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구스타브 리쾨르, 92세를 일기로 영면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가 지난 20일(프랑스 현지 시간) 9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폴 리쾨르의 아들 마르크는 그의 아버지가 파리 서부, 샤트나이 말라부이에 있는 자택에서 자연사했다고 프랑스 언론을 통해 밝혔다.
1913년 2월 27일 프랑스 남동부의 발랑스에서 태어난 폴 리쾨르는 렌 대학과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렌대학 졸업 직후 교사 생활을 하던 리쾨르는 1940년,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포로로 잡혀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이 기간 동안 야스퍼스의 감화를 받고 현상학자 후설의 ‘Ideen(이념들)’을 번역해 현상학자로서의 일생을 시작했다.
68혁명기 ‘정부의 협력자’라는 비판 듣고 미국으로 옮겨 강의
종전 이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의 연구원을 거쳐 1948년 부터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사를 강의하기 시작했고 1956년에는 소르본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6년에는 파리 교외의 낭테르 대학으로 옮겨 학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급진적 학생운동이 몰아쳤던 1968년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일면 반공주의자적이기도 한 그의 보수적 면모가 학생들과 충돌했고 그는 프랑스 청년들로부터 ‘정부의 협력자’라는 비판을 들은 끝에 낭테르 대학을 사임했다. 이후 뤼뱅 대학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뢰쾨르는 시카고 대학과 예일대학등지에서 강의했다.
특히 시카고 대학에서 15년간 몸을 담으며 리쾨르는 미국 철학과 사회과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쾨르는 1985년 공식적으로 대학에서 은퇴했으나 은퇴 후에도 활발한 연구, 저작 활동을 펼쳤고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시간과 이야기', '자유와 본성',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등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구조주의, 해체주의와 거리를 둔 보수적 면모를 지닌 해석학자
해석학자로서 리쾨르는 기존 문학 연구의 시간 연구를 종합해 시간의 주제와 형식 양 측면에서 통합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리쾨르는 평생에 걸쳐 어떻게 한 사람이 그가 직면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인식해서 자신의 진실을 형성해나가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로 향하는 리쾨르의 해석학이었다. “객관성이라는 말의 정의는 ‘논리적’인 정의에서 ‘윤리적’인 정의로 변형되었다” 리쾨르가 1955년 발간한 ‘역사와 진실’의 한 구절이다.
급진적인 프랑스 현대 철학의 주류에 반해 리쾨르의 연구는 성경과 텍스트로 틈입해 들어갔고 오히려 미국등지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리쾨르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하나인 해석이론은 1973년 그의 강연을 모아 출간되었는데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라는 당대의 흐름과 거리를 두고 있는 리쾨르의 사상 궤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리쾨르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에서부터 90년대의 보스니아 전쟁에 이르기 까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을 그의 철학적 실천으로 삼았다.
리쾨르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프랑스 대통령 자끄 시락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증명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철학자라고 헌사를 보냈다. 장 폴 구스타브 리쾨르는 1935년 시몬 르자와 결혼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겼다. 또한 리쾨르는 그의 장례식에 가족과 친구만 참석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