에서 “사물”은 관념들 및 물체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리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의 속성에 따라 파악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속성들에 따라 파악된 것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있다. 이는 각각의 속성에서 실체가 항상 이미 자기자신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실체의 절대적인 자기표현은 각각의 속성이 아무런 외적 제한 없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속성이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실체의 절대적 통일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는 바로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에 있다. 곧 각각의 속성은 그 자신의 형식/형상에 따라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을 표현하며, 이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에 따라 표현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헤겔이 속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범하고 있는 해석상의 오류―속성들을 지성이 절대자를 반성하는 외적 형식으로 간주하고, 속성들은 두 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 대립관계로 해석하고, 속성들과 실체의 관계를 퇴락하는 이행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는 부정적인 매개의 운동을 통해서만 무한자의 구체적인 보편성과 유한자의 실재성을 얻을 수 있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마슈레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4부에서는 “부정”과 “규정”의 관계가 논의되며, 여기에서 쟁점은 스피노자에서 유한자의 실재성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지, 따라서 무한자의 구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헤겔은 스피노자가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천재적인 정식을 발견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스피노자가 모든 유한한 규정들을 지양의 운동으로 이끌어가는 부정적인 것의 실정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규정은 단지 부정에 불과할 뿐, 또다른 상위의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실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유한한 규정들, 곧 유한한 양태들은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못한 외양, 가상에 불과하며, 역으로 절대자는 이러한 유한한 규정들과 외재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내용없는 절대자에 불과하게 된다. 요컨대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에는 아무런 실정적인 이행의 매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슈레는 이 문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해명하고 있다. 첫번째 문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절대자와 유한자의 관계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는 곧 스피노자에서 무한양태의 지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헤겔이 생각하듯, 유출적인 퇴락의 중간 단계, 곧 유출적 이행의 매개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두번째 문제는 유한자, 유한양태의 지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헤겔이 생각하듯 스피노자에서 유한양태는 외양, 가상에 불과한가? 아니면 유한양태는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가? 또 그렇다면 유한양태는 어떻게 이러한 실재성을 얻게 되는가?

 

첫번째 문제는 다시 두 가지 측면에서 해명된다. 1) 직접적 무한양태(사유의 경우는 “신의 관념”, 연장의 경우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속성과 양태를 매개해 주는 것인가? 하지만 이름이 가리키듯이, 그리고 스피노자 자신이 분명히 “신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직접 따라나오는 것”(『윤리학』 1부 정리 28의 주석)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직접적 무한양태는 매개로 간주될 수 없다. 이것들은 실체 또는 속성이 자기자신을 직접 표현하는 “방식modus”, 곧 양태이며, 이런 한에서 “일종의 무조건적인 것들”이다.

 

2) 그러나 그렇다면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은 일종의 매개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는가? 마슈레가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개적 무한양태는 사실 다수의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가 소산적 자연으로서의 이 매개적 무한양태를 “하나의 개체” 내지는 하나의 전체로 제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마치 자연에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부터 복합 물체들을 거쳐, 이 물체들의 총합으로서의 우주 전체의 모습에 이르는 위계적 계열, 또는 합성의 질서/순서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슈레는 이러한 인상은 그릇된 것이며,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과관계의 본성을 잘못 이해한 데서 생겨나는 가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곧 위와 같이 스피노자의 자연을 개체들의 위계적 질서/순서로 제시하는 것은 자연의 인과관계를 기계론적인 타동적 인과성의 관점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론적 관점은 사물들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해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맞짝으로서 목적론적,섭리론적 관점을 불러오게 된다(『윤리학』 1부 부록). 따라서 이러한 타동적 인과성의 관점이 아니라 내재적 인과성의 관점에서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을 파악해야 기계론적/목적론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우주 전체의 모습을 개체들의 위계적 총합으로서 표상하는 관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곧바로 두번째 문제와 연결된다.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을 내재적 인과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결국 독특한 사물들이 내재적인 인과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함축하며, 이는 곧 유한양태들에게 고유한 실재성이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4부의 [독특한 본질들] 장은 이 책의 철학적 결론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 장은 스피노자 철학을 적합하게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이 장에서는 매우 밀도높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핵심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제시해볼 수 있다. 마슈레는 바로 앞장인 [대립이 아닌 차이]의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 철학과 헤겔 철학에 나타나는 공통점, 곧 “모순은 주어/주체 속에서만, 그리고 주어/주체에 대해서만 파악되고 해소될 수 있다는 관념”을 도출해낸다. 양자에게 차이가 있다면, 데카르트는 유한한 이성의 범위를 모순율의 한계로 제한시키는 반면, 헤겔은 모순율을 전도하여 이 유한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이를 절대적 주체의 운동으로 변모시킨다는 데 있다. 그러나 마슈레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주어/주체 또는 개체를 실존의 영역에 위치시키고, 따라서 모순의 문제 역시 사물들의 실존의 영역, 곧 타동적 인과성의 영역에 위치시킨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게 두 개의 상이한 질서, 상이한 세계―하나는 본질들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들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내재적 인과관계와 타동적 인과관계가 두 개의 인과관계가 아니듯이, 본질의 질서와 실존의 질서 역시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 질서가 아니며, 단 하나의 동일한 현실에 대한 상이한 표현들일 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가상적인 인식―현대적인 용어로 하면 이데올로기―역시 합리적인 인식 못지 않게 실재적인 하나의 인식이며, 따라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슈레의 도발적인 표현을 따르자면 “극단적으로는 이 인식의 종류들 중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참되다”(만약 우리가 진리와 적합성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면)고 긍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종류들은 자신들이 기능하는 체계 속에서는 똑같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는 독특한 사물들은 본질의 수준에서는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 안에서in se” 존재함을 의미한다. 곧 독특한 사물들의 본질은 외재적 대립은 물론이거니와 내적 모순에 의해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규정된 방식으로certo et determinatio modo” 이 독특한 사물들 안에서 행위하는 신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독특한 사물들은 그것들이 신의 역량을 어떤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바로 “그만큼quantum”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코나투스 개념, 곧 “각각의 사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고 추구”(『윤리학』 3부 정리 6)한다는 개념의 의미이며,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각각의 사물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하고 있다(『윤리학』 3부 정리 7).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유한자의 고유성이 유지될 수 있는가? 또는 독특한 사물들은 어떻게 독특한 본질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는 모든 독특한 사물들 안에서 신의 활동, 신의 역량의 표현을 보기 때문에, 일종의 기회원인론에 빠지게 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마슈레에 따르면 이는 신과 독특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여전히 외재적인 관계, 제약과 구속의 관계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하며, 신 또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하나의 존재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에 불과하다. 마슈레가 강조하듯이 신은 하나의 전체Tout가 아니며, 독특한 사물들은 개체들이 아니고[ 이 때문에 “res singulares”를 “개체들”이나 “개물들”로 번역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res singulares”의 번역 문제와 관련해서는 뒤에 나오는 <번역에 관하여> 절을 보라], 속성들 또는 무한양태들은 이 양자의 매개가 아니다. 속성들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실체의 통일성을 표현하듯이, 각각의 독특한 사물들 역시 환원 불가능한―왜냐하면 모든 본질은 영원하기 때문에―본질을 보존하면서 실체의 무한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체와 독특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모순들에 따른 매개의 관계로 보지 않고 직접적 동일성의 관계로 본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에게는 주체의 변증법도 목적론적 변증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변증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바로 유물론적 변증법으로서의 “실체의 변증법”이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이러한 작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궁극적인 평가는 독자들 각자의 몫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알튀세르의 작업과 관련하여 간단히 몇 가지 함의만 지적해 두겠다.

 

 마슈레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사실 알튀세르가 『자기비판의 요소들』[L.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ed. Yves Sintomer, PUF, 1998]에서 제시한 한 가지 자기비판과 관련이 있다. 알튀세르는 이 책에서 60년대 자신의 작업은 (형식주의적,조합적) 구조주의가 아니라 스피노자주의에 기초하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자신은 마르크스가 유물변증법을 이론화하기 위해 헤겔을 우회해야 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 다시 스피노자를 우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회는 모든 관념론의 핵심적인 개념쌍이 주체와 목적임을 밝혀줌으로써, 마르크스의 시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여기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유보를 달고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는 헤겔이 마르크스에게 준 것, 곧 모순이 결여되어 있기”[같은 책, p. 188(강조는 알튀세르)]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슈레의 이 책은 알튀세르의 이러한 자기비판에 대한 응답이자 내재적 교정의 시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처럼 스피노자주의를 변증법과 무관한 철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스피노자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다른, 유물변증법을 가공하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슈레의 이러한 답변은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에서 전개되었던 구조 인과성 개념의 풍부한 함의들을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에 맞서) 계속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일관된 노력의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은 알튀세르 자신도 『자기비판의 요소들』이 출간된 다음 해 발표한 강연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인가?]에서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의 주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변증법 문제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좀 길지만 알튀세르의 말을 인용해 보자.

 

그렇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가까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강조는 알튀세르-인용자] 이유에서, 변증법에 선행하는 이유에서 ... 그러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모든 기원과 주체의 철학 ... 에 대한 헤겔의 완강한 거부 때문에, 코기토와 감각론적-경험론적 주체와 초월론적 주체에 대한 그의 비판 때문에, 따라서 지식의 이론이라는 사고에 대한 그의 비판 때문에 헤겔과 가까웠다. ... 요컨대 주체에 관한 모든 철학적 이데올로기의 비판 때문에 헤겔과 가까웠다. ... 그리고 만약 이 비판적인 주제들을 재편성해서 고려해 본다면, 마르크스가 헤겔과 가까운 것은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공개적으로 물려받은 것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에서 이미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에피쿠로스에서 스피노자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 유물론의 전제를 구성하는 이 심원한 친화성에 대해서는 경건한 침묵으로 지나치고 있다. ... 그리고 사람들은 마르크스-헤겔의 관계 전체가 단지 변증법에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의 자기의식에 기초해서 판단해서는 안되며 의식의 배후에서 이 의식을 산출하는 과정 전체에 기초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이 마르크스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 나는 사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문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강조는 알튀세르]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리고 이 유물론이 변증법이 되기 위해서 변증법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를 아는 조건 아래에서만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변증법에 관해 저술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인용자] 마르크스의 침묵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변증법의 결론들로부터 그 유물론적 전제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으며, 그 전제들에 기초하여 그것들이 야기시킨 (강한 의미에서) 새로운 범주들을 사고해야 했기 때문이다[『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146-147쪽; 위의 책, pp.210-211(별도의 표시가 없는 강조는 인용자의 강조다)].

 

매우 함축적이고 중요한 이 구절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좀더 체계적으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알튀세르가 변증법의 유물론적 전제―에피쿠로스에서부터 발원하는―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변증법을 하나의 결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 두기로 하자. 이는 달리 말하면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알튀세르는 모순의 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유물론적 전제에서 파생된 한 가지 결과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바로 이 책에서 마슈레가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 관해 하나하나 치밀하게 검토하면서 내리고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여전히 유물변증법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모순 개념을 “역사화”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순 개념 자체를 새롭게 사고하는 것도, 최종심급 개념을 복잡화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순 개념을 제거하거나 말소하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모순을 부차화하는 것, 그리고 모순을 하나의 계기로 포함하고 있는 관계의 이론을 사고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대한 실천적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바로 여기에 이 책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중요한 이론적 의의 중 하나가 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영향: “또는”에 대하여

 

 

언젠가 발리바르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 책은 유럽의 철학계, 특히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이 책은 당연히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곧 기하학적 방법에 관한 문제나 실체와 속성의 관계 문제, 무한양태에 대한 해석의 문제 등과 같이 이 책이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는 문제들에서 이 책은 표준적인 하나의 입장을 제시해 주었으며, 이 때문에 이 책은 게루나 들뢰즈 등의 저서와 함께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권위있는 해설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아울러 마슈레의 이 책은 스피노자와 독일철학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그 이후 스피노자와 독일관념론에 관한 여러 연구들을 낳는 산파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사실 빅토르 델보스나 마르샬 게루 등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스피노자와 독일 관념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저서들을 낸 적이 있지만[Victor Delbos, Le problème moral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et dans l'histoire du spinozisme, Félix Alcan, 1893; Martial Gueroult, L'evolution et la structure de la doctrine de la science chez Fichte, Olms, 1982(19321) 참조], 그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오랫 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이 분야에서 다수의 주목할 만한 저작들이 출간되었으며, 이 저작들은 스피노자와 독일 관념론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조망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특히 Sylvain Zac, Spinoza en Allemagne. Mendelssohn, Lessing et Jacobi, Meridiens Klincksieck, 1989; Manfred Walther ed., Spinoza und der deutsche Idealismus, Konigshausen & Neumann, 1991; Gabriel Albiac, La synagogue vide: Les sources marranes du spinozisme, PUF, 1994; Jean-Marie Vaysse, Totalité et subjectivité. Spinoza dans l'idealisme allemand, Vrin, 1994 참조].

 

하지만 스피노자 연구에서 이 책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스피노자 철학을 다루는 한 가지 방식―현재화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제공해 주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방식은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해 주듯이 대결confrontation의 문제설정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헤겔이냐 스피노자냐』의 의미로 이해했다. 곧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양 근대철학의 두 대가 사이의 대결이며, 이 대결의 쟁점은 변증법, 다시 말해 관념변증법이냐 유물변증법이냐 사이의 쟁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로 논평을 했다.

 

헤겔 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에서는 마슈레의 말이 옳지만, 헤겔 철학은 스피노자 독해로 모두 환원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곧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서 헤겔 철학의 한계의 증상을 읽어내려는 마슈레의 시도는 성급한 과장이라는 것이다[이러한 독해의 사례로는 André Doz, “Spinoza lecteur de Hegel?”,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1984/1; George L. Klein, “Pierre Macherey's Hegel or Spinoza”, in Spinoza. Issues and Directions. The Proceedings of the Chicago Spinoza Conference(1986), ed. Edwin Curley and Pierre-Francois Moreau, E.J. Brill, 1990을 참조].

 

반면 헤겔 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마슈레의 시도가 불충분하다고 비판한다. 가령 네그리 같은 사람은 1981년에 출간된 『야만적 별종』에서 마슈레의 저작이 헤겔 철학의 한계를 잘 드러내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서 유물변증법을 위한 새로운 이론적 자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일체의 매개, 따라서 일체의 변증법을 거부하는 새로운 구성적 존재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야만적 별종』 이래 “반(反)근대성”의 문제설정 아래, 홉스-루소-헤겔로 이어지는 근대성의 중심적 노선에 맞서는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마르크스의 노선을 진정한 유물론의 노선, 대중의 정치학의 노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동시대의 구조주의 사상가들 또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영역에서 역시 대결의 문제설정에 따라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해 보려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들, 헤겔 독자들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독자들을 하나의 대결로 초대한 셈이며, 또 국내의 독자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대결에 초대장을 받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대결은 누구를 위한, 또는 무엇을 위한 대결인가? 곧 이 대결은 헤겔의 궁극적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대결인가 아니면 이전까지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스피노자의 극적인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대결인가? 또 아니면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승리를 결정짓기 위한 대결인가?

 

마슈레는 1990년에 붙인 [재판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 중 “ou”―곧 영어의 or나 독어의 oder―라는 단어를 두 가지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곧 이는 한편으로 “...이냐aut ...이냐aut”를 뜻하기도 하지만, 또한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잘 알려진 스피노자의 표현이 가리키듯 “즉”, “다시 말해”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읽는다면, 이 책은 일차적으로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오해, 오독에 맞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헤겔철학을 재비판하려는 시도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 책은 헤겔과 스피노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 이 양자의 철학 안에서 공통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읽어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왜 이러한 이중적 독법이 필요한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슈레가 말하는 대결은 외재적인 대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너무 비(非)스피노자적인 발상일 것이다. 반대로 마슈레가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대결―하이데거라면 오히려 Auseinandersetzung이라고 말했을 것이다―은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편성의 철학이 아닌 독특성의 철학, 독특한 사물의 철학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또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 영원성 속에서 현재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헤겔이냐 스피노자이냐도 아니고, 헤겔 스피노자도 아니며, 헤겔 또는 스피노자, 곧 철학(함)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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