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리포트‥‘상아탑 지식’도 인터넷 매물로


△ 국내 주요 지식검색 포털사이트들의 초기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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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검색열풍은 다분히 ‘한국적’

  • 인터넷 지식검색 열풍
    지식유통구조 근본이 바뀌고 있다

    지식 유통구조의 근본이 바뀌고 있다. 인터넷 지식검색 열풍 때문이다.

    인터넷 순위 사이트인 ‘랭키닷컴’( www.rankey.com)의 집계에 따르면, 대표적 지식포털 사이트 ‘네이버 지식iN’의 주간(7월11일­7월17일) 방문자수가 사상 처음으로 238만명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엠파스 지식거래소’는 33만여명, ‘야후 지식검색’ 29만여명, ‘네이트 지식뱅크’ 7만여명 등의 방문자수를 기록해 역시 기존 기록을 갈아치우거나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런 추세는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한 고급·전문지식 서비스 개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윤을 쫓는 시장의 논리는 생활상식 무료문답이 아닌 새로운 수익창출 모델을 찾았고, 그 결과 그동안 접근성이 떨어졌던 ‘상아탑’의 지식을 인터넷에 끌고 나온 것이다. 각종 학위논문 검색은 물론, 전문지식 판매 및 구매, 관련 전문지식 동시제공, 전문학술도서 본문 열람 등의 지식검색 서비스가 올 상반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덕분에 기존의 지식생산·유통 구조의 변화도 불가피해졌다. 지난 5월 개설된 네이버 ‘지식시장’은 그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이곳에 나온 논문은 3천원­1만2천원 정도, 리포트 형태의 문서는 300원­4천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기존 논문검색 서비스가 정액요금에 따라 정식학위논문만 제공하는 데 비해, 지식시장에선 각종 형태의 ‘개인 지식’을 시장원리에 따라 사고 판다. 특정 지식에 대한 품평이 순식간에 이뤄지고, 이를 둘러싼 ‘지적 논쟁’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지식의 전문성과 고급성, 권위는 결국 ‘가격’이 결정한다.

    학술논쟁이 학술지에서 인터넷 게시판으로 옮겨오고, 학계 권위자는 상아탑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 인정받으며, 지식활동에 대한 보답은 교수 월급이 아니라 네티즌들의 입금액이 결정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관측은 더 이상 허황된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 박주범씨의 연구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계를 보여준다. ‘지식검색서비스에 관한 이용연구’를 주제로 최근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에서 박씨는 “지식검색 질문에 대한 답변 소요시간을 조사한 결과, 쇼핑·상품정보에 대한 답은 질문 24시간만에 제공된 반면, 교육·학문 분야의 질문은 0.02­0.03시간(1.2분­1.8분)만에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설문조사 결과, 주로 이용하는 지식 범주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36.4%가 ‘전문지식’을 꼽았다. 초중고생의 숙제 해결 수준을 넘어, 대학생 이상의 ‘지식인’들이 본격적으로 지식검색의 바다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 급격한 기술 발전과 이에 힘입은 지식사회 변동은 전 세계적인 관심거리다.27일 신라호텔에서 ‘지식사회 건설’을 주제로 열린 유네스코 주최 학술대회에서 토론자로 나선 학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연합·자료사진

    숨가쁜 기술변화는 지식사회 현장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한 사립대 역사학과 교수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학부과정 학생의 기말 레포트에 자신의 논문 일부가 그대로 옮겨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용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쓴 것처럼 했더라고요. 인터넷 검색 자료를 짜깁기하다가 내가 쓴 글인 줄도 모르고 그냥 옮겼대요.” 이 교수는 “텍스트를 읽어 제 것으로 소화하고 그 연구성과를 문서로 남기는 일을 인터넷에 맡기고 나면, 인문학도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남는가”라고 물었다.

    인문학계에 번지는 우려는 학문에 대한 ‘진지함과 성실함의 실종’이다. 지식·교양을 인스턴트 식품처럼 접하는 세대가 학문의 희열이나 가치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검색 시대가 ‘지식 권력’의 독점적 지위를 무너뜨리고 오히려 지식사회 전반의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 ‘지적 권위’의 상징으로 통했던 <브리태니커>에 맞서 네티즌들이 직접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만든 것은 대표적 사례다.(<한겨레> 29일치 1면>

    홍윤기 교수(동국대)는 “지식검색을 통한 시민적·대중적 참여가 기존의 ‘지적 독점구조’를 해체하는 것을 넘어, 학자들의 지적 오만함까지 깨고 있다”며 “이제 학자들의 지식수준과 익명의 네티즌들이 확보한 지식수준의 격차가 상당히 좁혀졌고, 결국 인문학이 인터넷 상의 지식경쟁을 수렴해 보다 높은 수준의 성과를 내놓아야 할 시대적 요구 앞에 서게 됐다”고 지적했다. 지식구조의 민주화와 이에 기반한 인문학의 질적 상승이 동시에 일어날 토양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 지적 권위의 상징인 <브리태니커>에 맞서 전 세계 네티즌들이 만들고 있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로고

    <지식사회>의 저자인 니코 스테어 교수(독일 체펠린대)는 지난 27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학술대회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어떻게 감시하고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결국 지식 또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정치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결국 ‘지식 민주화’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짚었다. 인터넷 지식검색 열풍이 인문학의 위기와 지식민주화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지식검색열풍은 다분히 ‘한국적’


    △ (위로부터)한정택 야후코리아 차장·박주범 이화여대 석사

    정보욕구 높은데 컨텐츠제공
    사이트는 외국보다 부족

    지식검색 열풍은 다분히 ‘한국적 상황’이 빚어낸 결과다. 네이버 지식iN을 운영하는 엔에치엔(NHN)의 조은현 대리는 “급격한 사회변동과 높은 교육수준 때문에 지식·정보에 대한 욕구가 대단히 높지만, 컨텐츠를 제공하는 국내 인터넷 사이트는 외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인터넷 접근성만 높을 뿐 막상 지식·정보를 구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는데, ‘지식검색’이 이를 해소할 유력한 도구로 떠올랐다”고 분석했다.

    국내 지식검색의 시초인 <인터넷 한겨레> ‘디비딕’(2000년 10월 개설) 기획자인 한정택 야후코리아 차장은 ‘동호회 문화’를 또 다른 이유로 꼽는다. 그는 “피씨 통신 시절, 미국의 AOL과 한국의 천리안·하이텔의 가장 큰 차이는 동호회 활성화에 있었다”며 “인적 유대를 기초로 하는 동호회가 관련 지식 공유 활성화의 기초가 됐고, 이것이 인터넷에서 확대된 것이 지식검색”이라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유료 지식사이트가 주류를 이룬 미국에 비해, ‘카피 레프트’ 정신에 충실한 지식검색 사이트들이 국내에 대거 등장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으로부터 지식검색의 영감을 받았다는 한정택 차장은 “인류 공동의 재산인 지식은 무한정 나눠져야 한다”며 “개미들이 더듬이를 맞대고 페로몬으로 완전 소통하는 것처럼, 인류도 인터넷을 통해 그러해야 한다는 꿈을 지식검색을 통해 구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결국 지식독점구조의 붕괴 등을 기대하는 목소리는 이런 ‘지식 공유’의 정신에 충실한 입장이다. 특정인이 권위자로 추앙받고 대중이 이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근대적 지식’에서 다중이 지식생산과 유통에 참여하고 이를 소비하는 ‘탈근대적 지식’의 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지식검색 열풍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박주범 이화여대 석사는 이런 지식검색의 세례를 만끽하고 있는 젊은 인문학도다. 선행연구가 전무한 상태에서 ‘지식검색’을 학위논문 주제로 삼은 박씨는 “대학원 입학 이후 거의 모든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찾았고, 학위 논문을 쓰면서도 대부분의 참고문헌은 인터넷 검색으로 구했다”며 “인터넷으로 접근이 안되는 논문은 아예 사용하지 않게 됐고, 어떤 분야든 질문이 생기면 일단 지식검색부터 한다”고 말한다. 박씨가 보기에 지식검색은 보다 깊이 있는 지식 축적을 위한 ‘참조자료’이자 편리한 도구다.

    그러나 자유로운 네티즌의 지식민주화가 아니라 기업집단에 의한 지식의 상품화를 향한 흐름도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업체 순위가 분기 단위로 변하고, 그 핵심이 지식검색 서비스의 성패에 달려있는 상황에서, 전문·고급 지식은 속속 유료화되고 있다. 지식생산·유통의 칼자루를 지식사회나 네티즌이 아니라 이들 기업이 거머쥐고 있는 형국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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