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서동욱 교수와 제가 편집 책임을 맡아 올 상반기 민음사에서 출간 예정인 [스피노자와 현대 철학]에 수록될
글 한 편 올립니다. 스피노자와 푸코의 관계론을 비교해본 글인데, 아직 초고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적 매체에서의
인용이나 토론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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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푸코-관계론의 철학, 정치, 윤리
I. 스피노자와 푸코, 불가능한 만남?
스피노자 철학이 현대 프랑스 철학, 특히 지난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 운동에 관여했던 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또 그 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을 띠고 현대 사상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이제는 별도의 논증이 필요한 사실이 아니다[스피노자가 프랑스의 구조주의 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1 및 2007 참조]. 가령 스피노자에 관해 빼어난 두 권의 연구서를 남긴 질 들뢰즈나, 스피노자에 관해 독자적인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철학을 탁월하게 응용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마르크스주의에 큰 영향을 미친 루이 알튀세르 같은 사람이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알튀세르의 제자였다가 그의 사후 각자 독자적인 사상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와 피에르 마슈레의 작업에서도 스피노자의 깊은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다중multitude” 개념을 토대로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열어놓고 또한 현대 사회 분석에서도 독창적인 업적을 남긴 안토니오 네그리(ㆍ마이클 하트)도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주요 인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 사상가가 미셸 푸코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들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준거했던 알튀세르나 들뢰즈 및 다른 사상가들과 달리 푸코는 스피노자에 대하여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이론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직접 하이데거나 니체를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이데거와 니체가 푸코의 사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Foucault, “Le retour de la morale”, DE IV 중 특히 p. 703을 보라.] 따라서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연구는 매우 적은 편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논의로는 Macherey 1988, Remaud 2003, Pfauwadel & Sévérac 2008 및 직접 양자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삼지는 않지만, 두 사람(및 알튀세르)의 사상에서 흥미로운 평행성을 발견하는 Montag 1995를 들 수 있다. Deleuze 1986은 스피노자와 푸코를 비교하는 대신, 스피노자적인 관점에서 푸코를 재해석하는 책(적어도 그 중 몇 부분은 그렇다)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양자를 비교ㆍ고찰하려는 시도는 매우 특이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불가능한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 때문에, 두 사람의 사상에 대한 비교ㆍ고찰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꽤 생산적이고 풍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두 사람은 매우 일관된 관계론적인 관점을 견지한 사상가들이었다. 뒤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푸코는 여러 저작에서 명시적으로 관계론을 자신의 권력 분석의 근본 원칙으로 천명하고 있으며, 스피노자는 범신론자라거나 실체의 철학자라는 세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매우 일관된 관계론의 철학자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더욱이 두 사람의 이러한 관계론적 입장은 알튀세르의 용어를 빌자면 급진적인 이론적 반(反)인간주의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푸코의 경우 이는 개인들은 권력의 원초적 담지자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산물이라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따라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자생적인 가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거기에 해당한다(E I 부록 및 E III P2s, E V 서문 참조).[지금부터 스피노자의 저작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약어들을 사용하겠다.
신학정치론 → TTP 예) 신학정치론 16장 2절 → TTP 16장 2절
정치론 → TP 예) 정치론 4장 6절 → TP 4장 6절
윤리학 → E. 정의(D) 공리(A) 정리(P) 증명(d) 따름정리(c) 주석(s) 보조정리(l)
예) 윤리학 4부 정리 37의 주석 1 → E IV P37s2
아울러 스피노자의 고증본 전집(Spinoza 1925)은 G라는 약어 아래, 권수는 로마자로, 쪽수는 아라비아숫자로 표기하겠다.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경우는 1999년과 2005년에 각각 출간된 새로운 고증본 전집(Spinoza 1999b; Spinoza 2005)을 사용할 것이며, 인용의 경우는 해당 쪽수를 표시하겠다. ] 더욱이 이러한 가상은 초월적인 자연의 주재자에 대한 미신 및 신학자들의 권력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TTP 서문), 스피노자에게 자유로운 주체의 가상은 정치적 예속의 표현과 다르지 않다.[이 점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Bové 1996 6장 및 진태원 2014 중 5장 참조. ]
따라서 스피노자와 푸코 두 사람 모두에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관념은 예속화하는 권력이 산출하는 가상에 불과하며, 이러한 가상을 극복하는 길은 사회계약론에 함축된 부정적인 권력 개념 대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권력 개념(또는 스피노자에게는 “역량potentia” 개념)을 바탕으로 기존의 예속화와 다른 주체화의 양식을 모색하는 길이었다. 푸코는 이를 “통치성gouvernementalité” 내지 “통치gouvernement”라는 일반적인 문제설정에 따라 새로운 자기의 구성이라는 문제로 인식했으며, 스피노자는 한편으로는 균형 잡힌 정치체의 통치라는 의미에서 정치적 안전의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능동화의 모색으로 인식했다. 이처럼 두 사람이 각자 상이한 스타일에 따라 독자적인 해결 방식을 추구했지만, 관계론을 자신들의 일관된 이론적ㆍ방법론적 원리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심원한 공통점을 지닌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시대적인 차이에도, 또한 푸코가 스피노자를 거의 언급하지 않음에도,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공통적이고 비교 가능한 요소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려는 논점은 다음과 같은 물음들로 집약될 수 있다. 스피노자와 푸코 두 사람에게 관계론적인 철학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러한 관계론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권력 분석에서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입장을 낳게 되는가? 이러한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정치적ㆍ윤리적 실천의 규범적인 기초나 방향을 제시해주는 데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 스피노자와 푸코가 이처럼 공통적으로 관계론에 입각한 권력 분석과 정치적ㆍ윤리적 실천을 제시한다면, 그들의 입장은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양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차이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II. 푸코와 스피노자에서 관계론
스피노자와 푸코 철학의 공통점은 일차적으로 관계론적인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푸코의 경우는 그 스스로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관계론적인 관점을 채택하고 있음을 밝히기 때문에 푸코의 철학, 특히 그의 권력이론과 윤리학을 관계론적인 입장으로 이해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관계론의 철학자라는 주장은 매우 놀랍게 여겨질 수 있으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의 용어모순적인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다. 스피노자는 서양철학에서도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이며, 실체의 철학은 관계론의 철학과 거의 정반대의 입장에 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를 관계론의 철학자로 부를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이론적 정당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 편의 글에서 이러한 정당화의 논변을 온전하게 전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우선 푸코가 채택하고 있는 관계론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 살펴본 다음,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푸코와 마찬가지로 관계론적인 관점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로 하겠다.
1. 푸코와 관계론적 전회
푸코는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권. 앎에의 의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등에서 몇 차례에 걸쳐 권력 분석에서 일종의 관계론적 전회를 제안하고 있다. 특히 다음 구절은 이를 매우 잘 보여준다.
권력을 관계의 원초적 항들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할 게 아니라, 관계야말로 자신이 향하고 있는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인 한에서, 관계 자체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해야 한다. 이상적 주체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예속될assujettir 수 있도록 그들 자신으로부터 혹은 그들의 권력으로부터 양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어떻게 예속 관계들relations d'assujettissement이 주체들을 만들fabriquer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권력 형태들이 그 결과로서 또는 그 전개로서 파생되어 나올 유일한 형태나 중심점을 찾기보다는 우선 이 형태들이 지닌 다양성, 차이, 종별성, 가역성을 부각시켜야 한다. 따라서 이것들을, 서로 교차하고 서로에게 준거하고 서로 수렴하거나 반대로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소멸시키는 경향을 지닌 세력관계들로 연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법에 대해 권력의 발현으로서 특권을 부여하기보다는 권력이 작동시키는 상이한 강제의 기술들을 표시해두는 것이 좋다. (Foucault 1997, 305~306―번역은 수정)[푸코의 저작에서 인용할 때 국역본이 있을 경우에는 국역본 쪽수를 중심으로 했으며, 함께 병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원문 페이지수를 달아두었다. ]
여기서 푸코는 네 가지 측면에서 자신의 연구 방법론으로서 관계론을 정식화하고 있다.[이 단락은 진태원 2012b 중 164~168쪽의 논의를 축약한 것이다]
1) 관계항들에 대한 관계의 우위
이러한 원칙으로 푸코가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권력이나 정치에 대한 분석에서 독립적인 개인이나 주체를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입장 및 또한 그것에 전제되어 있는 방법론적 개체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푸코가 방법론적 전체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푸코는 권력의 중심을 가정하거나 권력을 동질적인 전체로 이해했을 것이다. 푸코의 입장은 오히려 권력 관계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개인들이 소유하는 속성이나 대상으로 권력을 이해하는 대신, 권력을 개인들을 형성하고 재생산하고 변형시키는 관계로 파악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사회계약론이 아니라 예속 관계
관계론의 두 번째 원칙은 사회계약론을 예속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권력 관계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개인들이 사회계약론의 기본적인 이론적 전제 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다수의 개인들의 자발적인 의지로부터 어떻게 하나의 국가, 하나의 주권이 구성되는지 해명하려고 하지만, 이는 권력과 지배의 실질적인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호도할 뿐이다. 따라서 통일적인 주권에 기초를 둔 인공적 권력 구조에 관한 리바이어던 모델 대신 “지배의 기술과 전술”(같은 책, 53)로부터 권력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주권 개념에 기초를 둔 법적인 권력 개념 대신 “지배 관계 내지 그 작동장치들”을 부각시키려는 푸코의 이론적 관점의 표현이다.
3) 중심이 아니라 다양성, 차이, 종별성, 가역성
여기서 푸코가 겨냥하는 것은 모든 권력의 통일체이자 중심으로서 국가를 분석의 주요 대상으로 삼는 권력 이론이다.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거의 모든 정치이론은 긍정적인 것으로 보든 부정적인 것으로 보든 항상 국가를 중심으로 권력을 분석해 왔지만, 푸코에 따르면 이는 권력의 실제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서나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하는 데서나 부적절한 관점이다. 권력이 어떤 단일한 중심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사실은 “오랫동안 정치적 사유를 현혹시킨 주권-법 체계”(Foucault 1976, 115―번역은 다소 수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권력의 다면적이고 구체적인 작동을 분석하기 어렵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이 관점은 “권력에 대한 커다란 거부의 ‘한’ 장소”(같은 곳)를 가정하지만, 이는 결국 억압 가설이나 소외론으로 귀착된다.
반대로 푸코에게 권력 관계는 “작용영역에 내재하고 조직을 구성하는 다수의 세력관계,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을 통해 다수의 세력관계를 변화시키고 강화하며 뒤집는 게임, 그러한 세력관계들이 연쇄나 체계를 형성하게끔 서로에게서 찾아내는 거점, 반대로 그러한 세력관계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괴리나 모순, 끝으로 세력관계들이 효력을 발생하고 국가 기구, 법의 표명, 헤게모니에서 일반적 구상이나 제도적 결정화가 구체화되는 전략”(같은 책, 112)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푸코가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등에서 보여주었듯이 권력 분석에서는 항상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더 나아가 권력 관계는 항상 가역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권력이 있는 곳에 바로 저항이 존재하며, “권력 관계는 다수의 저항지점에 따라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같은 책, 115) 권력이 다양하고 구체적, 미시적으로 도처에 편재한 것처럼, 저항 역시 권력망의 도처에 현존하며, 따라서 때로는 서로 모순과 갈등을 빚기도 하는 다양한 저항의 형태들이 존재한다.
4) 법에 부여된 특권을 박탈하기
푸코는 또한 법에 대해 부여된 특권을 박탈하고 그 대신 다양한 강제의 기술들을 분석하는 것을 관계론의 주요한 요소로 포함시킨다. 왜 법에 부여된 특권을 박탈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한 일이 될까? 그것은 푸코에게 법은 사실은 지금까지의 원칙들에서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되었던 특징들을 집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성의 역사 1권 4장(Foucault 1976, 102 이하)을 참조하라] 곧 법은 초월적인 심급(곧 주권)을 가정함으로써, 관계항들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비대칭성을 도입하며, 더 나아가 이러한 초월적인 심급을 중심으로 권력을 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때문에 법은 다양하고 상이한 권력의 기술들을 하나의 중심을 갖는 통일체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법은 보편성과 필연성의 상징으로서, 그것의 기원의 우연성이나 그 역사적 변화의 가능성을 사고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법은 권력을 금기로 간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곧 권력을 금지하고 부정하고 제한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푸코(및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스피노자)가 항상 강조하는 권력의 생산적 또는 긍정적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법으로서의 권력은 “거의 “아니오non”의 힘밖에 없”(Foucault 1976, 106)다. 곧 법으로서의 권력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주체에게 자신이 금지하는 것은 하지 말고 허가하는 것만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무한한 힘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법은 바로 그 금지에 의해 산출된 욕망을 통해 자신의 주체들을 무한한 원환 속으로 이끌어 들이기 때문이다. 법으로서의 권력은 금기와 위반의 무한정한 되풀이와 다르지 않다.
요컨대 푸코에게 관계론이란, 개인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권력이 단일한 중심을 갖는다고 간주해서도 안 되고, 오히려 순환적으로 작동하는 연관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관계론적 원칙에 따를 경우 계약론이 아니라 예속 관계에 대한 분석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이는 다시 법적ㆍ주권적인 관계가 아니라 세력관계들을 연구하는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될 경우 당장 제기되는 반론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푸코에게는 능동적인 주체, 자율적인 주체에 대한 관점이 부재하며, 따라서 정치적 분석에서 아무런 적극적인 규범적 기초나 실천 방향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낸시 프레이저가 처음으로 정식화한 이래(Fraser 1981) 이러한 비판은 하버마스나 찰스 테일러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숱한 주석가들에 의해, 또 대중 매체에 의해 널리 유포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비판에 대해 숱한 반비판들이 제시된 바 있다. 특히 Allen 2011, Campbell 1998, Keenan 1987, Lemke 2002, 2010 참조] 우리는 스피노자에 대해서도 똑같은 질문이 제기되었음을 알고 있다. 특히 헤겔이 자신의 여러 저작에서 스피노자를 범신론pantheism으로 규정하고, 범신론이 내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한계로 “인격” 내지 “주체성”의 부재를 제시한 이후, 스피노자는 서양 철학사에서 항상 범신론=주체성의 부재를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인물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가 스피노자와 푸코를 각각 관계론의 철학자로 이해하려 한다면, 일차적으로 해명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관계론의 철학자 스피노자
푸코가 명시적으로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관계론으로 규정한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을 관계론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리 명확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갖고 있는 철학적 상식과 꽤 어긋나는 일이다. 따라서 간단하게나마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관계론적인 철학인지 설명해둘 필요가 있다.[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적인 철학으로 보는 좀더 상세한 논의로는 진태원 2014 참조]
1) 범신론과 주체성의 부재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의 철학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전통적인 규정, 특히 스피노자 철학=범신론이라는 규정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헤겔 철학을 통해 철학사적인 영향력을 획득한 범신론적 해석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절대자에 대한 사변적 표현이다. 곧 자신과 다른 타자들을 갖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생산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 산출되는 자기원인으로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순수한 실정성positivity의 개념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실체를 절대적으로 실정적인 존재자로 제시함으로써 동시에 실체를 아무런 운동도 인과 작용도 수행하지 않는 정태적 존재자로 제시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운동은 변화를 상정하며 변화는 타자성과 부정성을 전제하는 데 반해, 이러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런 타자성과 부정성도 지니지 않으며, 이는 결국 실체를 정태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면서도 아무런 운동, 아무런 변화도 수행할 수 없는 부동적이고 불활성적인 존재자라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범신론적 해석은 이처럼 실체가 태초에 정립된 부동적인 절대자이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또한 유출론적 성격을 지닌다고 간주한다. 이미 절대적으로 완성되고 충만한 실체가 존재하므로 남은 것은 이러한 실체로부터 내려오는 존재론적 하강의 운동뿐이다. 가령 헤겔은 윤리학 서두에 나오는 실체(자기원인), 속성, 양태들에 대한 정의는 이러한 하강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순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곧 자기원인인 실체가 절대적으로 충만한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주관적 관점(따라서 이미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고 부차적인 관점)을 지칭하고, 양태는 다시 이것들보다 훨씬 더 존재론적인 실재성을 결여한, 사실은 거의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들을 나타낸다.
결국 범신론적 해석에 따르면 이처럼 양태들이 존재론적 실재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무런 주체성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비롯한 개별 존재자들은 자유는커녕 실재성을 박탈당하고 만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주체성이 부재한다. 우선 실체는 내적 부정성의 계기를 결여한 부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인간들은 자연의 필연적 질서의 일부에 불과하므로 자유의 가능성을 부정당하고 주체성도 결여하게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은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실체의 일원론을 통해 극복하려는 이론적 시도의 산물이지만, 데카르트가 확립해 놓은 주관성의 철학을 거부한 대가로 능동성과 자유의 여지를 전혀 포함할 수 없게 된다.
2) 해방의 철학자 스피노자: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 경향, 역량론적 해석[“역량론puissantialisme”이라는 명칭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가인 앙드레 토젤André Tosel 2001에서 빌려온 것이다. 토젤은 역량론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 간주하지만, 이는 사실은 1960년대 말 이후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은 하나의 사상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 해석은 스피노자를 범신론의 질곡에서 빼내어 근원적인 해방의 철학자로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68년의 반역은 역량론적 해석의 동력이었으며, 들뢰즈, 마트롱 또는 네그리를 비롯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더 탁월한 해방의 철학자로 부활했다.[196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수용의 양상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7을 참조하고, 알튀세르, 들뢰즈, 네그리,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에 관한 소개는 진태원 2001을 보라.]
역량론적 해석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 변화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자연이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따라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E I P11, P16) 내재적인 원인, 자기 원인이다. 하지만 신이 이처럼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들, 개체들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게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 또는 실체의 절대적 역량이 양태들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실체와 유한한 실재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 관계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체는 양태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E I P18)이다. 곧 실체의 역량은 양태들의 자유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양태들 자신이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신의 절대적 역량의 유한한 (또는 스피노자 자신의 용어법대로 하면, “일정하게 규정된certa et determinata”) 표현으로서 코나투스 개념은 유한한 실재들이 스스로 어떤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원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E I P36, E III P7, P54 참조)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 그 이론적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까? 게루, 들뢰즈, 마트롱 또는 마슈레와 같은 대가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여전히 몇 가지 모호함을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수동성에 빠져 있는가? 이러한 예속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이는 어떻게 개조될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령 들뢰즈는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가정한다. “우리의 수동력은 불완전성 또는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다.”(Deleuze 1969, p. 204) 이 수동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실재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본질의 차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원인이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의 차원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며 이것이 우리의 예속의 뿌리를 이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의 이론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곧 여러 가지 마주침들 중에서 “좋은 마주침”,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을 선별하고 이를 통해 공통 통념들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
하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인간들은 상상과 수동성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선별이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 인간의 외부 실재들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서는 실존할 수 없는데, 수동력이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들뢰즈 또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이 추구하는 능동성은 외부 실재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남, 곧 해탈함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또는 원초적으로 주어진 능동적인 본질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목적론과 어떻게 다른가?[이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능동과 수동 및 변용이라는 범주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쟁점이다. 좀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2014 7장 참조.]
3) 관계론으로서 스피노자의 철학
이러한 해석들 대신에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으로, 그것도 가장 일관되고 근원적인 관계론 철학 중 하나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는 역량론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열어놓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좀 더 풍부하게 개척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다. 이 제안이 당혹스럽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이며, 따라서 관계론 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더 나아가 이는 매우 통속적으로 이해될 위험도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안하는 관계론을,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세상에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관계론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과 목표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관계론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은 개체화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의 목표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조건을 이루는 예속적 관계(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욕망으로부터 이러한 예속 내지 수동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해보자.
(1) 관계들의 체계로서 실체 또는 자연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의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체는 자연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실체는 오히려 무한하게 많은 인과연관들의 집합 내지 (현대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체계와 다르지 않다. 실체가 지닌 절대적인 역량,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생산해내는 역량은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밀하게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실천적 지향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스피노자에서 인과관계는 내재적 인과관계다(“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E I P18). 이러한 내재적 인과성은 자연에 대한 신의 초월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자연 내부에서의 초월성도 부정한다. 다시 말하면 역량론적 주석가들이 가정하는 것과 달리 스피노자에서 인과관계는 이중적 인과관계로, 곧 신과 개별 양태들 사이의 수직적 인과관계와 개별 양태들 상호간의 수평적 인과관계로 이중화되지 않는다. 윤리학 1부 정리 28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에게 인과관계는 미리 존재하는 개별적인 항들 사이의 타동적이고 선형적인 관계가 아니라, 항상 이미 다수의 항들이 관련되어 있는 복합적이고 비선형적인 인과관계, 곧 연관의 인과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과관계 속에서 개체들이 형성되며, 또한 상호작용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인식은 인과연관의 질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다른 내용을 갖지 않는다.(E I P18, P25, P28 및 E II P7 참조)[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으로는 특히 Balibar 2014 중 2부 2장, Barbaras 1996, 진태원 2014 중 2~4장을 참조.]
(2) 변용의 연관으로서 인과관계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를 결정론적인 관계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선형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다른 존재자, 따라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들” 내지 “변용들affectiones”이라고 부른다. “양태”라는 명칭은 실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주며, “변용들”이라는 명칭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변용으로서 존재하는 실재들은 명칭대로 늘 변화하며, 변화를 통해서만 존립한다. 우선 변용들은 다른 실재들에 의해 “변용됨affici”으로써 성립하고 실존한다. 외부 환경, 외부 실재들과 교섭하고 이를 통해 변용되지 않는 실재는 단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들뢰즈가 말하는 “수동력”이 아니다. 변용되기는 역량의 제한이나 우리의 불완전성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성립하고 축적되기 위한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E II P13 이하의 「자연학 소론」 참조). 그리고 변용들로서 실재들은 또한 “변용함afficere”으로써 존립한다. 곧 변용되기를 통해 성립한 역량을 바탕으로, 규정된 조건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산출하면서 실재들은 실존한다.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상관적인 작용 또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스피노자 철학에서 “변용”의 문제에 대해서는 Vinciguerra 2005 중 1부 “Sentire sive percipere” 참조.]
따라서 개체들로서 실재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다(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의 “존재론적” 함의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의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 내지는 원초적인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변용의 인과연관을 통해서 전개되는 개체화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개체들, 존재하는 실재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과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3) 예속과 능동화
하지만『윤리학』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또한 스피노자가 16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사상의 성숙기에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이라는 두 권의 정치적 저술을 집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의 진정한 관심사는 존재론 그 자체, 또는 그 과학적 표현으로서 자연학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있지 않았다. 그의 철학함의 대상은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었으며, 그의 철학함의 목표는 대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인간의 삶, 이 삶을 규정하는 예속적 관계들을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들로 개조하는 데 있었다.
스피노자 철학의 출발점은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 「서문」이 보여주듯이 목적론적 가상과 미신, 곧 예속 상태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의 삶이다. 먼저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인간의 모든 가상, 모든 편견의 뿌리는 목적론적 관점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든 편견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편견에 의존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자연 사물들이 사람들이 그러듯 어떤 목적에 따라 작용한다고 가정하며, 신 자신이 모든 사물들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Spinoza 1999a, 80~81)
그에 따르면 이러한 목적론적 편견은 두 가지 인간학적 사실에서 비롯한다. 첫째, 모든 유한한 사물의 현행적 본질이 코나투스, 곧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E III P6, P7)이듯이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E III P9s). 이에 따라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원하거나 욕망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의지하고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이 어떤 것을 좋다고 판단한다.”(같은 곳) 그런데 둘째,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일으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E I 부록, 강조는 인용자)는다.
욕망의 대상에 대한 의식과 욕망의 원인에 대한 무지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는 가상과 적합한 인식 사이의 괴리 때문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행동이 자율적인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가상하게 되며, 자신들의 의지의 지배력을 넘어서는 모든 자연활동 역시 초월적 존재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가상하게 된다. 이런 가상은 “자연을 완전히 전도”시킬 뿐 아니라, 자연을 주재하는 초월적 신에 대한 각종 의례와 관습들을 만들어냄으로써 편견을 미신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런 미신적 관습은 전제군주에 의해 예속화의 근본 지주로 활용된다.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그 지주와 버팀목은, 사람들을 기만의 상태 속에 묶어두고, 종교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 공포를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TTP 서문, 61~63)이다.
이렇게 해서 자연의 전도가 실천적으로 완성된다.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실재의 본질은 코나투스, 곧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욕구인데 반해, 위와 같은 경우 인간들은 다른 존재자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며, 이를 큰 명예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런 도착적 행동은 단지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전제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실천적으로도 중대한 과제를 제기한다. 신학정치론을 집필하게 된 스피노자의 근원적인 동기, 더 나아가 윤리학 후반부 및 정치론의 전개방향을 결정짓게 된 계기는 바로 이러한 반(反)자연적, 반(反)본성적인 도착이 가능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러한 도착을 방지할 수 있는 해결책에 대한 모색이었다.
정치학에서 스피노자의 관계론적인 관점은 무엇보다 근대의 자연권 이론 및 사회계약론과 단절한다는 점에서 잘 표현된다.[이 점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4 및 2005를 참조하기 바란다.] 근대 자연권론 및 사회계약론은 권리의 주체로서 독립적인 개인들을 가정하고 이러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계약을 통한 주권의 구성에서 국가의 형성 및 정당성의 근거를 찾는다. 반면 스피노자는 홉스와 달리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단절을 거부하며(50번째 편지), 인간을 포함한 자연적 실재들의 자연권을 그 실재들이 지닌 역량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TTP 16장; TP 2장). 따라서 고전적인 사회계약론에서 간주하는 것과 달리 전면적인 자연권의 양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에게 사회의 형성은 사람들이 지닌 “공통의 정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사회의 존립과 유지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공통의 정서에 의존한다(TP 6장 1절).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주권자의 권한 역시 그가 지닌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고 주장하며, 특히 정치론에서는 주권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을 사회의 궁극적인 토대로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존재론에서부터 인간학 및 윤리학과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관계론적인 관점에 따라 파악될 수 있고, 또 그렇게 파악되어야 좀 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있다.
(4) 우연과 가능성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피노자와 푸코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 심지어 대립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는 무엇보다도 푸코가 제안하는 계보학적 방법론이 우연과 새로운 가능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M. Foucault, “Nietzsche, généalogie, histoire”(DE I) 및 “Qu'est-ce que les Lumières?”(DE II) 참조.] 하지만 스피노자는 무엇보다도 필연의 철학자가 아닌가?
이러한 반론은 일리가 있긴 하지만, 근본적인 반론은 되지 못한다. 스피노자가 존재론의 영역에서 우연과 가능성을 비판하고 이 범주들이 낳는 가상과 신비화의 측면들을 분석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윤리의 영역에서는 우연과 가능성이라는 범주를 긍정하며, 더욱이 양자를 세심하게 구별하고 있다.
정의 3. 나는, 우리가 그것들의 본질만을 고려할 때, 그것들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정립하고 필연적으로 그것들의 실존을 배제하는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독특한 실재들을 우연적인 실재들이라고 부른다.
정의 4. 나는 이 똑같은 독특한 실재들을, 그것들을 생산해야 하는 [어떤] 원인들만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원인들이 그 실재들을 생산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 가능한 실재들이라고 부른다.(E IV D3, D4)
이 두 개의 정의의 공통점은 우연과 가능성 모두 일종의 무지와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다(우연의 경우에는 “발견하지 못하는nihil invenimus”, 가능성의 경우에는 “알지 못하는nescimus”). 이는 우연과 가능성이라는 범주가 자연 인식의 일반적인 원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실천적인 조건과 결부된 것임을 말해준다. 곧 우연이나 가능성은 우리 자신에 대한 범주, 그것도 실천적인 행동과 관련된 범주이며, 이러한 범주에 대한 긍정이 스피노자가 윤리학 1부에서 확립해놓은 자연 인식의 원리 일반에 대한 부정이나 포기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Rousset 2001 참조).
하지만 두 범주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두 경우에 우연은 독특한 실재의 본질과 관련하여 정의되고, 가능성은 독특한 실재의 원인과 관련하여 정의된다. 우연이 실재들의 본질과 관련하여 “우리가” 그 실재들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정립하거나 배제하는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로 규정되는 것은,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우연은 절대적인 우연, 곧 필연과 대립하는 우연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로부터 실존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거나(필연적 존재) 필연적으로 배제되지(불가능한 존재) 않는 존재자, 하지만 그것이 어떤 원인들에 의해 생겨났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자에 대해 적용되는 범주라는 것을 뜻한다. 반면 가능성의 경우 이 범주는 어떤 실재들을 산출하는 원인이 어떻게 그 실재들을 산출하게 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에 적용된다.
III. 법적 권력론에서 구성적 권력론으로
이처럼 스피노자와 푸코가 공통적으로, 하지만 또한 각자의 고유한 방식대로 관계론적인 입장을 보여준다면, 그들의 관계론은 각자의 정치 이론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관철되고 있을까? 또 여기서 나타나는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보기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일차적으로 사회계약론에 대한 두 사람의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근대 정치철학자 중에서는 매우 드물게도 사회계약론에 의거하지 않은 정치철학을 제시했으며, 더 나아가 사회계약론의 핵심 요소들을 비판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고유한 이론적 요소들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리고 푸코 역시 자신의 계보학 저작들, 특히 감시와 처벌 및 성의 역사 1권에서, 그리고 최근 출간된 그의 강의록들에서도 권력에 대한 법적 관점과 아울러 그것의 이론적 구현물로서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법적인 권력론에서 구성적 권력론으로의 이행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이러한 비판은 관계론적 사상에서 두 사람의 공통점과 더불어 또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해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1. 푸코의 사회계약론 비판
사회계약론에 대한 푸코의 비판이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감시와 처벌, 특히 3부다. 3부에서 푸코는 고전주의 시기에 어떻게 규율 권력의 메커니즘이 정착되었는지 분석한 뒤, 각 장 끝머리에서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이 갖는 이론적 의미를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해명한다. 푸코가 사회계약론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의 논점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사회계약이 이데올로기적인 기만이라는 것, 둘째는 사회계약론이 부정적인 권력 개념을 함축하며, 따라서 권력의 생산성 및 긍정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 셋째는 서양 역사의 특수한 시기에 이루어진 권력 행사의 한 형식을 영속화시킨다는 점이다.
1) 이데올로기적 허구로서 사회계약
푸코는 감시와 처벌 2부 2장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18세기 말까지 개인의 자유 침해(유괴 따위)나 자유의 남용(난행, 폭력 등)과 같은 경범죄에 대한 특수한 징벌 방법으로 간주되었으며, 더 나아가 “범죄의 개별성에 대응할 수 없고”, “일반 대중에 대한 효과를 결여”하고 있으며, “비용이 드는 데다 수형자를 나태하게 만들 수 있”고, “피감금자를 간수의 전횡에 방치해둘 위험이 있기”(Foucault 1975, 181~82) 때문에 부적절한 것으로 비판받았던 감금, 요컨대 군주의 전횡 및 권력 남용의 상징으로 비판받았던 감금이 갑자기 19세기 초부터 일반적인 형벌의 제도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의문이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푸코는 감옥 제도의 등장을 18세기에 처벌 권력을 조직하는 세 가지 방법의 경합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 방법은 군주권에 기반을 둔 처벌 방법으로, 여기서 처벌은 군주 통치권에 따른 하나의 의례로 간주되었으며, 수형자의 신체에 대한 보복과 군중들에게 야기하는 공포의 효과가 강조되었다. 두 번째 개혁 법학자들의 처벌 방법은 개인을 법의 주체로 재규정하기 위한 절차다. 그것은 외형적 낙인이 아니라 기호를 이용하고, 표상의 총체적 기호 체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감옥제도의 계획안에서 드러나는 처벌 방법은 개인에 대한 강제권의 기술, 규율의 기술이었다.
푸코는 첫 번째 주권자의 권력에 대항하는 후자의 두 가지 방법 사이의 경합을 사회계약론과 규율권력 사이의 경합, 곧 개인을 법적 주체로 재구성하려는 방법과 복종 주체로 형성하는 방법 사이의 경합으로 간주하며, 19세기 이래 서양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사회 곳곳으로 확산된 것은 바로 규율의 기술에 의거한 권력 메커니즘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교정 기술 속에서 사람들이 재구성하려고 애쓰는 것은 사회계약의 근본 이익에 사로잡혀 있는 법적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복종하는 주체sujet obéissant이자 습관이나 규칙, 그리고 명령에 대해 복종을 강요당하는 개인이며, 그 개인 주위에서 개인에 대해 부단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또한 개인으로서는 자기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작용하게끔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어떤 권위다.”(같은 책, 196)
이런 의미에서 사회계약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만적인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계약이 전제하는 독립적인 개인들은 규율 권력에 의해 생산되고 “제작된fabrique” 존재자들임에도, 사회계약은 그들을 원초적인 또는 자연적인 존재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2) 권력의 긍정성에 대한 몰인식
이는 두 번째 비판, 곧 권력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오도라는 비판과 연결된다.
우리는 흔히 개개인을 구성 요소로 갖는 사회의 모델이 계약과 교환이라는 추상적인 법률 형식에 의거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대에 개인들을 권력과 지식의 상관적 구성 요소로 만들기 위한 기술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상의 허구적 원자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또한 ‘규율, 훈련’이라고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해 제조되는 현실의 모습인 것이다. (...) 사실상 권력은 생산한다.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실에 관한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이러한 생산의 영역에 속한다.(같은 책, 288)
실제로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비롯한 70년대 중반의 저술들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권력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며, 금지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라는 테제다. 반면에 사회계약론은 네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권력의 긍정성을 이해 불가능하게 만든다. 첫째, 사회계약론은 권력을 양도의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권력을 일종의 소유물로 인식하게 만든다. 둘째,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이 각자 지니고 있던 권리, 곧 자연권은 계약을 통해 사회가 형성되면서 시민권으로 변화되는데, 이러한 시민권은 주권자 및 법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대가로 한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에서 권력은 금지와 허가, 의무와 권리의 법적 체계에 따라 인식되며, 이는 권력이 지닌 생산적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셋째, 권력 관계는 획일적이지 않고 다수의 대결점을 규정하거나 불안정성의 근원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그 근원의 하나하나에는 갈등이나 싸움, 세력 관계의 일시적 전도 등의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계약론에서 권력은 유일한 중심, 곧 주권자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전개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마지막으로 사회계약론은 독립적인 개인들을 자연적인 소여로 간주함으로써 근대 권력의 주요 목표는 예속적인 개인들의 생산(과 재생산)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예속화의 성과인 것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Foucault 1975, 60-강조는 인용자)
3) 주권적 권력에 대한 모델로서 사회계약
그러나 푸코도 인정하듯이 “주권자-법체계는 오랫동안 정치적 사유를 현혹”(Foucault 1976, 116)해 왔으며, 권력에 대한 법적인 이해 방식은 서양 사회(및 근대화된 사회 일반)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지, 왜 법적인 권력관이 아직도 그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질문해봐야 하는데, 푸코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자명한 듯이 보이는 일반적이고 전술적인 이유, 즉 권력은 바로 권력 자체의 중요한 부분을 감추는 조건 아래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의 성공은 권력 메커니즘들 중에서 은폐되기에 이르는 것과 비례한다. 권력이 전적으로 뻔뻔스럽다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권력의 영역에서 비밀은 아무리 많더라도 지나치지 않을뿐더러, 권력의 작동에 불가결하기조차 하다. 그것도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비밀을 강요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비밀이 그들에게도 불가결하기 때문일 것이다.(Foucault 1976, 107)
곧 이데올로기적 체계로서 주권자-법 체계 또는 법적인 권력 모델은 권력이 실제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은폐함으로써 기능하는, 그러한 은폐를 자신의 메커니즘의 일부로 지닌 체계이다. 더 나아가 이는 역사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보통 절대왕정의 권력을 “불법 쪽에, 즉 전횡, 남용, 변덕, 선의, 특권과 예외, 비공인 상태의 전통적 계승 쪽에 위치시키는 데 익숙해”(같은 책, 108)졌지만, 사실 “단일한 전체로 구성되고 자체의 의지를 법과 동일시하며 금지와 제재 메커니즘을 통해 행사된다는 삼중의 특징”(같은 책, 107)을 지닌 법적인 권력 모델은 그 초월적 특성 때문에 “군주에 의해 교묘하게 사용된 무기였을 뿐만 아니라, 군주제의 발현 형태였고 군주제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의 형태였다.”(같은 책, 108)
따라서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전개된 프랑스의 군주제에 대한 맹렬한 비판, 법률 개혁가들 및 철학자들의 비판은, 왕에 의한 권력의 남용과 자의적인 행사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법적인 모델 그 자체를 비판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19세기 중반 이후 청년 마르크스를 비롯한 급진적 이론가들이 법에 대해 제기한 비판, 곧 “실제의 권력이 법의 규칙을 벗어난다는 것뿐만 아니라 법의 체계 자체가 폭력을 행사하고 (...) 일반적인 법의 겉모습 아래 지배의 불균형과 불의를 작용하게 하는 방식일 뿐”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비판은 철학자들의 비판보다 훨씬 급진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권력은 본질적으로 기본법에 따라 행사되는 것이 이상적”(같은 책, 109)이라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시대와 목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표상이 군주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제 사유와 정치 분석에서 왕의 목을 자르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법 없이 섹스를 사유하고 동시에 왕 없이 권력을 사유하기.”(같은 책, 111)
2. 스피노자: 사회계약론에서 대중들의 역량으로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은 신학정치론(1670)과 정치론(1677)에서 다소 상이한 양상을 띤다.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홉스 사회계약론의 핵심 전제 중 하나인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사이의 단절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사회상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자연권이 지배하는 곳, 곧 갈등과 투쟁이 지속되는 곳이다. 그리하여 사회계약은 홉스와는 달리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 곧 인공적 질서로서 국가를 정초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권리는 “역량”에 의해 조건 지어지며, 권리의 범위는 역량의 정도에 비례한다. 따라서 주권자의 권리 역시 법적으로 확보되고 규범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 자신의 역량, 곧 “자연권”에 근거를 둔다. 또한 홉스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계약은 역사적 계약으로 나타나며, 더욱이 정치적 계약과 이를 보충하는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된다. 이때 종교적 계약은 사회상태 속에서 지속되는 개인들의 자연권, 곧 정념들을 순화하거나 규율하기 위한 장치로 도입된다. 스피노자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관한 고찰들을 통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의 기능을 설명한다(이점에 관해서는 Balibar 1985 및 진태원 2004 참조). 권력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관점이 더 뚜렷하게, 그리고 이론적으로 훨씬 성숙하게 드러난 곳은 정치론인데, 신학정치론과 달리 이 책에서 스피노자는 사회계약론의 어휘 및 문제설정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가운데 국가의 형성 및 유지에 관해 설명한다. 스피노자의 설명은 크게 세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이하의 세 가지 논점은 진태원 2005의 몇몇 논증을 요약한 것이다]
1)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
신학정치론과 마찬가지로 정치론에서도 인간의 사회적 삶은 정서적 관계로 특징지어진다. 단 전자에서는 아직 스피노자가 역량의 관점에서 정서들을 체계적으로 연역하지 못한 결과 주로 부정적인 정서들이 제시되며, 어떻게 정서들이 사회적 관계의 형성에 기여하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이는 신학정치론이 철학함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실천적 목표에 따라 저술된 저작이라는 점과도 연결된다.] 반면 윤리학 이후에 씌어진 정치론에서는 처음부터 정서들이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 제시된다.
스피노자의 설명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우선 그는 정치론 서두에서부터 인간의 자연권이 지니고 있는 공동적 성격,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강조한다. “국가의 자연적 원인들 및 기초들은 이성의 가르침에서 이끌어내서는 안 되며 인간의 공통 본성 내지는 조건에서 연역해야 한다.”(TP 1장 7절)
이는 근대 자연권에 함축되어 있는 원자론적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자연상태에 있는 각각의 사람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 동안에만 자신의 권리 아래 있기sui juris sit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 혼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자연권은 각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고 각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TP 2장 15절-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자연권이란 원초적으로 독립해 있는 개인들의 권리가 아니라 항상 이미 다른 사람들, 타자들과의 매개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러한 매개를 통해서만 각자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립할 수 있고, 각자의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둘째, 스피노자는 이로부터 사회적 관계의 해체 불가능성이라는 테제를 도출한다. “사람들 모두는 고립을 두려워하고 누구도 고립 속에서는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적/본성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하며statum civilem homines natura appetere, 그들이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정치론 6장 1절-강조는 인용자) 신학정치론 이래 스피노자의 일관된 테제는 자연권은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사회상태 속에서 자연권이 지속된다는 것은, 사회상태 속에서 갈등과 분열, 반목이 그치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 다시 말해 사회 속에는 근본적인 반사회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사회상태의 완전한 해체가 존재할 수 없다면, 이는 인간의 본성 안에 항상 이미 사회성의 경향이 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성의 경향이란 어떤 신비한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서의, 또는 인간 본성의 다양한 표현방식들로서의 정서들이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상호 개인적 관계를 통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인간들이 실존하고 행위하는 이상 인간들은 항상 이미 이러한 관계망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테제는 신학정치론 이래 지속되어온 “자연권은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는 테제를 보완하면서 스피노자 정치학의 인간학적 기초를 완결하는 테제라고 할 수 있다.
2) 원초적 계약의 불가능성
스피노자는 사람들의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주장에서 원초적 계약의 불가능성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는데,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정서 모방imitatio affectuum” 개념이다. 윤리학 3부 정리 27에 따르면 정서 모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그리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실재가 어떤 정서를 겪는 것을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이 사실에 의해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된다.”
이 개념은 정치학에 대해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개념은 고전적인 사회계약론자들(특히 홉스)의 가정과 달리 인간들은 원초적인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인간의 동일성에 대해 외재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라는 점, 곧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개체적(貫個體的)transindividual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관개체성 개념에 기초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으로는 특히 Balibar 2014 중 2부 참조.] 둘째, 이처럼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정서적 관계, 특히 정서들의 모방 관계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정체와 자연권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때문에, 원자적인 개인들의 우선성을 존재론적으로 가정하는 사회계약론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더 이상 이론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그 대신 스피노자 정치학은 새로운 대상을 갖게 된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대상은 바로 대중들multitudo이다.[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 “대중들” 또는 “다중”의 의미에 대해서는 Negri 1983, Balibar 2014 2부 1장을 각각 참조.] 시민론De Cive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하기 위해 대중들을 먼저 배제하고서 논의를 시작해야 했던 홉스와는 반대로 스피노자는 대중들을 원초적인 정치적 실재로서 인정한다. 이는 정서들과 관념들의 연관망으로 이루어진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들에 선행하고 개인들의 정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더러, 이러한 관계가 국가, 따라서 정치의 기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중들은 개인들을 결합하고 대립시키는 이러한 정서들과 관념들의 연관망과 다르지 않다.
셋째, 이처럼 대중들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새로운 대상으로 등장함에 따라 스피노자 정치학의 과제 역시 신학정치론과 달라진다.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국가에 내재적인 적대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주요한 위험을 이루는 내부의 적, 곧 시민들 또는 우중(愚衆)들vulgus을 규율하려 하지만, 정치론에서는 더 이상 대중들 바깥에서, 곧 어떤 초월(론)적 준거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사실 대중들이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이룬다면, 대중들 바깥에서 정치학의 기초를 찾는 것은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지거나(TP 1장 1~2절 참조) 참주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TTP 「서문」 외 여러 곳). 그런데 이처럼 대중들이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 설정되어 대중들이 더 이상 통치의 대상으로서만 간주될 수 없다면, 대중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이며, 이들에게 항상 수반되는 정서적 동요들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3)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또 다른 차이점 중 하나는 전자에서는 multitudo라는 용어가 매우 드물게 등장하고 이론적으로 미미한 위치를 차지하는 반면, 후자에서는 빈번히 등장할뿐더러 이론적으로도 매우 중요다는 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대중들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정치론에서 총 4차례 사용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다음 두 대목이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권리를 보통 통치권[주권]imperium이라 부른다.[정치론에서 “imperium”의 번역 문제에 관한 좋은 논의는 Ramond 2002 참조]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TP 2장 17절)
그 다음 3장 2절에서는 대중들의 역량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용된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처럼 인도되는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TP 3장 2절).
두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통치권 또는 주권을 정의하는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신학정치론에서 주권을 주권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정치론의 이 두 구절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이 구절들은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통치권의 기초로 명시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전개한 “역량의 존재론”과 좀더 부합하는 정치학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둘째,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가 대중들 자체를 일종의 “정치적 주체”로 간주했으며(이는 네그리의 입장이다), 민주주의를 대중들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 간주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에 관한 비판으로는 진태원 2009 참조.]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는 지배 권력에 맞선 인민대중의 비판적인 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라는 좀더 근원적인, 그리고 좀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더 나아가 정서적ㆍ관념적 연관망들의 집합으로서 대중들은 항상 능동성과 수동성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들어 있으며 정서적 동요를 겪기 때문에, 대중들의 역량은 항상 제도적인 매개를 요구한다.
법적ㆍ제도적 매개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띤다. 법적ㆍ제도적인 매개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자생적으로는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존재들로 남아 있는 개인들 및 대중들이 마치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행위하듯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행위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으며, 스피노자는 이를 3장 7절에서 “마치 ~처럼veluti”이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지적한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대중들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정신에 의해 실제로 인도되지는 않지만, 대중들의 역량이 국가의 보존과 안전을 위해 적절하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대중들은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것처럼, 법적ㆍ제도적 매개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이점에 관해서는 Balibar 2001 참조]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국가의 근본 과제를 “국가의 평화와 안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국가의 평화와 안전은 “국가 형태의 보존imperii formam conservandam”(TP 6장 2절)에 달려 있으며, 국가 형태의 보존을 위해서는 대중들의 (정념적) 동요가 낳는 불안정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IV. 주체화
지금까지 스피노자와 푸코가 어떤 의미에서 관계론의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지, 두 철학자의 일반적인 철학적ㆍ방법론적 지향과 정치철학적 관점을 평행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지면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공통점 내지 평행성에도 불구하고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와 20세기 프랑스의 계보학 사상가 사이에 어떤 차이점 내지 분기점들이 존재하는지 주체화(subjectivation)의 문제를 간략하게 검토해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스피노자와 푸코 사상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두 철학자가 용어의 넓은 의미에서 주체화를 자신들의 실천 철학의 핵심 주제로 삼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용어의 넓은 의미에서”라고 표현한 것은, 주체화라는 개념 속에 주체와 관련된 두 가지 과정 또는 오히려 한 가지 과정의 두 가지 양상을 모두 포함시키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주체화는 지배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주체들의 생산을 의미하는 예속화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또 단순히 자율적이고 주권적인 주체들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푸코에 관한 가장 흔한 통념 중 하나는 고고학적 푸코와 계보학적 푸코를 구분하고, 또 계보학적 푸코 중에서도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의 푸코와 성의 역사 2~3권의 푸코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런 구별법에 따르면,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에서는 예속된 주체를 만들어내는 주체의 예속화 과정을 고찰한 반면, 후자의 두 권의 책에서는 이러한 예속화와 구별되는 자유로운 주체의 윤리적 구성의 문제를 탐구한 것이 된다. 이 때문에 비판가들은 푸코 사상이 비일관적이며, 푸코의 권력의 계보학은 이론적으로 (또는 적어도 규범적으로) 실패한 기획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출간되면서 좀 더 분명해졌듯이, 푸코가 후기 저술들에서 탐구했던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는 결코 “주체로의 회귀”가 아니며, 좁은 의미의 도덕적 관계나 실존의 미학으로 축소되는 것도 아니다.[이 점에 관해서는 Leblanc 2006, Lemke 2010, 심세광 2005 등 참조] 오히려 푸코는 ‘통치’ 내지 ‘통치성’이라는 일반적인 문제설정에 따라 예속적 주체화에 관한 권력의 계보학과 자유의 주체화에 관한 윤리적 계보학을 연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앞에서 말한, 주체화는 “한 가지 과정의 두 가지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의 뜻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7세기의 맥락에서 볼 때 스피노자 인간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본질을 욕구 내지 욕망으로 정의했다는 점이다. 이때의 욕망은 이성과 대립하는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충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코나투스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실존과 행위의 역량을 나타낸다. 인간은 그가 무지하든 학식이 뛰어나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아니면 어린 아이이든 나이든 노인이든 간에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 어떤 것을 욕망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본성상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해도 그 방식이 동일한 것은 아니며, 또 그러한 노력과 욕망이 그의 존재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이로운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피노자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일으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비디우스를 인용하여 말하듯이) “더 나은 것을 보고 그것이 더 좋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더 나쁜 것을 좇는”(E IV P 17s)일이 일어나고, 더 나아가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TTP 서문) 되는 일이 일어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예속적 주체화에서 해방적 주체화로의 이행은 중요한 실천적 주제였다.
이러한 주체화의 문제에서 푸코와 스피노자는, 행위의 문제를 말하자면 이차적인 관계로 이해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나 말년의 몇몇 글과 인터뷰에서 통치의 문제를 “행위 인도conduire de la conduite”[푸코 강의록의 역자인 오트르망(심세광 외)은 “conduite”라는 푸코의 개념을 “품행”으로 옮기는데, 이 번역은 condire라는 푸코의 개념이 지닌 함의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conuite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행위”로 conduire라는 단어와 함께 쓰일 때는 “행위-인도”라고 옮겨서 사용하겠다.]의 관점에서 규정한다. 겉보기에는 간단해보이지만, 통치 및 행위-인도라는 개념은 권력 및 주체화에 대해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 개념은 주체의 타율적 조건이라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문제설정을 포기하지 않은 가운데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다. 통치의 관점에 따르면 권력은 실체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더 나아가 관계로서의 권력은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파트너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어떤 이가 타인들에 대해 행위하는 방식이다.”(Foucault 1982, 136) 곧 권력은 “타인들에게 직접적이거나 무매개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행위 양식”, “타인들의 행위에 대한 행위”(같은 글, 137-강조는 인용자)를 의미한다. 권력은 “가능태들의 장” 위에서 작동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일련의 행위들이다. 그것은 고무하고 유발하고 유혹하며 더 쉽게 하거나 더 어렵게 만든다.”(같은 곳) 따라서 권력은 일련의 주어진 가능성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행위자들의 능력, 곧 행위자들의 자유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예속이란, 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행위자들을 억압하거나 구속하는 것, 또는 어떤 행위들을 직접 금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위자들의 행위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그것을 특정한 방향으로 한정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푸코가 콩뒤르conduire라는 개념을 “권력 관계의 특수성을 다루는 데 가장 좋은 보조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콩뒤르라는 개념은 “타인들을 인도한다는 의미(...)와 함께 다소간 개방된 가능성의 장내에서 행위하는 방식”(같은 글, 138)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권력의 행사는 “행위 인도”이며 “가능성들의 관리”다. 그리고 통치한다는 것은 “가능성의 장 또는 타인들의 행위를 구조화하는 것”(같은 글)을 의미한다.
또는 감시와 처벌의 용어법으로 말한다면, 규율권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예속적 주체화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규율은 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규율은 (효용이라는 경제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신체의 힘force을 증대시키고 (복종이라는 정치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동일한 그 힘을 감소시킨다. 간단히 말하면 규율은 신체와 능력[권력]le pouvoir을 분리시킨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신체를 “소질aptitude”, “능력capacité”으로 만들고 그 힘을 증대시키려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에너지”와 그로부터 생길 수 있는 “역량puissance”을 역전시켜, 그것들을 엄격한 복종관계sujétion로 만든다. 경제적 착취가 노동력과 노동 생산물을 분리시킨다면, 규율에 의한 강제는 증가되는 소질과 확대되는 지배 사이의 결속관계를 신체를 통해 확립해둔다.(Foucault 1975-번역은 수정)
이처럼 예속적 주체화가 “신체와 능력[권력]을 분리”시키고, “증가되는 소질과 확대되는 지배 사이의 결속관계를 신체를 통해 확립”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자유의 주체화는 반대로 “어떻게 능력의 신장이 권력 관계의 강화와 분리될 수 있는가?”(Foucault DE II, 1595)라는 질문을 따라 탐색되어야 할 것이다. 푸코가 어떤 통치성의 인도에 따라 행위하는 대신, 그러한 통치성이 원하는 것과 다른 식으로 행위하는 것을 뜻하는 “대항 행위-인도”contre-conduite[오트르망은 이 개념을 “대항 품행”으로 옮기고 있다], 또는 대항 통치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행위가 이차적 관계로 이해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제안하는 능동과 수동에 대한 정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의 2에서 능동과 수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곧 (앞의 정의 1에 따라)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활동한다[능동적이다]nos agere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활동을 겪는다[수동적이다]nos pati라고 말한다.
이 정의는 얼핏 보기에는 별로 색다른 점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데카르트 철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함축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그의 마지막 저서 정념론에서 능동과 수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항. 한 기체/주체에 대해 수동인 것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항상 능동이라는 점.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보겠다. 곧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이루어지는 또는 새롭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일어나는 기체sujet는 수동passion으로, 그것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능동action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능동체와 수동체가 종종 아주 상이하긴 하지만 능동과 수동은 항상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이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관계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상이한 기체에 따라 두 가지 이름을 갖게 된다.(Alquié III, 952)
또한 레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능동과 수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물질적 사물 안에서 수동과 능동은 모두 단 하나의 장소이동 운동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이 운동하게 하는 사물[기동체] 안에서in movente 고려될 때 우리는 이를 능동이라고 부르고, 운동하게 되는 사물[운동체] 안에서in moto 고려될 때에는 수동이라고 부릅니다. 이로부터, 이러한 이름들이 비물질적 사물들에 적용될 때에는 이러한 사물들 안에서 운동과 유비적인 어떤 것을 파악해야 하고, 영혼 안의 의지작용처럼 기동체 편에 있는 것은 능동이라 부르고, 동일한 영혼 안에 있는 지적 작용과 시각처럼 운동체 편에 있는 것은 수동이라 부른다는 점이 따라 나옵니다.(Alquié II, 899)
이 두 텍스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관점은 첫째, 능동과 수동을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능동과 수동은 항상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수동과 능동 모두는 단 하나의 장소이동 운동에 놓여 있다”는 말에서 이런 관점이 잘 드러난다. 둘째, 두 텍스트는 공통적으로 능동과 수동의 차이를 관점의 차이로, 곧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이것을 어떤 것과 관계시키느냐에 따라 성립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가 이를 기동체 또는 운동하게 하는 것과 관련시키면 능동이고, 운동하게 되는 것과 관련시키면 수동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에게 능동은 어떤 운동을 개시하는 것, 따라서 그 운동의 원인을 의미하고, 반대로 수동은 어떤 운동을 받아들이는 것, 따라서 그 결과를 의미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과 비교해볼 때 위에서 인용한 윤리학의 능동과 수동에 대한 정의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스피노자는 능동과 수동을 원인과 결과로 구분하지 않고, 원인의 두 가지 종류 내지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한다. 곧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우리는 능동적이며, 반대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우리는 수동적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의는 수동을 하나의 원인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차이를 보여준다. 수동을 결과로 간주하는 데카르트의 관점에서는 수동은 어떤 운동을 받아들이는 것 또는 어떤 운동을 겪는 것이 되지만,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이는 수동이 아니라 변용되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능동 역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능동이 아니라 변용하기일 뿐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구분은 수동과 능동의 구분과 일치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두 가지의 구분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에게 변용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한 양태들이 다른 유한 양태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며, 능동과 수동은 이 관계 형태의 두 가지 양상을 가리킨다. 능동은 변용이 그 개인의 본성으로부터 명석판명하게 설명될 수 있을 때를 가리키며, 수동은 그 개인이 이러한 변용의 부분적 원인에 불과할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변용의 적합한(또는 전체적인) 원인이냐 아니면 부적합한(또는 부분적인) 원인이냐에 따라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가 구별된다.[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능동-수동 개념의 차이점에 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2014 중 7장 참조]
이는 위의 푸코식의 용어법대로 하면, 어떤 실재와 그 능력을 분리하여, 그 실재의 소질과 능력을 증대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타자의 권력 아래 위치시키는 것, 따라서 그 실재로 하여금 그의 역량 및 그로부터 생산된 결과에 대한 부분적인 원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수동성이 된다. 그리고 그 실재가 자신의 역량 및 그 결과에 대하여 전체적인 원인이 될 때, 그 실재는 능동적인 존재자가 된다. 이 실재는 가령 생산력을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도 있고 정치적 능력을 제한당하는 시민이 될 수도 있으며, 랑시에르가 말하는 몫 없는 이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푸코와 스피노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푸코의 계보학은 늘 신체를 분석 대상으로 하고, 신체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권력과 행위 인도에 주목하는 반면(“영혼 (...) 신체의 감옥”), 스피노자는 이른바 “평행론”,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과 신체의 동일성 이론으로 인해 정신과 신체 사이에 일체의 위계적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며(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이든,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위이든 간에), 정신의 능동과 수동 및 신체의 능동과 수동 사이에 평행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진태원 2012a). 따라서 스피노자에게는 역량의 변이를 나타내는 정서들의 자연학(적은 역량에서 더 큰 역량으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기쁨의 정서들과 더 큰 역량에서 적은 역량으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슬픔의 정서들 사이의 분화를 중심으로 하는)이 실천 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반면, 푸코의 경우는 신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미시물리학 또는 통치성이 정치와 윤리학의 주축이 된다.
또한 이 때문에 푸코와 스피노자 양자는 모두 갈등을 사회적 관계의 중심에 놓고 있음에도, 푸코의 경우 “니체의 가설”(Foucault 1997), 곧 전쟁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사회를 분석하는 권력의 계보학(또는 지배의 기술)을 합리적 기술로서의 자기의 기술과 접합하는 것이 통치성 분석의 화두를 이루는 반면,[이런 점에서 보면 Pfauwadel & Sévérac 2008은 매우 풍부한 논의를 담고 있음에도, 일방적인 전쟁의 논리라는 관점에서 푸코 계보학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다소 문제가 있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정서 모방이라는 단일한 메커니즘에 따라 사회적 갈등과 호혜성을 해명한다. 이런 점에서는 아마도 스피노자가 푸코보다 좀 더 일관된 관계론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토론은 또 다른 화두로 남겨두기로 하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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