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의미


  󰡔신학정치론󰡕에 대해 󰡔정치론󰡕이 보여주고 있는 핵심적인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의 등장이다. 이는 이 개념들이 정치체의 존재론적 기초에 관해 새로운 문제설정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고, 주권 개념의 의미와 기능을 다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선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서 볼 수 있는 용어법상의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저작의 용어법상의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대중을 가리키는 용어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곧 󰡔신학정치론󰡕에서는 우중vulgus, 평민plebs 같이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 용어들이 다수 사용되고 있는(불구스는 총 42번 사용되고 있고, 플레브스는 총 21번 사용되고 있다) 반면, 시민들의 집합으로 이해된 인민populus이라는 개념은 좀더 드물게 사용되고 있으며(총 13번), 대중들이라는 용어는 훨씬 더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신학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단어는 단 세 차례(「서문」, 17장, 18장) 등장할 뿐이다.1) 하지만 이와 달리 󰡔정치론󰡕의 경우에는 제일 경멸적인 함의를 지니는 불구스는 단 두 차례만 사용되고 있고(두번 모두 7장 27절에 나온다) 플레브스는 21번 사용되고 있는 반면2), 물티투도라는 단어는 총 69번 등장하고, 대중들의 역량, 곧 포텐샤 물티투디니스potentia multitudinis라는 개념은 총 4번, 2장 17절에서 한 차례, 그리고 3장 2절, 7절, 9절에서 세 차례 사용되고 있다3). 따라서 용어법에서 볼 때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두 저작의 실질적인 내용상의 차이점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연구4) 이후 많은 연구자들(특히 유럽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5),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신학정치론󰡕에서는 빈도가 적을 뿐 아니라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주변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처럼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이 개념을 중심적인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은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으로 나아가면서 스피노자 정치학이 발전 또는 “진화”하고 있다는 것(예컨대 Matheron 1990을 보라), 또는 적어도 모종의 이론적 단절이 발생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신학정치론󰡕에는 사회계약론이 현존하는 반면 󰡔정치론󰡕에는 부재한다는 사실과, 그 대신 󰡔정치론󰡕에는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중심 개념으로 부각된다는 사실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네그리가 말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며, 󰡔신학정치론󰡕에서 우중이나 평민 개념의 용법과 유사하게 부정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과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지적ㆍ정치적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 만약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욕망하도록 인간 본성이 이루어져 있다면, 화합과 신의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술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성향들은 전혀 다르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에, 국가는 통치자들만이 아니라 피통치자들도 포함되는 모든 사람이―내키든 내키지 않든 간에―공공의 복리를 위해 중요한 것을 할 수 있도록 규제되어야 한다. 곧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든 아니면 힘이나 강요에 의해서든 간에, 이성의 계율에 따라 살아가게 만들어야 한다(TP 6장 3절).


따라서 전체 대중들multitudo integra이 자기자신과 화합할 수 있다면, 대규모 회의에서 늘 일어나는 논쟁들이 소요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대중들은 결코 자신의 권리를 소수의 사람들이나 한 사람에게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 (TP 7장 5절)


또한 다음과 같은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본성상 적대적이며, 그들을 통합하고 연결시키는 법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본성을 보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귀족정으로 변화하고 다시 이는 군주정으로 변화한다고 믿는다. 사실 나는 귀족제 국가들 중 다수는 민주제 국가로 출발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믿는다(TP 8장 12절).


  이 구절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대중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화합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력의 결여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근본적인 인간학적 원리, 곧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되며, 또한 각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기질에 따라, 곧 자신의 인정하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고 자신이 거부하는 것은 그들도 거부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하려고 욕망한다”(TP 1장 5절)는 원리에서 유래한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 정서들에 따라 규정되는 한에서 인간들은 안정적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룩할 수 없으며, 모종의 강제나 규제가 없이는 사회적 관계가 제대로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론󰡕에서도 여전히 스피노자는 대중들이 보여주는 정서적 동요들과 비합리성 및 이것이 불러올 수 있는 국가의 혼란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6).

  발리바르는 대중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두려움과 근심을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개념을 통해 훌륭하게 규정한 바 있다. 스피노자 자신이 이 개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인용하고 있는, 그리고 발리바르가 자신의 논문의 제사(題詞)로 사용하고 있는 타키투스의 󰡔사기(史記)Annales󰡕 1권 27장의 한 구절은 이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준다. “[대중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7)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관념에서 핵심적인 것은 소유격의 이중적 용법이다. 곧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대중들이 통치자들에 대해 느끼는 공포만이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공포, 곧 대중들이 통치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라는 원리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인간들의 삶(개인적인 삶과 정치적인 삶)에서 정서들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 삶을 합리적(또는 능동적)으로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드러내준다. 

  하지만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정치론󰡕의 구절들은 󰡔신학정치론󰡕 및 󰡔윤리학󰡕과 관련하여 얼마간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위의 구절들에서는 더 이상 정서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중이나 평민으로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6장 3절)이나 “사람들”(8장 12절)과 같이 훨씬 일반적인 명사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는 더 이상 우중과 지식인들이라는 엘리트주의적인 인간학적 분할에 의거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곧 우중이나 지식인, 통치자나 피통치자 모두는 사람들인 한에서 똑같이 정서들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지, 정서적 영향력이 반드시 우중에만 한정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7장 5절과 같이 자기자신과 화합하지 못하는 존재를 “대중들”로 한정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통치자들보다는 피통치자들로서의 대중들이 좀더 정서적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8).

  또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는 달리 더 이상 우중 또는 대중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규율과 복종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우선 2장 17절의 규정이 잘 보여주듯이 󰡔정치론󰡕에서 대중들(의 역량)은 국가의 기초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주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TP 2장 17절)” 그리고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는 달리 대중들을 정념에 예속되어 갈등과 분열에 시달리는 존재로만 규정하지 않고, 적어도 몇 군데에서는 “자유로운 대중들libera multitudo”로 규정하고 있다(5장 6절 둘째줄과 넷째줄, 5장 7절, 7장 26절).  

  그리고 󰡔신학정치론󰡕에서도 엿보이는 관념, 곧 “민주주의 국가에서 부조리한 일이 발생할 우려는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전체의 다수 성원―이 전체가 상당히 큰 규모라면―이 어떤 부조리한 일에 일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TTP 16장 9절; 모로판, 516)라는 관념은 󰡔정치론󰡕에서도 지속될 뿐만 아니라 좀더 정확한 이론적 토대를 얻게 된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나의 전체―만약 이 전체가 충분한 크기를 갖고 있다면―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 다수가 어떤 부조리한 일에 동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TP 6장 1절)


인간 본성은 개인 각자가 항상 매우 열렬히 자기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추구하고 [...] 자신의 처지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다른 이의 대의를 옹호하도록 이루어져 있다. [...] 그리고 비록 매우 많은 수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이 회의기구는 필연적으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 이 회의기구의 다수는 결코 전쟁을 벌이려는 욕망을 갖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평화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이를 항상 선호할 것이다. [...](TP 7장 4절))


따라서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치론󰡕에서 대중들은 국가의 기초, 토대라는 위상을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신학정치론󰡕이 다수의 합리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낙관적 태도가 경험적 교훈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정치론󰡕에서 제시되는 거의 동일한 견해에 대해 좀더 일관된 이론적 논거를 제공해준다. 곧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충분한 숫자의 다수가 보여주는 합리성에 대해 신뢰를 보내고 있다면, 이는 그가 󰡔정치론󰡕에서 개인적 합리성과 제도적 합리성을 󰡔신학정치론󰡕보다 좀더 정확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구분은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통해 정서 개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정서들이 더 이상 이성과 대립하지 않고 역량의 관점에서 합리성을 실현하기 위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식된다면, 그리고 정서들의 상호개인적 성격이 분명히 인식된다면, 합리성은 더 이상 정서들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게 되며, 따라서 인간들 또는 대중들이 정서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이 집합적ㆍ제도적 합리성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주)

 

1) 󰡔신학정치론󰡕 및󰡔정치론󰡕에서 대중들, 우중, 평민 개념의 용법 및 의미에 관해서는 Balibar 1997b와 Chaui 1998을 각각 참조.

2) 하지만 이 때 플레브스는 󰡔신학정치론󰡕과 같은 부정적인 함의로 사용되고 있다기보다는 귀족과 대비되는, 고유한 의미의 평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빈도의 차이만으로는 중요성과 의미의 차이를 평가하기 어렵다.

3) 이에 관해서는 󰡔정치론󰡕의 용어들의 빈도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은 Spinoza 1978의 「부록」을 참조하라.

4) Negri 1990; 1994; Balibar 1997a; Balibar 2004 참조. 그 외에 대중들 개념을 스피노자 정치철학 해석을 위한 근간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저작으로는 특히 Bové 1996을 들 수 있다.

5) 반면 영미권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정치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대중들이나 대중들의 역량 개념이 지니는 중요성을 다소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영미권 연구자들이 그로티우스와 홉스에서 시작되는 자연권 사상의 흐름 속에서 스피노자 정치철학을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고(이 경우 스피노자 정치철학에서 사용되는 법적 개념들, 곧 권리와 법, 자유, 정체 같은 개념들이 주요한 검토 대상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영향에 따라 󰡔신학정치론󰡕이 좀더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미권의 연구자들 중 전자의 경향을 보이는 연구로는 Curley 1991, 1995; Den Uyl 1984, 1987를 꼽을 수 있고, Bagley 1999; Smith 1994, 1997은 후자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구이다. 반면 Montag 1998은 유럽의 연구 경향과 매우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영미권 연구자들 중 일부는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의 이론적 차이점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특히 리 라이스와 스티븐 바본의 개별 연구 및 공동 연구에서 잘 나타난다(Rice 1990; Rice & Barbone 2000).  이들의 논의에 대한 좀더 상세한 비판은 필자의 학위 논문 11장을 참조하라.  

6) 이에 관해서는 TP 1장 3절; 7장 25절; 8장 4절-5절; 8장 13절; 9장 14절 등을 참조.

7) “Terrere, nisi paveant.” 󰡔정치론󰡕 7장 27절.

8)  이에 관한 좋은 논의는 Montag 1998, pp. 78-81 및 Chaui 1998을 참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