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는 이래야 하는 거 아니야?”
무심코 이런 반문을 종종 접하곤 한다. 어떤 상황, 사안에 대해 판단할 때 여성주의적으로 올바른 방식과 태도, 관점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반문이 상황과 사안에 상관없이 ‘여성주의라면 이래야 한다’는 도식적인 틀을 요구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한 여성단체 상근자를 만났더니 고민을 털어놓는다. 요즘 단체활동 속에서 ‘여성주의/반여성주의’를 가늠하는 판단의 근거들이 일방적이라 답답할 때가 많다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단체 활동가들의 의견을 수렴해와서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한 사람이 전혀 논의를 하지 못한 채 참석했다. 이유는 이랬다. 활동가들이 의견을 말하지 않아 한 사람씩 의견을 물었더니, 한 활동가가 “말하기 싫다”면서 “이렇게 모두에게 의견을 묻는 것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이고 상처 받았다”고 항변했다는 것이다. 이후 모임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이 권위적인 방식인가에 대해 물으면 또 한번 ‘권위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으니 논의는 진전이 안되고 그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된다고 했다. 여성운동단체의 활동가라면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할 의무와 책임도 일면 있는 것인데, “말하기 싫다”는 무책임한 발언이 ‘여성주의는 권위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목 하에 정당화되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여성주의’적 방식일까.
이런 방식은 여성들끼리 서로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여주어야 여성주의적이라는 식의 믿음으로 이어져, 더 나아가면 자칫 온정주의가 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여성주의자들이 ‘상처’를 말하는 방식이 그리 낯설지 않다. 논쟁이 일 때 서로를 비판하기보다 자매애로 감싸 안아야 한다거나 ‘왜 같은 여성주의자들끼리 상처를 주냐’는 식의 안타까움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정작 비판에 대해 ‘상처주지 말라’고 답하는 것은 여성주의와 상반되는 주장이다. 여성주의는 필연적으로 비판적인 자세를 피력하게 되는데, 그러한 비판을 ‘상처’로 받는다면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어떻게 전달하고 설득하고 궁극적으로 타인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나.
경직된 올바름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힘을 갖기 어려우며 문제해결에 다가서기 힘들다. 여성주의에 대한 도식적인 원칙에 경도돼 있는 것은 위험하다. 정황을 보지 않고 단 하나의 원칙에만 매달리는 태도는 성희롱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접하게 된다. 성희롱 사건은 사안마다 그 상황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책이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실제적 작업이 필요하다.
이 때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희롱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느낌과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 해결에 있어서 피해자의 모든 요구나 언행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사안에 따라 현실적으로 무리하다고 판단하는 이에게 ‘여성주의적이지 못하다’고 비판을 하는 등 경직된 방식으로 표출된다면 곤란하다. 이런 태도는 논의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도 발전적이지 못하다.
한편, 여성주의는 결혼제도를 비판하니까 여성주의자라면 결혼해선 안된다거나, 여성주의자는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야 하니까 성관계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생각들이 정작 자신의 느낌, 경험들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여성주의는 도식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엄숙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말하는 원칙과 여성주의 속에 자신이 어디 즈음 존재하는지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설명하고 책임질 수 있는 언어로 여성주의를 구성해야 한다.
여성주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치열하게 판단되고, 만들어지고, 논의되며, 그러면서 담론을 생산해왔다. 여성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비판에 직면하고 강하게 이겨내고 움직여야 한다. 하나의 정답에 기대어 좌우에 눈을 감기 보다 자기 것으로, 자기 안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여성주의를 사고하고 부딪히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