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 김에 한 가지 더 쓰자면, 이렇게 프랑스 철학책들이 무책임하게 번역되고 출판되는 행태는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들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 문제는 외래 사상과 문화의 수용이라는, 좀더 일반적이고 중요한 문제와 관련이 있고, 여기에 대해 많은 시사점들을 제공해 주는 것 같습니다.

최근 뿌리없는 학문에 대한 비판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제기되고, 우리 학문, 우리 사상에 대한 반성과 모색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우리 현실에 맞지 않고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외국 학문과 사상의 무분별한 추종과 수입>이 많이 질타받고 있지요. 저는 정말 이런 문제제기에 공감하고, 이런 문제의식과 자세가 우리의 학문제도 내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국의 학문과 사상을 무조건 백안시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일부에서는 국학과 외국의 학문, 특히 서양 학문을 다소 대립적으로 보기도 하는 것 같더군요. 사실은 <국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주 이상한 것이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학문의 성격과 형세를 집약적으로 표현해 주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많은 분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외국의 학문과 사상을 어떻게 잘 수용하고 변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로, 미국 학계에서 <이론theory>이라고 통칭되는 새로운 학문분야의 등장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미국에서 직접 공부하지 않았고, 그저 이런저런 학술지들이나 책, 또는 이런저런 학자들의 발언 같은 데서 얻어들은 거라서,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별로 자신은 없지만, <이론>은 미국 학계가 외국의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고 변용하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 또는 하나의 가설입니다.

<이론>이라는 분야는 미국의 주류철학(분석철학이나 현상학)과 대비되는 유럽철학 및 인문학의 흐름을 지칭하는 명칭인데, 주로 영문학과나 불문학과, 독문학과, 비교문학과 같은 문학부들, 그리고 인문학부(humanity) 같은 데서 많이 한다고 합니다. 유럽,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소속되어 있는 곳도 이런 곳이고, 또 강의나 강연, 연구활동을 하는 곳도 이런 곳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데리다나 발리바르 같은 사람도 캘리포니아 대학의 버클리 분교 소속으로 있죠. 그리고 사실 우리가 볼 때에는 철학자들로 분류될 수 있는 미국의 학자들도 소속은 이처럼 문학부 쪽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구요.

이 <이론>이라는 분야는 60년대 말, 특히 1966년에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유명한 구조주의 회의가 시발점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회의에는 데리다와 라캉, 롤랑 바르트, 지라르, 장-피에르 베르낭 같이 이후에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과 문화계를 대표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 이후 미국에 본격적으로 구조주의를 비롯해서 프랑스의 철학과 이론이 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미국의 철학계는 분석철학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과에서는 이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여지가 없었고, 대신 이 사람들은 불문학과나 비교문학과 또는 영문학과 등으로 초빙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자들 및 다른 유럽의 철학자들이 이렇게 문학부 소속으로 활동하게 된 건 얼마간 우발적인 제도적 환경 때문이었는데, 이게 참 놀랍게도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미국의 문학이론계는 50년대까지 신비평이라는 흐름이 지배적이었는데, 60년대 이후로 소수의 이론가들이 이 흐름을 대체할 새로운 비평이론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공명한 게 바로 구조주의였는데, 구조주의는 신비평의 이론적 엄격함 못지 않은 엄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신비평처럼 문학 자체의 영역에 폐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 문학계에서 구조주의는 점차 확산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구조주의 자체는 아시다시피 원래 철학에서 처음 시작된 게 아니라, 인류학이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및 과학사 같은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시작되었고,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이나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이 이 분야의 문제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지고 세련된 지적 흐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구조주의 철학은 철학자들의 성향과 관심사에 따라 매우 다양한 면모와 이론적 발전을 보여주었지요.

그래서 구조주의는 처음에는 문학의 방법론이나 비평의 원리로 도입되었지만, 워낙 그 성격 자체가 학제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고 인문사회과학 영역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서, 처음 도입의 의도를 넘어서 자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구조주의는 좁은 의미의 문학의 분야를 넘어서 인문사회과학 영역 전체에 걸친 논의에 개입하게 되고, 이런 분야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게 됩니다.

 아울러 70년대 초에 미국에서는 이처럼 인문학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학술지들이 창간되는데, Diacritics나 Critical Inquiry 같은 학술지들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이 학술지들은 구조주의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만이 아니라, 기호학과 문학이론, 인류학, 사회학,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영화이론,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같은 다양한 분야의 논의들을 소개하고 토론하기 위한 장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 학술지들의 대표적인 필자들이 바로 데리다, 폴 드 만, 푸코, 리요타르,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학술지들이 큰 성공을 거두고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비슷한 성격의 학술지들이 여럿 창간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또 <이론>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론>과 관련해서 한 가지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출판사들의 작업입니다. <이론>이 뿌리를 내리고 확산되는 데에는 출판사들의 역할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특히 미네소타 대학 출판부에서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간 발행했던 <문학의 이론과 역사Theories and History of Literature> 총서가 큰 역할을 했는데요. 이 총서는 Wlad Godzich(폴란드 태생의 비교문학자인데, 발음이 어떻게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와 다른 독문학 전공자(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가 편집 책임을 맡아서 100여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들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철학자, 문학이론가, 비평가들의 번역서이고, 일부는 미국 학자들의 저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총서에서 출간된 대표적인 책들로는 리요타르의 『포스트 모던 조건』, 『갈등』,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블랑쇼의 『무한한 대화』, 만프레트 프랑크의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아감벤의 『언어와 죽음』,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 등이 있습니다. 많은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이 총서는 미국 학계에 유럽의 철학 및 문학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총서 이후에는 스탠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지금도 출간 중에 있는 <자오선Meridian> 총서나 <현재의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같은 총서가 비슷한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MIT 대학 출판부에서 나오는 <독일 사회사상 연구Studies in German Social Thought> 총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하버마스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수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론>이라는 분야는 이제 단순히 문학이론이나 문학비평의 한 조류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으로 평가받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데리다 같은 사람은 <이론>의 등장을 20세기 후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학문적 사건으로 들고 있기도 합니다. 미국 철학과에서 학생이 푸코나 데리다, 들뢰즈에 관심을 보이면, 교수가 그런 건 <이론>이니, 철학과 말고 다른 데 가서 하라고 말한다는군요. 그런데 <이론>에서는 분석철학의 작업까지도 수용하고 있으니, 참 놀라운 잡식성이자 왕성한 생명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고, 별로 근거도 없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면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이론>을 길게 소개한 건,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이론>이라는 분야가 외국의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는 매우 흥미로운 방식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국내의 어떤 프랑스 철학 전공 선생님들은 미국의 프랑스 철학 수용은 왜곡투성이라고 폄하하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강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론>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미국 사람들은 외국 학자들의 책이나 글을 논의할 때 엄격하게 영역본을 중심으로 논의를 합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외국의 원전을 인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요. 더 나아가 이 사람들이 프랑스나 독일의 이론을 수용하는 방식을 보면, 이 사람들은 그 이론을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시켜서, 자기 나라, 자기 학계의 맥락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 이론이 원래 그 나라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역할을 했느냐보다는, 이것이 자기 나라, 자기 학계의 맥락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의미를 갖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거지요.

그래서 가령 로티 같은 사람이 데리다를 수용하는 방식을 보면, 이 사람이 도대체 데리다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로티는 데리다 자신보다는 신실용주의의 맥락에 부합하는 데리다의 측면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학자들은 푸코의 권력이론에 대해 배타적인 관심을 보이고,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나 퀴어 이론가들은 후기 푸코의 ⌈성의 역사⌋에 관심을 국한하지요. 또 최근에 발간된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은 인종이론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는 푸코가 프랑스 사회에서 논의되고 평가되는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고, 따라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일면적이고 폭력적인 수용방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지극히 주체적이고 생산적인 수용방식입니다.

재미도 없는 글이 자꾸 늘어지는데, 정말 두 가지만 더 얘기하고 끝내겠습니다. <이론>의 사례에서 덧붙여 주목해야 할 점은 학자들이 논의를 조직하는 방식과 출판계의 작업 방식일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론>이 그처럼 확산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했던 학술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반면 국내의 경우에는 Diacritics나 Critical Inquiry에 비견될 만한 학술지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창작과 비평』이나 이전에 나오던 『현상과 인식』, 또는 『이론』 같은 학술지가 한 사례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창작과 비평』은 그 위상에 비하면, 아직도 동인지의 성격(또는 백낙청 선생의 잡지라는 성격)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국내에는 아직 대중성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한편으로는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반증될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예컨대 『이론』 같은 경우는 쉽지 않은 내용들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1만부 이상씩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지, 대중성이나 상업적 수익성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학진에서 시행하고 있는 우수학술지 인정제도는 잘못하면, 이런 식의 학술지의 출간을 더 어렵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행 제도는 너무 분과중심적이고, 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공인 학술단체 중심으로 평가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연구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공인 학술단체에서 내는 전문학술지에만 투고하려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성격의 학술지들이 출간되고 정착될 수 있을지 다소 의문입니다(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제도 자체를 없앨 수는 없겠지요).

출판계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먼저 국내에도 <총서> 체계가 빨리 정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이나 유럽, 특히 프랑스 학계는 철저하게 총서 체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학문적인 신뢰성과 체계성을 확보하고, 또 연구업적의 축적이 가능합니다(그 나름의 문제도 있겠지만요).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대중적인 관심이 많은 분야일수록 출판사들이 상업적인 목적에 따라 자의적으로 책을 선정하고 출판하기 때문에, 신뢰성이나 체계성도 없을 뿐더러, 졸속 번역과 출판으로 대중의 지적 의욕을 저하시키고 경제적인 낭비만 일삼는 결과를 낳습니다. 학문의 축적 같은 것은 당연히 생각하기도 어렵구요.

그런데 우리나라 출판사들이 대개 영세한 곳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출판사들에 <총서>를 하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출판부나 일부 대형 출판사들이 좀더 투자를 많이 해서, 모범적인 <총서>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도 각 분야에 걸쳐 유능한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현재의 출판체제는 이 분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길을 거의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의 자생성이나 외래 학문과 문화의 주체적 수용을 논의하는 것은 자칫 공염불에 그칠 우려가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너무 뻔한 얘기를 너무 지루하고 길게 말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다면 젊은 친구의 치기 정도로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데리다의 『불량배들』이나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때문에 너무 열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좀 자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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