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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자연의 일부냐 창작품이냐
[한겨레 2004-08-03 15:28]

[한겨레] 네덜란드 법정
‘트레조르향지적재산권’ 인정논란

장미향을 이용한 장미향수의 향은 장미의 것일까, 이를 만든 회사의 것일까 최근 네덜란드 법정이 유명 향수제품의 ‘향’에 대해 지적재산권을 인정해 전세계 화장품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네덜란드 덴 보쉬의 항소법원은 지난 6월21일 프랑스 화장품회사 랑콤의 향수 ‘트레조르’의 향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인정하면서 이와 비슷한 향의 향수제품 ‘피메일 트레저’를 판매하는 네덜란드 화장품회사 케코파에게 1995년부터 이 제품을 팔아 번 수익 2만5천유로(약 3천4백만원)을 랑콤에게 주도록 판결했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트레조르의 향이 “감각에 의해 측정 가능할 뿐 아니라 저작권법에 명시하고 있는대로 ‘창조된 작품’으로 보기에 충분할 만큼 구체적이고 안정적”이라며 “이를 만든 창조자의 개인적 흔적을 담고 있는 원조성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법원은 구체적인 근거로 두 제품이 26가지 성분 중 24가지가 동일하며 나머지 2성분에 대해 피메일 트레저는 값이 싼 대체 성분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세계적으로 지금까지 ‘향’에 대한 법적 재산권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향이나 냄새는 쉽게 사라지고 잘 변하는데다 대부분의 향수는 다양한 자연 향을 배합한 것이어서 향에 대한 소유권은 자연에 있다고 여겨 특정 개인이나 회사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아 왔다. 따라서 향수 제조업체들은 자신의 향수에 대한 ‘발명특허’를 등록하거나 제조자들에게 ‘제조비밀엄수 각서’를 받는 형식으로 향수 비법을 보호해왔다. 특허권은 배타적인 제조권이 20년 보장되는 데 반해 지적재산권은 100년 이상 배타성이 보장된다.

이 판결에 대해 랑콤 변호인단은 “혁명적”이라며 “두 향수제품 성분이 26가지 중에서 24가지가 (고의적으로 베끼지 않고) 우연히 일치하기란 100년 동안 매일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만큼이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적재산권이 인정되지 않는 ‘색’으로 구성된 ‘그림’의 지적재산권이 인정되고 모두가 사용하는 ‘단어’를 조합해 만든 ‘시’의 지적재산권이 인정되듯이 자연의 일부인 ‘향’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이를 창의적으로 조합한 향수에 대해서는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향원료 자연서 얻지만 제조자 조합으로 만들어져
복제품 ‘피메일 트레저’ 10년간 수익금 랑콤에 주라

랑콤쪽은 네덜란드에서 생산하는 다른 향수 7종에 대해서도 지적재산권 소송을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트레조르와 비슷한 향수를 트레조르의 10분의 1 가격인 5∼7달러에 제조·판매해 온 케코파는 곧바로 네덜란드 대법원과 유럽법원에 상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케코파 대변인은 “어떤 회사는 비싼 딸기잼을 팔고 있고 다른 회사는 싼 딸기잼을 팔고 있는 상황에서 싼 딸기잼을 못 팔게 하는 판결”이라며 “향수는 창조품이 아니라 딸기잼처럼 단지 같은 성분을 사용해 만든 산업제품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 판결은 이 두 회사 간의 공방뿐만 아니라, 전세계 화장품업계와 화학계, 법조계에까지 논란을 촉발시키고 있다. 이를 두고 영국 <가디언>은 이 문제가 “상업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물리학적, 철학적, 미학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향을 자연의 일부로 볼 경우 이를 다양하게 조합하는 창의성을 무시하는 게 되고, 그 창의성을 인정하면 극단적인 경우에 컴퓨터 회사에서 자사 컴퓨터의 냄새에 지적재산권 인정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컴퓨터 고유의 기계 냄새에 대해 재산권이 인정되면, 비슷한 부속품을 사용하는 후발 컴퓨터 생산업자들은 그 냄새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요즘 향수들은 단순히 식물에서 추출한 향뿐만 아니라, 아기 냄새, 유명 건물 냄새 등을 이용한 향수를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화학자이자 미국 프랭클린피어스 로스쿨 교수 토머스 필드는 “와인과 각종 향신료, 양념도 지적재산권을 인정할 것이냐”며 “공공정책의 관점에서 최악”이라고 판결을 혹평했다. 또다른 지적재산권 전문가인 암스테르담 대학의 제라르 몸 교수는 “이 판결은 네덜란드 안에서만 유효하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향수성분 대부분 비슷 창조품 아닌 산업제품일뿐
화장품업계 판도 바꿔 영세업자 도산 도미노예고

반면, 뉴욕에 있는 국제향수사 연구소의 수브하 페이털 박사는 “살아 있는 장미에서 나는 향과 장미에서 추출된 향은 추출되는 순간 향이 달라진다”며 같은 장미라도 재배법이나 추출시점 등에 따라 향이 다르기 때문에 제조자의 창의성 인정에 손을 들어줬다. 프랑스 베르사유 소재 국제향수연구소의 과학국장 시릴 버넷은 “향수를 만드는 것은 3천여개의 다양한 향 재료 중에서 선택과 조합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향수의 대가들은 평생에 걸쳐 4∼5개의 작품을 만드는 데 다른 사람들이 3개월만에 대가들의 필생의 작품을 베껴서 판다고 생각해보라”고 반문했다. 그는 또 “향수업계에는 수천개의 영세업자들이 유명 향수 상품을 모방하는 일이 다반사”라며 이번 판결로 전세계에서 비슷한 소송이 봇물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케코파쪽은 “대부분의 향수가 사실상 150개 성분을 쓰고 있으며, 70%는 사용 성분이 동일하다”고 반박했다.

한편, 이 판결이 확정될 경우, 화장품업계의 거센 구조조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화장품 업계가 몇몇 거대업체를 제외하고 대부분 영세하기 때문에 지적재산권 인정이 활성화되면 연구개발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영세업자들의 부담을 가중시켜 도산 도미노 현상을 부를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산업전문가들은 이 판결이 총매출규모 2억8백만달러에 이르는 네덜란드 화장품산업을 크게 위축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소송에서 승소한 랑콤은 프랑스 로레알 계열사로 직원 5만명에 지난해 매출은 172억달러였으며, 패소한 케코파는 직원 70명에 2002년 기준매출액이 1230만달러에 불과했다.

강김아리 기자 ari@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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