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복제 논쟁 인간 복제 이후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 원제 Humain, Posthumain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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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1944-)라는 이름은,
알튀세르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약관 20대에
바슐라르에서 캉귈렘을 거쳐, 푸코와 알튀세르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인식론 전통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를 남기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프랑스의 철학자다.
그의 연구는 국내에도 지난 90년대에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되었고,
그 이후에도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백의)나 [진보의 미래] (동문선) 같은 책들이 더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진보의 미래]는 동문선에서 나온 책 중에서도 가히 압권이라고 할 만큼 오역으로 점철된 책인 만큼
독자들은 절대! 그 책을 구입하지 마시기 바란다! 절대!!!)

르쿠르는, 국내에 잘 알려진 에티엔 발리바르나 피에르 마슈레와 함께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사람이다. 발리바르가 역사유물론과 정치철학 분야를 담당하고 마슈레가 문예이론과
철학사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면, 르쿠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또는 현대 인식론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국내에 소개된 책들 이외에도 [바슐라르, 낮과 밤Bachelard, le jour et la nuit](1974),
[반대냐 혁명이냐](1978), [질서와 유희L'ordre et les jeux](1980; 이 책은 르쿠르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이다) 같은 책들을 저술했다.
알튀세르가 공적인 이론 무대에서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도 과학철학과 윤리학 분야에서 빼어난
저작들을 산출했다. 특히 그가 감수한 [과학철학과 과학사 사전]이나 [의학사전]은 200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주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저작들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이렇게 페이퍼를 쓰게 된 것은 얼마전 번역, 출간된 그의 책 한 권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위에 있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매스컴에 널리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르쿠르의 이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원서로는 불과 150쪽 정도 되고, 여백이 여유 있게 편집된 번역본으로도
180쪽 남짓한 이 책은, 분량으로 평가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여럿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은 특히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과학철학적,
윤리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성도 풍부한 책이다.
하지만 책 제목이 시사하듯이(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이
'인간 복제'라는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생명체 복제", "인간 복제"라는 과학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되, 이러한 현상이 함축하는
철학적, 신학적, 정치적, 윤리적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내가 볼 때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서양의 기술적,
과학적 발전의 역사적 과정 속에 위치시켜 고찰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고찰이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국내에 소개된 생명 복제나 인간 복제에 관한 대부분의 저술들은 현재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피상적인 현상 기술에 그치든가 아니면 맹목적인 편들기(가령 생명공학은
과학기술 발전의 신기원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배아는 인격체인가 아닌가 등)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 책은 넓은 역사적 시야와 신선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로 문제를 조망하면서, 현재의
문제가 어떻게 오랜 신학적, 철학적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는지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적절한 방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술이나 인간 본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익숙한 관념들이 개조되어야 하고 특히 윤리에 대한 우리의 관점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물론 내가 볼 때) 보여주고 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의 리뷰를 통해 이야기하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오랜만에 르쿠르의 책을
한글로 접하게 되어 반갑고, 스피노자의 철학적 현재성을 또다른 각도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더욱 기쁘다.
좋은 역자를 한 사람 얻게 된 것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또다른 즐거움이다. 상당히 매끄러운 한글 문장에
충실하고 세심한 역주는 역자가 이 책(과 르쿠르)에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고 또 그만큼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앞으로 다른 책들을 통해서도 자주 접할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