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위 모델된 남아공 '진실위'는 ...
피해·관련자 참여 중요시, 위원들도 과거 민주인사
“진정한 화해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나라 의문사위의 모델이 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1995년 7월 출범한 이 위원회는 과거청산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기억을 명확히 되살려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일부 조사관들의 전력 문제로 의문사위의 폐지 주장까지 일고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남아프리카에서는 극렬 반정부단체의 지도자가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책임자 자리에 올랐지만 아무런 논란도 일지 않았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 위원장인 투투 성공회 주교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남아공 민주통일전선체(UDF)’의 핵심 지도자였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연구한 김영수 박사(한신대 대학원 정치학과 외래교수)는 “남아공은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는 그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피해자나 참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봤다”며 “이에 따라 조사관을 공개채용하면서 시국사건 당사자 등 과거 민주화·인권운동의 전력을 당연히 중요하게 취급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또 “투투 주교뿐 아니라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는 수많은 과거 반정부 인사들이 참여했다”며 “위원회의 17명 위원 역시 주요 반정부 민주인사들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이런 민간인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피해자들에 의한 보복 차원의 조사가 이뤄지는 것을 경계해 조사관의 절반 정도는 정부기관의 조사관들로 채웠다. 남아공이 원한 것은 ‘단죄’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바탕으로 한 ‘화해’였기 때문이다.
의문사위 관계자는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이런 인적 구성은 우리 의문사위의 인적 구성과 일치한다”며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민·관 합동 방식의 이런 인적 구성도 시비거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수 박사는 “남아공의 역사청산 과정이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피해자인 민간인이 참여한 위원회를 통해 적극적으로 진실을 규명하려 노력했고, 그 뒤 합의를 바탕으로 사면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다만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성공적인 활동은 우리 의문사위와 달리 정부기관까지 조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