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에 대하여

 

 

이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 1938-)의 저서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완역한 책이다. 이 책은 1979년 프랑수아 마스페로François Maspero 출판사에서 알튀세르가 감수하던 “이론Théorie” 총서의 한 권으로 처음 출판되었다가 1990년 데쿠베르트Découverte 출판사에서 [재판 서문을 추가하여 제 2판이 나왔다.

 

피에르 마슈레는 현재 프랑스 릴 3대학Université de Lille 3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프랑스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62년 조르주 캉귈렘의 지도 아래 『스피노자에서 철학과 정치Philosophie et politique chez Spinoza』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에는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로제 에스타블레 등과 더불어 유명한 『자본을 읽자』를 저술,출간했다. 그리고 1966년에는 프랑수아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알튀세르가 시작한 “이론” 총서의 한 권으로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이 두 권의 저서는 60-70년대 프랑스를 비롯한 구미 좌파 이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후자의 저서는 루카치의 반영 개념과 대비되는 생산의 범주를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이 때문에 마슈레는 특히 영미권에서는 문학이론가로서 더 명성이 높다].

 

70년대에는 몇 편의 논문 외에는 별다른 저술활동을 하지 않았던 마슈레는 79년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스피노자 연구에 몰입한다. 그 결과 1992년에는 그 때까지 발표된 스피노자 관련 논문들을 모은 『스피노자와 함께Avec Spinoza』를 출간했으며,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관한 5권짜리 주석서를 출간했다. 이 저작들, 특히 5권짜리 『윤리학』 주석서는 마슈레의 스피노자 연구를 집약하는 중요한 업적으로서, 스피노자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마슈레의 연구는 크게 네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철학사 분야, 특히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문학이론 분야의 연구가 있는데, 위에서 말한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이외에도 1990년에는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는 저서를 출간해서 구미 문학이론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문학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여러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

 

세번째 분야는 마슈레가 “프랑스식 철학Philosophie à la française”이라고 부르는,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 및 프랑스의 철학제도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처음으로 발표한 논문이 그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조르주 캉귈렘의 과학철학에 관한 논문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La philosophie de la science de Georges Canguilhem: Epistémologie et histoire des sciences”(avec présentation de Louis Althusser) La pensée 113, 1964], 그는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 콩트에서 라캉, 푸코와 들뢰즈, 데리다에 이르는 프랑스의 철학자들 및 철학제도에 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이 분야의 논문들은 특히 Histoire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9 및 In a Materialist Way: Selected Essays by Pierre Macherey, Trans. Ted Stolze ed. Warren Montag, Verso, 1998에 수록되어 있다. 그 외 이 책들에 수록되지 않은 선별된 논문목록은 뒤의 [참고문헌]을 보라].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연구들도 주목할 만하지만[특히 마슈레의 푸코에 관한 연구들은 푸코 연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논문들이다], 특히 프랑스 철학제도에 관한 그의 연구들은 우리가 막연하게 단수로, 또는 정관사 la를 사용해서 부르는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française이라는 게 얼마나 허구적인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기울여 볼 만하다[이는 근대철학의 고유한 제도적 형태로서 민족철학 또는 국가철학(독일철학, 프랑스철학, 영미철학, 한국철학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 네번째 분야는 실천철학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특히 마슈레가 릴대학에서 지난 2000년부터 시작한 “넓은 의미의 철학La philosophie au sens large”이라는 이름의 연속강좌에서 잘 구현되고 있다. 마슈레가 말하는 실천철학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실천이라는 개념은 알튀세르가 제창했던 “이론적 실천” 개념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포함한 이론적 활동을 순수하게 정신적인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을 반대하고, 생산production이나 작업opération―규정된 조건 속에서 규정된 결과들을 산출하는 활동이라는 의미에서―으로 볼 것을 제창한다. 하지만 이는 일부의 알튀세르 비판가들이 집요하게 주장하듯이 “현실적 실천”을 “이론적 실천”으로 대체하려는 게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지속되어온 이론theoria, 실천praxis, 생산/제작poiesis의 분류법 또는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의 용어법에 따르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을 비판하기 위해서다[따라서 이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특히 그의 행위-제작-노동의 구분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곧 철학이나 이론적 활동은 아무런 규정 조건 없이 이루어지는 개인의 순수한 창의적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제도적, 물질적 조건 속에서 수행되는 활동이며, 이러한 조건들은 이론적 활동의 성격 및 내용을 규정한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슈레는 이러한 조건이 생산양식에 의해 직접 규정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조건들은 이론적 활동에 내재적인―하지만 거의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이며, 이론적 활동에서 실제적인 결과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한다는 점에서 물질적이거나 객관적인―제약들 및 규칙들로 이루어져 있다[따라서 이는 데리다와 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사라 코프만 등이 제창한 “효과적인 철학/효과 속의 철학philosophie en effet”이라는 문제설정―이는 이들이 처음에는 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갈릴레 출판사에서 공동으로 펴내고 있는 <총서>의 명칭이기도 하다―과 매우 수렴적인 함의를 지닌다(물론 마슈레와 이들 사이에는 선호하는 철학자들이나 스타일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와 관련된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마슈레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7장에서 그 자체로 순수하게 지성만으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없는 저작의 사례로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들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기하학 원론』이라는 책이 전승되어온 복합적인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저술된 고유한 스타일 및 이 책에 담겨있는 논증방식이 특정한 시대적 조건 및 특정한 이론적 관점에 따라 생겨난 것이지 모든 학문적인 활동이 따라야 할 이상적 모범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해석(스피노자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에서)의 문제는 『성서』와 같은 비순수한 저작들에서만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슈레가 보기에 이는 오히려 스피노자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론의 의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이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역자의 [스피노자와 성서해석의 문제](미발표 원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런 의미에서 마슈레가 말하는 실천철학, 또는 “넓은 의미의 철학”의 문제설정은 일차적으로 철학이라는 이론적 활동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실천철학의 관점은 또한 철학과 과학, 예술 사이에 설정되어 있는 얼마간 인위적인 경계들에 대한 비판도 함축한다. 사실 실천철학의 첫번째 의미를 고려한다면, 기존에 이러한 분야들 사이에서 설정되어온 경계들이 그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함을 쉽게 추론해낼 수 있다. 철학이 규정된 (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 실제적인 결과들을 산출하는 활동이고, 마슈레 자신의 실천철학은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통해 좀더 유효한 결과들을 산출하는 것을 추구한다면, 이론적 활동의 무의식적, 물질적 조건이라는 관점에 따라 기존의 분류법들을 변화시키고 재편하려는 노력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넓은 의미의 철학” 강좌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시작되었고, 또 이러한 작업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실 프랑스처럼 상당히 오래전부터 경험과학들과 철학, 예술적 활동 사이에서 활발한 상호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져 온 나라에서 이는 매우 실질적인 철학적 질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마슈레의 작업이 여러 분야에 걸쳐 있고, 또 각각의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그의 작업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스피노자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이래 20여년간의 밀도있는 연구를 통해 마슈레는,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에 중요한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처음에 알튀세르가 감수하던 “이론” 총서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혁신적인 철학운동인 구조주의 운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또 그 스스로 이 운동에 한 가지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의 의의 및 마슈레의 스피노자 연구의 위상을 좀더 정확히 평가해 보기 위해서는 20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철학적 흐름을 간단하게나마 조망해 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

 

 

구조주의 운동과 스피노자 르네상스: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지적, 제도적 배경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을 꼽으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첫째는 구조주의 운동이다. 50년대 인류학과 기호학 및 정신분석학 같은 인문과학 분야에서 시작된 구조주의는 1962년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가 발표된 이래, 1965년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의 출간, 1966년 푸코의 『말과 사물』 및 라캉의 『에크리』의 출간을 계기로 프랑스 철학의 주도적인 흐름으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68 운동을 기점으로 구조주의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영미권에서 소위 후기 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로 알려진 데리다, 들뢰즈(․가타리), 리오타르 등의 작업 및 푸코의 계보학 연구가 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7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도래하고 “신철학자들nouveaux philosophes”이 등장하면서 구조주의 운동은 영향력이 감소되었지만,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을 주도한 흐름이 구조주의의 운동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조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자 마슈레의 절친한 동료인 발리바르는 이를 간명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구조주의는 지난 50년 간 프랑스 철학계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입니다.”[<구조주의와 현대 프랑스철학의 종말: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 『전통과 현대』 2001년 봄호, 207쪽. 계속해서 발리바르는 구조주의 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향력에 비하면 실제로 구조주의가 꽃을 핀 것은 매우 짧은 기간에 불과했습니다. 구조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마자 대표적인 구조주의자로 간주되던 사상가들이 모두 자신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실 구조주의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리고 세칭 구조주의자들도 명확한 공통의 문제의식[문제설정problématique?―인용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서 제 생각으로는 구조주의 사상의 가장 완벽한 발현은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입니다. 그러나 푸코는 루이 알튀세르나 롤랑 바르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질 들뢰즈와 같은 맥락의 구조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지요. 따라서 구조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딱히 정의를 내릴 수도 없고 구조주의자라고 불린 사상가들이 어떤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같은 곳.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대담의 제목(편집자가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곧 이 대담의 제목은 말 그대로 이제 현대 프랑스 철학은 끝장났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따라서 이는 프랑스 철학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환원시키고 싶어하는 일부 국내 지식인들의 희망사항에 은밀하게 공명한다), 이는 발리바르의 진의를 잘못 전달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대담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프랑스철학으로서의 프랑스 철학은 이제 끝났습니다. 다시 말해 5-60년대의 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인류학, 언어학 등을 바탕으로 형성된 구조주의로 대표되는 전후의 프랑스철학은 이제 그 종말을 고하고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따라서 이제는 프랑스에서보다는 일본과 미국 등지의 학생들이 저에게 논문지도를 받기를 원합니다.” 216쪽(강조는 인용자) 이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발리바르의 논점은 두 가지다. 첫째, 프랑스철학으로서의 프랑스철학, 다시 말해 하나의 민족적인 철학형태로서의 프랑스철학 또는 구조주의는 종언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둘째, 이는 구조주의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거나 아무런 중요한 기여도 하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강조표시한 데서 분명히 드러나듯, 발리바르는 프랑스의 민족적인 철학운동으로 시작된 구조주의는 프랑스의 영내를 벗어나 탈민족화되고 세계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곧 이제 구조주의는 더 이상 프랑스 국적의 철학운동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또는 한국 등에서 독자적으로 수용 및 변용됨으로써 새로운 동력을 부여받고 있는 훨씬 광범위한 철학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마슈레 자신이 주장해온 철학적 입장과 동일한 관점이다]

 

둘째는 이 구조주의 운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지만, 얼마간 다른 맥락에서 파악되고 평가될 수 있는 현상으로서 스피노자 연구의 르네상스를 꼽을 수 있다. 구조주의 운동보다 약간 늦게 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는 지난 30여년 동안 양과 질 모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스피노자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한 대담에서 이 상황을 극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마트롱: 정확한 의미에서 제 학위논문은 제가 알제리대학 철학과 강사로 재직하고 있던 50년대 말 내지는 60년대 초부터 구상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 상황은 전무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 몇년 뒤 스피노자를 다루기로 한 세미나의 예비 모임에 알튀세르의 초청을 받아갔던 게 기억나는군요(그런데 이 세미나는 끝내 열리지 못했습니다).

 

로랑 보브: 그 때가 언제였지요?

 

마트롱: 정확히 몇년도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는 『자본을 읽자』가 출간된 다음이었습니다. 이 모임에는 마슈레가 참석했고 바디우도 있었는데, 저는 이미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는 68년 5월 이전이기도 했지요.

 

보브: 그럼 65-66년경이었겠군요?

 

마트롱: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참고문헌으로 델보스Delbos와 다르봉Darbon의 책만 제시해 주었습니다. ... 게다가 제가 게루에게 참고문헌을 물어보러 갔을 때 그는 저에게 “참고문헌? 그런 건 없네! 델보스와 루이스 로빈슨만 빼놓고는 전부 멍청한 놈들 뿐이야!”라고 답변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었고, 이는 사실상 68년 경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

 

보브: 선생님 책에 수록된 참고문헌과 오늘날 스피노자 연구를 시작하는 학생이 갖고 있는 참고문헌을 비교해 본다면, 자연히 ...

 

마트롱: 정말이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 그러다가 68년에 게루보다 조금 앞서 베르나르 루세의 대작이 출간되었습니다.

 

보브: 그리고 들뢰즈의 책도요.

 

마트롱: 들뢰즈는 좀 늦게 나왔습니다. 게루 책은 68년 말에 나왔고, 들뢰즈는 69년 초에 나왔지요(이 책은 68년에 출간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69년 이전에는 서점에 배포되지 않았습니다).[“A propos de Spinoza: Entretien avec Alexandre Matheron” Multitudes n° 3, 2000, pp.169-171] 

 

사실 20세기 후반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매우 의미깊은 시기로 평가될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피노자 저작의 고증본 전집들이 출간되면서[ Van Vloten & Land. ed., Benedict de Spinoza Opera quotquot reperta sunt, La Haye, 1883-1884;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Heidelberg, 1925] 왕성하게 전개되었던 스피노자 연구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거의 소멸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프랑스 같은 경우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스피노자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지금도 많이 논의되는(그리고 국내외 도서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주요 저작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Victor Delbos, Le problème moral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et dans l'histoire du spinozisme, Félix Alcan, 1893(1990년 소르본 대학 출판부PUPS에서 재간행); Le Spinozisme, Vrin, 1950(19151); Albert Rivaud, Les notions d'essence et d'existence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Félix Alcan, 1906; Gabriel Huan, Le Dieu de Spinoza, Félix Alcan, 1914; Léon Brunschvicg, Spinoza et ses contemporains, PUF, 1923; Pierre Lachièze-Rey, Les origines cartésiennes du Dieu de Spinoza, Vrin, 1950(19371)], 역시 1930년대 이후 1950년대까지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60년대 말 이후에는 스피노자 연구에서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는 편의상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첫번째 시기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두번째 시기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이며, 1990년대 중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기가 세번째 시기가 된다.

 

첫번째 시기는 스피노자 연구가 오랜 공백기를 거쳐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기다. 하지만 이 시기의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는 무엇보다 마르샬 게루와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기념비적 업적을 통해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윤리학』 1, 2부에 대한 게루의 두 권짜리 주석서는 단지 프랑스만이 아니라 영미권을 비롯한 전세계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필수적인 참고문헌으로 인정받고 있을 만큼 『윤리학』에 대한 치밀하고 체계적인 주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트롱은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방법을 스피노자 철학에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놀라운 엄밀성으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철학의 체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업적 이외에도 이 시기에는 실뱅 자크, 베르나르 루세 등의 중요한 연구들이 배출되었으며, 이 저작들은 지금까지도 스피노자 연구의 핵심 참고문헌으로 남아있다[Sylvain Zac, L'idée de vie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PUF, 1963; Spinoza et l'interprétation de l'Ecriture, PUF, 1965; Philosophie, théologie et politique dans l'oeuvre de Spinoza, Vrin, 1979; Bernard Rousset, La perspective finale de l'“Ethique” et le problème de la cohérence du spinozisme, Vrin, 1968].

 

두번째 시기의 연구는 두 가지의 큰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 연구가 조직화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1977년 스피노자 사망 300주년을 기념해서 실뱅 자크, 베르나르 루세, 알렉상드르 마트롱, 피에르 마슈레,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등을 중심으로 “스피노자 연구회Groupe de recherches spinoziste”와 “스피노자 친우회Association des Amis de Spinoza”가 결성되어 『스피노자 연구Cahiers Spinoza』를 창간했으며(1991년까지 6호 발간), 1978년부터 매년 철학 학술지 “Archives de philosophie”에 “스피노자 참고문헌 목록Bulletin de bibliographie spinoziste”을 발간하기 시작했다(2002년 현재까지 24호 발간). 그리고 1982년 이탈리아 우르비노Urbino에서 열린 스피노자 탄생 350주년 기념 국제 스피노자 학술회의를 계기로 1985년부터 국제 스피노자 학회지인 『스피노자 연구Studia Spinozana』가 출간되면서부터(현재 17호까지 발간) 스피노자 연구는 전세계적인 연결망을 갖추게 되었다.

 

그 다음 이 시기의 연구들은 매우 강한 실천지향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마슈레의 이 책을 비롯하여, 안토니오 네그리[네그리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지만, 1980년대 이후 계속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활동했고, 또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다른 프랑스 연구자들과 한데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앙드레 토젤 등의 저작[André Tosel, Spinoza ou le crépuscule de la servitude, Aubier, 1984; Du matérialisme de Spinoza, Kimé, 1994]이 이 시기의 스피노자 연구를 대표하는데, 이 저작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배경으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을 추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세번째 시기는 철저한 문헌학적 연구와 학문적 주석의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마슈레 자신의 연구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헤겔 또는 스피노자』나 『스피노자와 함께』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현재의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지니는 함의에 관해 명시적인 관심을 표명했으나, 1994년부터 출간된 5권짜리 주석서에서는 『윤리학』의 문자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방법론적 원칙으로 천명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시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체의 2차 문헌을 배제한 채, 『윤리학』의 논증구조를 따라 하나하나의 단어들 및 문장들을 분석하고, 제시되는 주제들을 세밀히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스피노자 연구의 제3 세대의 작업 역시 현실적 준거를 배제한 가운데, 매우 엄밀한 문헌학적․논증적 분석에 치중하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이 시기에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스피노자 연구자 중 한 사람인 피에르-프랑수아 모로가 “외국의 젊은 스피노자 학도들은 엄밀함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온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을 만큼 수준높은 연구가 다수 배출되고 있다[대표적인 저작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Laurent Bové, La stratégie du conatus. Affirmation et résistance chez Spinoza, Vrin, 1995; Chantal Jaquet, Sub specie aeternitatis: Étude des concepts de temps, durée et éternité chez Spinoza, Kimé, 1997; Henri Laux, Imagination et religion chez Spinoza: La potentia dans l'histoire, Vrin, 1993; Christian Lazzeri, Droit, pouvoir et liberté. Spinoza critique de Hobbes, PUF, 1998; Charles Ramond, Quantité et qualité chez Spinoza, PUF, 1995; Spinoza et la pensée moderne, Harmattan, 1998; François Zourabichvili, Spinoza: Une physique de la pensée, Paris: PUF, 2002; Le conservatisme paradoxal de Spinoza. Enfance et royauté, Paris: PUF, 2002].

 

하지만 이러한 최근의 연구 경향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가 실천적 지향을 포기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2000년 창간된 좌파 학술지인 『대중들Multitudes』에 여러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젊은 연구자들 역시 대부분 좌파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2002년 여름에 유명한 스리지Cerisy 성에서 열린 “오늘날의 스피노자Spinoza aujourd'hui”라는 학술회의는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그동안 축적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스피노자 철학이 현재의 문제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함의들을 검토하기 시작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가 보여주는 엄밀성은 일종의 방법적 엄밀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대략적인 경향을 살펴보는 데 얼마간 유용한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며, 60년대 말 이후 30여년에 걸쳐 이루어진 스피노자 연구의 특징을 도식적으로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좌파적인 성향을 띠고 있고 60년대 구조주의 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연구자들 각자의 지적 배경이라든가 관심사, 스타일 등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30여년 동안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는 매우 풍요로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때문에 (이탈리아와 더불어) 프랑스에서는 “스피노자의 현재성”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쨌든 스피노자 연구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구조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주제적인 연관성이라는 측면이다. 앞의 대담에서 발리바르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구조주의는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된 운동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의 형식주의적,“조합적” 구조주의와 라캉의 RSI식 구조주의,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 들뢰즈의 베르그송식 구조주의 등은 스타일이나 방법론, 이론적 원천 등에서 매우 상이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얼마간 공통적인 한 가지 문제설정을 지적한다면,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각자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근대철학에 지배적이었던 “구성적 주체”, 곧 인식과 행위의 기초 내지는 기준으로서의 주체 대신 “구성된 주체”, 곧 지배구조의 상상적 효과로서의 주체라는 관점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스피노자 철학과 구조주의의 주제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윤리학』 1부 부록이나 『신학정치론』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자기자신을 “국가 속의 국가”(『윤리학』 3부 [서문])로 간주하는 인간의 가상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실천적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주체(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상적 효과로 파악함으로써, 구조주의 및 스피노자 철학은 강한 정치적 지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양자의 또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게루를 제외한다면, 1세대에서 3세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실천적,정치적 함의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왔으며, 특히 스피노자 연구의 2세대는 마르크스주의와 스피노자주의 사이의 연관성의 문제를 자신들의 핵심 주제로 삼아 연구했다. 따라서 마슈레가 한 논문에서 18세기의 유물론적 스피노자주의, 19세기의 범신론적 스피노자주의와 대비하여 20세기(후반)의 스피노자주의를 “정치적 스피노자주의”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주제적 연관성 이외에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측면은 철학제도의 측면이다. 철학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 구조주의 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반(反)제도적이거나 탈제도적이라기보다는) 비(非)제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운동의 비제도적 성격은 특히 후기 구조주의자들로 불리는 푸코나 들뢰즈, 데리다 같은 사람들이 잘 보여준다. 사실 이들 모두는 60-70년대 프랑스의 철학적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이면서도, 프랑스 대학제도의 중심부에 자리잡지 못하고 고등사범학교나 벵센 대학, 또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같은 대학제도의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더 나아가―이것이 좀더 중요한 측면이지만―이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철학적 활동이 정치적․학문적 제도와 맺고 있는 관계를 자신들의 이론적 반성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제도화의 논리에 저항하고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담론의 질서 및 계보학에 관한 푸코의 연구나 들뢰즈(가타리)의 “소수화되기devenir-minoritaire” 개념, 데리다의 기록(écriture 또는 archive) 개념이나 되풀이 (불)가능성itérabilité 개념 및 교육제도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은 모두 (후기) 구조주의의 비제도적 지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반면 스피노자 연구는 제도 내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며, 또 바로 그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프랑스 철학 특유의 제도적 조건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계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대중철학과 제도철학 사이의 경계가 매우 엄격해서, 라캉이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데리다 같은 60-70년대 구조주의 운동의 주역들이 외국 학계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고 활발한 연구대상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프랑스 제도권 철학에서는 거의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대신 제도권 철학에서는 서양의 철학사, 특히 17세기 대륙철학 및 멘 드 비랑에서 베르그송에 이르는 프랑스의 유심론 철학, 그리고 20세기의 현상학 등이 주로 연구되고 있다[최근 구조주의 철학을 비롯한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철학을 대학의 정식 학위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일부 철학자들―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이브 뒤루, 베르트랑 오질비 등―이 “구조주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 한다”는 자조섞인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제도적 경직성을 겨냥한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제도적 상황에서 60년 대 말 이후 전개된 스피노자 연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구조주의 운동을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구조주의 운동의 사상적 기초 중 하나를 제시해 주었으며, 이 운동의 철학적 쟁점들을 좀더 분명히 전개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구조주의자들의 공통적인 문제설정 중 하나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들 수 있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가장 명료하게 제시해 준 사람은 바로 스피노자다. 하지만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이를 수용한 것은 아니며, 또 이를 수용한다고 해도 반드시 스피노자식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라캉 같은 사람은 1933년의 학위 논문 이래 스피노자 철학을 자신의 이론적 토대 중 하나로 간주해 왔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스피노자 철학 대신 칸트, 그리고―마르샬 게루 등의 철학사 연구에 따라 재해석된―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이론적으로 더 선호하게 된다. 반면 알튀세르와 들뢰즈는 훨씬 더 일관되게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자신들의 철학적 작업의 기초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푸코 같은 경우는 부분적으로 스피노자의 작업을 수용하지만, 이는 늘 암묵적이고 모호한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푸코 철학의 스피노자적 측면에 대해서는 특히 Macherey, “Pour une histoire naturelle des normes” in collectif, Michel Foucault philosophe, Seuil, 1988 및 Olivier Remaud, “La question du pouvoir: Foucault et Spinoza” Filozofski Vestnik, Vol. XVIII, no. 2/1997 참조]. 이런 의미에서 60년대 이후의 스피노자 연구는 구조주의의 쟁점 및 갈등을 부각시키는 하나의 촉매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스피노자 연구의 활성화는 프랑스 철학의 민족적 지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데카르트가 곧 프랑스인가?Descartes, est-ce la France?⌋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마슈레도 지적하고 있듯이 프랑스의 철학제도는―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데카르트를 정점으로 한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 대학제도의 중심에 위치한 소르본 대학(파리 4대학)의 철학과 학과장은 데카르트 전공 교수가 맡고, 그는 또 데카르트학회 회장을 맡으며, 다시 데카르트학회 회장은 프랑스 철학회장을 맡는다는 프랑스 철학계의 암묵적 규칙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60년대 후반 이후 프랑스 철학계에서 이루어진 스피노자 연구는 예외적이고 주목할 만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 연구를 주도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좌파 성향의 철학자들이라는 점은 스피노자 연구의 이런 측면을 더욱 부각시킨다. 사실 80년대 프랑스 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는 후설과 하이데거였으며, 90년대 이후에는 분석철학이 도입되어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네덜란드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후설/하이데거나 분석철학과는 달리 스피노자 연구는 이론적,실천적인 측면에서 매우 강한 좌파적 성향을 띤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알튀세르와 푸코가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지적했다시피[L. Althusser, “Conjoncture philosophique et recherche théorique marxiste” in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2, ed.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5; M. Foucault, “Georges Canguilhem: Science et la vie” in Daniel Defert ed. Dits et ecrits, vol.4, Gallimard, 1994 참조], 20세기의 프랑스 철학은 빅토르 쿠쟁Victor Cousin 및 멘 드 비랑Maine de Biran 이래 베르그송까지 지속되어온 유심론적,종교적 성향의 철학과, 20세기 초에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사르르트와 메를로-퐁티를 중심으로 한 비판적,관념론적 철학, 그리고 오귀스트 콩트에서 시작해서 20세기 중반의 바슐라르와 캉귈렘, 알튀세르, 푸코 등으로 이어지는 개념적,과학적 흐름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 연구는 이러한 세 가지 흐름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 속에서 세번째 흐름의 입장의 편에 서서, 제일 국수주의적인 편에 속하는 유심론 철학의 입장 및 코기토적 주체의 전통을 복원하려는 비판적,관념론적 입장에 맞선 싸움을 뒷받침해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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