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국보법은 50년 넘게 이어온 '임시법'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소속 변호사와 법학자들이 <오마이뉴스>에 릴레이 기고를 시작합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편견과 잘못된 상식을 깨는 내용의 [100문 100답 - 국가보안법, 이것이 궁금하다]가 그것입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질문 5. 국가보안법, 제정 배경을 알려주세요

국가보안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당시 법무부장관이 "국보법은 총이고 탄환"이라는 발언도 했다는데, 제정 배경이 궁금합니다.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48년 12월 1일 처음 공포되어 시행됐습니다. 이는 일반 형사법인 '형법'이 제정된 1953년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 일이었는데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기형적인 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하시지요?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해방 이후 남한에 수립된 단독 정부의 성격에서 출발을 해야겠지만,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바로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순사건'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같은 해 4월 일어난 소위 제주4·3사건의 진압을 위해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제14연대가 이에 항명하고 이러한 항명사태가 각 부대로 번져 무력으로 진압된 것입니다.

당시 수립된 지 2개월 밖에 되지 않았던 이승만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정권의 정통성을 흔드는 사건에 대해 크게 당혹할 수밖에 없었고, 국회 역시 이와 같은 사태가 확산될 경우 정부뿐 아니라 의회도 없어질 것이라는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좌익세력 척결위해 제정한 법

그리하여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좌익 세력'의 철저한 제거와 탄압을 위한 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제정하게 된 것이 바로 국보법입니다.

이 법은 당초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안되었으나, 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내란행위 그 자체보다는 내란유사의 목적을 가진 결사 · 집단의 구성과 가입을 처벌하는 것으로 중심이 변질되면서 보다 포괄적인 '국보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어 구체적인 위법행위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남로당 외곽조직이나 어떤 형태로든 좌익 결사 자체를 말살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되어, 11월 20일 반국가단체 구성과 범죄 단체 조직, 목적 수행, 자진 방조 등 모두 6개의 조문을 가진 법률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사실, 여순사건 이후 한 달도 안 되는 단기간에 제안·심의·통과의 모든 과정이 이루어졌을 분 아니라, 법률 전문가의 의견이나 국민의 여론이 반영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국회 안에서도 반대 의견을 가진 국회의원들의 토론 기회가 모두 박탈되거나 부족한 상황에서 처리되었던 법입니다.

반대 의견 가진 국회의원 토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졸속 통과

당시 국회의원 중에서도 모두 40여명이라는 적지 않은 제정 반대론자들이 있었지만, 빠른 법안 처리를 주장한 의원들이 "이 법안이 잘되고 못되느냐에 따라서 이 남한이 인민공화국으로 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손만대에 자유스런 국가를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입법을 채근하면서, 폐기를 주장하는 의원들에 대해서는 "공산당 좌익들에 춤을 추는 것"이라고 매도하였고, 국회 밖에서는 우익단체들의 암살 위협까지 있는 상황에서 입법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실제 당시 입법제안자들은 이 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비상상황에 대한 한시적인 대응(한시법)이라고 설득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국보법은 '50년이 넘은 임시적인 법'인 셈이지요.

국보법은 '50년 넘은 임시법'

이렇게 제정된 국보법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 일제 시대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사상을 이유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습니다.

치안유지법 제1조가 "국체 변혁을 목적하여 결사를 조직한 자"라고 했던 것을, 제정 국보법 제1조에서 그대로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로 바뀌는 등 표현 상 차이는 있더라도,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기본 취지는 변하지 않았고, 실제로 일제하에서 치안유지법의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국보법으로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구체적으로 범행하지 않은 일정한 목적만으로도 처벌을 받게되어 반대·비판 사상 자체를 탄압하는 것으로, 좌익 세력을 주된 대상으로 한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반정부적 정치·사회 단체들이 적용대상이 되었으며, 삼팔선 이북에 수립된 정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함으로써, 통일을 위하여 이북과 협상·대화하는 행위를 처벌함으로써 분단 상태를 법제화하고 통일을 가로막는 법적 장애를 만든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부정적 성격 때문에, 당시 제정을 반대하는 의원 중 한 사람은 "포악무도한 일제 침략주의의 흉검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과 똑같은 비민주적 제국주의의 잔재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려는 이 마당에… 제국주의 잔재 폐물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다른 반대 의원은 "이 법률이야말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위한 법률이나 진시황의 분서사건이나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라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권승렬 법무부 장관 "국보법은 반대자 존재 말살하는 총과 탄환"

한편 "국보법은 총이고 탄환"이라고 했다는 말은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권승렬이, 국보법의 유지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한 말인데, 그는 제헌국회 제5회 회의에서 "지금 우리는 건국을 방해하는 사람하고 건국을 유지하려는 사람하고 총·칼이 왔다 갔다 하고 하루에 피를 많이 흘립니다, 즉 국보법은 총하고 탄환입니다… 이것은 물론 평화시기의 법은 아닙니다. 비상시기의 비상조치니까 이런 경우에 인권옹호 상 조금 손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가불 건국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로서는 다소간의 인권 침해 위험성이 있더라도 비상시기에는 총과 탄환 역할의 법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권리 침해와 위험을 제거하는 '법률'이 아니라, 반대자의 존재를 말살하는 무기"라는 국보법의 성격을 적절하게 표현한 셈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비상한 시기에 제정되었고 "평화 시기의 법은 아니"라던 국보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진압되고 사태가 진정되는 등 사정이 변경된 이후에도 소멸하기는커녕 점점 강화되고 확대되었습니다.

수 차례 '개악' 통해 명맥 이어온 '임시법'

6개의 조문은 모두 11차례의 개정을 거치는 동안 25개(많을 때는 40개)의 조항으로 늘어났으며, 처음에는 최고형도 무기징역(반국가단체 구성죄)이던 것이 사형이 가능한 죄만 7개가 되었습니다.

찬양·고무 조항과 같이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한 불분명한 조항도 추가되었고, 심지어 중간에는 인심혹란죄(1958년 3차 개정 : "… 인심을 혹란하게 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와 같은 조항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개악되는 시점마다 있지도 않은 국가적 위기가 만들어졌고,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강조되었는데, 제정 당시 이 법이 가지는 위헌성과 인권 침해 요소를 들어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던 논리나 법을 강화·유지하면서 특수상황을 강조하는 논리와 오늘날 존치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답변: 김진 변호사 / 감수: 백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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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시법이 50년을 넘어서,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 계속 법으로 군림하려 한다니
어이가 없군요.

릴케 현상 2004-07-2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한미군 주둔도 임시죠

balmas 2004-07-2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시도 정말 극악한 임시죠. 빨리 치우고 좋은 것으로 바꿔야 할 텐데 ...

MANN 2004-07-31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으로 제정되어서 아직까지도 굳건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법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