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ltitudes]라는 좌파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버마스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텍스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하버마스/데리다의 텍스트는
아마 [테러 시대의 철학]에 부록으로 실린 그 글인 것 같습니다)
네그리적인 입장과는 어느 정도로 친화적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Multitudes] 안에는 네그리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입장이 있는데다가
다음에 올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네그리 입장과 관련해서는
자율주의자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니까요.
아래 라자뤼스 얘기에서도 나왔듯
이번 국민투표 문제를 거치면서 세력들/입장들의 분열과 (정세적) 수렴이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만큼
이전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세력들/입장들에 대한 표상 가지고는
지금 사태의 추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을 읽어보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글은 완역이 아니라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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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씨똥, "포스트-정체성의 유럽을 향하여" 정리
<뮐티튀드> 14호, 2003년 가을호.
원문 : http://multitudes.samizdat.net/article.php3?id_article=1173
최근 한 텍스트는 '도래할 유럽의 매력적인 비전'의 토대들을 절합할 것을 제안했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작성하고, 자끄 데리다는 이것을 보증[지지]해주었다. 서명자의 명성 때문에, 유럽과 세계의 인텔리겐챠에게 영향을 미친 이 텍스트는, 그 훌륭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도덕주의적인 자세, 그리고 도래할 세계보다는 과거의 유럽에 더 속해있는 정체성의 문제틀에 빠져있다.
도덕화된 유럽의 여섯 가지 맹점
1) 도덕적 의무. 텍스트의 첫 두 문장이 의무를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럽은 저울에 자신의 무게를 재보아야 한다', '우리는 두 날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의무의 표현은 현대 정치 담론에 오히려 구성적인 것이며, 의지주의자의 자세를 보여줌. 즉, 사태가 어떻게 왜 그런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는 무능력함. 결국 텍스트 마지막에, '정치의 도덕적 원리들'에 명시적으로 호소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에 대한 이러한 회고주의적 비전은 도덕이 세계를 지도할 것이라고 믿는다. 즉, (영구 평화의 세계에 도달)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유럽을) 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2) 법. 자유로운 선택 및 도덕적 의무의 형이상학은 자연스레 법을 강조하는 것으로 번역됨. 2003년 2월 15일 유럽의 거리로 뛰쳐나온 군중들이 부시와 그의 도당들을 비판한 것은, '국제법에 반대되는' 행동이 된다. 개인과 국민국가는 의무의 주체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그 주체들은 계약을 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슈퍼파워'는 그것이 법을 신성시하지 않아서 비난받은 것이지, 그 텍스트에서, 법은 역량이나 힘의 용어로 번역가능한 것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3) 국민-국가. [그네들의 시각에서] 국제법의 주체 그리고 국민국가의 법의 조작자는 자명하게도 국민-국가들이다. 세상의 어떤 다른 이가 국가간의 계약에 들어가고, 법을 공포하고 할 수 있겠는가?
4) 정체성의 문제틀. Nation이 국가에 대한 사유를 지배하는 한에서, 이런 류의 접근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유럽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며, 그 역사의 '뿌리' - 프랑스 혁명, 세계 전쟁, 전체주의, 쇼아 등등 - 를 찾아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회고주의는 가장 명백히 나타난다. 즉, 미래의 유럽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과거로 되돌아가야 할 뿐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는 '유산'이라는 용어를 통해 제기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na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 nati, 즉 출생을 재발견한다.
5) 유럽중심주의. 유럽의 정체성이 동일성주의와는 달리, 차이를 인정하고, 이타성 속에서의 타자를 승인하는 것이며, 이것이 공통의 정체성을 표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 유럽은 이미 제국주의의 쇠퇴에 직면해야 했으며, 그러한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데, 이 와중에서, 미국이라는 적의 편재하는 유령 이외에, 유럽만이 세상에서 유일하다는 식으로 보인다. 오로지 '런던, 로마,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베를린, 파리의 거리'에서만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정교분리원칙이나, 이타성에 대한 승인, 사회 정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텍스트만 읽으면, 마치 유럽이 행성의 나머지로부터 고립된 채 그런 관념들을 발명해낸 듯이 보인다.
6) 칸트. 그 텍스트의 마지막 단어들은 칸트를 위한 것이다. '유럽의 정치적 프로필의 역사적 뿌리들'은 '세계적인 내적 정치의 형태로 칸트의 희망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텍스트 초반부터 칸트의 틀은 적용되었다 (도덕적 의무, 국제법의 토대에 대한 범세계주의적인 질서, 공적 공간의 계몽 등). '세계적인 내적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실상 텍스트의 나머지 부분이 짜놓은 틀을 이중으로 넘어서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한 편으로, 우리는 세계에 놓여있다라는 것. 다른 한편으로, '내부 정치'라는 관념은 이 세계를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조절적 심급하에 두도록 만든다.
아이러니한 대칭
자끄 시라크는 이라크 위기를 착취함에 있어서 부시와 가장 가까웠다. 둘 모두 지정학적 문제를 데마고지의 대상으로 만들 줄 알았다. 서로가 대립함에 있어서도, 두 인물은 거의 완벽한 대칭 거울이었다. 그러나, 칸트적인 가치, 자유, 법치 국가, 민주주의를 말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호소는 위 둘과 마찬가지의 아이러니한 대칭에 참여하게 된다. 부시와 블레어가 '도덕적 의무의 이름으로' 비도덕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압제자의 세계를 해방시키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지식인들은, 유럽이 미국의 슈퍼파워의 헤게모니가 지닌 비도덕성과 비정당함에 저항해야 한다고 응수하면서 마찬가지로 도덕적 의무에 호소했던 것이다. 이라크에 개입하면서 말한 것도 바로 이 '도덕적 의무의 이름으로'였다. 우리 저자들이 유럽의 사유에서 찾고 있는 '뿌리'의 '정치적 운명'이란 것은 미국 공화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말하는 '신성한 미션'과 너무 가까운 것이 아닌가?
전승된 정체성에 반대하는 발명
그러한 정치적 운명에 대한 주장은 그 텍스트가 제기하고 있는 정체성의 수사학의 핵심이다. "전 유럽 시민에게서 정치적 운명에 대한 의식을 기초하는 경험들, 전통들, 공통의 경험(형질)은 도래할 유럽의 매력적인 비전의 토대에 복무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된 과거, 유산 등을 끌어들여야 하는 필요성이 나온다. 유럽이 물론 무로부터 구성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장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과거를 다시 기억하는 것보다 더 필요하다. 유럽적 사회의 생성을 이끌기 위해서는 '인정해야할 전통'과 '거부해야할 전통' 사이의 선택이란 (힘을 가지고 표면을 만들기 시작하고 있는) 스피노자적인 전통과 (지난 30년간 정치적 사유를 먹여살려온) 칸트적 전통 사이의 선택을 거쳐야만 한다. (과거의 '승인' 뿐 아니라) 현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절합되는, 그리고 스피노자적인 존재론에 의해 그 내용이 채워지는, '도래할 유럽의 매력적인 비전'이란 무엇일까? 유럽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런 비전은 당연히 아직 발명해야할 것으로 남아있다. 유럽 통합은 pro-jet, 즉 그것의 논리와 정당성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찾으러 가야한다. 즉, 이미-알려진 것은 본성상 불충분한 그런 발명.
도래할 유럽의 매력적인 비전을 위한 여섯 가지 사항
1. 의무에서 역량으로. 모든 도덕적 담론은 이제는 유지할 수 없는 자유 의지의 형이상학에 기초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만일 내가 개인이 자유롭고 그의 선택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그 개인의 지나간 '잘못들'을 '처벌'하도록 이끌 것이다. 또 나는 선, 악, 그것들 각각의 축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 과학에 의해 지난 한 세기 동안 발전된 원인에 대한 인식들이 제공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축소시키게 될 것이다. (...) 우리의 현실을 짜고 있는 (유럽에 대한 정체성 담론이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지식 경제, 인지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대륙의 진정한 역량은 공동 방어의 정치(이것은 범세계주의적 법에 대한 칸트적인 도덕성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다중들의 교육과 발명의 수준을 높이는 우리의 능력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2. 신성화된 법에서 법(권리)의 역량으로. 과거의 환영들을 보기보다 현재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유럽을 '정치의 도덕적 원리'나 국제법에 대한 존중과 잇는 주장이 프랑스-독일 지식인들의 꿈과는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지 자문할 수 있다. 유럽의 협상자들은 국가 이익을 방어하는 것에 불과하고, 외무부 장관들은 날마다 적법성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 체제들과 계약을 맺는다. 이 모든 유럽의 행위자들은 두 번째 판에 있어서 정치의 도덕적 원리를 거쳐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물론, 우리는 법으로부터 제기되는 문제틀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유 역량은 구체적으로 법의 상태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인류의 생존을 조건짓는다.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와 더불어, 우리 모두가 그것에 의존하고 있는 법이 위에서 문제가 되었던 역량의 또 다른 측면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칸트와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칸트가 순수한 힘의 논리를 상쇄할 수 있는 초월적 원리로서의 법을 신성화할 것을 주장했다면, 스피노자주의는 힘 없이는 법도 없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인간들 사이의 권력 관계 내에는 법에 고유한 역량이 있다. 바로 그것이 포스트-국가적 질서를 둘러싼 현재논쟁의 쟁점이다. (유럽의 혹은 지구적인) '국제법의 토대'를 방어하는 '범세계적 질서'는 법에 대한 승인 위에서만 기초할 뿐, 스스로 구성되거나 발명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행위자들 사이의 역량 관계에 적합한 인식에 대한 관계를 가져올 수도 없다. 행위자들은 모두 그네들의 역량을 실현하고 영속시키기 위해서는 법을 필요로 하므로, 현대 세계에서의 법의 역량을 분석함으로써만, 우리는 범세계적 질서에 실제적인 실존을 부여할 수 있다.
3. 슈퍼 국민-국가에서 지구화된 조절로. 유럽 헌법을 기안하는 것이 제기하는 문제는 결국 국가를 재정의하는 문제다. 모두가 EU에 의해 집중화된 결정과, 지역적 행위자들의 탈집중화된 결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유럽이라는 것을 단일한 조정 심급으로서가 아니라, 수 천 겹의 중첩 형태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유럽을 사유하는 것은 지금 이대로 존재하는 유럽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 구성은 '주권의 지붕'이 아니라, 한 층을 더 짓는 것, 즉 그것의 실제 지붕은 지구적 차원에서 지정되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 유럽 구성(헌법)을 발명해야하는 현재의 과제는 그것이 전지구적 구성의 물꼬를 트는 것으로 구상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4. 전승된 정체성으로부터 모방적 발명으로. '유럽 정체성'이라는 정의는 하버마스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성찰(계몽과 근대성의 기획)의 노선에 위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그것의 논리상 이미-구성된 집단성을 통해 정체성을 정의하는 모든 접근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을 함의한다. 가브리엘 타르드가 잘 밝혔듯이, 독창성이란 기원이나 타자의 고립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의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드는, 스스로를 다양화하는 동학의 결과 속에 위치해 있다. 만일 우리가 계몽주의의 기획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정체성을 모방하면서 발명하는(발명하면서 모방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방적 발명은 타자의 배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포함시키는 것에 기초한다.
5. 유럽 중심주의에서 다중들의 상호작용으로. 유럽이란 것이 우리가 세계적으로 되어가는 과정 중에서 이미 와해되고 있는 중인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적인 근대성의 기획은 논리적으로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이를 것이다. 오늘날 유럽 구성(헌법)을 사유하는 것은 유럽을 전지구성 속에 기입하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 된다. 이 사유가 우리 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귀를 더 잘 기울일수록, 이 구성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행성의 다중들이 다소 직접적인 방식으로 내일의 제도를 주조할 것이다. 범세계적 질서를 구축하는 규칙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 유럽인들이 유럽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다중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으면 있을 수록, 우리는 인류의 해방과 번영을 보장하는 유럽의 기획의 한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유럽의 공공 영역'이라는 문제, 특히 그것의 경제적 하부구조의 문제는 그것이 유럽 바깥의 다중들이 통합되는 지평에서만 제기될 수 있다.
6. 칸트에서 스피노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