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내에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나올 [정치체에 대한 권리] "서문"을 올립니다.  

발리바르가 쓴 여러 책의 "서문"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나고 인상적인 "서문"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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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에 관한 권리를 갖다/~에 속할 권리가 있다”avoir droit de cité라는 이 표현은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특히 사상들이나 문제들에 적용된다. 지난 수년간 이런저런 잡지나 학술지 또는 공동 저작에 발표됐거나 미발표된 논문들 및 발표문들을 묶으면서[나는 처음에 여기 실린 글들을 수록해 준 출판사들 및 간행물의 편집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학술지 󰡔리뉴󰡕(Lignes)를 편집하는 미셸 쉬르야(Michel Surya), 다니엘 도블(Daniel Dobbels) 및 프란시스 마르망드(Francis Marmande)에게 감사하고 싶은데, 그들은 지속적인 역경의 와중에서도 󰡔리뉴󰡕의 필수 불가결한 기획을 고수해 오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시민성/시민권[[옮긴이] 지난 󰡔우리, 유럽의 시민들?󰡕의 번역에서는 ‘citoyenneté’를 일괄적으로 ‘시민권’으로 옮겼는데, 이러한 번역은 ‘citoyenneté’에 담긴 이중적 함의, 곧 정치적 활동의 주체로서 시민의 본성을 뜻하는 주체적 함의와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제도적 함의를 온전히 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이 점을 감안하여 이 책에서는 경우에 따라 ‘citoyenneté’를 ‘시민성’과 ‘시민권’으로 구별하여 옮기거나 ‘시민성/시민권’같이 병기하여 옮기기로 하겠다.]의 생생한 문제들에 대해 프랑스에서 논의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주도록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민권이라는 주제는 이미 가장 많이 다룬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교육이 문제이든 아니면 기업이나 공공서비스가 문제이든 또는 공직 선출자의 책임 및 정치적 도의 내지 사회운동이나 문화의 역할이 문제이든 간에 “시민적” 및 “시민”이라는 관형어가 결부되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대꾸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내 논점을 좀 더 정확히 해두기로 하자. 내 목표는 다면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때로는 형태를 가늠키조차 어려운 이런 토론 속에 대개 그것과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일군의 문제들 ⎯ 이는 이 문제들이 너무 “형이상학적”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특수하”거나 평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 을 도입하는 것이며, 또한 이런 문제들이 서로 소통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둔 문제들은, 집합적 복종의 토대들이라는 문제 또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원칙들을 적용하는 문제이며, 또한 거기에는 국민국가 내에서 외국인들의 지위라는 문제 내지 세계 및 도시의 갈등을 인류학 및 조형예술의 현대적 발전과 접합하는 문제들도 포함된다.

나의 논변과 탐구의 핵심에는 경계/국경 제도가 놓여 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더[나는 이미 경계/국경이라는 문제를 󰡔민주주의의 경계들󰡕(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La Découverte, 1992 및 󰡔대중들의 공포󰡕(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대중들의 공포󰡕,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에서 다룬 바 있다.] 경계/국경 제도는 단지 심원하게 기능이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제도를 구현하는 관행들 및 표상들 ⎯ 영토의 한정에서부터 내국인과 외국인의 (“자연적”이거나 “강요된”) 분리에까지 이르는 ⎯ 은 상호 양립 불가능한,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다수의 시민권의 정치들의 시금석을 이룬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시도해 볼 생각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국경 제도의 민주화라는 개념은 비록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가 존속 가능한 시민권, 그리고 모든 이들이 영위할 수 있는 시민권을 설립하고자 한다면 필수 불가결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나는 국경 제도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검토해 볼 것이며, 또한 이런 민주화를 정의하고 작동시키기 위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수단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검토해 볼 것이다.

따라서 시민성/시민권에 관한 문제들을 검토하면서 나는 결코 이런 문제들을 프랑스에 고유한 역사적 제도들 및 조건들에 대한 성찰과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유럽 국민들 전체에 공통적인 문제들이나 지중해의 양쪽 연안 국가들에 공통적인 문제들(특히 프랑스 인민과 알제리 인민의 운명이 함축하는 문제들), 그리고 세계화 과정 ⎯ 이 과정에는 아메리카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데, 비록 이런 그림자를 미국의 제국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 속에서 문화의 생성이라는 문제들(무엇보다도 “다문화주의”의 등장이라는 문제)과도 분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이 문제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문명들의 중첩과 옛것과 새로운 것, 친숙한 것과 낯선 것lointain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는, 지리와 역사의 “삼중적인 지점들” 중 하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Les frontières de l'Europe”, La Crainte des masses, op. cit.; “유럽의 경계들”, 󰡔대중들의 공포󰡕, 앞의 책.] 현재의 세계에서 이 지점들보다 더 민감한 지점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분석의 관점 및 넓은 의미에서의 투사적인 활동의 관점에서, 이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경계 다름 아닌 프랑스 자신위에 나 자신 및 또한 독자들을 위치시키고 싶었다. 나는 이런 작업에서 이 책을 이루는 텍스트들의 대화 상대방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이 텍스트들 대부분은 나의 지인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며, 그들과의 만남을 반향하고 있다. 제10회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의 프랑스 및 독일 예술감독들이나, 국제철학학교에서 열린 “알제리, 프랑스, 교차된 시선”Algérie, France, regards croisés이라는 제목의 콜로퀴엄을 조직했던 파리와 오랑Oran[[옮긴이] 오랑은 알제리의 도시 명칭이다.]의 내 동료들이 바로 그들인데, 나는 그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요청들은 오늘날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런 요청들은 우리가 매번 지역주의와 국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준다. 아무튼 바로 이런 요청들로부터 우리는 “프랑스식” 시민성의 가장 훌륭한 유산인 정치적 보편주의를 확장하고 재작동시켜야 할 필요성을 이끌어 낸다.

프랑스와 유럽에서의 인권의 정치가 문제이든 아니면 식민화의 흔적들 및 그 흔적들이 불러내는 능동적 “기억”이 문제이든, 또는 “세계화”라고 불리는 것 속에서 국경과 국적의 문제 및 동일성들과 문화의 생성이 문제이든 간에, 이 문제들은 단순하게 이론적인 관계에 따라 서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어떤 추상적 공식으로부터 연역할 수 없는데, 이 문제들이 결국에는 한 개념이 지닌 상이한 측면들을 밝혀 주는 데 기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이 문제들의 접합을 지령하는 것은 어떤 정세가 지닌 강제력들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정세는 육면체의 공간[[옮긴이] “육면체의 공간”은 프랑스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프랑스의 지리적인 모습이 육면체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을 훨씬 넘어서지만, 현재의 조건 및 프랑스의 전통은 이런 정세에 대해 아주 특수한 모습을 부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격을 띠고 있는 위기에 주의를 집중해야 하는데, 국민전선의 발흥은 이런 위기의 가장 명백한 증상을 이룬다. 내가 샤토발롱Châteauvallon[[옮긴이] 샤토발롱은 프랑스의 툴롱(Toulon) 시에 있는 문화공연센터의 명칭이다. 샤토발롱에서 발표한 발리바르의 글은 이 책 6장에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과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국민 우선”이라는 문제 ⎯ 이는 국민전선의 중심 구호들 중 하나이며, 국민전선이 지닌 파시즘적인 성격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구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에 관해 큰 목소리로 고찰하면서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국민전선에 강박 들려 있지 않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화급한 문제들을 정식화하는 데서 국민전선이 불러 주는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두가 다 기억하는 말을 원용하여, 국민전선은 “좋은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말해 두자. 하지만 국민전선의 영향력은 진정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국민전선의 영향력이 민주주의에 대해 가하는 위협은 구조적 원인들에서 유래한다. 이런 위협은 잔혹하게도, 만약 우리가 집합적으로 정치를 재발명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아주 험난한 저항의 길밖에 없는, 그런 조건들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점에 관하여 부단히 참여와 성찰을 호소하는 것이 비관론이나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될 수는 없다.

확신하거니와 이런 위기에 대한 이해는 일방적인 문제 설정의 틀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이해는 일의적인 용어법을 통해서는 표현될 수 없으며,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말했던 것처럼 “다중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그리고 예술의 자원들 및 역사, 사회학, 정치철학의 자원들 등이 이런 다중 언어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지시적 범주가 필수적인데, 이 범주는 시민성/시민권의 실천들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서 실추를 거듭해 온 제도적 복합체, 더구나 이런 실천들이 함축하는 현재의 긴장을 격발시키고 있는 그런 제도적 복합체가 지닌 상이한 측면들을 포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범주다.

내가 제안하려는 지시적 범주는 국민(적이고) 사회(적인) 국가État national (et) social라는 범주인데, 나는 이 표현의 도발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범주는 우리를 경제 신학적인 이념성들의 천상天上(“섭리국가”[[옮긴이] 우리가 “섭리국가”라고 옮긴 “l'État-providence”는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welfare state”, 곧 복지국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단어 뜻 그대로 이해하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잘 통치되는 국가”를 의미한다. 이런 명칭의 기원은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노동헌장을 통해 당대 자본주의국가들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고발하면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 및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는 국가를 제시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발리바르가 “l'État-providence”를 “경제 신학적인 이념성들의 천상”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에서 역사적 전환들이 이루어지는 지상으로 데려가며, 계급투쟁 및 사회운동을 유토피아로 투사하거나 역으로 악마화하지 않으면서도, 점차 국가로 통합된 계급투쟁 및 사회운동이 미친 세속적 효과를 고려할 수 있게 해준다. “계약적 질서”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위기 및 그것이 낳은 사회적・정치적 “소속 박탈”désaffiliation의 효과들의 뿌리에 관한 연구들 가운데 이론의 여지없이 가장 탁월한 연구[R. Castel, Les Métamorphoses de la question sociale : Une chronique du salariat, Fayard, 1995.]에서 로베르 카스텔Robert Castel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어도 한 차례는 이 범주를 사용하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이 범주가 지닌 통제 불가능한 함의들을 경계하고 있다. 반대로 나는 논의를 일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범주가 지닌 모든 함의(가장 우려할 만한 함의들까지 포함해)를 열어 놓기 위해 이 범주의 사용을 옹호한다.

지난 50여 년 동안 산업 발달을 이룩했고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는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사회들(프랑스와 같은)이 경험했던 상대적인 사회적 평형 상태가 파시즘과 친화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이 범주를 사용하는 이유는 결코 아니다.[[옮긴이] 발리바르 말의 의미는, ‘국민사회국가’라는 개념이 나치스, 곧 ‘국가사회주의’(독일어로는 Nationalsozialismus, 불어로는 socialisme national)을 연상시킬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전자의 사회들에도 불평등과 배제가 존재하고 도덕화하고 정상화하려는 강제들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점차 국민주의의 틀 속에서 사회적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멸시키고, 또한 이와 상관적으로 사회정책을 수단으로 하여 다양한 동일성들, 국민적 공화주의의 다원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점차 소멸시켰던 경제적이거나 기타 다른 변화들에 대해 이 사회들이 취약했던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 사실 [사회적 갈등의 조절과 다양한 동일성들의 통합 사이의] 이런 “선순환”은 사회적 투쟁의 동역학의 산물로서, 이는 코포라티즘이라고 비난받아 왔지만, 또한 그런 사회적 투쟁은 특히 능동적 시민성을 산출하기도 했다. 이런 선순환이 중단되자마자, 위기의 상황에서 선순환이 표상해 왔던 파시즘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 역시 더는 사고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상위의 수준에서” (예컨대 “사회적” 유럽의 수준에서) 이런 선순환의 재구성을 다소간 의례적으로 예고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이를 회복해야 하며 ⎯ 처음 보기에는 아무리 그럴듯하지 않다 하더라도 ⎯ 모든 수준에서(지역적・국민적・관국민적) 민주주의적 실천들과 개혁, 반역, 혁명의 수렴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국민사회국가의 역사적 형상을 넘어서, 개인적 지위로서의 시민권과 집합적 해방으로서의 시민성의 변증법을 또 다른 틀 속에서 재개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일반적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텍스트들은 한 번의 계기에 저술된 것은 아니지만, 같은 특집호에 수록된 여러 편의 글들처럼 읽을 수 있다. 이 텍스트들이 서로 모순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내가 보기에 본질적인 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나는 이런 모순들을 감추고 싶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정세가 지닌 불확실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정정은 지적 작업을 제시하는 일의 일부를 이룬다. 지적 작업을 제시하는 일은 독백을 고집하는 연구를 소개하는 일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 만남과 호명, 현실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한 일에서 유래한 작업은 그 흔적을 담고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새로운 대결을 향해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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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정한 상황들 속에서 “시민 불복종”에 대한 발의를 요구하는 원칙들을 검토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미등록 체류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에 대한 공개적인 환기를 통해서 이 책을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국가 권위에 대한 불복종 및 그 내용이나 입안 조건들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법률들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시민성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가의 사멸”을 요구하는 무정부주의가 공동체를 정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이 함축하는 개인주의는 정치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불복종에 대한 이런 필수적인 준거가 없이는, 그리고 심지어 이처럼 불복종에 의지함으로써 생겨나는 위험을 주기적으로 감수하지 않고서는 시민성과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외국인의 프랑스 입국 조건을 훨씬 더 까다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 “드브레” 법안에 맞서 1997년 2월 벌어진 집합적인 반항 운동 시기에 발표됐고 이 책에 수록된 글에서 내가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시민 불복종은 그것이 필수적인 것이 되는 경우에는 제도에 맞선 개인적 양심의 항거를 표현하지 않으며, 사적인 도덕적 측면과 공적인 삶의 측면 사이의 치유 불가능한 분리를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상징적 토대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용어의 강한 의미에서 정치적 행동이다. 사실 국가의 상징적 토대는 국가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이런 토대는 초월적 권위에게 돌려지던가 아니면 사회에 내재적인 “구성 권력”에서 비롯해야 한다. 하지만 정당성이 기성 질서로부터 분리되자마자 두 경우에서는 갈등과 폭력의 위험, 이율배반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에 대한 복종의 조건들을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봉기의 행위 또는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불복종 행위가 오류나 과오 또는 범죄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결정하는 판단은 규칙 없고 모델도 없는 항상 독특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런 불복종 행위를 보편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불복종 행위의 상황들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상황들은 공적인 장소에 “미등록” 이민자들의 처지(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기로 하자)를 드러내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상황들은, 인정받는 인간 및 시민의 지위를 요구하는 이민자들의 입장과, 본질적으로 이들에게 합법적인 체류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선택 및 자신의 행정적인 모순들, 그리고 자신의 역사적 유산이 낳은 결과들을 떠맡기를 거부한(그리고 여전히 많은 부분 거부하고 있는) 국가의 완고한 태도 사이에 존재하는 공개적인 갈등에서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가담하도록(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담하게) 만든 것은,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것과는 반대로 지식인의 참여가 지닌 메시아적인 모습에 대한 향수나 이제는 상실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망상적인 대체물의 추구 때문이 아니다. 국민전선이 조장하고 고무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에 맞서 외국인들을 그 자체로 사랑하자는 대칭적인 명제를 무책임하게 대립시키려는 시도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이동권 및 생존권의 중요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입국 및 체류에 대한 치안상의 제한에 대한 이런 권리들의 우선성이 국적 그 자체의 원칙을 정당하게 활용하기 위한 시금석이 되리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치체에 대한 권리로부터 가장 완강하게 배제되고 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제도적 쇄신 및 발명(이를 통해 오늘부터 시작해서 미래의 시민성이 짜여 나갈 것이다)이라는 대책을 강구하도록 강제하는 이들의 개인성을 현시하지 않고서는 또는 적어도 환기시키지 않고서는,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질문을 그것이 지닌 상호 의존적인 차원들 전체와 함께 검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미래의 시민성은, 상징적 준거들(자유, 인간들 사이의 평등, 연대)의 질서에서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권리들에서도, 무국민적이거나 반국민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관국민적일 것이다. 이런 시민권은 추상적이게도 반국가적이지는 않을 것이며, “주권적인” 국민국가의 전능함이라는 신화의 정정과 더불어 시민권의 설립 장소의 확대, 따라서 인간 활동의 공공성publicité 영역의 주목할 만한 증대를 전제할 것이다. 미래의 시민성은 결국 국가가 수행하는 문명화/국가 자신에 대한 문명화la civilisation de l'État(이 표현의 이중적 의미에서)를 경유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단지 관습과 덕목, 또 법률만이 아니라 이상들과 연대들, 집합적인 반역이나 봉기, 그리고 시빌리테와 안전 및, 폭력과 대항 폭력의 발전에 맞선 저항의 실천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습속의 문명화”를 훨씬 넘어선다. 이는 유토피아적인 과제는 아니지만, 커다란 상상력을 요구하는 과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치적 기예의 상반된 측면들을 실천적으로 묶어 내는 능력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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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기말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상상의 힘을 해방시키면서도 유토피아와 결별하는 일이다. 이런 테제는 확신하건대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내지 정치 사이의 불모의 대립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집단주의적인 것이든 개인주의적인 것이든 간에 유토피아는 현실주의와 비현실성이라는 양자택일 속에 상상력을 가두는 반면, 현실주의는 근원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며,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비현실적인 것, 심지어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 역사 속의 어떤 현실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지구화”globalisation 내지 “세계화”mondialisation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과정[나 자신은 “세계의 세계화”라는 표현, 곧 세계의 “총체성”이라는 형상의 실질적인(virtuelle)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이 책에 수록된 “세계 문화?” 참조.]과 함께 고전적인 유토피아의 토대들 자체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점을 확인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제도들의 변화라는 질문 및 제도가 불가피하게 포함하는 허구의 몫(집합적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한 단어들과 권리들, 새로운 기법들의 발명,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접합하는 가치들의 변화)이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는 진정한 철학적 딜레마가 존재한다.

내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잠시 우리가 마르크스와 푸코에게 물려받은 정식들(두 사람의 철학의 양립 불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결국 이 정식들 사이의 수렴은 그만큼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을 원용해 보겠다.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아주 일찍부터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비판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 진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간의 거짓된 양자택일로 인해 은폐되었으며, 주지하는 바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대립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한다(노벨 경제학상의 과학적 자본주의가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적 자본주의의 대립물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것은 오히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귀결이며, 실증주의적 언어로 변환된 결과물이다.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비판의 의미는 과학 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과학의 기능은 전혀 다른 것, 정확히 말하면 인식이다) 실천 쪽에서, 그리고 혁명적 실천관 쪽에서 찾아야 한다. “세계를 변혁하기”,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진화에 대해 대안을 마련하기, 그리하여 세계의 진화에 대한 대안이 세계의 모순들 및 세계의 투쟁들 속에, 지배적인 경향들이 점점 더 광범위한 인간 대중들이 견뎌 낼 수 없는 강제들을 부과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실현할 수 없게 되는 그런 불가능성 속에, 따라서 이런 강제들이 야기하는 저항들 속에 객관적으로 기입되게 만들기.

푸코의 경우에는(그에게 저항의 사상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유토피아에 대해 대중의 변혁 운동이 아니라 그가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 것을 대립시켰으며, 그것의 실제적인 다양한 변이 형태들을 기술하고 분류하고자 했다. 헤테로토피아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의 가장자리 위치해 있지만, 역으로 사회에 대해 작용을 가하며, 사회가 크고 작은 차원의 차이들을 조절하는 데서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배제의 장소들 또는 그와 반대로 실험과 정상화 및 일탈의 장소들, 매음굴, 식민지, 극장, 감옥, 박물관, 정원 …… 요컨대 우리는 어떤 제도가 과연 헤테로토피아적인 차원을 갖고 있지 않을지, 그리고 과연 그런 차원 없이 존속할 수 있을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성의 모순 및 그것이 지닌 화해 불가능한 갈등들이 아니라, 모든 정상화에 대해 반항적이고, 모든 규칙보다 더 복잡하거나 이질적인 특징을 지닌 사회적 행위들의 이질성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또한 마르크스와 푸코가 각자 나름대로 정치의 본질적인 한 차원을 탐구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좋은데, 이런 차원은 사회적인 장 속에서 주체성이 이런 장의 절대적 “타자”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내밀하고 필연적인 차이로서, 그것의 불가피한 유동성 내지 “역사성”의 보완물로서 등장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제 현대 세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이 제기하는 문제들로 되돌아가 보자. 좀 더 빨리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나는 세계화는 유토피아의 고전적인 거대 형상들에 조종을 울렸다고 말해 볼 생각인데, 이는 특히 이런 형상들이, 법치국가Rechtstaat 및 권력국가Machtstaat의 현실들에 대해 ⎯ 마치 그것들의 이면裏面을 이룬다는 듯이 ⎯ 상상적 보충물이자 명예의 표현으로 작용했던 “세계시민주의”의 지평 속에 기입되어 있었던 한에서 그렇다. “세계시민주의”는 이상 도시Città ideale의 조화로운 꿈을 세계 전체로 확대한 것으로 근대의 모든 진보 사상의 지평이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지구 전체의 지배, 교환 및 지적 소통, 분업의 유일한 공간 내부에서 인간 종의 통합이 인종적이거나 국민적인 적대들의 해소와 더불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태의 불평등 및 인간에 의한 인간의 압제의 제거와 일치하게 되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두 진영” 사이의 단순화된 적대의 종언에 의해, “남”과 “북”의 주민들의 점증하는 상호 침투에 의해, 새로운 국제 질서 및 그 인도주의적 보충물의 피비린내 나는 실패에 의해, 요컨대 사람들이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미몽에서 깨어난 우리의 눈앞에서 완전히 산산조각난 채 끝나 버린 것이 바로 이런 유토피아적 전망이다. 사실 동일한 세계 내부에서, 동일한 경제적 규제에 종속되고 동일한 환경 문제들에 직면한 가운데, 동일한 관측 위성들의 감시 아래 놓인 채로 마침내 실현된 인간 종의 통일성은 시민적civique / civile 공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홉스가 자연 상태로 묘사한 바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과 더 닮았다. 더욱이 통신의 “가상 세계”는 계속해서, 스펙터클로 전환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의 불행(보스니아나 르완다 또는 알제리에서 볼 수 있듯이)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고, 이제는 결정적으로 폐지된 것으로 믿었던 “우등 인간”과 “열등 인간”(심지어 “일회용 인간”)의 분할을 재창조하고 있다.

따라서 더는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유토피아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들이 정말이지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는 이제 “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만들어 낸 표현을 따르면)가 되었다. 󰡔지나간 미래󰡕, 한철 옮김, 문학동네, 1998 참조.] 이 때문에 아마도 유토피아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퇴락된 형태들로서만 지적으로 살아남게 될 것이다. 기술 관료적 프로그램이나 메시아적인 예언 같은 것들 …….

나로서는 결코, 상상은 이제 정치에서 아무런 자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는 불가피한 것을 관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불가피한 것의 가장자리들을 정돈하거나 인간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대한 상상보다는 오히려 현재에 대한 상상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나는 이런 상상력을 집합적・실천적 차원 및 법적・상징적 차원을 아우르는 제도적인 창조의 장 속에서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령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다루겠다) 민주주의 그 자체의 탁월한 반민주주의적 조건을 이루는 국경 제도의 민주화를 기획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단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허구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허구란, 경험 그 자체로부터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며, 인식과 행동이 서로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된 것, 그리고 구성/헌정을 산출하는 봉기(및 현존하는 헌정들의 변혁)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개인적 책임이자 집단들 사이의 소통의 도식으로서의 정치를 재발명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경험을 통해 허구의 장소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직접적 현실은 우리에게 그런 장소들 중 몇 가지를 (하지만 제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가리켜 준다. 가령 “국민” 내에서 외국인들의 지위 또는 국민들과 외국인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표상/재현/대표 같은 것이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차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이런 폐지는 문명을 형성하는 차이들의 종언이 될 뿐만 아니라, 환대라는 본질적인 통념의 의미를 박탈시킬 것이다), 차별의 기능에서 상호성의 기능으로, 그리고 이로부터 세계적인 연대와 갈등의 공간을 지역적으로 개방하는 기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한 사례에 불과하고 또 이것을 노동 분야에서 또는 문화적 동일성과 종교 분야에서 제기되는 다른 쟁점들과 분리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가 지난 10여 년 또는 20여 년간 헤쳐 온 여정을 생각해 볼 때 모든 것을 잘 고려한다면 이것은 허무주의에 저항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1997년 10월 30일

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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