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쎈연필 > 쌓인 눈은 누가 밟아 주리

죽음은 바로 옆에 있다. 죽음은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성큼 다가서 있는데. 죽음은 공유될 수 없다. 죽음은 오롯이 타인의 죽음이다. 내가 체험하는 순간 나는 이곳에 없다. 삶이라는 상자를 열고 날아가 버리는 것.

죽는 순간 몸 안의 배설물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안에 있는 건 유동적이고 흐물흐물하다. 딱딱한 건 안에 있을 수가 없다. 그것, 우리가 보기 싫어하는, 안 보는 우리의 몸이란 실상 얼마나 부드럽고 눅눅하고 따뜻한가? 죽음은 이러한 속엣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계기다. 집중된 힘이 흩어져 나가는 것. 탄력을 유지한다는 건 집중해서, 흩어져 나가는, 사라져 가는 것에 저항하는 것. 죽는다는 건 급속도로 흩어져, 잘려, 부서져, 찌그러져, 으깨어져, 떨어져, 분해되어, 부패해, 사라져 가는 것.

근사하게 말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 그 과정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이를테면 여행도중 눈길에 미끄러져 전복된 승합차 안에서 온몸이 으깨어질지 모를 어떤 것. 몸이 불 구덩이 속에서 산산히 분해되는 것. 내가 죽어 누워 있지도 못하고 흩뿌려지는 것. 공기 속을 오래도록 부유하며 사라져 가는 것.  

우리는 죽음을 발설하고 싶지 않다.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환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재수 없기 때문이다. 저 너머에 봉인하고 싶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죽음을 향해 있고, 우리는 전생애를 감내하면서 죽음을 사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시선을 회피하는 저 너머를 응시해야만 자기의 존재를 개진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은 그 끔찍한 (어쩌면 진실로 안식처일지도 모를) 곳을 지독하게 응시하려는 사람이었다. 범벅된 피, 고통, 상처; 그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아갔다. 너무 아픈 글만 쓰는 그가 안타까웠고, 읽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는 그를 응원했다. 그가 나아가서 저 너머에 있는 죽음을, 이겨 버리기를.

그래서 죽음은 두려웠나 보다. 자기의 비밀이 시나브로 파헤쳐질까 봐. 죽음은 시인이 두려워서 일찍 잡아갔나 보다. 젊어서 죽음은 억울하다. 안타깝다. 아깝다.

나는 그를 단 한번 마주친 적 있다. 명동 어느 오르막길에 있는 까스등이라는 어두침침한 술집이었는데, 그는 말이 아예 없었고 표정은 어두웠으나, 늘 밝은 얼굴을 한 그의 애인과 퍽 다정해 보였다. 그의 애인은 그를 자랑하진 않았지만 자(사)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그에게 어색한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으나 나는 원체 숫기가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와 나는 몹시 친해질 것 같은, 그래서 언젠가 형, 하고 부르게 될 것 같은, 그런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의 죽음을 슬퍼할만한 사람이 못 된다. 나는 그를 피상적으로만 알 뿐이다.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또, 아주 많이 외로웠던 사람이라고. 그를 모르지만, 그의 시는 안다, 고 말할 정도로 읽었다. 발표된 그의 모든 시를 애독했으며, 애독하며, 애독할 것이다. 그의 재학 시절 시들도 문집에서 모두 찾아 읽었으니 나는 그의 시를 조금이라는 수식어보다는 많이에 가깝게, 좋아하나 보다. 유고를 엮을 만큼 그의 시가 발표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유고를 많이 사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수 있도록 건네 주는 일, 그리고 그가 개진했던 저 너머의 세계를 직시하며, 온 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일. 요며칠 슬프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그저, 아깝다, 안타깝다, 라는 말만 입으로 궁글리고 있다. 내일은 또 시를 제출할 테고,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께 마지막으로 시를 배울 것이며, 나는 학우의 시에 대해 떠들어 댈 것이다. 도대체.

그의 시 몇 편 그리고 그의 숨결이 생생한 홈페이지 주소다. 마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한, 마지막 게시물과 배경음악이 자꾸만 가슴에 걸린다. 그의 명복을 빈다.

 

               가족사진 
                                           신기섭


그들은 모두 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저마다 간격을 두었지만 서로의 핏물이
커튼처럼 그 간격 꼼꼼히 닫아 주었다
무엇을 꼭 끌어안은 모습으로 누워있는 여자의
발치엔 아기가 구토물같이 엎질러져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마다 얼굴을 가린 여자들의
짧은 비명소리 같은 엄마!
(엄마, 언제부턴가 모든 엄마는 비명이었다)
깊이 파헤쳐진 무덤처럼 누워있는 여자
얼마나 귀가 찢어질 듯한 짧은 엄마인가?
혼자 멀찍이 떨어져 누운 여자의 사내는
여전히 술냄새를 풍겼으므로
그의 핏물은 거침없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피로써 스밀 수 있다는 걸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눈을 감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 순간
카메라 불빛이 터졌다, 그들도 이 생에서
눈을 뜨고 가족사진을 박는다

 

               나무도마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화색(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텨가 내려지고 있었다

 

               등대가 있는 곳


위층에서 터진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는 또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노를 젓는다
여자의 몸이 욕실바닥을 휘젓는 소리
살림이 난파되는 소리 비명소리 속으로
콸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오후 내내 베란다에 앉아있던 여자의
흐느낌은 물소리였다 이내 길고 긴
골짜기가 되었다 화분이 하나 둘 흘러갔고
앞날을 모르고 웃고 있는 환한 사진들이 흘러갔다
불붙은 편지는 뒷걸음질치며 느리게 흘러갔고
우수수 머리카락들이 흘러갈 때
멀리 먼 바다의 문어대가리처럼 지던 태양은
먹물 같은 어둠을 갈겨 버렸다
그때 첨벙첨벙 어둠을 밟으며 장화 신은 그가 온 것이다
늘 바다 비린내가 나는 그의 몸,
그는 거친 뱃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갑판에 올라본 적 없는 선장
토막나고 썩은 물고기만 가득 싣고
그의 배의 바깥 손잡이를 끌며
허우적댔다 시장과 거리에서, 그는 자주 목격됐다
과중으로 인해 배의 뒤축이 침몰해 버릴 때면
그의 굽은 몸도 덩달아 들려 올려져 배와 함께
물 위로 입을 내민 고래처럼 포효하곤 했었다
해가 저물고, 그의 배가 여자의 골짜기 끝에 정박했던 것이다
흘러간 것들을 다시 건져 올라온 그가
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향해를 시작한 밤
물소리는 끝이 없고
도대체 저들은 어디까지 흘러간 것일까
귀를 막고 창문을 내다보면 너무 많은
등대의 불빛, 불빛들

 

              현기증


칼을 쥐고 변소에 갔다 변소에 매달린 끈을
끊으러 간다 끈을 잡고 반쯤 서서 일 보던
당신의 몸속에는 숭숭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들 중에 오래 전 내가 살다 나온 구멍 하나;
나를 내 뱉던 그날의 그 구멍처럼 변소가
뜨겁다 탯줄 같은 끈을 끊는데 우글우글 핏빛 똥통 속
구더기들 끓는 냄새 잉잉 파리떼 소리
덩달아 내 온몸에 맺힌 땅방울이 끓는다
툭, 끈은 끊어지고, 그러나 나는 왜 아직도 갇혀 있나?
자궁 속 태아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데
점점 밀려오는 환한 빛; 고개를 숙이고
빛을 향해 나는 머리부터 먼저 내밀고 나가는데
누군가 내 머리를 쭈욱 잡아빼고 있다
바짝 곤두서는 머리칼! 나의 몸이 솟구친다.
빛이 입속으로 들어와 빛을 먹여준다.
빛을 입에 물고 빛에 안겨 숨막히는 이 순간
나를 꼭 안았다가 다시 놓아주는 빛, 한없이
나는 떨어져 내리고 빛은 사라져서 그늘진
마당에 주저앉아 나 이제 숨 쉰다. 희뜩희득
엄마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신생아처럼

 

              아버지와 어머니


그가 보는 동물의 왕국 속; (뱀이 뱀을 먹으며 죽어간다
같은 황토色 비늘이라 얼핏 보면 한 마리 같다
처음과 끝이 꼬리인 길고 긴 몸
뱀의 대가리는 몸 가운데에 멈춰 있다
그 두 눈빛은 핏빛이다 힘껏 뒹굴어도 끊어지지 않는
몸, 속으로 못 박히듯 또 다른 몸이 채워지고 있다
황토色 비늘이 붉은 잔금들로 깨지기 시작한다
천천히 먹어치우며 가는 몸은 멀고 먼 길이다
고독한 길 뱀은 자꾸 이빨을 박으며 간다
독은 길을 따라 몸속으로 서서히 퍼진다
이 끔찍한 길은 포장도로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꾸역꾸역 삼키며 가는 길 뱀은 찔끔 눈을 감는다
그러자 몸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길
어쩌면 처음부터 저도 함께 안간힘 쓰며
몸속으로 밀려왔을, 서로의 몸 끝까지 가지 못하고
멎어버린다면 그 모습 얼마나 웃길까?
사랑은 그런 것, 천천히 몸속을 기어가는 숨막히는 길
서로 다른 끝을 보며 스쳐가듯 하나가 되는 고통 속
다시 슬그머니 눈을 뜬 뱀의 눈이 깊어졌다
함께 가자,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뱀은 운다
커다랗게 부풀어오르며 완전히 하나가 된 시뻘건 몸
천천히 굳어가는데) 그가 보는 동물의 왕국 전원을
강제로 꺼버리는 그녀, 쩌억 벌어진 입에서
독이 쏟아지고 뱀 먹는 뱀처럼 갈 길이 정해진 듯
거실을 기어가는 늙은 몸 하나

 

              이발소 가는 길
 

손등에 글씨를 쓰고 날갯짓을 한 문창과 동생,
몸이 무거운 새* 그 날개에 남겨진 글씨; 삶이 무겁다
상투적이지만……이발소를 찾아가는 이 저녁, 삶이
무겁다 벌써 초겨울 낙엽 깔린 佛光洞 골목,
가슴을 내놓고 박수를 치는 여자; 이제 두 돌이 지났다고
많이 컸다고……(내 눈엔 보이지 않는 무게) 죽은 아기가
크고 있다 나날이 커질 무게, 행복하고 불행한 무게.
그나저나 이발소는 보이지 않고, 제 똥 보고 좋아라 하는
변비 환자같이 떨어진 무게를 굽어보는 홀가분한 가로수들,
처럼 잘라달라고 할까? 뜨거운 이발소 수건에 덮여
벌겋게 익을 얼굴 하얀 거품이 발린 무게 덩어리.
이발사는 칼을 들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하리라, 눈 감으세요.
그러나 얼마 만에 와보는 이발소인데 어둡고 한산하다.
의자에 앉아 이발소의 꽃, 달력 속 벗은 여자를 바라본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발기하는 몹쓸 무게 순간
대문처럼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전신거울, 거기
환하게 나타나는 붉은빛 통로! 어서 건너오라고
내게 손짓하는 여자! 잘못 온 길인데 제대로 온 길같이
설레다 머릿속의 무게들이 가볍게 떨리고 온몸 가득
퍼져나가는 (((떨림))) 천천히 입이 벌어지고, 삶이……
상투적이라서 말하지 않기로 한다.


* 그의 문집 제목임

 

http://xodd1234.netian.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