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론>을 <학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좀 막연하고, 더 나아가 애매성이 있습니다. <이론>은 분명 science는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discipline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론>의 특징은 하나의 특정한 분과학문에 따라 정향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이론>의 이런 비분과적인 성격은 단지 그 소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작업방식과 스타일에도 담겨 있습니다. <이론>과 관련해서 그 독특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고 또 스스로의 작업을 자각적으로 <이론>이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꽤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도 꽤 잘 알려져 있는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주로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 자신은 자신의 작업을 <이론>이라 지칭합니다. 그에게는 <이론>이 전통적인 철학을 대체하고 포괄하는(헤겔의 의미에서 <지양하는>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매우 중요한 학문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곧 <이론>은 전통적인 철학처럼 보편학이라는 과도한 야심을 갖지 않지만, 또 철학처럼 하나의 특정한 분과학문으로 경직되어 있지도 않고, 더 나아가 이론과 실천, 학문과 현실의 관계를 자체 내에 품고 있다는 의미지요.
제임슨과 다른 의미로 <이론>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인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론>은 미국의 철학계가 유럽철학을 수용하는 한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류 철학 제도 내에 편입시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도 바깥으로 완전히 몰아내는 것도 아니죠. 반면 문학부 쪽에서 보면 <이론>은 비평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고 형성하는 한 방식, 그 결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론>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제도적인 <의도>나 <목적>을 훨씬 넘어서는 또는 일탈하는 결과가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이론>이 도입되고 형성되는 시점은 제도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편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일단 시작된 과정이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실 <이론>은 이미 어떤 정형적이고 완성된 틀을 갖고 있는 학문이라기보다는 계속 변모 중에 있고 진화과정 중에 있는 것이어서, 이게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모할지 정확히 예견하기는 좀 어려울 듯한데요.
어쨌든 <이론>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초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이제는 상당히 자신들의 작업의 성격에 대해 자각적인 것 같다는 인상입니다. 앞에서 말한 프레드릭 제임슨도 그렇고,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야트리 스피박 같이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대학 수사학과에 있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같은 사람, 버클리 대학 인류학과의 폴 레비나우(Paul Rabinow) 같은 사람, 노스웨스턴 대학 인문학부에 있는 새뮤얼 웨버(Samuel Weber) 같은 사람, 뉴욕 주립대 비교문학과에 있는 로돌프 가쉐(Rodolphe Gasche) 같은 사람, 존스 홉킨스 대학 정치학과의 윌리엄 코널리(William Connolly) 같은 사람, 영국 서섹스 대학에 있다 얼마전 미국 에모리 대학으로 옮김 제프리 베닝턴(Geoffrey Bennington) 같은 사람, 얼마전 국내에도 다녀간 지젝(Zizek), 또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제국』을 공저한 듀크 대학의 마이클 하트나 미국의 대표적인 알튀세르 연구자인 워렌 몬탁(Warren Montag) 같은 사람은 영미권에서 대표적인 <이론가>로 불리는 사람들이고, 또 이를 잘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유럽 같으면 철학자로 불릴 만한 사람들이고, 사실 유럽에서는 이 사람들을 모두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소속도 그렇거니와 굳이 자신을 철학자로 부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사람들은 철학을 자신들의 작업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고, 또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엄격한 철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버틀러 같은 사람들은 독일에서 가다머나 토이니센 밑에서 헤겔을 공부한 사람이고, 새뮤얼 웨버도 독일에서 아도르노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고, 제임슨은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에 무불통지인 사람이고, 가쉐 역시 독일 관념론 철학에 정통한 사람이죠.
하지만 철학은 이들 작업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공부한 철학을 자신들의 각각의 작업의 분야에서 직접 활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컨대 버틀러는 페미니즘과 퀴어이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고, 이 영역의 문제들을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 철학을 활용합니다. 제임슨은 초기에는 변증법 문학이론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나중에는 좀더 일반적인 문화이론의 영역의 문제들을 고찰하는 데 철학을 동원하지요. 이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들이 관심을 가진 영역이 문학이론인지, 인류학인지, 사회학인지, 정신분석학인지, 탈식민주의인지 등이 다를 뿐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들은 엄밀한 철학적 능력을 갖추고 각 분과학문에서 활동하는 전문학자들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들의 작업을 <이론>이라는 일반 명칭으로 묶기에는 이들의 관심사라든가 작업 내용, 스타일들이 너무 다양하고 이질적이기 때문이지요. 이 점에 관해서는 저도 뭐라고 딱부러지게 드릴 말씀이 없는데, 제가 미국에서 공부한 적도 없고, 멀리 떨어진 외부관찰자로서 이것저것 단편적인 면모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론>이라는 공통의 명칭으로 묶이고 있고, 또 이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작업이 갖는 <이론>으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얼마간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이들의 작업을 <이론>이라는 새로운 범주로 분류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또 너무 글이 길어졌는데요. 어쨌든 제가 볼 때 중요한 것은, 초창기에는 제도적인 우연이나 편의성에서 출발했던 것이 이처럼 새로운 학문 영역, 또는 이론적 작업 영역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사람들이 이런 걸 만들어냈을까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이 사람들의 문화적 수준이 높다든가, 풍부한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다든가, 인적 자원이 풍부했다든가 하는, 특수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요인들, 다시 말해 우리도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요인들도 있었다는 거지요. 이런 의미에서 앞의 글에서 몇 가지 측면(학문적 태도, 총서, 학술지, 출판제도 등)을 제 나름대로 한 번 말씀드린 겁니다.
변변치 않은 생각에 이렇게 관심을 보여주시고, 긴 답변까지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 경험을 말씀드리면, 저는 이렇게 번역이 엉망으로 된 책들을 읽으려면 짜증이 나고 답답하기도 해서 도무지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공지능 연구에서 60%의 정확성만으로도 학습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