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실천문학사 주최로 경향신문사에서 열렸던 김남주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 올립니다. 이 원고는 다소 축약된 형태로 이번 [실천문학] 봄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원래 청탁받은 원고 분량이 50매였는데, 분량이 훨씬 길어졌지요.

 

나중에 심포지엄 원고들을 책으로 묶을 때는 발표문보다 약간 더 보충된 글을

 

실을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심포지엄 발표문이 그대로 실린 곳은 이 서재밖에는 없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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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이후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김남주, 「낫」

 

뒤틀린 세월.
아, 저주스런 낭패로다,
그걸 바로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아직도 김남주야?

 

 

  작년에 󰡔실천문학󰡕 편집위원이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동료인 김정한 선생에게 󰡔실천문학󰡕에서 김남주 시인 20주기를 맞아 특집호를 준비하고 있고, 그와 관련된 학술 모임을 기획하고 있는 데 참여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주저 없이 승낙을 했다. 그에 관해 무언가를 써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한 적은 없었지만, 우연히 전해 듣게 된 김정한 선생의 제안은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어떤 필연성을 지닌 과제로 다가왔다. 그것은, 형식 논리상으로는 모순적이지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번 마주치게 되는, 일종의 우연적 필연의 순간이었다. 우리가 그전까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어떤 잠재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표출되는 순간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사건이나 외상(外傷)을 사후적으로 또는 소급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잠깐의 망설임이나 숙고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거의 즉각적인 그 승낙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이 글의 필자는 지금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아마 김남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의 이름을 여자 탤런트 이름과 혼동하지 않는다면) 많은 독자들이 겉으로든 속으로든 한번쯤 해볼 만한 생각은, ‘아직도 김남주야?’ 같은 반문(反問)이 아닐까 싶다. 실로 그렇다. 김남주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고, 그의 시집을 들춰보며 이런저런 시들을 읊어보는 것 역시 정말 오래만의 일이다. 오늘날 김남주는 그렇게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서 힘겹게, 간신히 살아가는 이름이다. 더욱이 그 이름은 ‘아직도?’라는 의문문의 형식을 띠게 되는 이름이다. 마치 이제는 잊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제는 상실된 것으로, 죽은 것으로, 더 이상 불러낼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 이름에는 늘 의문문이 수반된다. ‘아직도 김남주야?’


  그렇다면 왜 김남주에 대해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느꼈을까? 왜 아직도 김남주라는 이름을 호명하고, 그를 초혼(招魂)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김남주라는 이름은 80년대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광주가 그렇듯이, 김남주 역시 필자에게는 80년대의 동의어들이다. 광주, 김남주, 80년대. 이 이름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것들 모두 ‘아직도?’라는 의문문의 대상이 될 만한 대표적 이름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아직도 광주야? 아직도 김남주야? 아직도 80년대야? 내가 김남주라는 이름을 우연적 필연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의문문들에 대해, 그러한 의문문들을 지탱하고 있는 오늘날의 어떤 심성에 대해, 그러한 심성과 공모하고 있는 어떤 정치적 효과들에 대해, 무언가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아직도 아직도야?’라고.

 

 

김남주라는 시금석

 

 

  나는 지난 2012년 김정한 선생을 비롯한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탈근대ㆍ탈민족ㆍ탈식민: 포스트 담론 20년의 성찰”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인문한국)연구단 소속 ‘도래할 한국민주주의’ 팀 주최로 열린 이 심포지엄은 2012년 6월 15일 개최되었으며, 이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들 중 일부는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민족문화연구󰡕 57호(2012년 12월 31일 간행) 특집호에 수록되었다.] 이것은 199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20여 년 동안 한국의 지식계를 변화시킨 포스트 담론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내가 발표한 글에서 밝힌 바 있듯이,[진태원,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민족문화연구󰡕 57호, 2012 참조] 1980년대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꽤 의미 있는 시기였다. 그 학문적인 수준이 어떠했든 간에, 또 그 도식성과 관념적 급진성이 어떠했든 간에, 1980년대는 한편으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독자적인 민족사를 구성하는 것이 국문학, 국사학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의 중심적인 학문적 과제로 제시된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 독재에 대한 저항의 수단이자 한국 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변혁하기 위한 지적 원천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런데 1988년 직선제 대통령 선거 이후 매우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방식으로나마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되고,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 이후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와해되는 것과 동시에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한 포스트 담론, 곧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은 일련의 담론들은 한국 사회의 지적 풍경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이것은 “가히 인식론적 단절 내지 절단이라고 부를 만한 변화였다. 이것이 충격적인 이유는 국내의 그 누구도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전혀 알지 못했던 사상, 담론, 용어들이 갑자기 시대의 주류 사상과 담론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진태원,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앞의 글, 11쪽. 강조는 원문.] 1980년대에 누가 데리다, 푸코,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또 해체, 시뮬라크르, 규율권력, 파놉티콘, 대상 a 또는 담론 등과 같은 개념들을 누가 들어본 적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사상가들과 이 개념들은, 비판을 위해서든 찬양을 위해서든 또는 단순한 수사적 장식을 위해서든, 학술적 논의 및 저널리즘적 담론에서 공용어로 자리 잡았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아무도 알지 못했던 개념들과 이론들이 너무나 자명한 것들도 변신한 것이다.


  왜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그것은 세계사의 어떤 객관적인 필연성에 따른 불가피한 변화였을까? 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변화의 방식이 반드시 지난 20여 년 동안 일어났던 것과 같은 그런 방식을 띠어야만 했던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포스트 담론의 수입과 급속한 수용을 일종의 애도의 표현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곧 상실된 대상, 이미 죽었거나 떠나버린 대상을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애도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으로서 포스트 담론은 지난 100여 년 간 전 세계 해방 운동의 지적ㆍ정치적 기초를 제시해 준 바 있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종말을 고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러한 애도는 동시에 고유한 맹목을 지닌 것이었다. 왜냐하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요약되는 새로운 종류의 갈등과 적대, 또는 새로운 종류의 계급투쟁의 시작이었음에도, 이러한 애도는 현실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을 현실 역사의 종말로 또는 적어도 정치적ㆍ사회적 갈등 자체의 종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한국 사회에서 사회변혁에 관한 담론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화에 대한 논의로 대체되었다는 뜻이며, 골치 아프고 힘겨운 정치와 투쟁이 아니라 이제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먹고 살만한 국민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적 향유와 심미적 쾌락의 담론이 시대의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또한 그것은, 현실에서 전개되는 불평등의 심화와 새로운 예속화 양식들의 확산에 대해 맹목적이게 된 결과, 포스트 담론은 그것에 내장된 전복적 함의를 거세당한 채 점점 더 이데올로기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이래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종류의 담론, 말하자면 ‘포스트-포스트 담론’이라고 할 만한 담론이 첨단 인문학의 흐름으로 유행하고 있다. 포스트 담론의 주요 사상가들의 제자 내지 후배에 해당하는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ㆍ마이클 하트 같은 이름들을 필두로 한 이 새로운 담론은 포스트 담론에 비해 훨씬 더 급진적인 정치적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가령 지젝과 바디우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과 북미의 주요 도시들(파리, 베를린, 뉴욕 등)을 순회하면서 ‘공산주의의 이념’을 주제로 한 일련의 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공산주의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내세우면서 이를 테면 다중의 공산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철학을 제창하고 있다. 아감벤은 유대ㆍ기독교 메시아주의 전통에 대한 재해석에 기반을 두고 역시 이들 못지않게 급진적인 정치철학을 제안하고 있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개념 아래 일종의 무정부주의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랑시에르의 사상 역시 급진 정치 담론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인문학은 이전의 포스트 담론이 갇혀 있던 이데올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급진적이고 해방적인 담론의 지평을 복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리 낙관적인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젝이나 바디우, 아감벤의 사상이 지닌 이런저런 문제점들 이외에도, 포스트 담론 및 그것의 대체물 내지 계승물인 이 새로운 담론을 수용하는 국내의 지적ㆍ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문제에 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의 국내 수용에 대하여」, 󰡔황해문화󰡕 통권 82호, 2014년 봄호 참조.] 포스트 담론에 제일 열광했던 사람들이 이제 다시 새로운 담론에 또 다시 열광하고 있을뿐더러, 그것을 글로벌한 최신 학문, 첨단의 유행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선거 때가 되면 민주당에(또는 심지어 때로는 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에) 투표하기 위해 투표소로 가면서. 따라서 이들이 아무리 급진적인 정치적 주장을 제시하든 간에, 그것이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메시아주의든 간에, 이들의 주장은 세계적인 석학이 설파하는 고상한 담론들로 이해되고 문화적 사치품으로 재빨리 소비될 뿐,[

2008년 랑시에르가 방한했을 때나 2013년 지젝과 바디우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했을 때,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만이 아니라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적인 신문들도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는 사실만큼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입증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한국 인문학의 담론 구조를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인식론적ㆍ정치적 실천을 산출하지는 못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 김남주를 하나의 시금석으로 삼아볼 수 있지 않을까? 김남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그의 시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든 간에, 김남주가 한국 시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것, 가장 철저하고 급진적으로 혁명과 시를, 전사(戰士)와 시인을 일체화한 시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디우, 지젝, 아감벤, 랑시에르 같은 이들의 정치 사상 및 그들의 급진적인 정치 담론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이론적ㆍ정치적 진지함을 평가하기 위한 한 척도로 김남주를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지젝이 최근 일련의 저작에서 제창하는 메시아적 폭력, 신적 폭력을 김남주만큼 가장 정확하게 구현한 시인이 있을까? 그의 「낫」이라는 시만큼, 자신을 경멸하는 주인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는 노예를 노래하는 이 시만큼 전복적이고 파괴적인 시가 있을까? 그렇다면 이제 좌파 메시아주의가 유행하는 그만큼, 많은 이들이 그 사상에 열광하는 그만큼, 김남주가 다시 한 번 한국 문학 및 인문학의 중심으로 복권될 시기가 멀지 않았다고 예상해 봐도 되리라.

 

 

이후에 대하여

 

 

  하지만 필자가 포스트 담론과 그 이후의 담론을 평가하고, 그 담론들이 국내에서 수용되고 소비되는 방식을 고찰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김남주에 대해, 김남주 이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러니 이제 김남주 자신으로 돌아가 보자. 김남주 이후에.


  필자는 이 글에 김남주 이후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후라는 이 짧은 단어는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생각보다 복잡한 의미망을 지니고 있다. ‘김남주 이후’라는 이 글의 제목은 이후라는 단어가 지닌 이 의미망 속에서 김남주 및 그의 시를 살펴보려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우선 시간적인 의미에서 다음에를 뜻한다. 1946년에 태어나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서 저항과 투쟁의 시를 쓰고 1988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여 짧은 자유의 시간을 맛보다가 1994년 젊은 나이로 타계한 시인에 대해 이후에, 다음에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또한 우리가 쓰는 이후에라는 말은 그가 어떤 기점이 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는 그의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한 어떤 분수령이다. 세상에는 여러 시인들이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지만, 그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이후에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연대기적인 시간상의 의미에서 (또는 그 각각의 개인사의 관점에서) 그들 모두에 대하여 이후에라는 말을 쓸 수 있겠지만, 상징계의 질서에서 본다면 특정한 시인들만이 이후를 거느릴 자격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김남주 이후라고 말하는 것은, 김남주를 하나의 상징적 기점으로, 어떤 정초의 사건으로, 또는 일종의 기원으로 세우는 것이다. 이 시인은 어떤 자격으로 기원으로서 기억될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여러 사람들이 그에 대해 김남주 이후라고, 정초의 사건으로서 김남주라고 말하겠지만, 그들이 여기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는 제각각 다를 것이다(또 그래야 마땅하다). 필자가 보기에 어떤 상징적 기점이라는 의미에서 김남주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를 통해 절절이 구현된 혁명과 해방,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다른 많은 시인들이 김남주와 마찬가지로 혁명과 해방, 민주주의를 노래했고 그것을 염원했지만, 김남주만큼 그것을 비타협적인 투쟁의 정신 아래, 적들(곧 독점 자본과 군사독재, 미제국주의)에 대한 강렬한 분노와 민중에 대한 끝없는 사랑, 자신에 대한 엄격한 규율 속에서 추구했던 시인을 찾기는 어렵다. 따라서 김남주 이후라는 말은 해방의 시 이후, 혁명의 시 이후라는 다른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적인 다음과 상징적 기점이라는 의미 이외에, 이후는 또한 상속의 책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바디우 같으면 ‘충실성’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 상징적 기점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사건이나 인물을 상징적 기점이나 준거로 기입하고 인정하는 그 이후의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또는 그들은 이러한 기점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지만, 또한 바로 그들을 통해 상징적 기점은 상징적 기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 상징적 기점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항상 그 또는 그것을 물려받고 계승할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계승자가 끊어진 기원은 더 이상 기원으로 존립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기원은 바로 그 후속 사건들의 계열을 통해 비로소 기원으로 성립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또한 데리다가 잘 보여주었듯이, 상속은 항상 선별의 과제를 부과한다. 누구도 모든 것을 상속할 수는 없으며, 거기에는 항상 구별과 선별, 비판의 노력이 요구된다.[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수정 2판)] 따라서 누군가에 대해 이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그 이후를 정당화하고 입증하는 과제만이 아니라, 이후를 늘 새롭게 개조해야 하는 과제, 그렇게 하기 위해 이후를 선별하고 비판해야 하는 과제를 떠맡게 된다. 오직 그럴 경우에만 이후가 설정하는 기원의 사건은 한때 존재했던,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되풀이되고 쇄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또는 데리다 자신의 개념을 빌리면 ‘되풀이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의 ‘되풀이 (불)가능성’ 개념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수록된 「용어해설」 참조.] 비판을 통한 변용과 쇄신이 없는 기원은, 박제화된 기념물로 남을 뿐 더 이상 상징적 기점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 김남주의 시를 어떻게 상속할 수 있을까? 김남주가 무엇보다도 해방과 혁명의 시인이고, 해방과 시, 혁명과 삶을 일체화한 시인이라면,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상속해야 할까? 우리에게 부여된 계승과 선별, 비판의 과제는 어떤 것일까? 이것이 ‘김남주 이후’라는 이 글의 제목이 지닌 세 번째 의미다.


 

이제 이것으로 이후의 의미론은 종결될 수 있을까? 아마 아직도 또 다른 이후의 의미,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의미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징적 기점 내지 기원 자체를 하나의 이후로 만드는 이후라는 의미다. 이러한 이후는 상징적 기점을 더 이상 초월적인, 또는 칸트나 후설 식으로 말하면 초월론적인(transcendental) 위치에 놓지 않는다. 이러한 이후의 의미론에 입각하면, 상징적 기점은 더 이상 하나의 초월(론)적 기원, 곧 다른 것들이 그것을 기점으로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얻게 되고, 모두 그것에 후속하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정하게 되는, 그러한 기원의 자리, 초월(론)적 아버지의 자리에 놓이지 않게 된다. 또는 놓이지 않아야 한다. 그보다 그러한 상징적 기점은, 그것에 앞서는 다른 기점(들)에 대하여 하나의 이후로 자리 지어지고, 또 그것에 후속하는 다른 기점(들)에 대하여 기원이 아니라 (데리다가 강조한 바 있듯이[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참조. 지나치는 김에 지적하자면,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무려 3종의 국역본이 있지만, 그 판본들 모두 심한 오역들로 인해 국역본으로는 데리다의 논의를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3종의 국역본은 다음과 같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1996;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2010]) 하나의 흔적으로서 존립하는 것이 된다.


사실 김남주 스스로 자신을 자기 자신에 앞서는 어떤 기점(들)의 후예로, 하나의 이후로 위치 짓고 있다. 그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후가 되기를 자처하며(「황토현에 부치는 노래-녹두장군을 추모하며」), 또한 전봉준을 “김시습/정여립/정인홍/최봉주/김수정/허균/이필제/김옥균/김개남/전봉준” 같은 다른 기점들(“민중의 지도자/하늘의 별”로 불리는 사람들)의 계열 속에 위치시키면서 그 끝자락에 서기를 열망한다.

 

 

그들은 지금 우리와 함께 여기 있다/민족이 해방을 요구하고
나라가 통일을 요구하고
민중이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이 시대에
......
어제의 그들이 꿈꾸었던 사상의 세계를
오늘의 우리가 꽃으로 피우는 일이다
그들이 못다 부른 노래를 우리의 입으로 부르며
그들이 남기고 간 무기를 우리의 손으로 들고서

(「역사에 부치는 노래」 부분)

 

 

이러한 계열은 위대한 혁명가들, 하이네, 마야꼬프스끼, 네루다, 브레히트, 아라공 같은 저명한 유물론적 시인들의 계열(「그들의 시를 읽고」)이나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의 계열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망이와 망소이 같은, 만적 같은 고려 시대 노예들(「노예라고 다 노예인 것은 아니다」)과 “불의의 세계와 싸우다가/도끼와 총알에도 굴하지 않았던 형제들”(「한 매듭의 끝에 와서-80년대, 저 짓밟힌 풀들과 함께」)의 계열이기도 하며, “지하로 흐르는 물”, “밤으로 떠도는 별”(「혁명의 길」)의 계열이기도 하다. 이러한 흔적들의 흐름, ‘지하로 흐르는’ 이러한 흔적들의 흔적들의 줄기는 김남주 이후에도 계속되고, 그 이후에도 멈추지 않을 그런 흐름이고 계열이다. 이것은 이후들의 흐름이다.


 

  따라서 상징적 기점의 자리에 위치하여 스스로 자신의 이후들을 거느리고 또 앞으로 계속 거느리게 될 김남주가 초월성의 숙명에서 벗어나 내재적인 유물론[아마도 데리다라면 유사 초월론(quasi-trancendentalism)이라고 말했을 것이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김남주 이후는 이후의 김남주, 이후들의 흐름 속의 김남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가 말한 바 있는, ‘기원도 없고 목적도 없는 과정’, 또는 ‘마주침의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 곧 진정한 의미에서 유물론적인 역사 과정의 한 가지 뜻일 터이다.

 

 

 

뒤틀린 세월

 

 

  이제 다소간 장황한, 또는 너무 간략한 이후의 의미론에 기대어 김남주의 시 몇 편을 읽어보도록 하자. 우리는 특히 이후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의미에 입각하여 그의 시를 살펴볼 생각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남주의 시를 하나의 상징적 기점으로, 정초 사건으로 만드는 힘을 그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시와 혁명, 삶과 해방을 일체화하려는, 따라서 그 자신을 시인-전사로 만들려는, 비견될 수 없는 그의 투철한 열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체성과 단호한 의지가 그의 시의 특징을 이룬다는 점에 대하여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열정과 의지는 어디에서 유래할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햄릿의 표현을 빌리면 ‘뒤틀린 세월’(the time is out of joint)에 대한 깊은 분노에서 나온다. 억압과 착취, 불의와 폭력 및 치욕으로 얼룩진 시대에 대한 끊임없는 분노야말로 그의 시를 지탱하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뒤틀린 세월에 대한 분노는 그의 가족의 삶의 이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머슴으로 살다가 주인 집 애꾸눈 딸과 결혼하여 한 평생 죽도록 열심히 일했지만, “제 노동의 주인이 되어 이 손이/제 입으로 쌀밥을 가져가는 것을/노동의 기쁨이 되어 이 손이/춤이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을/제 노동의 계산이 되어 이 손가락이/나락금을 셈하는 것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손」)는 그의 아버지의 삶에 대한, 그의 가족의 삶에 대한 연민과 분노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가족사 및 개인사의 차원에 국한되는 분노는 아니다. 그것은 그의 동네 다른 농민들의 삶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아무런 권력도 재산도 지식도 빽도 없는, 있는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하나뿐인 사람들, 곧 민중들의 삶에서 전형적으로 되풀이되는 삶의 곤경에 대한 연민과 분노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나의 원수,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적인 악감정이 아니다. 이 땅에는 나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갑오농민전쟁 때 수백 수천만 농민들이 지배계급인 양반들에게 품었던 감정이고, 일제 강점기에 수백 수천만 농민들이 왜놈들과 그 앞잡이들인 친일매국노들에게 품었던 감정이고 또한 양키 제국주의의 시대인 오늘날 천만 농민들이 양놈들과 그 앞잡이들인 친미매국노들에게 품고 있는 감정인 것이다.[김남주,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시와 사회사, 1994, 51쪽]

 

 

 

더욱이 이러한 고난과 비참은 우리 시대, 우리 현대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유구한 역사를 거쳐서 계속 되풀이되어 온 것이다. 그는 12세기 프랑스의 한 시인의 시에서 이러한 고통의 역사를 발견하고,[클레티앙 드 트루아, 「셔츠의 노래」, 김남주, 앞의 책, 58~59쪽 참조] 서정시인으로 알려진 푸시킨의 저항시에서, 미 제국주의 및 중남미 매판자본을 고발하는 네루다의 시에서도 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찾아낸다.

 

 민중의 고통에 대한, 민중이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모욕당하는 뒤틀린 세월에 대한 분노는 김남주의 투쟁심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그러한 분노는 그의 정체성과 일체화되어 있다. 「명줄」이라는 제목의 시만큼 이것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칠년 가뭄에도
우리 어머니 살았습니다 죽지 않고
시원하게 물 한 모금 없이
한낮의 불 같은 더위 먹고 살았습니다
보릿고개 너머로 불어오는 황사바람이
우리 어머니 노한 숨결이었습니다
칡뿌리 나무껍질이 아침 저녁의 밥이었고
손톱 끝에 피나는 노동이
칠십 평생 우리 어머니 명줄이었습니다

그 명줄 한 매듭 끊고 태어나 나 이 땅에 갇혀 삽니다
가뭄의 자식 칠년 옥살이에도 시들지 않고
주먹밥 세 덩이로 살아 있습니다
철창 끝에 때리는 북풍한설이 나의 숨결입니다
내 어머니 노동의 착취에 대한 증오가 내 명줄입니다
증오 없이 나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증오는 나의 무기 나의 투쟁입니다
노동과 그날그날이 우리 어머니 명줄이듯이
나의 명줄은 투쟁과 그날그날입니다
노동과 투쟁 이것이 어머니와 나의 통일입니다
(「명줄」 전문)

 

 

“아무리 찢어지게 못사는 마을에도 잘사는 집은 한두 채 있게 마련”이지만, “이제 그런 집 한 채도 없”(「내력」)게 만드는, 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은, 한반도의 분단을 낳고 광주의 학살을 낳고 “농약과 화학비료와 공해 산업으로 내 조국의 대기와 토지를 더럽”히고 “내 조국의 춤과 노래를 질식시키고”, “끝내는 겨레의 골수까지 반공의식으로 파먹어”(「길」) 버리는 결과를 낳으며, 벌주를 마시다가 가슴이 파열되어 죽은 호스테스를 낳는다(「항구의 여자를 생각하면」).


  따라서 뒤틀린 세월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미 제국주의의 역사에 대한 얼마간의 사회과학적 지식과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좌파적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기는 하되, 엄밀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유물론에 입각한 ‘과학적 인식’은 아니며, 계급투쟁 이론에 입각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넓은 의미의 민중, 못 가지고 못 배우고 “배운 자로부터는 가진 자로부터는/값싼 동정밖에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역시」)에 대한 연민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분노에 기반을 둔 것이다. 못 가지고 못 배우고 ‘빽’도 없고 배경도 없는 이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보편적이고 전면적이다. 그들은 심지어 감옥에서도 차별 대우를 받고, 민주화의 투사들과도 다른 대접을 받는다.

 

 

오선생이 나갔다
(......)
경북고 서울대 동창생들이 면회 왔다더니
그래서 멀지 않아 곧 나가게 될 것이라고
소문이 옥내에서 파다하게 돌더니
정말 나갔다 포승 풀려 자유의 몸으로

김근태도 나갔다
얼마 전에 케네디상인가 인권상인가 받았다더니
(......)
더 이상은 미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들 하더니
정말 나갔다 사슬 풀려 자유의 몸으로

재일교포도 나갔다
(......)
영락없이 나갔다 족쇄 풀려 자유의 몸으로

남은 것은 개털들뿐이다
나라 안에 이렇다 할 빽도 없고
나라 밖에 저렇다 할 배경도 없는
개털들만 남았다 감옥에

(「개털들」 부분)

 

 

 

그러므로 김남주가 연민과 동일시의 대상으로, 투쟁의 동력으로 삼는 이들은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는 의미에서 ‘몫 없는 이들’(sans part)이라고 할 수 있다.[Jacques Rancière, La mésentente, Gallimard, 1995;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근간] 몫 없는 이들은 사회과학적인 의미에서의 피착취계급, 곧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계급적 분류에서 벗어난 사람들, 착취와 수탈의 대상에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사람들, 넓은 의미에서 배제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그래 어디를 가나 담 안팎으로/살 권리가 있는 놈들은 가진 놈들 뿐”(「세상사」)이라는 시인의 인식에서 알 수 있듯이, 갖지 못한 이들, “룸펜프로들”(「언제 다시 아」), 곧 “들치기 날치기 소매치기 업어치기 사기꾼 협잡꾼 노름꾼 갈보 뚜쟁이 깡패 전과자 실업자 가난뱅이 부랑아/ (......) / 이른바 계급의 찌꺼기들”(「환상이었다 그것은」)이며, 또한 한나 아렌트가 말한 바 있는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던,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 무권리자들(rightless)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73, p. 267;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489~90쪽]던 사람들이다.

 

 

 

민중의 이름으로, 혁명

 

 

몫 없는 이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 차별과 배제가 보편적이고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만큼,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혁명의 한 길, 가열찬 투쟁과 반역의 한 길뿐이다. 이들의 처지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분노가 깊은 그만큼, 이러한 혁명과 반역에 대한 시인의 열망은 강하고 뜨겁다.


김남주에게 혁명 또는 해방은 말 그대로 전복적인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가, 독재자, 주인들, 미 제국주의자들의 질서를 뒤집고 일하는 사람들, 착취당하는 사람들, 억압당하는 사람들, 굴욕당하는 사람들의 평등과 자유, 존엄을 되찾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둘로 나뉜 조국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억압의 사슬에서 민중이 풀려나는 길이고
외적의 압박에서 민족이 해방되는 길이고
노동자와 농민이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
해방의 길 이 길을 어디메쯤 가다보면 거기 자본가와 점령군에 고용된 용병의 무리가 있고
마침내 우리가 무찔러야 할 총칼의 숲이 있다
그렇다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길 이 길을 가면 거기 틀림없이
압제와 자본의 턱을 보아가며 재판놀음을 하는 검사와 판사가 있고
마침내 우리가 벗겨야 할 정의의 가면이 있고 불의가 있고
인간성의 공동묘지 감옥의 밤이 있고 마침내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증오의 벽이 있다

그러니 가자 우리 이 길을
길은 가야 하고 언젠가는 역사와 더불어 이르러야 할 길
아니 가고 우리 어쩌랴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어깨동무하고 가자

(「길」 부분)

 

 

하지만 김남주에게 혁명이나 해방은 승산이 없는 싸움, 늘 패배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싸움이다. 김남주는 혁명과 해방의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지도 않을뿐더러, 혁명에 대한, 혁명 이후의 세상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가 혁명가, 민중 해방의 지도자의 전범으로 삼는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시에서 잘 나타난다. 전봉준을 “이 위대한 혁명가”로 만드는 것은 그가 “암울한 시대 한 가운데/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한 시대의 아픔을/온몸으로 한 몸으로 껴안고/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승리 없는 투쟁/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이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기꺼이 동의했던 사람”(「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녹두장군을 추모하며」)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싸웠던 싸움은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이 끊임없는 싸움”(같은 시)이었다. 또한 혁명과 해방을 위한 싸움은 “죽음에 값하는 싸움 하나 있기에/피흘리는 싸움에 값하는 죽음 하나 있기에”라고, “죽음 위에 죽음 하나 쌓아올려 꽃봉오리로 살아 있기에”라고 할 수 있는 싸움이고(「싸움」), “가시로 사납고 바위로 험한 벼랑의 길 (......)/ 끝이 보이지 않는 도피와 투옥의 길이고/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긴긴 싸움”(「혁명의 길」)이다. 혁명과 해방을 위한 싸움은 늘 죽음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몫 없는 이들의 싸움, 민중의 혁명 투쟁의 비극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물론 시인 자신의 투쟁의 좌절의 경험의 반영일 수 있고, 동학농민전쟁의 패배의 기억일 수 있으며, 4. 19에 대한 반동으로서 5. 16,  5. 18 광주의 비극에 대한 쓰라린 반추의 결과일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시인의 많은 시들이 오랜 수감 생활 속에서 쓰인 것들이라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시인이 생각하고 참여하려고 하는 싸움이 그만큼 역사의 근본적인 싸움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그 싸움은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한 차례 또는 두 차례의 선거에서 이긴다고 해서, 권력을 쟁취한다고 해서 끝나는 싸움이 아니며,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다고 해서 종결될 수 있는 싸움도 아니다. 그것은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아직까지 한번도 맛보지 못한/자유”(「황토현에 부치는 노래」)를 얻기 위한 싸움이며, “형제와 누이와 아버지와 아들이/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는 기술을”(「사랑의 기술」) 배워가는 싸움이다.


왜 승산이 없는 이 싸움,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이 싸움을 벌이는 것일까? 그것은 그러한 싸움 말고는 달리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착취와 수탈, 억압과 차별, 배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중들 자신의 단결된 투쟁 이외의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결 없이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건 단결 없이
밥 한 그릇 공짜로 부자들이 내준 적 있었는가
투쟁 없이
짓밟힌 이들의 목숨을 건 투쟁 없이
한 발이라도 스스로 압제자들이 물러난 적 있었던가
4. 19 이래 있었던가
5.18 이래 있었던가
6.29 이래 있었던가
대한민국 반 세기 이래 있었던가

(「숨막히는 자유의 이 질곡 속에서」 부분)

 

 

이러한 목숨을 건 투쟁이 없다면, 민중에게는 노예의 삶, 종의 삶만이 있을 뿐이며, “삶/종놈의 삶/가난의 삶/거기에는 치욕이 있을 뿐이었다/거기에는 모욕이 있을 뿐이었다/거기에는 굴욕이 있을 뿐이었다.”(「굴레」)


  따라서 민중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그들의 삶과 고통을 일체화하는 시인은 자신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최신 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고, 또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 대신 시인은 자신의 시가 다음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총검의 그늘에 가위눌린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의 시가
탄압의 눈을 피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기를
미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부른 자들의 도구가 되어 혹사당하는 이들의 손에 건네져
깊은 밤 노동의 피곤한 눈들에서 빛나기를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들이 나의 시구를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그들의 목젖까지 차올라
각성의 눈물로 흐르기도 하고
누르지 못할 노여움이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싸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를
(......)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 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 일어서는 봉기의 창끝이 되기를

(「나는 나의 시가」 부분)

 

몫 없는 이들,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배제된 이들의 삶과 고통에 분노하지 못하고, 그들의 투쟁의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분노는 그만큼 날카롭고 가혹하다. 그 비판은 시인 자신을 향해 있기도 하다. 출옥 후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나태해지고 투쟁의 대열에서 이탈해 있는 게 아닌가 끊임없이 자책한다(「근황」). 그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다시 한 번 투쟁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다짐한다(「사상의 거처」).

 

 

민중의 이중성, 또는 이후의 김남주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김남주 이후를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민중의 고통에 대한 시인의 깊은 분노와 일체감, 그리고 착취와 억압, 차별과 배제에 맞선 민중들의 기나긴 투쟁, 패배와 죽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투쟁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자신의 시를 그 투쟁의 무기로 삼으려는 시인의 태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계급투쟁보다 더 오래되고 더 뿌리 깊은 지배와 억압, 차별과 배제에서 기인하는 싸움에 대한 시인의 깊은 인식에서 비롯하는 태도이며, 몫 없는 이들 스스로 단결하여 이러한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는 그러한 지배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실천적 자각,[이는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그들 스스로 쟁취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마르크스에서 유래하는 테제의 다른 표현이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러한 테제를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표현으로 간주한 바 있다. É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진태원 옮김, 「평등자유명제」,『평등자유명제』, 그린비, 근간 참조. 발리바르에 대한 평주로는, 진태원,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실천문학󰡕 2013년 여름호 참조] 그리고 자신의 시를 그러한 싸움의 무기로 삼으려는 시의 당파성에 대한 투철한 소명감에서 생겨나는 태도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예속화의 확산과 심화에 따라 몫 없는 이들, 곧 비정규직과 불안전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점점 증대하고, 유신의 망령이 나라 전체를 휘감고 있는 시점에서, 김남주 이후라는 것은 비단 시문학만이 아니라, 인문학 전체에까지 의미 있고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김남주 이후’를 넘어선 ‘이후의 김남주’라는 문제를 간략하게나마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후의 김남주를 위한 한 가지 실마리는 민중에 대한, 몫 없는 이들에 대한 시인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시인은 그가 “룸펜프로들”이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몫 없는 이들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시적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다음 세 개의 시는 이들에 관한 매우 대조적인 시인의 시선을 담고 있다. 처음 두  개의 시는 그가 감옥에서 작성한, 5. 18 광주항쟁에 대한 시이고, 세 번째 시는 출소한 뒤에 1988년 대통령 선거의 패배를 겪으면서 쓴 시다. 첫 번째 시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5월 그날 누가 가장 잘 싸웠습니까
압제에 반대하여 자유를 위해
착취에 반대하여 밥을 위해
학살에 반대하여 밥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누가 과연 최후까지 싸웠습니까
가장 잘 배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까
(......)
가장 많이 아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까
(......)
가장 많이 가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까
(......)
오늘 그날 착취와 압제와의 싸움에서
무기를 들고 최후의 그날까지
승리 아니면 죽음을 외치면서 싸운 사람은
가장 잘 싸운 사람은
여러분처럼 배운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아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가진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받는 공장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일년 삼백예순 날
쉬는 날 하루도 없는 들녘의 농민들이었습니다
가장 험하게 일하고 매일처럼
가장 천하게 일하고 매일처럼
천길 굴 속에서 빠져 죽는 광부들이었습니다
만길 하늘에서 떨어져 죽는 현장 인부들이었습니다
배운 것이라고는 여러분처럼
부잣집 담밖에 넘을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몸 팔아 상품으로 팔아 쾌락의 도구로 팔아
(......)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여러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가진 것 없는 노동자 농민들로 하여금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들로 하여금
아는 것 없는 부랑아들로 하여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최후까지 싸우게 했겠습니까
(......)
여러분들처럼 그들도 뒤를 돌아봐야
잃어서 아까울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잃을 것은 압박과 가난의 쇠고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부분)

 

 

이와 비슷한 인식은 「역시」라는 시에서도 나타난다.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군
80년
5월 투쟁에서
영웅적으로 죽어갔던 사람들은

나하고는 나 같은 사람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군
나로부터는 나 같은 사람으로부터는
배운 자로부터는 가진 자로부터는
값싼 동정밖에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군
다 앗기고 더 앗길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군

(「역시」 부분)

 

이 두 개의 시의 공통점은 비극적인 광주항쟁에서 가장 영웅적으로 싸웠던 사람들을 몫 없는 이들, 곧 “배운 것이 없는”, “아는 것이 없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배운 자로부터는 가진 자로부터는 값싼 동정밖에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렇게 잘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두 시에 따르면, 이들이 “잃을 것은 압박과 가난의 쇠고랑밖에 없었기 때문”이며, “다 앗기고 더 앗길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프롤레타리아는 무소유계급이기 때문에 환상을 지니지 않는다는 󰡔공산당 선언󰡕의 인식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반면 세 번째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한탄하고 저주한다.

 

환상이었다 그것은
권력 앞에 꿇지 않는 무릎 없고

돈뭉치 앞에서 걷어올리지 않는 치마가 없고
부패와 타락이 그 본색인 부르조아 사회에서
들치기 날치기 소매치기 업어치기 사기꾼 협잡꾼 노름꾼 갈보 뚜쟁이 깡패 전과자 실업자 가난뱅이 부랑아 (......)
이른바 계급의 찌꺼기들이
술 한잔에 점심 한 그릇 값이면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매수될 수 있는 룸펜프로들이
도시마다 거리마다
하늘 아래 산동네 꼬방동네마다
기어다니고 숨어다니고 내빼다니는
그런 범죄의 나라에서
맨입의 빈손으로 표를 모아
착취의 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환상이었다 그것은
자본가는 말할 것도 없고
(......)
가진 것이라고는
원숭이 앞발로부터 물려받은 손재간밖에는 없어
하루라도 그것을 자본가에게 팔지 못하면
한시라도 그것으로 부자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면
그날 저녁으로 잠자리를 잃게 되고
다음날 아침이면 끼니를 걱정하게 되는 노동자들까지도
공산주의 어쩌고저쩌고 하면
아예 사람 살 곳이 못되는 지옥쯤으로밖에 생각할 줄 모르고
이북 어쩌고저쩌고 하면
엉덩짝에 뿔난 괴물의 세계가 아니면
아버지와 아들이 강냉이죽 한 사발을 놓고 드잡이하는
아귀도쯤으로밖에 상상할 줄 모르는

그런 꽉 막힌 나라에서
무조직의 사상과 그 표현인 연설의 힘이
철벽으로 무장한 반공의 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환상이었다 그것은」 부분)

 

 

처음 두 시와 달리 이 시에서는 동일한 민중, 동일한 몫 없는 이들이 “계급의 찌꺼기들”로, “룸펜프로들”로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술 한잔에 점심 한 그릇 값이면/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매수될 수 있는” 이들이며, 하루라도 노동력을 팔지 못하면 잠자리를 잃고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임에도 반공 의식에 찌들어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환상도 지니지 않고 누구보다 영웅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더 쉽게 매수될 수 있고, 더 쉽게 환상에 젖어들 수 있는 이들이다.


  이 세 편의 시에서 나타나는 민중에 대한 김남주의 상반된 태도는 상황의 변화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곧 전자의 두 시가 감옥에서 민중에 대한 다소간 낭만적이고 이상화된 관점에 입각하여 쓴 시들인 반면, 세 번째 시는 감옥에서 출소한 후, 그가 직접 현실 세계의 민중들을 경험한 뒤 쓴 시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김남주가 두 종류의 시에서 제시하는 민중은 민중의 현실적인 두 가지 모습이기 때문이다. 민중들, 특히 가난하고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민중들은 때로는 가진 자들과 배운 자들이 할 수 없는 위대한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바로 그들이야말로 히틀러와 박정희와 조지 부시 또는 르 펜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김남주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민중의 양면성만이 아니다. 그는 세 번째 시에서 “무조직의 사상과 그 표현인 연설의 힘이/철벽으로 무장한 반공의 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환상이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그는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에 의해 무너진다/그리고 어떤 사상도 그것이/물질적인 힘으로 되는 것은 그것이/대중을 조직적으로 전투적으로 유물론적으로 사로잡을 때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환상에 젖어 있고 쉽게 매수되는 대중을 “조직적으로 전투적으로 유물론적으로 사로잡”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유물론적인 방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냉엄한 현실에 좌절하여 단순히 주관적 당위를 강조하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이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제시한 바 있는 통찰, 곧 “자신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국가에 대해 그들이 항상 “좋은 쪽”에 있고, 희생자,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 (......) 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점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도록 가시적인 안전 중심적 조치들을 취하고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것 (......) 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146쪽. 강조는 발리바르]하며, 이것이 오늘날 극우정치의 주요 온상 중 하나라는 통찰에 대해 맹목적으로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오늘날 김남주 이후를 넘어, '이후의 김남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민중의 이러한 양면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야말로 절실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1%의 부자들이 세계의 부를 독점한다고 해서 99%의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단결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1%의 부자들을 위해 50%가 넘는 사람들, 그러므로 과반의 민중들은 박정희와 그의 딸과 부시와 대처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모욕하는 주인의 목을 낫으로 베는 종의 태도는 반역적이고 전복적이지만, 프랑스혁명에서 왕의 목이 기요틴의 칼날 아래 잘린 이후 약 200여 년 후에 푸코가 “우리는 아직 정치이론에서 왕의 목을 베지 못했다”[Michel Foucault, “”Entretien avec Michel Foucault” réalisé par Alexandro Fontana et Pasquiale Pasquino, in Dits et écrits, vol. II, Gallimard, 2001 참조]고 말하면서, 주권적 권력이 아니라 그 기저에 놓인,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규율권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할 것을 주장했듯이, 주인의 목을 베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특히 주인과 지배자의 목을 베어야 할 종이, 민중이 다른 종과 민중의 목을 겨눌 때는 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오늘의 김남주, 이후의 김남주(들)은 햄릿의 한탄을 다시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데리다에 의해 재해석된 햄릿의 한탄을. 데리다에 따르면 햄릿의 탄식은 단순히 아버지로부터 복수의 명을 받고도 그것의 이행을 망설이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수하거나 반역하기 위해서는 “징벌하고 처벌하고 살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폭력과 대항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는, “복수의 숙명에서 벗어날 정의”[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58쪽]를 추구하려는 햄릿의 염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정의는 민중을 민중 자신으로부터 갈라놓는 그 분열, 그 원한과 폭력의 심연에 대한 해법을 발명하지 않고서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의 민중이 없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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