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과 ‘묶임’의 딜레마
국제정치학에서는 유달리 딜레마를 많이 얘기한다. 국가안보를 위한 정책은 어느 것이나 비용이 따르게 마련이고 원하지 않는 부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선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동맹의 딜레마’도 이러한 딜레마 중 하나이다.
동맹은 기본적으로 유사시 국가안보에 도움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동맹관계를 맺었는데도 막상 유사시에 동맹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쉽지 않다. 동맹국이 인명피해와 정치경제 비용을 무릅쓰면서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버림’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맹국을 단단히 묶어 두는 ‘묶임’이라는 수단이 등장하고 ‘묶임’은 국가안보의 든든한 동량이 된다. 그러나 이 ‘묶임’이 단단하면 할수록 또 다른 안보위험이 제기된다. 이제는 동맹국의 전쟁에 끌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동맹관계는 ‘버림’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도 ‘묶임’의 위험성을 견제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명제는 적어도 한국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지난 50여년간 한-미관계는 미국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한국을 튼튼히 묶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일색이었다. ‘남침’의 위협 앞에 떨고 있는 한국에게 ‘묶임’의 위험은 사치일 뿐이었다. 한국은 미국에 기지를 공여하고,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고, 주한미군의 지위와 편의를 최대한 보장하고, 이것도 모자라서 주한미군 방위비를 분담하고, 월남에 파병하고, 이라크에 파병하는 등 미국을 한국에 묶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냉전시기 소련이 유럽을 공격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소련을 공격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해도 ‘묶임’의 위험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과거 ‘버림’에 대한 공포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한국의 국방비는 북한보다 6배가 많을 정도로 한국 군사력이 성장했다. 한국 군사력이 북을 능가한다는 평가들도 나오고 있다. 이미 1990년대 초에 주한미군 철수계획이 나왔던 것도 이러한 군사력 평가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국은 이제 ‘버림’ 받아도 혼자 설 수 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정보력과 대포병화력 능력 등에서 공백이 생긴다는 것은 전쟁발발시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작전계획 5027을 이행하는 능력에 부족분이 생긴다는 것이지 남침저지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서 ‘묶임’의 위험은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1994년 여름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직전에까지 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이 공격을 감행했다면 한국은 당연히 그 전쟁에 끌려 들어갔을 것이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현 부시 행정부도 북한과 같은 국가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공식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도 ‘묶임’의 위험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은 미국과의 묶임을 더 튼튼히 하기 위해 아프간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강행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인을 수입까지 해와서 한국 기지에서 주한미군 일부가 이라크 전쟁 훈련을 받았고, 이들은 곧 이라크로 투입된다. 그 결과 김선일 사건이 보여준 것과 같이 테러의 위협이 늘어나고 있다. ‘묶임’이 한국의 안보에 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묶임’의 위험은 미래의 시나리오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대만해협에서, 또는 동남아시아 남사해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주한미군이 투입되고 한미연합사가 동원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동맹에 묶여있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분쟁에 끌려 들어가고 톡톡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내주 한-미 두 나라는 포괄협정과 이행합의서에 가서명할 예정이다. 349만평이나 되는 땅을 제공하고 3조6천억~6조원에 달하는 이전비용을 한국이 전액부담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이 미국의 전쟁에 끌려들어갈 ‘묶임’을 자초하면서 말이다. ‘버림’이라는 과거의 강박관념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전쟁에 묶어 놓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적어도 ‘버림’과 ‘묶임’의 딜레마를 인식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서재정/미 코넬대 정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