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범위를 법에서 정의할 필요 있나.”
민법개정안과 건강가정기본법의 ‘가족’ 개념 규정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지난 29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로 열린 ‘가족위기? 가족변화? -가족개념의 발상전환을 위하여’ 토론회에서 이재경 교수(이화여대 여성학과)는 “가족에 대한 정의가 과연 필요한가”라고 문제 제기했다.
복지의 대상은 가족이 아닌 ‘개인’
2003년 국무회의를 통과한 민법 개정안을 보면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는 가족으로 한다’고 정의 내리고 있다. 또 건강가정기본법 제3조에선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인 가족 규정은 실제 현실 속의 가족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재경 교수는 “우리는 흔히 가족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잠시 주춤한다. 왜냐하면 누구를 포함시키고 누구를 제외해야 하는지 쉽게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을 그 외부와 경계가 분명한 단위로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가족을 정의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가족의 다양성 담론에 확산되면서 그동안 비정상 가족으로 범주화됐던 가족들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진정한 다양성의 수용이라기 보다 정상가족을 기준으로 한 변이 현상으로 보는 관점이었다”면서, 건강가정기본법과 민법개정안의 가족개념 규정을 비판했다. 즉 “다양성의 수사가 민법개정안의 가족범위 규정이나 건강가정기본법의 ‘건강/비건강 가족’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면, 이미 다양성은 담보되기 어렵다”는 것. 이 교수는 “가족의 범위나 경계, 가족원의 역할을 출계, 혈연, 성별 등에 근거해 규범적으로 정의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개인이 선택하고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생활이 제도적으로 지지되고 지원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면서, 가족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어떻게 정책지원 대상을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사회적 보호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즉 복지의 대상은 가족이 아닌 개인이 되어야 하며 개인을 통해 가족은 간접적으로 지원의 혜택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별 가족실태 파악부터 해야
한국여성개발원 변화순 수석연구위원은 “가족의 범위를 규범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일상적으로 가시화될 때 어떤 형태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표시했다. 또 ‘가족’을 단위로 국가의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향성과 당장의 시책마련 사이에는 괴리가 있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이상을 추구하는 것에는 보다 깊은 논쟁과 토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현숙 교수(상명대학교 가족복지학과)는 “학자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이념적 정의와 일반시민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이념적 정의는 다르다”면서, “핵가족만을 고수하는 단일개념에서 벗어나 한부모, 재혼, 입양가족을 가족의 형태로 점차 수용하는 경향을 나타내지만 여전히 동성애, 공동체가족, 친지들과 동거하는 노인단독가구는 가족으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부부관계와 부모자식관계를 필수조건으로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이런 이념적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요구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가족정책을 위한 가족에 대한 정의도 각 국가의 가족정책의 방향과 가족에 대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정책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건강가정기본법에 대해 “가족에 대한 기본법이 생겼다는 데 의의를 두고, 사회적 관심환기를 통해 좋은 방향으로 수정, 유의미한 지원법으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유경희 상담소장은 건강가정기본법에 대해 “가족에 대한 기본법이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면서, “기존의 안정된 틀을 고수하기 위한 단편적 대응책보다는 가족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읽어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족현실을 바탕으로 한 각각의 개별가족 실태파악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과 현실의 괴리
박순덕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복지위원회)는 “가족을 법에서 개념 지을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법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예를 들어 남편은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나지 않은 자녀도 부인의 동의 없이 남편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 남편의 혼인 외 자식은 비록 법적으로는 부인과 다른 자녀들의 가족이지만 그들의 인식 속에는 가족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부모가 이혼해 엄마가 자녀들을 키우는 경우 비록 자녀들은 아빠의 호적에 그래도 남아 아빠와 계모의 법적인 가족이 되지만,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자녀들은 엄마나 계부와 호적이 함께 되어 있지 않아도 엄마나 계부를 가족으로 인식한다는 것.
박 변호사는 “아무리 법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규정하고 싶어하고 규정한다고 해도 현실상 개개인이 인식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은 개인마다 그 차이가 많으므로 법과 현실이 괴리될 수밖에 없고 개개인이 인식하는 가족의 형태를 법에서 모두 개념 지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법은 보호가 필요한 개인이 있으면 그 개인을 통해 가족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한편 윤홍식 교수(전북대 사회복지학과)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빌미로 등장한 서구의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가족위기’ 담론임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가족위기 담론의 정치적 의도는 가족위기 담론을 통해 전형적 가족을 강화하는 이념적 근거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시민의 복지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가족에게 강제함으로써 소위 비생산적 자원의 소모를 완화하자는 전략적 목적 속에 배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가족위기에 대한 논의의 지평을 세계적 신자유주의 질서의 재편 과정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