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가을호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재작년에 발표된 [국민이라는 괴물?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족문화연구} 51호, 2009의 후속편 성격의 글입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므로, 이 글에 대한 토론이나 비평을 원하는 분들은 [역사비평] 가을호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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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1. 이 글은 2011년 4월 1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제148차 월요모임에서 처음 발표됐고, 그 뒤 7월 7일 제1회 역사비평 토론회에서 발표된 바 있다. 두 발표회 참석자들의 유익한 문제제기 덕분에 글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참석자 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그럼에도 이 글에 여전히 담겨 있을 난점이나 문제점은 온전히 필자의 책임임을 밝혀둔다.]
 

I. 들어가는 말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을 쓰게 된 몇 가지 동기를 밝혀두겠다. 우선 나는 그동안 서양어인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 또는 내이션 스테이트[2. 이 글이 부분적으로는 nation과 nationalism, ethnicity, ethnie 등과 같은 서양 개념들의 번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이 개념들은 발음만 옮겨서 표기하도록 하겠다.]가 때로는 민족이나 민족주의, 민족국가로 또 때로는 국민이나 (드물긴 하지만) 국민주의, 국민국가 등으로 특별한 원칙 없이 번역되거나 아니면 그냥 발음에 따라 표기되는 경향을 꽤 불편하게 생각해왔다. 이것은 대개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 등이 갖는 원래의 다의성을 근거로 하여 정당화되곤 한다. 더욱이 민족, 민족주의, 민족국가 등의 번역을 선호하는 이들이나 19세기 말 네이션이 처음 소개된 이후[3. 이 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권보드래, 「근대 초기 ‘민족’ 개념의 변화」, [민족문학사연구] 33, 2007 및 박찬승, 「한국에서의 ‘민족’ 개념의 형성」, [개념과 소통] 창간호, 2008을 참조.] 일제 시대 및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이 용어가 사용된 용법을 근거로 하여 우리말의 ‘민족’ 개념이 갖는 특수성(심지어 세계사적인)을 강조하는 이들은 때로는 민족을 국민의 상위 개념(더 포괄적이거나 규범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의미에서)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경향이 우리말의 국민과 민족을 네이션 개념에 대한 서로 경쟁하는 번역어로 간주하거나 또는 동일한 지시체를 지칭하는 두 개의 상이하고 때로는 배타적인 용어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다. 이러한 혼용(더 나아가 ‘혼동’)은 이해할 만한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기는 하지만[4.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흔히 말하듯이 매우 유례가 드문 ‘단일한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서 어느 정도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서양(특히 영미권)에서도 ethnicity나 ethnic group 같은 용어가 부재한 가운데 nation이 ethnicity나 ethnie를 포괄하는 뜻으로 꽤 다의적으로 사용되어온 데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한 연구에 따르면 ethnicity가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처음 등재된 것은 1972년이며, 영어권에서 이 용어는 1953년 사회학자 데이비드 라이스먼(David Riesman)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Thomas Erikson, Ethnicity and Nationalism, Pluto Press, 2002(2nd Edition), p. 4 참조], 이제는 불편할 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부정확하고 현실에 대한 설명력도 떨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근대 네이션은 우리말의 용법을 고려해보건대 ‘민족’이라는 말로 번역되거나 표현되기는 어려우며, 우리말의 ‘민족’은 서양어의 에스니시티나 에스니(ethnie)에 더 가까운 말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근대적 의미의 네이션에 적합한 우리말 표현은 ‘국민’이다. 단 이것은 민족과 국민을 동일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상이한 지시체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보통 다소 형식적인 법적 의미로 이해되는 국민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이 글을 쓰게 된 두 번째 동기는 지난 2008년에 전개된 촛불시위의 경험이다. 이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시위대들이 즐겨 부르던 “헌법 제1조”라는 짧은 노래였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조문을 되풀이하는 이 노래는 아마도 주권자로서 또는 제헌권력으로서 국민(또는 ‘인민’)의 위상과 의미가 대중들에게 자각적으로 인식되고 그들의 정치적 기억 속에 기입되게(또는 재기입되게) 된 최초의 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에도 ‘국민’은 ‘민족’과 더불어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 모두에 의해) 정치적으로 자주 호명되었지만, 대중들이 자기 자신을 단순히 피통치자나 수동적인 복종의 대상이 아니라 헌정의 주체로서 자각적으로 호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필자는 이러한 정치적 사건을 이론적으로 좀더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국민에 대한, 곧 근대 네이션에 대한 심층적인 정치적ㆍ존재론적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글의 또 다른 저술 동기와 연결된다. 나는 지난 20여 년 간 국내에서 이른바 ‘포스트주의’ 내지 ‘포스트 담론’이라 불리는 사조에 속하는 철학자들과 이론가들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왔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소개된 포스트 담론이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 학계에서 수행하는 기능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포스트 담론은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것과 꽤 생산적인 갈등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던 데 반해[5.이 점을 특히 잘 보여주는 저작으로는 로버트 영,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5; [백색신화], 김용규 옮김, 경성대출판부, 2008을 각각 참조. 다만 두 번째 책은 (까다로운 내용 때문이지만) 번역에 다소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국내의 포스트 담론은 지난 1980년대 인문사회과학의 화두였던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하는 담론으로 기능했으며,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여러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주제들을 약화시키거나 때로는 배제하는 데 기여해왔기 때문이다.[6.이 문제에 관한 필자의 관점은 「진태원과의 대담: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현재적 과제」, 김항ㆍ이혜령 엮음,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 그린비, 2011 참조.]


이런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분야는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자생적 발전론’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민족사’의 구성이 20세기 후반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중심적 화두 중 하나였다면, 포스트 담론의 대두 이후 ‘민족’이나 ‘민족주의’에 관한 논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에 관한 논의도 ‘위기’나 ‘종말’, ‘소멸’이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줄곧 부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그것은 다양한 포스트 담론을 원용하는 이들에 의해 괴물로 치부되기도 하고 국민들에게 노예적인 삶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내지 파시즘의 대명사로 낙인찍히기도 했다.[7.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국민이라는 노예?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족문화연구󰡕 51호, 2009 참조.] ‘포스트 담론’으로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조야한 논변과, 자신들이 비판하는 이들 못지않은 극단적인 이분법과 환원주의로 점철된 (말하자면 ‘민족=국민=근대=전체주의’ 식의) 이런 식의 논의가, 하지만 국내에서는 또한 대표적인 포스트 담론으로 통용되는 현실에 대한 불편함과 곤혹스러움이 이 글을 쓰게 된 또 하나의 동기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가 즐겨 말했듯이, 해체 또는 탈구축(필자는 이것이 데콩스트뤽시옹(déconstruction)이라는 프랑스어의 좀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믿는다)은 이런저런 철학자의 작업이기 이전에, 현실 내지 사태 자체가 스스로 수행하는 작용이다. 현실은 항상—범박하게 말하자면—철학자가 작업하기 이전에 스스로 탈구축되고 재구축된다. 따라서 철학자나 이론가가 수행하는 탈구축은—역시 범박하게 말하자면—2차적인 탈구축이다. 현실 내지 사태가 스스로 탈구축되는 것은 그것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모순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주의나 마르크스주의적 종말론에 의거하는 이들이 믿었던 (또 이른바 ‘금융위기’를 계기로 고무되어 다시 한 번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모순은 전면적으로 지양되지도 않거니와 반드시 행복한 귀결을 낳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인 사태를 구성하는 복합적 모순은 스스로 탈구축되면서 더 강화되기도 하고 전위(轉位)되면서 새로운 모순들을 산출하기도 한다. 2차적 탈구축이 좀더 복잡하고 다면적인, 그리고 미묘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는 네이션(또는 네이션들의 체계)이 근대를 대표하는 구축물이라고 생각한다. 또 네이션이 오늘날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탈구축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의 네이션이 수행하는 탈구축은 단순히 네이션의 종말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정치체로의 선형적인 대체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네이션(또는 네이션들의 체계)의 운동을 규정했던 복합적인 모순의 심화이고 새로운 전위일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네이션들의 체계가 수행하는 탈구축의 운동에 대응하는 2차적 탈구축을 위한 과제는 ‘민족’이나 ‘민족주의’(또는 국민이나 국민국가)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그것들을 단순히 저주하고 청산하려는 것일 수도 없다. 그러한 탈구축은 무엇보다 네이션의 운동을 규정해온 모순의 성격을 밝히고 그러한 모순의 운동을 굴절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만약 탈근대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탈구축의 작용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II. 네이션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1. 네이션을 ‘민족’으로 번역하는 경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우선 네이션의 번역 문제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최근의 한 연구는 국내에서 네이션이 적어도 해방 이후에는 줄곧 ‘민족’이라는 말로 번역돼온 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민족’이란 단어는 ‘nation’의 번역어이다. 20세기 한국사에서 ‘민족’이란 단어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와 분단의 현실은 ‘민족의 독립’, ‘민족의 통일’을 20세기 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만들었다. nation은 본래 ‘국민’이라는 말로로 번역되었고, 따라서 ‘국민’이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로 인한 국권의 상실은 한국인들의 ‘국민’될 자격을 박탈하였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불완전한 국가의 성립은 한국인들에게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만족할 수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국민’이라는 단어보다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8. 박찬승, [민족, 민족주의], 소화, 2010, 21쪽.] 그리고 그는 이후 별다른 정당화의 논거 없이 네이션을 민족이라는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고, 전근대 시기의 ‘민족’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그가 찾아낸 ‘족류’(族類)라는 용어가 적합할 것 같다고 제안하고 있다.[9. 박찬승, 같은 책, 50쪽 이하 참조.]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따른 이유[10. 한국사 연구자들은 간혹 개념 내지 용어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이라는 말이 네이션에 대한 타당한 번역어라고 옹호하면서도 그러한 역사성을 과거의 역사성으로 한정한다. 다시 말해 역사라는 것은 계속 변화하고, 그에 따라 변화된 역사적 현실을 지칭하는 용어도 새롭게 바뀔 수밖에 없다는 점, 곧 용어의 역사성은 현재 및 미래의 역사성도 함축한다는 점을 다소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많은 민족 관련 연구자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시대적 맥락을 매우 중시하면서도 1990년대 이후의 상황을 새로운 시대적 상황으로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박명규, 「네이션과 민족」, [동방학지] 제 147권, 2009, 32쪽 주 7).] 이외에도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을 ‘민족’이나 ‘민족주의’로 번역해야 하는 논리적인 논거를 제시하는 필자들도 적지 않다. 가령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로서는 만일 ‘네이션’을 ‘국민’으로 번역하면 ‘네이션’에 함유되어 있는 종족의 문화적 측면(민족)은 소거되고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의 성원(국민)이라는 측면만이 부각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모든 ‘네이션’에는 종족의 문화적 논리와 시민의 정치적 논리가 공히 존재한다. ‘민족’이란 번역어도 ‘국민’에 깃들인 정치적ㆍ계약적인 성격이 약하기는 하지만 혈연적ㆍ문화적 공동체를 함의하는 ‘종족’(ethnicity)이란 말이 따로 있으므로 ‘민족’은 ‘종족’과 ‘국민’의 중간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11. 장문석, [민족주의 길들이기], 지식의풍경, 2006, 10쪽.]

국내에는 네이션과 내셔널리즘 또는 네이션 스테이트에 관한 논의는 많아도 이 용어들의 번역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대략 관례에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장문석은 자신의 번역 이유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논거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 네이션을 ‘국민’으로 번역하는 경우

하지만 네이션을 ‘국민’으로 번역하자는 제안도 국내에서 이미 몇 차례 제시된 바 있다. 특히 서양사학자인 최갑수의 제안이 주목할 만한데, 그는 일련의 논문들에서 이런 주장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는 199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네이션이라는 서양 개념은 우리말의 ‘민족’과 ‘국민’ 두 가지로 옮길 수 있으며, 오히려 후자의 의미를 더 강하게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12. 최갑수, 「서구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민족주의」, 한국사연구회 편, [근대 국민국가와 민족문제], 지식산업사, 1995, 15쪽.] 더 나아가 “그것이 우리말에서 주로 ‘민족’으로 옮겨지고 있음은 우리가 드물게도 ‘종족적으로’(ethnically) 매우 동질적이며 진정한 의미의 국민을 아직 이룩해내지 못한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13. 같은 책, 같은 쪽. 더 나아가 최갑수는 “‘종족적으로’”라는 말에 각주를 달아, 이러한 번역은 영어의 ‘ethnic group’을 ‘종족’으로 표현하는 기존 국어사전의 용례에 따른 것이지만, “원래 혈통적 의미를 강하게 갖고 있는 ‘종족’이 과연 ‘ethnic group’의 적절한 번역어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인종’은 더욱 부적절하다. 차라리 ‘민족’이 어떨는지. 즉 ‘nation’을 ‘국민’으로, ‘ethnic group’은 ‘민족’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감히 제언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좀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

몇 년 뒤에 발표한 다른 글들에서는 좀 더 나아가 네이션 이외에 내셔널리즘이라는 개념 역시 단일한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구별해서 이해하고 번역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가령 1999년의 「프랑스 혁명과 ‘국민’의 탄생」 첫 번째 각주에서 그는 (프랑스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네이션은 ‘국민’으로, 내셔널리즘은 ‘국민주의’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이희승 선생의 [국어대사전](민중서관, 1975)에 따르면, 민족이란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집단.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것임”이며 국민은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을 뜻한다. 전자를 문화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nation’이 이 두 의미를 포괄함이 명백하나, 그 근대적 용례를 확립시킨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적어도 187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정치적 개념인 ‘국민’이 단연 우세했다. ... 따라서 본고에서 ‘nation’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국민’으로, ‘nationalism’ 역시 ‘국민주의’로 옮길 것이다. 하지만 예컨대 독일의 민족주의와 같이 프랑스의 ‘국제주의적’ 헤게모니에 대한 국민적 반발로 나타났던 경우는 ‘국민주의’보다는 ‘민족주의’로 옮기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14. 한국 서양사학회 편, [서양에서의 민족과 민족주의], 까치글방, 1999, 107쪽.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는 김인중, 「민족주의의 개념」, [프랑스사 연구] 제 22집, 2010, 309쪽 참조.]

그 뒤 2003년에는 더 나아가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의 번역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언어, 역사, 신화, 관습, 그리고 아마도 종교를 포함하는 기본적인 삶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공동체에 속하는 인민”을 말하는 ‘ethnic group’은 어떻게 옮겨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민족’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내셔널리즘’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도 nation/ethnic group의 구분법을 Nation/Volk로 유지했던 것이다."[15. 최갑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특성」, [서양사 연구] 제 31집, 2002, 2-3쪽.]

내가 최갑수의 견해를 인용한 것은 대체로 그의 논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고 또 그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명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밖에 주목할 만한 것은 상당수의 인류학자들이 네이션을 ‘국민’으로, 그리고 에스니시티나 에스닉 그룹은 각각 ‘민족성’이나 ‘민족’ 등으로 옮기자고 제안한다는 점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견해가 주목할 만하다. “ethnic group, ethnicity는 원래 미국의 다문화, 다민족사회의 맥락에서 소수민족들의 존속이나 부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1960년대 이후 사용되기 시작한 개념으로, 한 국가 내에 존재하는 민족집단 및 그것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nation의 번역어로 쓰이는—인용자] 민족의 개념과 구별하기 위하여 ethnic group(ethnicity)이 종족(종족성) ... 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ethnic group, ethnicity라는 용어가 이제 한 국가 내의 주류 민족 집단(예를 들어 중국의 한족)뿐만 아니라, 국가의 범역을 넘어선 민족현상의 설명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수민족’으로 번역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민족에 관한 광범위한 현상들이 ‘민족’이라는 일상화된 실천적 용어에 의해 설명되고 있는 현상을 감안할 때, ‘종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어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실제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ethnic group, ethnicity를 별도의 용어로 번역하기보다 전자는 민족집단, 소수민족, 민족단위로, 후자는 민족성, 민족 정체성, 민족 특질, 민족관계, 민족현상 등으로 맥락에 따라 개념화되어 서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16. 유명기, 「민족과 국민 사이에서: 한국 체류 조선족들의 정체성 인식에 관하여」, [한국문화인류학] 35권 1호, 2002, 75-76쪽. 또한 이광규, [신민족주의의 세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2장 및 이 책에 대한 서평인 이정덕, 「서구적 개념어의 번역에서 오는 혼란」, [한국문화인류학] 41권 1호 참조. 시안 존스, 이준정ㆍ한건수 옮김, [민족주의와 고고학], 사회평론, 2008, 11쪽에 나오는 번역 용어에 관한 설명도 참조하라. 이 책의 원제는 Siân Jones, The Archeology of Ethnicity, Routledge, 1997이다.]

인류학자들이 이처럼 에스닉 그룹이나 에스니시티에 관한 번역에 민감한 이유는 원래 서양에서 이 개념들이 생성되고 또 최근에 널리 논의되는 분야가 인류학 분야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17. 서양 사회과학에서 이 개념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시안 존스, 󰡔민족주의와 고고학󰡕, 2장-4장을 참조.] 반면 한국에서는 그동안 소수민족 문제나 다민족 문제가 그다지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분과학문에서는 이 개념들의 용법이나 번역 문제에 대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앞의 인류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에스니시티나 에스니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는 네이션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돼 있으며, 에스니시티나 에스니라는 개념들을 고려해야 민족과 국민, 민족주의와 국민주의 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좀더 깊어지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 네이션을 ‘민족’으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반론: 네이션과 에스니

다시 앞의 논의로 돌아가자면, 장문석은 앞서 인용했던 것처럼 네이션이 종족과 국민 사이의 중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몇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 번째 반론은, 과연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단어가 종족과 국민 사이의 중간적인 의미를 표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앞서 인용한 국어사전에 따르면 우리말의 민족은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집단.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것임”을 뜻한다. 이러한 정의는 실제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잘 전달해준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당연히, 한국의 역사와 전통, 한국어,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양식, 한국인에게 고유하다고 여기는 심리적ㆍ정서적 습관을 떠올리며, 한국어를 잘 구사하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잘 알고 있고 한국의 의식주 생활에 익숙한 사람, 더욱이 검은 머리를 하고 약간 광대뼈가 나온 사람을 그러한 민족의 성원으로 떠올리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프랑스 출신으로 한국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한국에서 20여년을 살아오면서 방송에도 자주 출연해서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이다 도시라는 방송인을 한민족의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더욱이 대개의 경우 그는 한국어를 잘 하는 신기한 외국인으로 비쳐질 뿐 한국인으로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은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음에도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외국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섭섭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어법이 이런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네이션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장문석이 ‘종족’이라고 번역하는 에스니시티,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에스니’(ethnie)[18. 에스니라는 단어는 영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어 단어다. 영어에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ethnicity나 ethnic group 같은 단어들이나 ethnic이라는 형용사만 존재했을 뿐 단일한 명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아래에서 논의되는 앤서니 스미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ethnie라는 프랑스어를 수입하여, 그것을 에스닉 공동체의 한 유형을 가리키는 명사로 사용한 바 있다. 이러한 용법이 학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이 단어는 최근 서구학계에서 공용 학술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여기서 새로운 쟁점이 나타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네이션과 에스니에 관한 최근 서양학계의 정의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네이션과 에스니에 관해 비교적 체계적인 정의를 제시한 사람은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내셔널리즘에 관한 권위자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앤서니 스미스(Anthony D. Smith)다. 이른바 ‘민족상징론’(ethno-culturalism)의 주창자로 분류되는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 네이션 및 내셔널리즘에 관한 원초론(primodialism)적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에른스트 겔너, 에릭 홉스봄 또는 베네딕트 앤더슨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근대론(modernism)적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전근대적 에스니와 근대적인 네이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체계적으로 규명하여 국내 학계에서도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앞서 우리가 거론했던 장문석이나 김인중 역시 그의 입장과 저작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전근대적 에스니와 구별되는 근대 네이션은 대략 다섯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19. Anthony D. Smith, Nations and Nationalism in a Global Era, Polity Press, 1995, pp. 54-56; 앤서니 스미스, 강철구 옮김, 󰡔국제화시대의 민족과 민족주의󰡕, 명경, 1996, 75-76쪽 참조.] 이러한 특징을 종합하여 그는 근대 네이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유된 신화와 기억, 대중적 공공 문화, 특정한 고토(故土, homeland), 경제적 단일성,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이름 붙여진 인간 집단.”[20. A. D. Smith, Ibid., pp. 56-57; 앤서니 스미스, 같은 책, 76쪽.] 또는 최근에 출간된 책에서는 “고토를 점유하고 있고 공통의 신화와 공유된 역사, 공통의 공공 문화와 단일한 경제, 모든 성원을 위한 공통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이름을 지닌 인간 공동체”[21. A. D. Smith, Nationalism: Theory, Ideology, History, Polity Press, 2001, p. 13.]로 네이션을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니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고토와 연결돼 있고 선조와 관련된 공통의 신화, 공유된 기억,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공유된 문화 및 (적어도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연대의 수단을 소유한 이름을 지닌 인간 공동체.” [22. A. D. Smith, Ibid..]

이 두 가지 정의는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지만(고토와 연결됨, 공통의 신화, 공유된 문화), 뚜렷한 차이점도 지닌다. 하나는 네이션의 경우 고토를 점유하고 있는 반면 에스니는 고토와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자의 경우 현재 고토에서 살아가는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고토와 떨어져서 살아가는 이주 집단들이나 망명 집단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이션의 경우 공유된 역사를 가지는 반면 에스니는 공유된 기억만을 가지는데, 이것은 에스니가 서로 분산된 영토에서 흩어져 살아가지만 같은 혈통과 신화 및 문화와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을 포괄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네이션의 경우 단일한 경제와 공통의 공공 문화, 모든 성원을 위한 공통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데 반해 에스니는 이러한 것들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네이션은 문화적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ㆍ법적 공동체인 반면, 에스니는 문화적 공동체로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말은 네이션보다는 오히려 에스니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에스니시티나 에스니 또는 에스닉 그룹 같은 용어는 앞의 인류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말에서 비교적 생소한 ‘종족성’이나 ‘종족’, ‘종족 집단’ 같은 번역어로 옮기기보다는 내용상으로도 더 적절하고 일상어로도 친숙한 ‘민족’ 관련 어휘들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더욱이 에스니시티나 에스니를 ‘종족성’이나 ‘종족’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일부 인류학자들이 하듯이 ‘소수민족’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최근 서양학계에서 이 개념이 이룩한 이론적 진전을 몰이해하게 될 소지도 있다. 앞서 논의한 앤서니 스미스의 이론적 업적 가운데 하나는 에스니시티나 에스닉 그룹의 용법에 담긴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나 의고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에스니라는 개념을 근대 네이션의 기원 및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이다.[23. 이 점에 대해서는 Eric Kaufmann & Oliver Zimmer, “‘Dominant Ethnicity’ and the 'Ethnic-Civic' Dichotomy in the Work of A. D. Smith”, Nations and Nationalism, vol. 10, nos. 1-2, 2004 및 Andreas Wimmer, “Dominant Ethnicity and Dominant Nationhood”, in Eric Kaufmann ed., Rethinking Ethnicity: Majority Groups and Dominant Minorities, Routledge, 2004를 참조.] 그의 작업 이전까지 서양 학계 및 서구 사회에서 에스니시티나 에스닉 그룹이라는 말은 타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가령 영국이라면 파키스탄이나 인도 출신의 이주자들, 프랑스라면 북아프리카나 아랍 출신의 이주자들 또는 미국이라면 중국이나 일본, 한국의 이민자들이 이 단어의 지시체들이었다. 하지만 앤서니 스미스가 모든 근대 네이션은 에스니라는 역사적ㆍ문화적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대개의 네이션에는 다수의 에스니가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한 이후, 에스니시티는 더 이상 타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한정되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영국의 경우 인도인이나 파키스탄인과 다른 본토 영국인들(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및 심지어 잉글랜드인 등)도 일정한 문화적ㆍ역사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에스니이고, 중국의 경우 티벳족이나 만주족 또는 조선족만이 아니라 한족 역시 하나의 에스니이며, 한국의 경우라면 한국인 역시 하나의 에스니인 셈이다. 따라서 문제는 더 이상 본토인 대 이방인(또는 소수민족)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국민 내에 존재하는 다수의 에스니들 사이의 구별(그 중 어떤 에스니는 다수이자 문화적ㆍ정치적으로 지배적일 수 있고 어떤 에스니들은 소수적일 수 있는)이며, 그것과 네이션 사이의 관계다.

셋째, 민족이나 민족주의, 종족성 같은 용어를 택하는 이들 역시 이른바 ‘종족적 민족주의’가 지닌 폐해를 지적하며 될 수 있는 한 그것을 억제하고 관리하면서 이른바 ‘시민적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앞에서 인용했던 장문석을 비롯해 많은 필자들이 이런 관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종족적 민족’ 대 ‘시민적 민족’이라는 이분법이 지닌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이분법을 고수하게 되며, 더 나아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시민적 민족’이나 ‘시민적 민족주의’ 자체가 함축하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맹목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른바 ‘시민적 민족’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프랑스나 미국이나 호주 같이 이민자들에 기반을 두는 나라에서 오늘날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배타적 시민권의 문제를 제대로 고려할 수 없게 된다.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시민권은 사회적 폐쇄의 지극히 막강한 도구다. 그것은 (국경이 없고 배타적 시민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전쟁과 내부 갈등, 기근, 일자리 부족이나 환경오염 등을 피해 도피하고 싶어 하는 또는 자녀들이 좀더 많은 기회를 얻게 해주고 싶어 하는 거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번영을 누리면서 평화를 구하는 나라들을 보호한다. 시민권에 대한 접근은 도처에서 제한돼 있으며, 그것이 원칙상 민족성(ethnicity)과 무관하게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된 이들, 심지어 국가의 영토에서 배제됨으로써 시민권에 지원할 가능성마저 배제 당한 이들에게는 작은 위안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민적” 배제 양식은 비범하게 강력한 것이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아마도, 삶의 기회를 형성하고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대대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데서 이른바 민족성에 기반을 둔 어떤 식의 배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비가시적으로 남아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24. Rogers Brubaker, “The Manichean Myth: Rethinking the Distinction between “Civic” and “Ethnic” Nationalism”, in Hanspeter Kriesi et al. eds., Nation and National Identity, Ruëger Verlag, 1999, pp. 64-65. 또한 Bernard Yack, “The Myth of the Civic Nation”, in Ronald Beiner ed., Theorizing Nationalism,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1999도 참조.]

따라서 에스닉 내셔널리즘보다 시빅 내셔널리즘이 더 개방적이고 더 진보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시민권이나 정치적 신조에 기반을 두는 시빅 내셔널리즘은 공통의 문화나 공통의 혈통에 기반을 두는 에스닉 내셔널리즘과 “다른 식으로”[25. R. Brubaker, Ibid., p. 65.] 개방적이거나 배타적이라고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할 것이다.

III. 국민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처럼 시빅 내셔널리즘이 좀더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고 보는 생각은, 사실은 네이션과 내셔널리즘(및 에스니시티)에 관한 논의에서 국민이라는 용어 자체가 실제로는 공백으로 남겨지거나 논외로 취급되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돼 있는 문제다. 사실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관해 논의하고 또 이 개념들에 대해 상이한 번역어를 제안하는 필자들 중에서 국민이라는 말의 의미를 천착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국민이라는 단어는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한 국가를 구성하는 성원들, 또는 한 국가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또는 앞서 인용한 [국어사전]에 따른다면 국민이란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이다. 따라서 국민은 새삼스럽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상이 될 만한 게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네이션을 국민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한 이상, 그리고 국민은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성원"을 가리키기 때문에 네이션의 번역어로 부적합하다는 반론이 이미 제기된 이상, 이러한 번역의 정당화를 위해서도 한번 국민의 의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이다.

1. 보편적 모순체로서의 국민

따라서 국민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피해야 할 함정은 그것의 의미가 지닌 자명성의 외관이다. 이러한 자명성은 무엇보다 국민을 법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서 생겨난다. 곧 국민을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으로 정의하거나 아니면 좀더 간단하게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의 성원”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 국민이라는 용어는 동어반복에 가까운 것이 될뿐더러 너무나 형식적이어서 아무런 개념적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 속한 시민은 이러한 의미의 국민이 아닌가? 또한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이런 의미의 국민이 아닌가?


따라서 네이션으로서의 국민에 대해 좀더 적절한, 그리고 좀더 근본적인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법적 관점에서 벗어나 국민의 정치적 존재론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 내셔널리즘에 관한 빼어난 저작을 남긴 한 사회학자의 지적은 우리 논의의 실마리로 삼을 만하다.

"주권이 인민 안에 있다는 것과 인민의 여러 계층 간의 근본적인 평등을 인정한다는 것, 그것은 근대적 국민 관념의 본질을 이루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기본 신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국민됨(nationality)에 대한 인식과 함께 태어났다. 민주주의와 국민됨은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연결로부터 떼어놓으면 양자 모두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내셔널리즘은 민주주의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취했던 형태였고, 나비가 누에고치 속에 들어 있듯이 국민 개념 속에 들어 있었다. 원래 내셔널리즘은 민주주의로서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의 발달조건이 존속된 곳에서 양자 사이의 동일성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이 다른 조건 속으로 확산되고 국민 개념에서 강조점이 주권자라는 성격에서 인민의 단일성으로 옮겨가면서 그것과 민주주의의 원리 사이의 본래의 등가관계는 상실되었다. 이것의 함의 중 하나는 (마땅히 강조될 만한 것인데) 민주주의는 수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떤 국민에게는 내재해 있는 성향일 수 있지만, 다른 국민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며, 그래서 후자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거나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은 정체성의 변화를 요구한다. 주권인민이라는 본래의 (원칙적으로 비-배타적인(non-particularistic)) 국민 개념의 등장은, 명확하게 ‘인민’의 상징적 지위상승과 정치 엘리트로서의 인민의 새로운 정의를 시사하는 해당 주민의 성격 전환, 다시 말해 구조적 조건의 깊은 변화가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했다. 그 이후의 배타적 국민 개념의 등장은 그와 같은 전환을 반드시 겪지는 않았던 조건에 본래의 국민 개념이 적용된 결과였다."[26. Liah Greenfeld, Nationalism: Five Roads to Moderni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92, p. 10. 강조는 원문.]

이 인용문의 논점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는, (16세기 영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본래의 국민 개념의 본질은 인민주권과 인민 내부의 평등을 인정하는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 따라서 본래의 내셔널리즘은 민주주의로서 발달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민주주의는 어떤 국민에게는 내재적 성향이지만 다른 국민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어서 정체성의 변화를 동반할 경우에만 수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배타적 국민 개념의 등장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조건에 본래의 국민 개념이 적용된 결과라는 점이다.


내가 그린필드와 견해를 같이 하는 것은 본래의 국민 개념이 자신의 본질로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포함한다는 점이며, 견해를 달리 하는 것은 나머지 두 가지 논점이다.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 견해를 따른다면, 본래적인 국민(곧 민주주의를 내재적 성향으로 지닌 국민)과 비본래적인 국민이 존재하며, 내셔널리즘이 지닌 배타성은 이 후자의 국민에 고유한 것이라는 견해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브루베이커가 지적했듯이 이른바 본래적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의 국가들에게 고유한 배제적 성향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고려하기 어렵게 만든다.[27. 이것은 그린필드의 논의가 다소 형식적인 역사적 유형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국민이 지닌 민주주의적 성격과 그것의 배타적 성격을 상이한 국민들(및 문명)에게 각각 지정될 수 있는 상호 분리된 성격으로 보거나 상호 외재적인 성격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근대 국민의 모순적인 본질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왜 이른바 시빅 내셔널리즘의 본향이라고 할 만한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이 배타주의적인 성향을 띠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왜 근대 국민 형태가 위기에 처하게 됐는지, 또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가능한 방향은 어떤 것인지 적절히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점을 가장 명쾌하고 깊이 있게 보여준 사람은 에티엔 발리바르다. 그는 지난 20여년의 작업을 통해 국민국가의 역사를 관통하는 모순적인 경향을 분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가능한 경로들을 모색해왔다. 발리바르의 논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프랑스 사회학자인 도미니크 쉬나페르(Dominique Schnapper)와의 논쟁을 검토해보는 것이 좋다.


도미니크 쉬나페르는 프랑스의 신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사회학자로서 국민국가의 위기 시대를 맞아 공화주의적 전통 위에서 국민 개념을 옹호하려고 시도한다.[28. 특히 Dominique 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Gallimard, 2003(19941); Qu'est-ce que l'intégration?, Gallimard, 2007 참조.] 그녀에 따르면 “시민들의 공동체”로 이해된 국민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삶에 대한 개인들의 능동적 참여라는 의미에서의 시민권의 본질적인 토대이며 또한 세계화 시대에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해법이다. 그녀의 핵심 논거는 두 가지다. 첫째, 근대적 의미의 국민은 특수한 신분이나 위계, 민족적(ethnique)ㆍ문화적 차이에 기초하지 않고 “개인들의 존엄성을 ... 그들이 지닌 보편적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연계한다”[29. D. 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p. 106.]는 점 때문에 다른 어떤 정치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이다. 둘째, 따라서 국민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덜 배타적이며 덜 폐쇄적이다. 국민이라는 정치공동체가 모종의 배타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타자에 대해서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배타성은 배척이나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식별”(discrimination)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곧 모든 정체성이 불가피하게 타자들과의 차이를 통해 정의되듯이 국민 역시 자신의 타자로서 외국인을 통해 정의된다는 의미에서 국민은 외국인이라는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민족적이거나 문화적ㆍ언어적 실체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나 ‘헌정 애국주의’에 근거를 둔 하버마스식의 포스트 국민 정치체보다 국민이야말로 여전히 현실적이면서도 민주주의적인 정치공동체의 기초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0. 네이션에 대한 쉬나페르의 관점은 프랑스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지만, 동시에 프랑스 안팎에서 상당한 비판을 초래했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다문화적이고 다민족화된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무시한 관점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프랑스 바깥에서는 프랑스에 고유한 네이션 개념, 곧 정치적 네이션 개념을 과도하게 보편화한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발리바르는 국민국가가 보편주의적인 정치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국민국가가 배타성이나 배제성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배제적이라는 점, 따라서 정치 공동체의 보편적 형태가 지닌 모순을 첨예한 형태로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점에서 국민국가는 보편적이면서 배제적인가? 발리바르는 외연적(동화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이를 해명한다.


외연적 보편주의(universalisme extensif)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것은 국민국가와 식민화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이다. 곧 유럽 국민국가들의 형성과 패권 경쟁은 식민지 경쟁으로 이어졌는데, 식민화에 나선 각각의 국민국가들은 이를 보편성의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식민화는 단순한 약탈이나 침략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선교의 사명 내지 인류 전체의 문명화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수행되었으며, 더욱이 내면화된 신념에 따라 수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식민화를 통해 비유럽의 피식민지 인구들은 지배자들의 국적에는 포함되었지만, 식민지 본국의 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는 못한다. 따라서 같은 국적을 지닌 시민들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비(非)시민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하나의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은 또 다른 보편주의, 곧 내포적 보편주의(universalisme intensif)를 통해 좀더 첨예한 형태를 띠게 된다. 내포적 보편주의는 “인권선언”에서 구현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곧 평등=자유라는 명제를 가리키며, 또한 그것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인간=시민 명제, 곧 인간은 무매개적으로 시민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31. E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평등자유명제], 진태원 옮김, 그린비, 근간 참조.] 내포적 보편주의가 함축하는 모순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면, 또는 적어도 그럴 권리를 지니고 있다면,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이 누리는 평등과 자유는 그가 어떤 정치체(대부분 국민국가)의 성원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낳는다. “시민권의 배제 ... 는 인간성 또는 인간 규범 바깥으로의 배제와 달리 해석되고 정당화될 수 없다.”[32.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131쪽. 강조는 발리바르.]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람인 한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만, 역으로 이러한 권리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곧 특정한 정치체, 특정한 국민국가의 성원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제로 향유되고 행사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곧 그가 이러저러한 국민이 아니고, 따라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한에서는 실제로는(잠재적으로는)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무수히 생겨난 국적 없는 사람들이 이러한 모순을 실제로 체험하고 구현했음을 보여준 바 있다.[33.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박미애ㆍ이진우 옮김, 한길사, 2006, 9장 참조.]

이러한 모순은, 보편적인 시민권의 체계로서 근대 국민국가는 항상 그것과 맞짝을 이루는 배제의 체계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함축한다. 그리고 20세기 이후 국민국가가 ‘국민사회국가’(État national-social)로 전환됨으로써 이러한 모순은 한층 더 강화된다. 왜냐하면 이미 국민국가 체계에서 시민권이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커다란 특권(권리들에 더하여 누릴 수 있는 자격이자 심지어 신분)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권이라는 자신의 본래 의미와 모순되는 것이었지만, 국민사회국가에서는 사회권이 기본권으로 포함됨으로써 시민권을 누리는 본래적 의미의 시민들과 그것에서 배제된 비시민들(소수자들 및 이주 노동자들) 사이의 차별은 훨씬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정부는 이러한 차별을 폐지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더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값싼 노동력의 수요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미등록(불법)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수입 제한과 고용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의 (불법) 수입과 고용은 관행적으로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들을 합법화하는 데서 생기는 사회적 비용과 법적ㆍ행정적 문제점 때문에 각 국가들은 이들을 계속 불법적인 상태에 놓아두려고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이들의 노동으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불법 행위를 조장하고 그것을 구실로 하여 주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고 사회적 치안을 강화하려는 국가의 기만적인 이중적 행태가 전개된다.

정리하자면, 근대적 의미의 국민은 ‘시민들의 공동체’로서 내포적 보편성과 외연적 보편성을 갖는 정치적 공동체다. 하지만 국민의 이러한 보편성은 배타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보편성 때문에 또한 그것에 고유한 배타성 내지 배제를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국민이 함축하는 배타성은 특수한 종류의 국민(가령 동유럽이나 비유럽 지역의)에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국민 자체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국민적 인간: 일상적 국민주의와 국민적 정체성

근대 국민 개념에 고유한 이러한 모순은 내셔널리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내셔널리즘은 매우 병리적이거나 퇴행적인, 또는 적어도 후진적인 현상으로 이해되곤 한다(국내에서도 몇 년 전에 벌어진 이른바 ‘디워 논쟁’ 당시 진중권 등의 논객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견해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하지만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마이클 빌리그는 [일상적 국민주의]라는 저서에서 그 당시까지 내셔널리즘에 관한 논의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국민의 재생산이라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이러한 관점이 지닌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34. Michael Billig, Banal Nationalism, Sage, 1995.]

그의 출발점은 내셔널리즘을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극우파 정치”[35. M. Billig, Ibid., p. 5.]와 결부시키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내셔널리즘을 ‘우리’가 아닌 ‘그들’의 문제로, 곧 아직 국민국가의 형성을 달성하지 못한(또는 서구와 같은 수준의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한) 제3세계 내지 주변부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퇴행적이고 후진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고, 이미 이러한 과정을 완수하여 잘 제도화된 국민국가를 구성한 서구인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뜻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과 같은 나라들은 “계속 실존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이 나라들은 국민들로서, 그리고 그 나라의 시민들은 국민 성원들로서 재생산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재생산의 필요성이 “너무 익숙하고, 너무 연속적”[36. M. Billig, Ibid., p. 6.]이어서 이러한 재생산을 위해 국민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가 “일상적 국민주의”라고 부른 것은 이처럼 “서구의 확립된 국민들이 재생산될 수 있게 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관습”[37. M. Billig, Ibid., p. 7.]을 가리킨다. 따라서 일상적 국민주의라는 개념은 국민주의를 무언가 비정상적이고, 어떤 격변이나 사건이 도래했을 때 일어나는 열광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는 통념을 넘어서, 국민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재생산되기 위해 꼭 필요한 상징적ㆍ관습적 관행들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주의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일상적 국민주의는 사실은 국민적 인간의 형성과 재생산이라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국민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발리바르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이것은 국민국가의 핵심 목표가 “다른 모든 정체성을 압도하는 ‘국민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고, 국민적 소속이 다른 모든 소속과 일치하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일”[38.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55쪽.]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근대 국민국가 내에서 각 개인들은 (자유주의에서 상정하는 것처럼) 국민에 대한 소속 이전에 또는 그러한 소속과 무관하게 자신의 독자적인 개인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얻게 된다. 국가를 구성하는 각 집단들 및 개인들은 자신들을 이러저러한 집단의 구성원이자 이러저러한 개인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국민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고 국민으로서의 자본가이고 국민으로서의 선생이고 학생이고 가정주부이고 범죄자 등등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모든 국민 국가(프랑스나 미국 같은 ‘이민자 국가’를 포함하는)는 정의상 국민주의적이며, 또한 그 국민 국가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국민주의적이다.


이것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자신의 유명한 저서에서 말한 것처럼 국민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한다.[39.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2006(3rd Edition), pp. 5-6;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윤형숙 옮김, 나남, 2002, 21쪽 참조.] 여기서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은 가상이나 환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국민이 자연적인 공동체(곧 혈통에서 유래하거나 에스니시티를 기반으로 하는)가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진 “특수한 종류의 문화적 인공물(cultural artefacts)”[40. B. Anderson, Ibid., p. 6; 베네딕트 앤더슨, 같은 책, 21-22쪽.]임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인공물로서의 국민은 인쇄 매체들 덕분에 가능해진 근대에 고유한 시간, 곧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41. B. Anderson, Ibid., p. 35; 베네딕트 앤더슨, 같은 책, 56-57쪽 참조.]


하지만 일상적 국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앤더슨의 정의가 지닌 약점은 그것이 국민적 정체성 형성 및 재생산의 문제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42. 나중의 저술에서 이 점이 다소 보완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불충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B. Anderson, “Nationalism, Identity, and the Logic of Seriality”, in The Spectre of Comparisons, Verso, 1998 참조.] 반면에 발리바르는 앤더슨과 거의 같은 의미에서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이 개념을 국민적 인간의 형성과 재생산 문제와 결부시킨다.

"결정적인 논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국민은 어떤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인가? 또는 오히려, 국민이 설립하는 공동체 형태는 어떤 점에서 다른 역사적 공동체들과 종별적으로 구별되는가? 전통적으로 이 통념과 결부돼 왔던 반정립들과는 곧바로 거리를 두겠다. 우선 ‘현실적’ 공동체와 ‘상상적’ 공동체라는 반정립으로부터 거리를 두겠다. 제도들의 기능 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다시 말해 이 공동체들은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이야기의 짜임 속에 투사하는 것에,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에, 기억도 할 수 없는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이러한 전통들이 근래의 상황 속에서 제작되고 주입된 경우에도)에 의거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일정한 조건들 속에서는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 공동체들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43. É. Balibar & I.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p. 126; 에티엔 발리바르, 「민족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 [이론] 6호, 1992, 117-118쪽―번역은 수정.]

이러한 의미에서의 ‘상상’은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공상이나 환상 또는 착각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을 인공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적 공동체로서 국민 공동체의 생산 및 재생산의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발리바르는 그것을 상상적인 것으로서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에서 찾는다. 이것은 인민이 자신들을 국민으로서 (재)인지하고, 인민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바로 이러한 국민에 대한 소속을 매개로 하여 자신들의 개인적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리고 국민 성원들 사이의 일체감, 동질성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동질성의 기원 및 주체에 대한 보충적인 상상계를 수반한다. 이는 우리나라 같이 이른바 ‘단일 민족’의 경우에는 더욱 더 사실이다. 여기서 허구적 민족체(ethnicité fictive)(또는 의제적(擬制的) 민족체)라는 또 다른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개념은 국민이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고 연속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 온 역사적 실체 또는 심지어 (유일한) 역사적 주체라는 국민주의에 고유한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상상적’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허구적’이라는 개념이 가상적이라거나 가짜 또는 단순히 공상적이라는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적 효과라는 의미, 곧 제작”[44. É. Balibar & I. Wallerstein, Ibid., p. 130; 같은 글, 121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 때문에,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의제적 민족체’라는 번역어가 일리가 있다).

이런 의미로 이해된 허구적 민족체는 실존하는 어떤 국민이 오래된 민족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가령 골족의 후손, 단군의 자손 등), 그 국민은 동일한 기원을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세대를 거치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유구한 역사적 실체(또는 오히려 주체)로서의 민족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허구적 민족성은 국민 국가 내의 집단들(사회 계급이나 이러저러한 에스니들) 및 개인들이 자신들은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의 차이를 초월한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같은 국민이라고 여기게 해주는 상상적 토대의 구실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이나 인식이 단순히 공상적이거나 가상적인 의식에 머물지 않으며, 교육 제도나 가족 제도 같은 사회적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훈육되고 각종 의례나 절차, 관행 등을 통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재생산된다. 따라서 국민주의는 그것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이러한 허구적 민족성을 더 강하게 반영하기 마련이며, 상상적인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을 자신의 기초로 삼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이 제기될지도 모른다. 왜 여기에서 민족주의 대신 국민주의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내셔널리즘을 ‘민족주의’로 이해할 경우 내셔널리즘을 국민국가의 유기적 이데올로기, 또는 국민국가의 고유한 상상계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의미로 이해된 민족주의라는 말은 서구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비서구사회, 특히 덜 민주주의적이고 덜 발전되고 덜 개화된 국가에 고유한 퇴행적 이데올로기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서구의 이른바 선진국들에 고유한 내셔널리즘, 곧 빌리그가 일상적 국민주의라고 부른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연적인 관행으로 간주될 것이다. 반면 국민주의라는 번역어는 내셔널리즘을 유기적인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 내지 상상계로 좀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둘째,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라면, 이것은 상상계 없는 공동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상상계 또는 이데올로기를 그 자체로 비난하거나 그것을 초월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문제는 상상계 내지 이데올로기를 좀더 복합적인 체계로 인식하고 그것들 내의 차이를 식별하는 일이다. 이는 내셔널리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흔히 내셔널리즘을 단일한 이데올로기나 상상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내셔널리즘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이데올로기다. 가령 프랑스의 예를 든다면, 쉬나페르 등이 대표하는 신공화주의적 국민주의와 극우파 국민전선의 민족주의(“프랑스인의 프랑스”)는 모두 내셔널리즘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양자가 똑같은 의미나 가치를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자가 국민 개념에 내재한 모순에 둔감하긴 해도 민주주의적 시민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반면, 후자는 배타적 인종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IV. 결론을 대신하여

요컨대 우리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용도폐기할 때가 되었고 대신 ‘국민’이라는 개념이 그것을 대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45. 필자는 7월 7일 역사비평 토론회에서 상당수의 참석자들이 필자의 주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는 다수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일제 시대 및 독재 시대 이래로 민족=‘저항적, 비판적인 것’, 국민=‘순응적, 관제적인 것’이라는 구별법을 일종의 (절대적인?) 규범적 가치로 간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표로 보인다. 이러한 규범성은 이른바 뉴라이트 쪽에서 8ㆍ15를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개칭하자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발로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필자의 주장은 민족과 국민은 동일한 지시체에 대한 서로 경쟁하는 개념들이 아니라 각각 상이한 지시체를 가진 개념들이라는 것이며,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현재의 논의에서 나타나는 혼란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적 네이션보다는 시민적 네이션이, 민족주의보다는 국민주의가 그 자체로 더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근대 국민에는 민족적 요소와 시민적 요소가 공히 존재하며, 또 국민주의는 그것이 국민주의인 한 모종의 배타성을 띠기 마련이다. 보편적인 정치체로서 근대 국민에 함축된 이러한 배타성이야말로 근대 국가의 전개 과정을 규정한 핵심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론을 대신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 점이다. 첫째, 국민이 여전히 지배적인 정치 공동체로 존재하는 한에서 국민국가의 모순을 영위하기 위한 실용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국민이라는 모순적인 복합체는 그것을 괴물이나 노예적인 것으로 저주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분간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종류의 국민 공동체보다는 다른 종류의 국민 공동체, 한 종류의 국민주의보다는 다른 종류의 국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판단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근대 국민의 이상, 곧 민주주의적 시민성의 이상에 더 근접한 것인가 여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특정한 국민을 모델로 하여 그것을 뒤쫒는 것(가령 독일 대신 프랑스, 에스닉 네이션 대신 시빅 네이션)과는 다른 종류의 과제다.

둘째, 하지만 근대 국민이 역사적 위기에 봉착한 만큼 이러한 실용적 해법은 충분할 수 없고,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해법은 민족이나 국민과 다른 또 다른 상상적 공동체(이 경우에도 여전히 공동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요구할 것이며, 앞서 말한 실용적 해법은 이러한 새로운 상상적 공동체에 대한 모색에 기반을 두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새로운 상상적 공동체의 사례를 하나 언급해두고 싶다. 우리가 본문에서 여러 차례 논의한 바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는 네덜란드의 정치철학자 헤르만 판 휜스테렌(Herman van Gunsteren)을 따라[46. Herman van Gunsteren, A Theory of Citizenship, Westview Press, 1998; [시민권 이론], 장진범 옮김, 그린비, 근간 참조.]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는 이름의 새로운 상상적 공동체를 제시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 공동체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폐지할 수 없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47.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48쪽.]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원주민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적 정체성을, 적어도 상징적으로라도 재검토해 보아야 하며, 다른 모든 이들―곧 어디 출신이든, 선조가 누구든, ‘적법성’이 어떻든 간에 오늘날 지구의 한쪽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 그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48. 에티엔 발리바르, 같은 책, 258-59쪽.] 한다.

이러한 종류의 공동체에서는 가령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게 된 모든 사람은, 그가 한민족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또 그가 한국 국적을 소유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들이 물려받은 정체성의 특권(가령 한국에서 한국인이라는 것은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출신의 이주노동자에 비하면 엄청난 특권이 아닐 수 없다)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없으며, 같은 운명을 공유하는 이들, 곧 같은 지리적 공간, 같은 정치체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동등한 시민의 자격으로 새로운 시민적 정체성을 재발명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운명공동체는 이 용어의 통상적인 용법[49. 가령 2006년 4월 27일자 북한 [로동신문] 사설은 남한의 다문화주의 정책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민족을 운명공동체로 정의한 바 있다. “민족은 력사적으로 형성된 민족성원들의 사회생활단위이고 운명공동체이며 ... 단일성은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민족의 영원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위한 투쟁에서 필수적인 단합의 정신적 원천[이다].” 박명규, 「네이션과 민족」, 앞의 글, 54쪽에서 재인용.]과는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형성될 남ㆍ북한 공동체를 우리가 말한 의미에서 운명공동체로 지칭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에스니라는 의미에서) ‘민족’이라는 배타적 틀로 묶이지 않는, 또 묶이지 않아야 할 운명공동체일 것이다.


너무 공상적인 공동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그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 국민의 이상 속에는 이미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약속이 기입되어 있다.[50.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에 수록된 여러 글 참조.] 따라서 그러한 약속이 도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날 국민국가의 위기에 직면한 민주주의자들이 상상해봐야 할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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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바보 2011-08-2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옛날에 하신 얘기들 중에 누군가 脫構築이 더 적절하지 않냐고 선생님께 질문했던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한마디 하시는 군요. 뭐 일본에서는 이미 쓰고 있었던 번역어지요. 저도 이게 더 나은 듯 합니다.

예상대로 선생님이 언젠가는 "국민주의"라고 부르실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그렇게 부르시는 군요.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회를 엿보시는 건지 아니면 논거를 준비하시는 건지?

그런데 "서양인들이 보기에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로 이해될 수 있다"는 얘기는 뭐하러 하셨습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느냐 안 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지식은 바보 2011-08-2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버트 영의 책 이야기도 언급하셨으니 조금 얘기해 보자면 술탄-갈리에프나 마리아떼기 또는 셍고르 또는 범아프리카주의가 nation(나시옹)을 언급할 때 그 nation은 흔히 말하는 nation-state를 당연한 전제로 하면서 언급하는 것도 아니고 nationalism에 근거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죠. 설사 그런 요소가 있더라도 최소한 그것만으로 한정되지 않아요. 발마스 님이 말씀하시는 "國民"으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부적절합니다.

19세기 유럽의 식민주의 또는 메트로폴리스 정부의 對식민지 정책인 제국주의가 "민족적 억압"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물론 지금은 민족적 억압의 형태는 아니고 훨씬 복잡하다) 한국의 위대한 지식인들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부르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는 nation이나 nationalism을 "國民"이나 "國民主義"로만 이해했던 게 아닙니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발마스 님이 마련해야 할 듯 합니다. 물론 짜증나는 나라 또는 국가 한국은 제외하고 그렇다는 거죠.


지식인은 바보 2011-08-2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급하신 최갑수 씨는 인도의 라나지트 구하에 대해 학을 떼시는 또는 알레르기를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라나지트 구하에 대해 아주 적대적인 분이죠.

최갑수 씨가 보기에는 프랑스에 "국민"이 우세하다고 발마스 선생님이 좋아하실 이야기를 하셨군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에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쓰던 nation은 제가 보기에는 "민족"입니다. 19세기에 들어서 근대국가가 뚜렷해지면서 그런 식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생긴 거 뿐이죠. 1830년 알제리 침공으로 본격화된 프랑스 제국주의가 생산한 "문명화 담론"(빅토르 위고가 아주 좋아한) 같은 것을 보면 저는 최갑수 씨나 발마스 님에게 순순히 동의할 수가 없네요.

서발턴은 더 바보 2011-08-29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 시민사회와 민족-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는 서로 결합했습니다. 따라서 시민운동이든 시민단체든 시민이 들어가는 것들은 결코 국가나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죠. 그것은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식민주의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모두 모던 안에 있는 겁니다.

발마스 선생님의 논의는 결국에는 유럽중심주의의 시선 안에 있다고 봅니다.

balmas 2011-08-30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지식인은 바보님 댓글에 대해 딱히 드릴 말씀은 없지만, 한 가지는 좀 확인해봐야 할 것 같네요. 제가 "서양인들이 보기에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문에서 쓴 적이 있나요? 저는 이런 말은 전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데.^^;

국민주의 2015-04-2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현재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을 연구하고 있어서, 글쓴이의 주제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nation을 민족으로 번역하게 된 것은, 일본이 nation을 민족이라고 번역한 것을 그대로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근데, 현재 일본은 더 이상 nation을 `민족` 그리고 nationalism을 `민족주의`로 번역하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내셔널리즘이라는 말은 그대로 쓰지만, nation은 대개 `국민`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내셔널리즘도 `국민주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죠. 전후, nationalism의 번역어 `민족주의`는 오역이었다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비판으로 시작해서 nation에 대한 용어 논쟁이 있었죠. 이런 번역어 논란은 거의 60년 전에 이루어져서, 빠르게 용어에 대한 논쟁이 정리되었고, 지금은 `국민`이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고 , `민족주의`라는 번역어는 내셔널리즘과 별개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와 중국(타이완을 포함해서)에서는 아직 nation과 nationalism을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아직도 쓰고 있는데, 이건 아마도 국가차원에서 민족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용어를 고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부분은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요. 다만, 요근래 민족이라는 용어는 다시 논의해봐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비록 이 글은 4년 전 글이지만, 앞으로도 이와 같이 nation에 대한 적절한 용어 논의가 있었으면 합니다.

balmas 2015-04-28 00:2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논의에 관한 좋은 정보를 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일본에서 내셔널리즘, 국민주의 등에 관한 논쟁사를 역사비평에 한번 기고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제 글에 관해 몇 분 선생님께서 이미 [역사비평] 지면에 글을 기고하신 적이 있는데, 일본의 논쟁사를 소개한다면, 이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는 계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 글과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쓰셔도 좋습니다.^^ 저도 작년에 다른 선생님들의 논평에 대한 답변을 겸해서 이 문제에 관해 한번 더 글을 써볼 생각이었는데, 한겨레 연재로 인해 시간이 너무 쫒기다보니 미처 글을 싣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다뤄보고 싶은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국민주의 2015-05-03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코멘트에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역사학 관련자가 아니고 정치학 전공자(게다가 아직 학위 과정 중입니다.)라 말씀하신 잡지에 글을 기재하기엔 제 역사적 내공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저 또한 이에 관련된 글을 써보고 싶긴 합니다. 사실 제가 직접 쓰는 것보다, 일본에서의 논쟁사를 번역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지만요.ㅎ

일본 학계(내셔널리즘을 주로 연구하는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등에서)도, 본문에서 언급하신 국내 인류학자들의 번역처럼, 민족을 ethnicity의 번역어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단순 nationalism이 아니라 `Ethnic nationalism`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nationalism에 관련된 연구를 주고 받을 때, 근본 용어부터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한국 관련 서적 중 `민족주의`라는 단어를 보면 일일이 보통 nationalism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Ethnic nationalism`을 말하는 건지 항상 확인합니다. 영어 병기가 있으면 문제가 없으나, 없을 땐 참 난감하더군요/ 참고로, 국민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 영어 병기도 대부분 함께 쓰는데, 민족주의를 쓰는 사람들의 경우 영어 병기를 잘 표시하지 않더군요. 모든 용어에 영어 병기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번역 용어에 논란이 있는 건 원어도 함께 적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에... 물론 당사자들은 논란이 되는 용어가 아니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한 번 더 다루어주신다면 후학 세대들에게 굉장히 유의미한 일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 또한 기회가 된다면, 그 논의에 동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