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중교양서 전담번역의 풍경

직접 쓰는 기분으로…

학술서에 비해서 대중서들은 번역자가 누구인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렇지만 문학이나 인문학적 에세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해외 저자의 문체와 삶을 잘 이해하는 전담번역가가 그 사람을 화젯거리로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가의 매력에 빠져서 그 사람을 속속들이 소개하고 싶어하는 전담번역가들이 국내에도 꽤 여럿 있다.


소설 ‘개미’를 비롯해 ‘나무’, ‘뇌’ 등으로 국내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은 모두 이세욱 씨가 번역했다. 우연히 베르베르의 책을 접하게 됐던 그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문학이며 문학시장과 문학에 대한 사유를 넓히는 데 많이 기여할 것”이란 생각에 출판사를 의뢰해서 번역을 시작했다. 첫 번역 때부터 그는 베르베르를 만나러 갈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책에 나오는 거리, 무대, 인물 등 작가가 느끼는 것은 모두 느끼기 위해 여행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마치 내가 쓴다는 기분으로” 그는 베르베르가 되어 번역하는 데 몰두해 한 권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소개했다. 지금은 올 10월 출간된 ‘우리는 신’이란 3부작 번역에 착수했으며, 앞으로 3년간 이 작업을 할 예정이다. ‘하와이의 자식들’ 등 베르베르의 만화도 소설로 개작되고 있는데, 물론 이것도 이세욱 씨 몫이다.


시오노 나나미 만큼 관심을 모은 여류문필가도 없다. ‘로마인 이야기’를 위시해 수십권이 번역돼 나왔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전담번역가는 세 명이다. 한길사에서 먼저 시오노 나나미를 발굴했고, 이를 故 정도영 씨, 김석희 씨, 오정환 씨 세 번역가에게 맡긴 것. 정 씨는 ‘바다도시 이야기’를, 김 씨는 ‘로마인 이야기’를, 오 씨는 ‘나의 친구마키아벨리’ 등을 각각 맡게 됐다. 세 번역가 모두 시오노 나나미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김 씨와 오 씨는 모두 “너무나 탁월한 작가다”라고 입을 모으면서,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번역할 것이라 말한다. 김씨는 여태껏 ‘로마인 이야기’ 12권을 번역했는데, 향후 3년간은 나머지 3권 번역에 몰두할 것이라고 한다.


독일문학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도 많은 번역가들을 거느리지만 특히 안인희 씨를 첫손에 꼽을 만하다. 안 씨는 1995년 독일유학에서 우연히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집어 들었는데 지식인들의 광기어린 내면을 너무나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 이 탁월한 복음술사에게 반해버렸다. “이미 여러권의 책을 번역해봤지만, 이 책을 옮기면서 처음으로 번역의 독특한 즐거움을 느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베토벤의 전기를 쓴 로맹 롤랑의 전기를 쓴 츠바이크”는 매력덩어리였다. 그에게 숨가쁘게 말려들어간 안 씨는 그 외에도 ‘스코틀랜드의 여왕’,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등을 번역했다.


이것 말고도 모리스 르블랑 등 프랑스 추리 소설 분야에서 성귀수 씨가 전담번역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며, 요시모토 바나나는 일본문학의 전문번역가로 명성을 굳힌 김난주 씨가 10여권을 독점하다시피 번역하고 있다. 무라카미 류는 양억관 씨가 주로 번역했는데, 김난주와 양억관은 일본문학을 맛깔스럽게 옮기는 양대 번역자로 명성을 누린다. 스페인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 마르케스를 비롯해 주요 작가들을 번역해온 송병선 울산대 교수는 작가들을 현지에서 작가들을 만나서 교유하고 수시로 메일을 주고받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담번역가로 충분한 조명이 필요한 번역자다. 최근 돌풍을 일으킨 파울로 코엘료의 책은 불어 전문 번역가인 이상해 씨가 주목을 끈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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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09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번역자를 유심히 보는 편인데, 주로 과학서적 쪽 번역자들한테 관심이 많아요. 박병철 교수님(만나뵌 적은 없지만) 번역은 물리학 쪽에선 최고봉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는 김희봉 선생님도 아주 탁월하시거든요. '물리가 물렁물렁' 시리즈를 번역하신 이충호선생님도 끝내주는 번역가이시고... 반면에 생명과학 쪽 주로 번역하는 이한음씨 번역은, 관련분야 전문가다운 솜씨는 인정하지만 문장이 가끔 목에 걸려요.

일본어 소설 쪽에선 김난주씨가 워낙 탁월하니깐... 자기책 외국어번역본에 까다롭다는 요시모토 바나나도 만족스러워하고 있다더군요. 김난주씨랑 양억관씨는 부부 번역가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김난주씨 쪽의 명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얼마전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이랑, 일본의 비판적 지성으로 꼽히는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을 읽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체 일어체 번역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저런 학자들이 쓴 책을 번역한 책에서는, 일본어의 독특한 표현을 제외하면, 목에 걸리는 어색한 문장들이 없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전반적인 우리나라와 일본의 학문 수준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요. 마루야마 마사오도 그렇고 가라타니 고진도 그렇고, 이 사람들이 서양 학자들 글 인용해서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자연스럽고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거든요. '완전히 소화해서' 얘기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번역돼 나오는 서양 책들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책 내용이 독창적이어서라기보다는 우리말로 적절한 개념을 찾지 못해서 이상하게 꼬아놨기 때문인 듯합니다. 저명한 과학자인 모씨가 그랬다죠. "전문용어를 써야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요.



그것과 조금 다른 맥락에서 번역에 아쉬움을 느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윤기선생이 번역한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을 때였어요. 이윤기 선생은 누가 뭐래도 훌륭한 번역자입니다만, 본인이 내용을 잘 안다고 자신했던 터인지, 글에서 캠벨보다 번역자가 더 부각이 되는 거예요. 설명하기 좀 애매하긴 하지만... 어떤 느낌이냐면, 번역자의 독특한 글투가 너무 많이 묻어난다는 것. 책은 굉장히 훌륭했고 번역도 그정도면 100점에 가깝지만 캠벨에 앞서 이윤기 냄새가 난다는 것은 좀 아쉬웠어요.



번역 얘기가 나와서 본의 아니게 주절거리게 되었네요.

릴케 현상 2004-11-09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혹한 글읽기'를 보니 이윤기님의 번역서에 유난히 잔혹하던데요

balmas 2004-11-09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스트롱베리님, 이런 좋은 정보를 그냥 댓글에다 풀어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마이 페이퍼라도 하나 쓰시지 ...



'잔혹한 글읽기'??

아하! 그 책이요 ...

저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그 분야의 전공자가 한 이야기이니,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이윤기님이 좀 오버하는 건 있죠.^^

딸기 2004-11-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야겠어요. 페이퍼에 정리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