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20세기, 야만의 얼굴을 한 평화 - 국지전

20세기 세계의 국지전 그 뿌리와 결과
-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중심으로
 
글쓴이 :  바람구두

*이 글은 제가 지난 2002년 계간 황해문화 봄호(통권34호) 특집 "전쟁없는 21세기를 위하여"에 총론 성격의 글로 쓴 글입니다. 책을 보시면 실명을 확인하실 수 있겠지만... 구태여 이곳에 실명으로 올릴 필요는 없을 듯 해서요. 6-7회 정도로 나눠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세기, 야만의 얼굴을 한 평화 - 국지전
 
  전쟁을 기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정된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이라는 국지전의 사전적 정의에 맞게 지역별로 대표적인 국지전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동아시아에서의 국지전 -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베트남전

  추축국 동맹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패망으로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을 지원함으로써 공산당의 정권 장악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물량 지원에도 불구하고 제2차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1949년 중국 본토를 장악하자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고 패전국 일본을 재건해 아시아의 군사·경제적 거점으로 삼고자 한다. 미국은 한국전쟁(1950-1953)이 발발하자 1951년 서둘러 일본과 안보조약을 맺고 승전국으로서의 배상 취득을 포기하고, 일본의 반성 없는 주권 회복을 인정한다.

  이후 미국의 일본을 이용한 중국 봉쇄 정책은 현재 일본의 재무장화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의 전략적 패배와 1949년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은 미국의 냉전적 사고에 더욱 불을 당겨 50년대 초에는 미국 전역을 매카시즘이라는 마녀사냥에 휩싸이게 한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을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통치하고자 한다. 앞서 베트남 민족지도자 호치민의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베트남의 민족지도세력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 그들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기대를 품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반제민족해방 세력은 프랑스 식민정부와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했다.
 
  1945년 3월 9일 일본은 베트남에서 불편한 공존관계를 지속하던 프랑스 식민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무력으로 이들을 굴복시켰다. 80년간 계속되던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잠시나마 종결되었으나 일본은 베트남에서 자신들을 대리할 세력으로 이미 오래 전에 무력화된 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즉위시킨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일본의 베트남 왕정 복원이 결코 베트남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간파하고, 연합군과 협력하여 베트남에서 일본군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한다. 8월 6일 일본에 핵공격이 가해지자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깨달은 베트남독립동맹(Viet Nam Doc Lap Dong Minh, 越盟)은 즉각적인 총궐기를 선언하고, 8월 19일에는 하노이, 같은 달 25일엔 사이공을 장악하고,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전후 연합군은 베트남의 독립 열망을 저버린 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북위16도선을 경계로 영국과 중국의 군대를 진주시키고, 뒤이어 프랑스가 식민정부를 복원시키면서 독립은 깨졌다.
 
  베트남 전쟁은 크게 3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945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와의 전쟁, 제2기는 1954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 제3기는 미군 철수 후인 1973년부터 1975년 남베트남의 패망기이다. 미국이 완전한 자주 독립을 원한 베트남보다 프랑스를 지원한 까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불확실한 민족주의 세력보다는 유럽에서 점증되는 냉전 체제의 확고한 우방인 프랑스를 지지하고, 이들에게 전비를 지원8)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이 확실해질 때까지 그들로 하여금 대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대만, 필리핀, 일본, 남한을 연결하는 태평양 연안의 군사적 요충지를 차지하고, 인도차이나의 풍부한 자원을 지배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의 패권 장악을 노렸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민족해방 세력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의 패전으로 독립을 쟁취할 듯이 보였던 베트남은 1954년 프랑스와 제네바 협정을 맺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임시 분할되고 협정에 의거하여 남북베트남간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다. 예상되는 선거 결과는 호치민 정부의 승리9)였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이 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CIA를 통해 베트남에서 여러 비밀 공작들을 수행하여 조약을 파기하고, 고딘 디엠 정권이 수립되도록 했다. 고딘 디엠 정권은 태생적 한계와 실정, 부패로 인해 국민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1963년 CIA의 공작에 의한 쿠데타로 제거된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수행한 일련의 정책들은 미국이 다른 제3세계 국가에서 수행한 일련의 정책들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댐과 병원, 학교를 건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전역에서 소모한 폭탄의 2배 이상을 남·북베트남 구분없이 골고루 투하했다.(참고로 남베트남은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가 통치했고, 북베트남은 국제법상 독립국가였다.) 이 시기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다이옥신 등 각종 화학무기를 실험한 것은 물론 CIA의 피닉스 공작을 통해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닉슨 대통령 시절에는 북베트남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와 시간을 벌기 위해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공급기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미국이 대외에 선전한 것은 낙후되고, 식민지 경험을 가진 제3세계의 빈민국가에 문명의 혜택(?)을 전하는 전도사였다. 이런 미국의 교만한 정책은 결국 밀라이(My Lai)10)에서 347명의 민간인을 학살한다. 이런 미국의 군사전략은  피해당사자였던 제3세계 민중은 전세계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967년 버트란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아이작 도이처 등과 같은 세계의 지식인들이  '베트남전쟁범죄에 관한 국제재판소'를 조직해 베트남에서 미국의 행위가 민간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무차별 대량 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side)라는 전쟁범죄를 포함하고 있는가를 물었다. 이 재판소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증언을 청취했고, 베트남 민간인들의 증언을 들었다. 사르트르는 최종적인 평결문에서 당시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가 "(베트남에서)우리는 우리를 방위하고 있다"고 한 말에 주목하며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쟁 목적이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런 군사적 목적을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허명을 내세워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제노사이드라는 의도적인 무차별 살상 즉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만장일치로 결론지었다.11)

  1975년 4월 29일. 베트남 전쟁은 미군 58,000명의 전사자, 153,000명의 부상자를 내며 끝났지만 베트남 민중의 인적·물적 손실은 계량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이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민주주의의 교사'를 자청하며 일으킨 결과였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게 된 원류는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발견한 원주민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는 방법을 택했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인디언들이 가꾸고 생육하지 못한 땅을 자신들이 문명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와 똑같은 논리로 1848년엔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 텍사스, 유타 등 서부 지역을 빼앗았다. 신의 축복을 받은 미국은 세계를 미국식 민주주의로 문명화시키기 위해 계속 팽창해야 하고, 그것은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12)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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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50년까지 미국은 인도차이나 전체의 프랑스군을 무장시킬 수 있을 만한 분량인 약 30만 정의 소형무기와 기관총, 10억 달러의 군사비를 프랑스에 지원했다. 미국은 프랑스의 전쟁 비용 중 약 80%를 부담했다.

하워드 진, 조선혜 옮김, 「베트남전쟁」, 『미국민중저항사2』, 일월서각, 1986, 220쪽

9) CIA의 전신인 OSS의 윌리엄 도노반 국장은 소련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 유럽에서 소련은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철학이라는 대단히 강력한 카드를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은 소련만큼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정치적, 사회적 철학이 없다." 10여 년 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도 이와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았으며, 인도차이나 사태가 악화됐을 당시에도 미 정부 당국자들은 같은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노암 촘스키, 오애리, 「남-북, 그리고 동-서」,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2000, 이후, 121쪽에서 재인용. 그리고 이런 불안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의 토지개혁 과정과 쿠바 혁명의 성공이 제3세계 민중들 사이에서 하나의 가능성있는 시도로 보이는 것 자체를 불안 요소로 여기고 미리 차단하려는 반혁명, 예방혁명 시도로 이어진다.

10)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국내 TV뉴스에서는 영국 BBC방송의 한 프로듀서가 미 국방부 문서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노근리를 포함한 전지역에서 미군에 의한 조직적 민간인 살상에 대한 명령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소개되고 있었다.

11) 이삼성, 「미국의 세기와 베트남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한길사, 1998, 211~212쪽에서 발췌 인용

12)) 이 말은 1837년 멕시코와의 전쟁에 즈음해서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존 어 설리반(John L. O'Sullivan)이 쓴 신문 사설에서 멕시코는 "앵글로 색슨족의 월등한 기력에 융합되거나 굴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패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긴 말이다.  최웅, 김봉중, 「해외팽창」, 『미국의 역사』, 1997, 조합공동체 소나무,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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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25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직 [법의 힘]을 안 사셨단 말씀입니까? 이런, 섭섭해라 ... ^^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당연히 독어본을 번역했지요. 물론 불역본에서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영역본은 오역이 더러 있는데,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준거로 삼고 있는 불역본은 아주 번역이 정확하더군요)^^.
그런데 수업에서 좋은 글들을 많이 다루네요. 좀 너무 많은 걸 다룬다 싶기도 하지만 ...
인세에 보탬을 주신다면, 언제든 환영이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