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출판의 중요성에 대한 국가적 인식은 보편적이다. 이에 많은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학술출판 진흥책을 펼치고 있는데 그 형태는 인식의 정도와 활용가능한 정책 자원의 규모에 따라 다양하다. 특히, 대학도서관을 비롯한 도서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현황과 요구되는 과제를 살펴보았다.<편집자 주>
촘스키, 홉스봄, 뮈르달 등 세계적 학자를 키운 출판기획자 앙드레 쉬프랭은 얼마전 방한해 학술출판에 대한 정부지원의 중요성을 적극 거론했다. 학술출판 유지는 국가개입 없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여기엔 학술서가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체이며, 이에 기반해서 한 사회의 전체 문화가 형성, 보존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학술출판이 시장의 경쟁과 도태 원칙에 맹목적으로 종속되지 않도록 다양한 진흥 정책을 펴고 있다. 영국의 경우 연간 6천1백만 파운드를 공공도서관의 도서구입비로 지원하고 있으며, 호주도 도서관에 비치되는 교육 목적의 도서 저작자 또는 출판사에게 4년간 3천8백만 달러를 투입하는 ‘도서대여권리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모든 신간학술 도서를 구입하게 하는 제도는 책값의 절반을 받고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각각 2권씩 납본하는 ‘납본 보상금 제도’가 유일하다. 이것은 양 도서관의 유지를 위한 출판계의 자발적 협조이지, 지원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한국은 국가가 직접적으로 도서를 선정하여 출판을 지원하는 독특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우수도서지원, 학술진흥예산의 2.5%에 불과
현재 문화관광부와 교육부를 중심으로 한 추천/우수 도서제나 국내외 번역 활동 지원을 통해 학술출판에 연간 1백억원 정도의 금액이 지원된다. 이 밖에도 언론, 사회복지, 다산학 등의 특수 분야 저술/번역 활동을 지원하는 각종 민간 재단들이 연구비와 출판 지원 형태로 학술 저술과 번역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예컨대 2003년 한 해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과 한국과학재단(이하 과학재단)이 대학 중심의 연구 활동 진작을 위해 투입한 총 예산은 6천1백46억5천9백만원임에 반해, 문광부와 대한민국학술원이 우수도서 출판지원에 투입한 금액은 75억원으로, 학진과 과학재단 통합 예산의 1.2%에 불과하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2003년 한 해에 정부가 연구개발 부분에 들인 예산(5조2천6백78억원)비교하면 정부의 학술출판 진흥책은 그야말로 ‘껌값’이다.
물론 연구지원이 학술서로 연결되는 시스템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결과물들을 관리하는 체계가 빈약하다. 외부 접근도가 지극히 낮을뿐더러, 책으로 출판돼 나와도 금방 절판되기 일쑤며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안정적인 연구와 학술출판에 대한 비판적 수용메카니즘이 없는 상황에서 연구개발 중심의 지원책은 문제가 많다.
중요한 것은 예산증액이 아니다. 이제 학계와 출판계 및 관련 전문가들은 예산의 적절한 배정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연구원은 “도서관이나 연구소 등의 공공 인프라를 더 구축한다면 학술출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용준 대진대 교수(출판학)도 “출판시장의 위기로 나타난 사회의 지적 자원의 고갈 문제들은 도서관 구입 확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기관 수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서관 현황은 암울하기만 하다. 도서관 운영 예산은 매년 조금씩 증가하고 있으나, 도서구입비는 요지부동이거나 하락세다. 책을 싸게 구입하려 하거나, 책구입비를 시스템 전산화 및 전자저널에 투입하고 있다. 일부 도서관들은 ‘책은 공짜’라는 인식에 젖어 있기도 하다. 문학과지성사 채호기 대표이사는 “영세 도서관의 경우, 도서를 기증해 달라는 공문을 심심찮게 보낸다”라고 말한다. 유명 저자들에게는 직접 도서 기증을 요청하기도 한다. 국가가 도서관 관리에 신경쓰지 않으니, 도서관이 마치 시민운동단체 같은 ‘공공성’을 내세운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전문 학술출판의 가장 큰 소비자라 할 수 있는 대학도서관의 현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02년을 기준으로, 지난 10년간 국립대학 예산이 평균 12.4% 인상된 반면, 대학도서관 예산 및 도서구입비는 평균 7.7%의 증액에 그치고 있다. 한국 대학 중 가장 많은 도서관 운영비를 책정하는 서울대(65억 9천만원)도 일본 게이오대(3백3억원)의 1/5에 불과하다.
학술에 무감각한 도서관 장서체제
게다가 전자도서관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도서구입예산에서 학술도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허남진 서울대 도서관장은 “현재 전체 도서구입비에서 국내외 단행본이 25%를 차지하고 해외 전자저널 구입이 나머지를 차지한다”라고 말하는데, 대부분의 대학도서관들이 해외 전자저널 구입 비중을 지속적으로 확충해 갈 계획이다.
해외 전자저널을 통해 최신의 학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외 전자 저널의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해외 전자저널의 편의성과 필요성 만큼, 학문후속세대를 위한 기초환경 조성도 중요하다는 점을 학자들이 잊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많다. 도서구입예산의 증액보다는 예산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학술서 구입에 대한 대학도서관 측의 전략도 문제다. 전문 사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도서 내용을 꼼꼼하게 검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출판사나 저자의 인지도, 제본 상태 등의 외형적 요소만으로 도서를 선정하거나 신문 광고나 베스트셀러 목록 위주로 도서를 식별한다. 이런 조건은 도서관이 학술서에 대한 적정 포션을 유지할 수 없게 하고, 그럼으로써 학생과 교수를 위한 ‘건강한 식단’은 물건너 가게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방 A대학의 한 교수는 “교수들이 도서관 장서에 아예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단편적 사실만 끌어모아 논문을 작성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열심히 책을 보면서 연구하겠는가”라고 꼬집는다.
학술도서 구입 전략의 부재는 도서 납품 시스템과도 긴밀히 맞물려 있다. 현재 많은 도서관들이 자체 제시하는 할인율을 기준으로 유통대행 업체나 대형 서점을 통해 도서를 납품받고 있다. 이건 오랜 관행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점들이 출판사에게 도서관 납품용이라며 50%에 책을 넘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경북대 서종문 도서관장은 “일부 서점들이 마진이 약한 학술서를 목록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아 심사체계의 확충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한다. 심지어 일부 대학도서관에는 연말에 남은 예산을 저가의 통속 소설 구입으로 소진하는 관행적 악습이 남아있다.
도서관 납품을 둘러싼 이러한 악습들은 기본적으로 대학도서관이 현재 한시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도서정가제의 예외조항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고경대 출판인회의 사무국장은 “출판의 공공성을 담보해야 할 대학도서관에게 법적으로 할인을 허용한 정부의 출판문화인식이 한심하다. 도서관 납품 과정에서 유통업체간의 할인경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소규모 학술 출판사의 몫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규모만의 문제일까. 대형출판사라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장서의 질로 대학 평가해야
도서관이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신간 학술 도서 일체를 구입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도서관 도서 보상금제’는 학술출판 활성화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다. 우선적으로 4백62개의 공공도서관만을 대상으로 해도 저자와 출판사로서는 최소 4백62부를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다. 김정숙 백제예술대 교수(출판학)는 “한국의 공공도서관 수가 미국의 1/45, 유럽의 1/10에 불과하니, 다른 나라의 도서관 도서 보상금제 예산보다 아주 적은 예산으로도 운영 가능하고, 학술진흥에 배정된 예산 쓰임새의 효율적 조정만으로도 가능하다”라고 지적한다.
한 해 연구개발예산의 10%인 5천2백67억원이 학술출판 진흥 기금으로 활용되는 과감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이러한 도서 보상금제는 어렵지 않게 추진될 수 있다. 또한 막대한 예산을 들여 논문을 양산하는 것에 그치는 현재의 학술지원 체제의 귀퉁이를 약간 허물어 저술 중심의 사후평가지원 체제에 투입해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연구 결과물의 출판을 의무화하고 국가가 이를 구매해주는 체제가 되면, 학계에 만연한 단편적 연구 업적 쌓기 관행도 수그러들 수 있는데, 결국 이 모든 게 연결돼 성찰될 문제다.
대학 도서관의 경우, 학술서 구입을 의무화해야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국가가 대학지원금 중 대학도서관 장서 비용을 구체적으로 정해 지원하고 이를 대학평가 항목으로 적극 반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재는 교육 여건과 관련해 학생당 도서 자료 구입비가 대학 평가 항목으로 주로 인용되고 있을 뿐, 장서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나 방법이 부재하다.
물론 학술출판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위해서는 정부차원에서 이를 인식할 수 있도록 대학, 학계, 출판계, 도서관계가 의견을 모아 제출해야 한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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