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노부후사 > <퍼온글>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이 정권의 큰 착각 하나는 자신이 한나라당과 비대신문의 수구 신성동맹으로부터 영일(寧日) 없이 두드려 맞는 이유가 여권과 신성동맹 사이의 이념적ㆍ정책적 차이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최근 생뚱맞은 물타기로 개혁 법안들을 멀겋게 만듦으로써 그런 시각을 또렷이 드러냈다.

그러나 웬걸, 신성동맹의 공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신성동맹이 여권을 두드려 패는 이유는, 적어도 결정적 이유는, 이념이나 정책 층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과 올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겼더라도, 지금까지 현정부가 펼쳐온 정책과 크게 다른 처방을 선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인들 무슨 수로 지금 정부보다 더 화끈하게 대미 종속과 가진 자 옹호를 실천하겠는가. 정권 출범 당시에야 여권과 신성동맹 사이에 이념 차이가 없지 않았겠지만, 이 정부는 지난 한 해 반 동안 그 차이를 실천으로 입증한 바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신성동맹은 왜 여권에 끊임없이 말의 팔매질을 해대는가? 여권의 존재 자체가 그냥 싫기 때문이다.

마땅히 자기들이 꿰차야 했을 자리를 잇따른 선거 패배로 빼앗긴 것이 짜증스럽고, 게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평소에 깔보아왔던 무지렁이들이라서 더욱 짜증스러운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정권이 같잖다는 것이다.

여권에 대한 신성동맹의 감정은 맞수에 대한 미움에도 미치지 못하는 멸시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가당찮은 멸시의 감정이야말로 멸시하는 주체의 천격(賤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접어두자. 아무튼 신성동맹이 바라보는 현 정부는 프랑스 왕당파 귀족들이 바라보았던 제1제정과 비슷하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 역시, 코르시카의 미천한 신분 출신 황제처럼, 근본 없는 집안 출신의 ‘왕위 찬탈자’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동맹이 여권을 지칭하며 애용하는 ‘좌파’라는 말도 ‘그냥 싫은 놈’이라는 뜻일 뿐이다.

신성동맹이 이런 알량한 귀족주의로 여권을 대하고 있는 이상, 이 정부가 설령 가상의 한나라당 정권 이상으로 우향 돌진한다고 해도 이른바 ‘상생’의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여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신성동맹이 싫어하도록 내버려두고 제 갈 길 가는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정권은 출범 이후 지지자들 심정에는 아랑곳없이 신성동맹 눈치를 살피느라 끊임없이 우경화의 길로 매진함으로써 제 지지기반을 허물어왔다.

그러다가 사면초가다 싶으면 사소한 ‘껀수’를 잡아 온 나라가 들썩이도록 신성동맹과 각을 세우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방식의 조잡한 정치공학을 되풀이해 왔다.

여권이 무슨 일을 하든 신성동맹이 거기 딴죽을 걸 준비가 돼 있는 한, 신성동맹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적 유권자들이 여권의 새로운 지지자로 충원될 가망은 거의 없다.

여권이 살 길은 정권 출범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에 박차를 가하며 두 차례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유권자들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다.

게다가 출범 이래 줄곧 좌파 정권이라는 ‘욕’을 들어온 바에야, 본때 있는 좌파는 못 되더라도 좌파 흉내쯤은 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개혁 피로증? 만약에 그런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신성동맹의 악선동 때문만이 아니라 아무런 실천 없이 허공에 지겹게 난무하는 여권의 개혁 담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개혁은 개혁이라는 구호 안에 있지 않다.

지금 개혁 법안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슨 대단한 공사가 아니라 그저 우리 사회를 정상화하는 최소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여권이 이 정도 일을 하면서 입으로 개혁 유세(有勢)를 떨어 덤의 반발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언어는 온건할수록 좋고, 실천은 어기찰수록 좋다.

지난 대선 때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2007년 대선 때 민주노동당 후보 찍을까 아니면 기권할까 고민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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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4-10-2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이 머리속의 논리로 풀수 없다는것을 알면서 점점 괴롭게 되는군요.
지난 토요일 일로 강남 기득권자라고 할까(서울대 나오고 의사로, 제 기준에 이정도면) 한분과 애기하는데 내년쯤 체제 변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더군요.
이런 분들 애기들으면 밖에서 보면 이너써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다들 경기, 서울고 나와 서울대 나온분들 모임에서 이런애기저런애기하는게 이런것인데 이분들 현실인식이 이렇더군요. 그리고 이런분들이 현실적인 힘인 권력과 돈을 쥐고 있고.
애기를 듣는순간 암담해지더군요.
답이 없어보입니다. 실천이라는것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도 맘대로 못하는것이 참.
정말 내년에 김정일 하수를 받아 체제변혁이 일어날것인지.
무얼해야할지

balmas 2004-10-2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 기득권자들, 특히 상류층 지식인들의 지적, 도덕적 능력이 터무니없이 허약하다는 점은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들은 지난 50여년 동안 미국과 군부독재의 호위 아래 온갖 편의와 특혜 속에서 풍요를 누려왔지요. 문제는 자신들의 풍요를 가능하게 했던 그 조건들(미국과 군부독재)이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반민족적인 것이라는 점을 성찰하고 교정할 만한 능력을 이들이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자기인식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는 그 조건들이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조건이라고, 곧 민주주의적인 것(이 때의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풍요의 자유 보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이런 판단 위에서는 이 조건들을 개조하고 교정하려는 노력들은 모두 반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런 노력들은 모두 좌파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행태들을 단순한 전술적 선동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그들 스스로가 이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체제전복의 위기의식을 느낄 만하지요. 전문지식은 갖추고 있지만 사회적 인식(특히 한미관계나 남북관계에 대한)은 초중등학교 수준을 넘지 못하는 고급 지식인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오늘의 남한사회죠.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처럼 여기에서 타협하게 되면 아무것도 안되고 다시 과거로 회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싸우고 깨뜨리고 사회적 조건들을 개조해야죠.

릴케 현상 2004-10-25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무속인 협회에서 노무현은 내년에 급살 수가 있다고 했댑니다. 그리고 미국선거는 부시 당선으로 점치더군요

balmas 2004-10-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무속인 이야기를 들으니까, 동국대 정치학과 황모 교수가 생각나는군요.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로 자처하다가 90년대에는 비판적 하버마스 연구자로 나서고, 다시 00년대에 와서는 김대중 대통령 자문 교수의 한 사람으로 속해 있다가, 최근에는 점성술 정치학으로 돌아서서 대통령의 사주에 관한 책을 내기도 했고, 올해에는 대통령 탄핵안을 이론적으로 기초했다가, 결국 조선일보 칼럼의 필자로 등단한, 그 황모 교수 말이죠.
암만 해도 무속인들이 황모 교수의 이론적 뒷받침을 받고 있는 듯 ... 아니면 그 반대인가???

릴케 현상 2004-10-2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 교수가 그렇게 재주가 많은 줄은 몰랐군요

biosculp 2004-10-2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모교수는 사상의학을 정치학에 적용한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주워들은 견문으로는 이분이 일급의 맑스정치학자라고 들었었는데 배우고 아는것과 늙어가면서 처신하는것이 이렇게 괴리가 되나 그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김문수 한나라당의원을 봐도 사는게 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배우고 행동하는것 그리고 늙어서 추하게 되지 않는것 참 힘들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