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마이리뷰"에 한국일보 토요일치 신문에 실릴, [유럽을 지방화하기] 서평을 올렸는데,

 

올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평 안에 책의 구체적인 내용이 좀더 담겼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마이리뷰"에 올린 서평을 거의 새로 쓰다시피해서 어젯밤에 다시 보냈습니다.

 

한국일보 서평 수정본을 이 책의 소개를 겸하여 여기에 다시 올려둡니다.

 

---------------------------------------------------

 

  지난 2000년에 출간된 이래 많은 화제를 불러온 역작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저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1980년대 초 일군의 인도 역사가들이 시작한 서발턴 연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일반화하여 엘리트 집단 이외의 모든 인도인, 곧 종속적인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했다. 이는 인도 역사를 서술하는 영국의 식민주의적 관점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도 부르주아 역사학의 민족주의 관점을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서발턴 역사학이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서술하려는 급진적인 기획이었다. 라나지트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가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구하는 19세기 인도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서발턴 농민들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그들을 인도 역사의 주체로 새롭게 세우려고 했다. 일종의 민중사 기획인 셈이다.


 

  그런데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프리즘 총서 12권)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구하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재현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구하가 들려주는 서발턴의 목소리는 역사가로서의 구하가 설정한 틀에 따라 재현된 것이며, 그가 생각하듯 진짜 서발턴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문젯거리로 남게 된다.


  차크라바르티는 이 책에서 서발턴과 재현의 문제를 좀더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이번에는 역사라는 것의 성격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는 역사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주의는 “모든 연구 대상은 그것이 실존하는 내내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세속적, 역사적 시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역사에 관한 사유 양식”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세계 전체는 동일한 역사적 패턴에 따라 발전해왔고 또 계속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텅 빈 시간이라는 개념, 곧 역사적 사건들이 그 속에서 전개되는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틀로서의 시간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역사주의를 문제 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역사주의야말로 유럽의 식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통찰이다. 역사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구조다. 곧 산업화와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 등이 먼저 유럽에서 생겨났으며,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선진 문명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유럽은 세계의 모든 문명이 뒤따라야 할 표준적인 모델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둘째, 역사주의는 서발턴 역사의 문제의식을 관철시키는 데 근본적인 장애물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캘커타 공장 기계 노동자들의 예를 든다. 이 노동자들은 매년 가을마다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종교 의례를 지낸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이는 전(前)근대적 의식의 흔적이다. 곧 자신들의 기계가 잘 가동되도록 모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계 숭배는 우발적인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평가는 이 노동자들의 의식과 생활에 늘 함께 하는 신성(神聖)을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따라서 사라져야 하고 세속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노동자들 자신이 지닌 의식과 믿음, 생활은 이미 역사주의적 틀 바깥으로 배제되어 버린다.


 

  이 사례는 구하가 분석했던 19세기 인도 농민 봉기의 사례와 곧바로 연결된다. 농민 봉기 당시 어떤 농민들은 봉기는 자기들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니라 타쿠르라는 신이 명령한 것이며, 그 신이 직접 싸움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하는 이들의 의식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되살리려고 노력하면서도 이것을 “그들에게 진리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역사가 구하와 서발턴 농민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서발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역사주의를 포기하고, 거기에 입각한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을 포기한 가운데 서발턴의 의식과 믿음을 역사가 자신도 있는 그대로 따라야 할까? 하지만 그 경우 보편성과 합리성은 상실될 것이다. 더욱이 역사주의에 기반을 둔 근대 문명 역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차크라바르티의 주장은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발턴의 의식과 삶이 역사주의에 기반을 둔 역사학에 대하여 일종의 도전이자 한계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발턴이라는 틈새를 포함하기 위해 역사학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발턴들의 독특한 삶의 역사들에 기반을 둔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테면 탈중심적 보편성, 해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화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고전 저작들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독일철학자들과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같은 프랑스철학자들의 저작들까지 두루 꿰고 있는 데다가, 인도의 역사와 사회, 문학 등에 관한 폭넓은 사료들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서와의 대조 없이 술술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두 번역자의 빼어난 능력과 힘겨운 노력 덕분이 아닐 수 없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文明`이란 개념 자체가 발전주의적이거나 역사주의적인 것이죠. 애초부터 문화의 위계서열을 전제한 유럽중심적이고 근대중심적인 개념입니다.

마르크스도 그렇지만 헤겔이야말로 역사주의자입니다.

2) 나는 차크라바리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1부는 이론적으로 흥미진진한데 2부는 퇴행적이고 신통치 않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2부는 이론적으로 빈곤해요.

탈구축적 보편성이건 탈중심적 보편성이건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보편성이나 보편주의를 앞세우는 ˝근대˝ 또는 근대성 혹은 유럽중심주의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뿐이에요.

오히려 근대를 흐트러뜨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근대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거지요.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 그러면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역사주의에 기반을 둔 이른바 근대 문명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보편성이 상실되는 게 난 오히려 바람직해 보이는군요. 그리고 근대적 이성이 무너진다고 합리성이 상실된다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웃기군요.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근대주의자나 그렇게 생각하겠죠.

역사주의에 기반을 두지 않고 근대 또는 보편성을 무너뜨리는 역사학을 추구하면 되는 겁니다!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보편적 인식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유럽이 그런 위치를 찬탈한 겁니다.

보편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차이로 구성되는 것일 뿐입니다.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남자만 달랑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때 그 ˝남자˝라는 그 단어의 의미가 성립합니까?

보편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보편적 인식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유럽중심주의의 효과입니다.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보편적 인간이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차이를 배제하지 않았던 역사학이라는 것은 없었죠.

각각의 인간들의 차이(젠더, 계급, 종교, 나이, 지역 등등)를 최대한 드러내는

˝차이의 역사학˝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군요.

이른바 근대 문명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겁니다.

근대를 그 안에서 최대한 흐트러뜨려서 더 이상 근대라고 부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탈구축적 보편성이든 그냥 근대적 보편성이든 그것들을 추구하거나 거기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변형된 유럽중심주의에 불과합니다.

비교사 좋아하는 강철구나 벤틀리(이른바 지구사) 같은 사람들이 그 예죠.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시 정리하자면

1) 문명이란 개념 자체가 이미 문화를 위계서열화하는 폭력적인 유럽중심주의의 지배효과라는 것.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세계의 모든 역사는 하나의 단일한 과정이고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간다는

헤겔 같은 역사주의자 또는 발전주의자가 좋아하는 개념이라는 겁니다.

˝문명˝이라는 개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유럽중심주의의 시선을 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죠.

유럽의 지방화를 애기하면서 이 개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이러니˝하고 ˝절망적˝인 것입니다.

2) 보편은 그 자체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 인식은 ˝원래부터 또는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보편적 인식이란 것은 애당초 없습니다!

단지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유럽이 그 보편의 ˝자리˝를 찬탈할 것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보편적 인식˝을 추구하려는 생각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의 지배효과입니다.

3) 따라서 유럽중심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또는 유럽을 지방화하기 위해서는

근대 안에 머무르거나 (근대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적이므로) 보편성 또는

탈구축적 보편성 및 탈중심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에는 유럽중심주의에 함몰되는 행위이거나 변형된 유럽중심주의에 머물고 말 거라는 겁니다.

(절대주의나 객관주의, 상대주의나 다원주의도 다를 바 없습니다.)



3) 오히려 근대에 머물지 말고 그 안에서 근대를 흐트러뜨려야 합니다.

더 이상 근대라고 부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보편성을 추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차이˝를 더 드러내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위에 써있는 글의 표현을 빌려오면 역사주의적 근대 문명을 배제해 버리고

이른바 보편성과 합리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역사주의를 벗어나고 유럽중심주의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유럽중십주의의 선물인 근대 국가도 파괴해야 합니다!)


4) 따라서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도 그 근대적 성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중심적인 이른바 ˝보편성˝이나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파괴해야 합니다.

인간들의 다양한 ˝차이˝를 드러내는 보편으로 근대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질적이고 저항적인 ˝차이˝를

최대한 드러내는 역사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5) 보편을 추구하면서 ˝차이˝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을 폐기 처분하면서 ˝차이˝를 재현하는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저는 차크라바르티의 견해와 발마스 님의 견해에 반대하는 거죠.


*보편성 폐기

*합리성 폐기

*근대 문명 배제 (예를 들어 근대 시민사회나 근대 국민-국가 파괴)

*역사주의와 발전주의 파괴

*근대적인 합리성이나 보편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의 역사학 추구.

*˝차이˝의 역사학을 추구하면서 재현의 문제에 대해 모색.

더 이상 ˝근대 사회˝라고 부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비로소 유럽중심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근대 국민-국가를 파괴하고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거나

보편성이나 보편적 인식을 폐기처분한 바탕에서 ˝차이˝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