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와 사유의 미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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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박사 배출 외국대학 서울대 ‘1위’

  • 며칠 전 신문에서 미국의 박사학위 취득자 가운데 미국 대학을 뺀 외국 대학 출신자 가운데 서울대가 1위를 차지했으며, 미국 대학을 포함해도 버클리대학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를 보면, 서울대에 더해 연세대와 고려대도 10위권에 들었다고 한다. 그 기사를 읽은 날이 내가 재직하는 대학의 입학 면접날이라 입시생들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교수의 질문 의도를 잘 짐작 못해서 머뭇거리긴 했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현상이며 굉장한 성취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답했다. 그들에게는 서울대 출신들이 미국에 가서 그렇게 많이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사실이 올림픽 경기에 나가서 메달을 많이 따온 것이나 진배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식의 생각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는 학생에게 한정될 것 같지는 않은데, 만일 그렇게 사태를 본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 된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지적 담론과 사유의 흐름을 규정하는 지식인이 되고, 정책을 생산하고 집행하는 관료가 되며, 사회적 생산력을 담지한 기업의 경영진으로 편입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명문대학 출신들이 미국에서 그렇게 많이 박사를 받는다는 것은 엘리트 집단의 충원이 미국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며, 그런 만큼 미국 사회가 생산한 지적 패러다임과 시스템을 우리 사회의 표준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커짐을 뜻한다.

    그저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것뿐이고 학문이란 보편적인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학문의 보편성이란 국민적 특수성을 아우름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특수성을 산입하지 않고는 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보편성의 소재지는 미국 대학과 우리 대학 간의 대화와 토론에서, 그리고 예컨대 인도의 대학과 우리 대학 사이의 교류와 논쟁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미국 대학에 있지 않다. 미국 대학은 불가피하게 미국적이다. 그러니 엘리트 재생산이 미국 대학을 매개로 해서 이뤄지는 것은 우리와 실정이 달라도 한참 다른 사회가 우리의 준거점이 되는 지적 편식을 거듭하는 일이 된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큰 사회적 파급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꽤 치명적인 사태를 낳을 수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을 분석하는 신장섭과 장하준의 책,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은 그런 사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외환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통해서 우리나라 경제 엘리트 집단이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수용했고, 그 결과 90년대 초부터 97년까지 적극적으로 국가의 산업정책 기능을 축소해 나간 데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한국의 경제 엘리트가 이렇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자발적으로 복속해간 원인의 하나를 경제학 문화의 미국화에서 찾는다. 그들은 87년 말부터 95년 사이에 미국 경제학 박사 가운데 한국인이 차지한 비율이 약 10%였다고 집계했다. “한국 인구가 세계 인구의 약 0.75%를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놀라운 일이다. “이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한국에 귀국했고, 따라서 대학의 경제학 교육을 점차로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움직여나갔다. 추가로 처음에 한국 대학에서 점차로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따라 교육받게 된 많은 엘리트 관료들은 2년 동안의 고급과정 학습을 위해 미국에 보내졌다.

    그들 중 얼마는 심지어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더 오래 미국에 머물렀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결국 한국 정부에서 맡고 있던 이전의 직무로 복귀했다.”

    이런 지적은 지식·정책·엘리트 충원 간의 관계에 대한 더 체계적인 연구에 의해 보완되어야겠지만, 고등교육과 그것을 매개로 한 엘리트 충원방식이 한 사회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엘리트와 사유체계의 미국화를 암시하는 통계를 더 깊이 곱씹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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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기 2005-01-1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 해야 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국 '공부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1. 한국에서 공부를 안(못) 하고 유학을 가야만 한다.
    2. 유학을 가면 대다수가 미국으로 간다.

    문제는 두 가지인데, 이 글에서는 두번째 문제점을 주로 짚고 있군요.
    첫번째 문제점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1. 한국에서도 충분히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 한국 고등교육이 발전해야 합니다. 여러가지가 필요한, 장기적 과제.

    2. 유학을 미국으로만 가지 말고 여러 나라로 가서 다양한 세계관을 접해야 한다
    -> 미국으로만 유학을 가는 이유 중에 장학금 문제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군요.
    유학 가는 분들한테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일테니까요.
    하지만 미국으로만 유학을 가는 이유-
    학문 분야 자체가, '미국식'에 집중되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예를 들면, 지역학 연구가 활성화 돼있다면
    터키로도 갈 것이고 중국으로도 갈 것이고 남아공으로도 갈 것이고 브라질로도...
    경제학, 사회학, 철학, 예술학, 각종 어학... 모든 분야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이 학문에서도 필요한 것 아닌가요.
    -> 미국식 뿐 아니라 다른 스타일(유럽만을 미국으로 대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포함해서)도 통용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러려면 사회의 거의 모든 면이 바뀌어야겠지요.

    정부가 국공립사립 기타등등 각종 대학교에
    미국 외의 다양한 지역에 대한 분야별 공부가 이뤄질 수 있게 지원을 해주고
    대학들도 나름대로 특화를 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저 교수의 글은 이런저런 문제제기/대안 모색 ... 이런 계기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그들을 욕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즉자적/일차원적인 것 같습니다. 발마스님께서 댓글들을 퍼오시면서 보여주고자 하신 것도, 그런 측면일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공부도 못/안하고 생각도 없는 인간이 길게 떠들었습니다.

    balmas 2005-01-1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렇게 긴 댓글을 주시다니 ...

    "뱀딸기"(으윽, 왠지 징그런 느낌 ...^^;;;)님 말씀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간결명료한 분석에 감탄하면서 ...^^

    딸기 2005-01-1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로 동의하시는군요. 동의 안 하시는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발마스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요즘 퍼뮤니케이션에 충실하시되, 하고픈 말씀을 직접 안 하시는 것 아닌가 싶은데... 핫핫핫;;
    아무래도 학계??에 계신 분이니까, 저같은 외부인이 보는 것과는 달리 여러가지 지적을 하실 수 있으실 것 같거든요. 궁금해요.

    릴케 현상 2005-01-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에 사회학계는 그래도 국내파가 선전했다는 말을 학부수업때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약발이 그다지 이어지지 않은 걸까요? 학비 문제는 유럽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고 들었는데 결국 영어 외의 외국어 공부를 할 환경이 안 되어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네요...

    balmas 2005-01-1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딸기님, 대체로 동의한다는 말은 특별히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 문제를 꼼꼼히 따져보지 않은 상태라서(또는 꼼꼼하게 논의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반대할 만한 점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제 생각을 말하려면 따로 논문 한 편은 써야 할 것 같은데, 언젠가 이야기해볼 기회가 있겠죠.
    자명한 산책님, 80년대는 사회과학에서 한국사회성격논쟁이 풍미했던 시기죠. 다수의 소장사회과학자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는데, 많은 논자들이 "국내파" 연구자들이었어요. 90년대 이후에는 그 논쟁에 비견할 만한 논쟁이 없었죠. 여러가지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죠.

    딸기 2005-01-1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그런데 유럽 유학가면 힘들긴 한가봐요.
    재작년에 각국에 유학중인 친구.선배들과 인터넷으로 잡담을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유럽에서 독일이고 프랑스고 영국이건 간에, 대학 민영화 한다고 난리를 쳐대고 있고, (단기적인 건지는 모르지만) 유로가 뛰어서 아주 죽을 맛이라더군요.
    그러니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는 얘기는 아니고, 미국 아니면 유럽 밖에 생각 못하는 그런 틀도 좀 벗어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이건 유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어느 쪽 인력을 필요로 하느냐의 문제이겠지만요.

    릴케 현상 2005-01-20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렇군요 저희 회사사람들은 다들 유럽 유학판데... 한 10년 전 정보를 줬나보네요. 비용은 제가 서울유학한 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했는데-_- 유럽 말고는 뭐...한국의 진정한 세계인(?)은 크리스찬들밖에 없지싶어요. 제3세계권에 가 있는 한국인은 죄다 선교하러 간 것 같던데요

    balmas 2005-01-20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자명한 산책님, 날카로우시군요. "제3세계권에 가 있는 한국인은 죄다 선교하러 간 것 같던데요" ...

    딸기 2005-01-2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좀 짱나기도 하지요. 선교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