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외로움'
몇년 전 부산아시안게임 때, 북한의 ‘미녀’응원단에 열광하는 남한 남성들을 보면서 난 정신 분열 상태였다. 반북 이데올로기가 극복되기를 열망하지만, 그 방법이 남성 주체의 시선과 욕망을 위한 여성의 몸이라니…. 그런 식으로라면, ‘못생긴’ 북한 사람이 오면 반북 정서는 더 악화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맹위를 떨치는 억압 이념 중 하나는 외모주의일 것이다.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영화처럼, 간첩이나 페미니스트도 ‘예쁘면’ 용서가 되는 사회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자면서 ‘진보’적이기는 매우 어렵다. 아마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지방’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존의 진보 개념이 이들의 고통을 사소하고 부차적인 문제로 비정치화, 비가시화 해왔기 때문이다.
며칠 전 ‘청와대 패러디’ 사건에서도 난 몹시 괴로웠다. 행정 수도 이전에 찬성하면서도, 그 패러디에 반대하는 나는 설 자리가 없었다. 외로웠다. 이 사건에 관한 나의 어떠한 의견도 여성주의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다. 사건을 비판하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요, 침묵하면 현 정권을 옹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전 제주도 도지사의 성추행 사건도, 성별 권력의 문제는 사라지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싸움이 되었던 것처럼, 남성의 여성폭력은 피해 여성이 속한 남성 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의미화된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가 남성과 남성의 갈등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전선은 좌/우, 진보/보수 등 남성들 간의 투쟁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러한 전선 외부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남성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원, 활용된다.
사실, 그 패러디는 패러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패러디는 기존 언어의 존재를 전제하는데, 그 언어를 남녀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패러디 효과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이 사건은 남성에게는 패러디지만, 여성에게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들이 이 사건에 왜 그토록 분노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성애자 남성에게 섹슈얼리티는 사적인 것이지만, 여성이나 동성애자에게 성은 너무나 정치적인 것이다. 남성도 여성도 성적인 존재지만, 여성에게 성적인 이미지가 부과되면 남성의 경우와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대상이 되면, 가장 낮은 계급의 남성이라도 모든 여성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남성 섹슈얼리티가 여성에게 그토록 위협적인 권력인 이유다. 이 패러디의 정치학은 20여명을 살해했다는 연쇄 살인 사건과 연속선상에 있다. 이 사건의 용의자도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살해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회 문제가 한 가지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믿을 때, 단 하나의 정치적 올바름만을 주장하게 된다. 원래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말 자체가,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권 시절, 올바르게 살기 힘들기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약간 비웃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다. 근대의 본질이 ‘실제에 대한 열정’이라면, 결국 현실은 이미 ‘포스트모던’하게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실은 언어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복잡한 이유들로 매 순간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유일한 올바름이 아니라 다원적인 올바름이 요구된다. 남성과 다른 올바름의 판단 기준을 가진 여성의 입장과 이해가 정치적인 것으로 인정될 때, 실천은 풍요로워지고 진보는 폭넓어진다. 이번 패러디 사건처럼, 남성은 피해여성이 소속한 집단에 따라 혹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따라 투쟁 여부를 결정하지만, 여성은 피해 여성이 ‘강금실’이든 ‘박근혜’이든, ‘성매매 피해’ 여성이든 ‘일반’ 여성이든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여성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