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 철회” 놀이와 저항 거리서 만나다


△ 이라평화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5~6월 광화문 네거리에서 집중적으로 벌인 ‘박스맨 피스몹’ ‘평화공 피스몹’ ‘국화 피스몹’의 한 장면.이라크평화네트워크 제공

문화현장-지금 이곳엔
새 시위문화 ‘피스몹’

그들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이 세상에 많지 않다. 광화문과 여의도에 신출귀몰한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급진적이면서도 영적인 구석이 있고, 집단적인데 조직적이진 않다는 알쏭달쏭한 평가도 따라붙는다.

지난 2월 만들어진 ‘이라크 평화네트워크’ 회원들은 정치와 문화의 경계, 재미와 저항이 만나는 지점에서 지금 한창 ‘놀고 있다’. 80년대 ‘저항문화’가 90년대 대중문화에 휩쓸려 사라진 지금, 이들은 새로운 저항문화의 등장을 예고한다.

이들의 정서구조를 이해하려면 우선 문제 하나 풀어야 한다. ‘박티스트’와 ‘박스맨’의 차이는 ‘이라크…’ 회원 최경송(37)씨가 직접 설명드리겠다. “아~, 그거요. 별거 아닌데. 박티스트는 ‘박(빡)세게’ 일하면서 괜히 부지런떠는 사람을 말하는 거고, 박스맨은 말 그대로 피스몹할 때 박스 뒤집어쓰고 나오는 사람이죠. 우린 박티스트 별로 안 좋아해요. 박스맨이야 많을수록 좋죠.”

꼬리를 무는 또다른 질문. 그런데 피스몹은 뭐지 피스몹은 플래시몹에 평화(Peace)의 개념을 덧씌운 것이다. 그럼 플래시몹은 순식간에 모여들어 ‘뭔가’를 하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군중을 일컫는 말이다. 세상이 따분하고 고까운 네티즌들의 심심풀이 놀이다.

‘이라크…’ 회원들은 플래시몹을 차용해 피스몹이란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4월부터 지금까지 10여차례에 걸쳐 이 신기한 ‘저항 놀이’를 세상에 선보였다. 필수 준비물은 몸과 마음, 구호·연설·노래제창 절대 사절,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준비한다.

이라크 평화네트워크 회원들
‘플래시몹+평화’ 하나로 묶어

광화문 네거리에 갑자기 몰려들어 ‘평화의 공’을 튕기며 놀거나, 국화꽃 하나 얼굴에 올려 바닥에 드러눕기도 한다.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는 박스맨 피스몹에 대한 첫 제안은 이랬다. “박스는 우리의 무기, 방위나 윤봉길의 도시락. 박스는 우리의 오브제, 미적 성취. 박스는 너희의 총칼보다 강하다. 하여 박스는 우리의 소리없는 단단한 저항. 박스는 자유다!” 이들은 결국 “부끄러워 하늘을 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아 박스를 뒤집어쓰고 세상을 향해 ‘각’을 세웠다.

그러나 피스몹의 결정적 재미는 다른 데 있다. 대충 이런 걸 하자고 모였지만, 반드시 ‘딴 짓’ 하는 회원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로 신경쓰지 않고, ‘알아서 놀면서 저항하도록’ 내버려두는 것까지가 피스몹의 핵심이다. “하나의 주장을 구호를 통해 집단적으로 외치는 게 아니라, 각자 스스로 표현하는 거죠. 우린 각자의 의지에 따른 저항을 꿈꾸는 겁니다.”(염창근 사무국장)

피스몹에 처음 참여했던 한 회원은 그 감상을 이렇게 전했다. “개인들의 작은 목소리의 만남.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지향점 하나. 파병철회와 평화를 위해 합쳐지는 목소리들의 하모니. 그 작지만 깊은 울림. 게다가 평화적이고 유희적인 형태로. 아주 오랜만에 ‘만남’의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이라크 평화네트워크 인터넷 게시판에서)

구호·연설·조직적 외침 대신 국화꽃 한송이 얼굴에
올린 채놓고 상자 뒤집어쓰고 침묵 항의


△ 이라크 평화네트워크 회원들이 7월22일 열린우리당사 앞에서 밤새도록 ‘널린노래방’을 열었다.

이들은 최근 또다른 놀이를 개발했다. 이른바 ‘파병반대 널린노래방’이다. 고독하고 지겨운 1인 시위문화의 새 버전이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띄운 노래방 개업 알림은 다음과 같았다. “노래는 무쇠를 녹인다. 24시간 풀가동. 폐장은 없다. 파병이 철회되거나 더 노래부를 사람이 없을 때까지.”

이 노래방은 82시간 동안 열린우리당사 앞에서 계속됐다. 연인원 60여명이 참가했다. 마이크도 없이 ‘생목소리’로 한사람당 1시간 이상씩 불러댔다. 트로트도 부르고 자장가도 부르고, 어떤 사람은 라틴어 경전을 들고 와서 줄기차게 읊었다. 부르고 싶은 노래 맘껏 부르고 나니 “이게 중독이 되더라”(최경송)며 앞으로 매주 이틀씩 정례화하기로 했단다.

이들은 지난 30일 ‘바그다드 카페-평화파티’도 열었다. “일일호프라뇨 절대 아니에요. 그냥 노는 거예요. 기왕이면 평화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면서.”(회원 채리미영) 노는 것과 대드는 것에 두루 능통하다는 시중의 ‘꾼’들, 그 소문을 듣고 300여명이나 모였다. ‘블루마블’을 변형한 ‘평화 보드 게임’을 하고, ‘땡기면’ 무대에 가서 노래도 하고, 밤새 그냥 놀았다.

이들은 회원 규정도 따로 없다. 게시판에 자주 글 남기고, 피스몹에 얼굴 내밀면 그게 회원이다. 그렇게 따져서 한 70여명 정도가 핵심이라면 핵심이다. 고등학생부터 일반시민, 시민단체 활동가까지 망라돼 있다. 정치성향으로 보면,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사회당 당원에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녹색당 지지자까지 있고, 아나키스트 클럽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1인시위 넘어 ‘널린 노래방’ 고등학생부터 활동가까지 방라
“평화의 그날까지 쭉~놀자”

이들을 묶는 유일한 끈은 ‘새로운 저항문화’에 대한 갈증이다. 김어준 문화평론가는 이를 “심각하고 경건한 저항조차도 ‘유희화’하려는 문화흐름”이라고 평가했다. 그 흐름이 처음으로 현실화된 것이 인터넷 패러디였는데, 이제 ‘오프라인’까지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는 힘없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유력한 방법이고, 풍자는 그들의 ‘보복적 탄압’을 무산시키는 지혜로운 길입니다.”

모든 권위를 해체하려는 젊은 세대는 이제 ‘운동권 문화’까지 해체하고 새로운 ‘저항 문화’를 찾아 나서고 있다. 이들의 ‘문화실험’은 끝이 없다. 파병이 철회되거나 더 놀 사람이 없을 때까지.

‘난 다르다’는 그들의 말·말·말



△ (좌로부터)최경송·염창근·김박태식·채리미영

최경송(37)
화염병 던져봤지, 이젠 소통을 생각해

공부방 운영하는 ‘일반시민’. 널린노래방에 푹 빠져있다. “80년대 학교 다니면서 나도 화염병 던지며 싸웠다고. 발언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지. 이제 그 ‘공간’은 있으니까, ‘소통’에 대해 고민해야 되지 않겠어”

염창근(29)
지속 가능한 감수성이 필요할걸

원래 회원 규정도 직책도 없는 모임이지만, 바깥 사람들 편하라고 그냥 ‘명목상’ 사무국장 맡고 있는 평화운동가. “저항의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하단 건 나도 알지만 말야, 정서적·즉자적 대응보다는 지속적으로 성과가 쌓이는 저항이 필요한 게 아닐까”

김박태식(32)
말 안하고 있으니 귀기울이잖아

대학 총학생회장 시절 ‘군중동원 문화’에는 이골이 났다. “가두시위와 군중집회 방식의 저항문화가 원래 목표했던 게 뭔지 다시 살펴볼 때가 왔어. 말이 넘치는 세상, 말 안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귀 기울이잖아.”

채리미영(29)
슬픈 우리, 차라리 재미있게 놀자!

부모성 함께 쓰면서 이름이 더욱 예뻐진 여성운동가. 반전평화를 위해 최근 ‘파티 플래너’로 거듭 났다. “8월3일날 추가 파병부대가 이라크로 떠난대. 무기력하고 슬픈 우리, 차라리 재밌게 놀자. 평화에 대해 수다 한번 떨자구. 파티도 결국 소통이잖아.”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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