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에 후마니타스 출판사와 [정치체에 대한 권리] 출간 기념 인터뷰를 했는데,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번에 올려놓습니다.
인터뷰가 실린 [후마니타스 통신 11월호]를 보시려면 아래 주소로 가보세요.
http://www.humanitasbook.co.kr/webzine/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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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정치체에 대한 권리』 (발리바르 지음, 2011년 10월 출간)의 옮긴이 진태원
질문 1.
『정
치체에 대한 권리』가 드디어 출간이 되었습니다. 그간 진태원 선생님은 후마니타스와 에티엔 발리바리의 저서 두 권(『우리, 유럽의
인민들?』)을 번역, 출간하셨습니다. 두 권 모두 한편으로는 활동가로서의 발리바르가 지닌 실천적 개입의 측면이 특히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그러다 보니 국내 독자들에게는 발리바르가 개입하는 지점들이 다소 낯설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점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정세적 개입의 성격을
가지는 내용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입들이 일관되게 던지고 있는 중요한 질문들 말입니다.
답변 1.
당
연히 이 두 권의 책은 실천적인 개입에 대한 개인적인 보고나 경험담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발리바르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천적인 개입의 함의에 대해 고도의 이론적인 성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권의 책에서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핵심적인 것은 세 가지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첫째, 근대 정치체의 한계와 그것의 극복에 관한 주장입니다.
발리바르는 근대 정치체를 국민국가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사회국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핵심적인 모순을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하죠. 다시 말하면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뜻하는 시민권을, 국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부여한
것이 근대 정치체의 한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연합이라는 기획이 발리바르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러한 기획이
근대 정치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실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발리바르는 현실의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역사적 소명과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이 자신의 소명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근대 정치체인
국민사회국가가 이룩한 민주주의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유럽연합은 붕괴하거나 좌초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입니다.
둘째, 정치체에 대한 재정의가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체’라는 우리말에 해당하는 서양어로는 폴리테이아, 레스 푸블리카, 키비타스, 커먼웰스, 시테와 같은
다양한 명칭들이 존재합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명칭들을 관통하는 정치체의 핵심을 ‘시민권 헌정’(constitution of
citizenship)으로 재정의합니다. 이러한 재정의는 정치체의 근간이 시민들의 봉기적 구성 행위에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정치체는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기초를 갖지 않으며, 억압과 압제, 또는 소수의 지배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인민의
봉기적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헌정’으로 번역되는 constituion이라는 단어는 또한 ‘구성’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이중적 의미가 뜻하는 바는 헌정으로서의 정치체는 시민들의 봉기적 구성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죠. 물론
발리바르가 말하는 ‘봉기’란 꽤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대규모의 시위일 수도 있고 고전적인 혁명적
봉기일 수도 있지만,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청원 운동 등 역시 넓은 의미의 봉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미등록 이주자 탄압에 맞선 시민불복종이나 국민전선의 발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반역을 촉구하는 것은 일시적이거나
상황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정치체의 본질에 대한 재정의에 기반을 둔 주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대 정치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치체를 구성하는 것 역시 이러한 시민들의 봉기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발리바르는 좀 더 최근의
저작들에서는 봉기와 헌정 사이의 긴장 관계, 또는 민주주의와 시민권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천착하면서 자신의 성찰을 좀 더
급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어 본다면, 발리바르의
작업이 얼마나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국내 독자들에게 조만간 그런 기회가 찾아올 것으로
믿습니다.
셋째, 끝으로 반(反)폭력의 정치 또는 시민다움(civilité)의 정치에 관한 분석이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발리바르가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으로 재정의하면서 봉기적 시민권을
강조한다고 말했는데요, 이것은 사실 고전적인 해방운동(근대 부르주아혁명 및 사회주의혁명 또는 반식민 해방 투쟁 등)의 지지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혁명이나 반역, 봉기 등이 내포하는 구조적인 한계 또는 그것의
도착적인 효과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 내지 시민다움의 정치는 일상적인
용어법에서 말하는 ‘비폭력’을 뜻하지 않습니다. 전에 어떤 강연회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분이 발리바르의 반폭력에 관해,
‘결국 발리바르 얘기는 화염병을 써도 좋다는 얘기냐, 쓰면 안 된다는 얘기냐’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한 상당수 국내 독자들(특히 이른바 ‘좌파’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이해 정도를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발리바르에게 이것은 아예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발리바르는 정치에는
불가피하게 폭력이 개입하기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구조적인 폭력이나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것을 물리치기
위한 폭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폭력 없이 권리를 쟁취하거나 억압 내지 지배를 해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하지만
수많은 역사적 경험들이 보여 주듯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화염병을 쓰느냐 아니냐, 심지어 무기를 사용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금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절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들이라면 누가 그것을 금지한다고 해도
결국 사용하기 마련입니다.
발리바르가 반폭력의 정치 내지 시민다움의 정치를 말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째, 반폭력의 정치의 논점은 고전적인 혁명이나 반역, 봉기 등에 내재한 도착적 효과를 감축하거나 제어하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방을 위한 혁명이나 봉기가 다시 소수의 지배자를 위한 억압과 독재의 정치를 낳게 되었을까, 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및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내걸었던 사회주의 운동이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지배로 귀착되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상이한 답변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발리바르의 논점은 이러한 도착이나 퇴락에는 폭력의 애매성에 대한 맹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둘
째, 발리바르가 염두에 둔 ‘폭력’은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이 아니라 극단적 폭력입니다. 그는 특히 초객체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이라는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초객체적 폭력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쓸모없는 인간들의 전면적
제거’와 ‘구조의 재생산 전체를 초과하는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초주체적 폭력은 어떠한 변혁도 목표로 삼지
않는 희망 없는 반역, 목적 없는 폭력의 일반화 같은 현상들 및 이른바 ‘민족 청소’나 대량 학살 같은 현상에서 나타나는 ‘증오의
이상화’ 현상, 곧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정체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맹목적이고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 극단적 폭력이 오늘날 세계 정치에서 가장 심각한 문젯거리들에 속한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이론화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는 철학자는 매우 드뭅니다. 반면에 발리바르는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문제에 대한 해법의 모색 없이는 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를 개조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주장할 만큼 이러한
문제들을 중요한 정치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셋째, 발리바르가 말하는 폭력은 좁은 의미의 폭력, 곧 물리적
힘의 행사나 공격, 착취, 억압 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 게발트(Gewalt)의 다의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력과 권위 등을 함께 뜻합니다. 따라서 반폭력의 정치나 시민다움의 정치가 목표로 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폭력을 금지하거나
줄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폭력이 정치를 구조화하는 메커니즘을 개조하거나 변혁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당연히 공동체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경계란 어떤 것인가 같은 사변적인 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며, 또 그것에 부응하는 제도적
형태들은 어떤 것인가라는 구체적 쟁점을 수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발리바르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서 언급하는 ‘운명
공동체’ 개념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제시하는 ‘다양체로서의 우리’ 같은 개념들은 시민다움의 정치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2.
국
내에서는 지젝, 랑시에르, 아감벤 등을 비롯해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되짚어 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특히 발리바르를 통해 민주주의의 문제, 정치철학의 문제를 재사고하는 것이 가진 장점은 무엇일런지요.
답변 2.
이
문제에 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별도의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토론해 보고 싶은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점만 지적해 두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동시대의 다른 정치철학자들과 비교해 볼 때 발리바르가 갖는
강점 내지 독창성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대개의 다른 정치철학자들, 특히 유럽의 정치철학자들이 지극히
환원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주는 반면, 발리바르는 정치를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사고합니다. 동시대의 유럽 정치철학자들에게서 놀라운
점은 이들이 다방면에 걸쳐 매우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고 고전 철학의 전통에도 정통해 있지만, 정치적 사유에서는 대개 강한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가령 아감벤에게 정치의 문제는 주권과 생명의 문제로 환원되고, 랑시에르는 정치란 오직 평등의
문제일 뿐이라고 강변하고, 지젝은 고전적인 혁명론을 실재의 차원에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또 바디우나 네그리 역시
환원주의적이라는 점에서는 이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발리바르는, “해방, 변혁, 시민다움: 정치의 세 가지 개념”이라는
논문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를 한 가지 개념이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사고하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주목할 만한 장점입니다. 이러한 복합적 사유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변혁의 문제 설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고전적인 시민혁명의 이상인 자율성의 정치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더욱이 이 두 가지 정치의 한계를
시민다움의 정치 또는 반폭력의 정치라는 문제 설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첫 번째
측면과 연결된 것인데, 대개의 유럽 정치철학자들은 말하자면 ‘바깥의 정치’를 추구합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남겨 놓은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들이 보기에 진정한 정치는 제도적인 정치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생산관계 또는 넓은 의미에서의 경제가 진정한 정치로서 바깥의 정치의 장소였던 반면, 이들은 각자 다른 영역에서 바깥의 정치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들과 달리 바깥의 정치를 위해 제도적인 정치 또는 시민권 헌정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깥의 정치와 제도 정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합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제도 정치는 ‘바깥의 정치’로서 봉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 바깥의 정치는 제도의 영역 속에서 구현되고
관철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는 단지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로 국한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양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 또는 상호 견인 관계야말로 발리바르가 생각하는 정치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3.
발리바르의 저서들을 번역하면서, 특히 어려웠던 점은 없으셨는지요. 혹은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번역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웠고 감동적이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특히 어떤 점들에서 그러했는지요.
답변 3.
발
리바르 저서를 번역하면서 어려운 점은 특히 그의 복잡한 문체입니다. 발리바르의 문장은 비교적 긴 편인데다가 괄호나 삽입구 같은
것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문장 안에 괄호가 서너 개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말 한
문장으로 옮기기도 어려울 뿐더러, 독자에게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가 이런 식의 문체를 쓰는 이유는 개인적인 성향
탓도 있겠지만 그의 인식론적 관점과도 연결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자로서는 매우 성가시고 괴롭지만, 어쨌든 독자들이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번역하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의 “옮긴이
후기”에서도 말했지만, 발리바르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이론은 추상적인 관념들의 영역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고도로 추상적인 그의 논의가 현실의
정치나 운동에 대한 생생한 참여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숙고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명쾌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가 최근 저작에서
이론화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이율배반이라든가, ‘운명 공동체’ 개념, ‘공동 시민권’(co-citizenship) 개념
같은 것들은 1980년대 이후 유럽 및 프랑스 정치의 핵심 쟁점이었던 미등록 이주자, 인종주의, 국민주의, 네오파시즘 같은 문제에
대한 면밀한 고찰과 실천적 참여가 없었다면, 이론화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국내의 연구자나 활동가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