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국내출판 유감
『에릭 호퍼 자서전』에는 호퍼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외울 정도까지 탐독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호퍼가 그렇게까지 열광했다는 건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얼마 전에 박홍규 교수가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를 출간하셨기에, 나중에 수상록과 함께 구입해서 읽어볼 요량으로 알라딘에서 '몽테뉴'로 검색을 했더니 비교적 최근 것으로 99년 혜원출판사, 96년 청목사에서 나온 수상록이 있다. 그런데 먼저 것은 324쪽, 나중 것은 430쪽에 불과했다. 호퍼는 자서전에서 몽테뉴의 수상록이 엄청나게 두껍다고 설명했기에 뭔가 이상해 아마존에 가서 다시 검색을 해봤다.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검색된 수상록 원본은 1400쪽에 육박한다. 영어판이 폰트를 대략 30정도로 잡고 자간과 행간을 어린이 책 마냥 지나치게 늘리지 않았다면(당연한 얘기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제로다), 국내에서 출간된 수상록은 모두 요약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소규모 출판사로서는 1400쪽의 엄청난 분량을 번역, 편집해서 고가의 가격을 붙여 내놓을 만한 여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출간했더라도 국내 독자층을 고려해 볼 때 얼마 팔지도 못했을 것이다(최근 승산출판사가 '파이만의 물리학 강의'를 내놓아 출판관계자와 독자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본을 1/3, 1/4로 확 줄여서 출간해도 되는 걸까? 국내 요약본이 국내 출판사에서 편집했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게 영어판 중에도 국내본과 비슷한 분량의 요약본이 몇 권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원본도 아닌 요약본을 그대로 가져와서 번역만 한 것이다. 번역의 질은 읽어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김화영님, 이세욱님 말고는 제대로 된 프랑스어 번역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무튼 나는 요약본 수상록은 청소년용 '토지'나 '장길산'처럼 불쾌하지 그지없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지만 국내 출판은 거의가 외국서의 번역 일색이고(번역의 질은 둘째치고라도)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연구하고 투자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어떤 학자가 혼자 죽도록 연구해서 이룩한 결과물을 출판사 이름만 붙여서 출간하는 게 전부다. 우리가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할 만한 기획물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국내 출판사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책 중에 호평을 받으며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책이 있는가? 원래 있는데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건지, 도무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계에서 1년 동안 출간되는 수많은 책 중에 명저를 100권만 추려낸다고 했을 때 국내서가 그 안에 한 권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대답 못하겠다. 이게 국내 출판의 현실일 것이다. 세계 출판시장에 변방이 있다면 바로 우리 나라가 변방이다. 물론 내가 좋은 책 정성스레 번역해서 내놓는 출판사들의 노고를 폄훼하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작업과 더불어 독자적인 출판 영역을 개척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한 변방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양자역학의 모험'이라는 책이 있다. 550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누가 썻는지 아는가? 일본 TCL이라는 단체에서 10주 동안 양자역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썼다. 이렇게 말하면 TCL이 물리학 단체인 줄 알겠지만, 물리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7개 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이다. 그럼 책의 질이 좀 떨어지지 않느냐고? 안타깝지만 국내에서 출간된 양자역학 관련 책들 중에 전공책을 제외하면 이 책보다 뛰어난 책은 없다. 이게 바로 일본과 우리의 차이이다. 하늘과 땅이 아닐 수 없다. 정보화 시대, 인터넷 시대 하는 말들이 많지만 제대로 된 책이 없는 나라의 미래가 밝을 리 없다. 결코. 제대로 된 책을 내려면 우선 요약본 수상록 같은 책은 아예 만들 생각을 말아야 하고, 독자들도 사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