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 건너편 서가를 살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서가에 둔 걸까? 러시아 문학이나 뭐 그런 쪽에?
사서는 컴퓨터로 검색했다. 우리 둘 다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친밀하고, 숲 속 나무 사이를 홀로 산책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자유 주변을 맴도는 특별한 시간으로 가득했다.
사서가 고개를 들고 말한다. 두 권 소장 중인데, 안타깝게도 모두 대출됐네요. 예약해 드릴까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사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에 책 세 권을 들고 있는 다른 할머니 - 나보다 나이가 적다 - 쪽을 돌아본다. 사람들이 책을 드는 방식은 특별해서, 다른 어떤 물건을 들 때와도 다르다.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아니라 마치 잠이 든 어떤 것처럼 든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들 때 같은 방식으로 드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인구 육 만 명 정도의 파리 교외 지역에 있는 공공도서관이다. 그 중 사천 명 정도가 도서관 회원으로 책을 (한 번에 네 권까지) 빌릴 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신문이나 잡지 참고서적을 보러 온다. 교외 지역의 아기나 어린이 숫자를 고려하면, 지역 주민 열 명 중 한 명은 도서관 회원으로 등록을 해서 종종 책을 빌려가 집에서 읽는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누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일까? 아닐 것 같다. 둘 다 그 책을 처음 읽는 걸까? 아니면 둘 중 한 명은 나처럼, 이전에 읽었지만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었던 걸까?
순간 이상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 두 독자들 중 한 명과 내가 마주친다면 - 일요일에 열리는 장터에서, 지하철역에서 나오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빵을 사면서 - 우리는 서로 조금은 의아하다고 느낄 어떤 눈짓을 주고받지 않을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감동을 받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다.
내가 정의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유산이 아니라 좀 더 특이하고 개인적인 것이다. 마치 누군가 읽은 이야기의 혈류가 그 누군가가 살아온 이야기의 혈류와 만나는 것 같다.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계속 되어갈 어떤 모습에 보태진다.
복잡할 것도 갈등도 없는 가족관계 안에서, 우리를 만들어낸 그 이야기들이, 생물학적 조상과는 다른, 우리의 공통조상이 된다.
파리 교외의 누군가, 아마도 오늘 밤 의자에 앉아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을 그 누군가는, 이미, 이런 의미에서, 먼, 먼 사촌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