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어쩌려고 그래…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야”

김선일씨 납치 뒤 이라크 현지 표정… 한국의 파병 강행 보도되자 납덩이처럼 무거운 반응


한국의 한 노동자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억류되어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다. <한겨레21>은 현지에 있는 자유기고가 김영미씨를 긴급 섭외해 현지 상황과 이라크인들의 반응을 취재했다. 이라크인들은 정부가 성급히 파병 철회 거부를 선언하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추가 파병 예정지인 아르빌의 복잡한 상황도 전한다.


▣ 아르빌= 김영미/ 자유기고가

마침내 우려하던 사태가 불거졌다.

지난 6월20일께 바그다드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스완 호텔에 사무실을 차린 <알자지라> 방송사로 CD 한장이 들어왔다. 어떤 낯선 남자가 놓고 간 것이다. CD의 내용은 놀랍게도 가나무역의 한국인 직원 김선일씨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납치됐으며 한국군의 철군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알자지라>의 신속한 보도 결정


△ 김선일씨의 귀환을 위하여, 6월21일 저녁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린 파병 철회를 촉구하는 촛불집회.(사진/ 김진수 기자)

이라크 저항세력의 외국인 납치는 올해 들어 끊이지 않고 있다. <알자지라>는 이렇게 인편으로 호텔에 놓고 간 테이프로 그동안 일본인과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등 여러 나라의 외국인 납치 사건을 방영했다. 한국인 납치 뉴스를 담당한 <알자지라> 프로듀서 오마르는 “지금으로서는 누가 언제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납치 억류돼 있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화면을 보는 순간 톱뉴스라고 생각했고 신속하게 보도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김선일씨는 6월17일에 납치된 것으로 확인됐고 바그다드에 소재한 가나무역의 직원이다. 가나무역은 이라크 주둔 미군부대에 일상용품이나 군복에 관련된 물건을 납품하는 군납업체인데,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군을 상대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펼쳐왔다. 이라크에는 지난해 바그다드 함락과 동시에 미군과 함께 이라크에 들어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알와하드 거리에 민가 두채를 빌려서 사업을 하는 중이다.

사장 김천호씨를 비롯해 12명의 한국인 직원, 제3국에서 온 노동자와 이라크 현지인 등 제법 큰 회사로 성장했다. 이라크에 진출한 한국 기업 중 성공한 사례로 꼽혔고 매출도 꽤 많은 회사이다. 가나무역의 직원들은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남부 나시리야, 나자프, 북부 티크리트, 키르쿠크, 모술 등 가리지 않고 다녀야 했고, 이라크 현지 사람들에게 감정이 안 좋은 미군에게 납품을 하는지라 그전부터 안전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군다나 미 해병대가 지난 4월 팔루자 전투 이후 팔루자 인근에 주둔지를 마련하면서 새로운 거래처가 생기자, 김선일씨는 이라크 현지인 한명만 동반한 채 배달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한국에 김씨 납치 사실이 알려진 것은 <알자지라> 채널을 통해서다. 이곳 시각은 6월20일 밤, 한국은 21일 새벽 5시께다. <알자지라>는 저항세력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애용(?)하는 방송사다. 김씨가 복면을 한 3명의 무장 괴한들 앞에서 울부짖으며 영어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과 무장세력이 한국군 파병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낭독하는 장면을 담은 2분가량의 비디오테이프가 방송됐다.


△ <알자지라>가 입수, 6월20일 방영한 김선일씨의 모습.(사진/ AP연합)

파병 재확인 이라크 전역에 방송

지난 6월18일 한국 정부의 추가 파병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해서 아마 이라크 전역에 신속하게 그 소식이 전달됐을 것이다. 이번 김선일씨 납치 사건도 톱뉴스로 다뤘다. 지금 상황은 김선일씨를 인질로 잡고 <알자지라>라는 방송을 이용해 한국 정부와 한국군을 ‘협박’한 셈이다. 이 와중에 한국 정부는 기존의 파병 방침을 고수하겠다고 했고, 이는 또다시 신속하게 이라크 전역에 방송됐다. 이 방송은 한국 정부가 이라크에 3천명의 병력을 파견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고 21일 보도했다. 방송은 ‘한국, 구조 신호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 파병키로’라는 자막과 함께 한국 정부가 긴급 대책회의에서 파병 강행 방침을 정리했다고 전했다. 방송은 김씨의 울부짖는 모습에 한국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부가 파병 결정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송을 접한 현지인들의 반응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저항세력이 나름대로 정색을 하고 협박하는데 한국 정부가 파병 철회 불가를 계속 외치며 그들의 요구사항을 정면에서 거절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속사정이 있겠지만, 이곳 이라크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방송을 접한 이라크 시민들은 저러다 인질이 희생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한마디씩 했다. 바그다드와 아르빌을 오가며 중고차를 수입하는 요세프(52)는 “나도 한국의 중고차를 많이 수입하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데 이런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이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한국인들이 겪어보지 못한 특별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한다면 하는 사람들인데 한국 정부가 너무 강경하게 나오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 현지인들은 거의 김씨가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체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은 돈을 원하지 않는다


△ 부산 동구 김선일씨의 집에서 아버지 김종규씨와 어머니 신영자씨가 울먹이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그럼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는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지금 무장세력들이 방송을 통해 요구를 하는 만큼 한국 정부도 이곳 방송을 통해 설득해봐야 한다. 아마 테이프를 보내놓고 <알자지라> 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텐데, 한국 정부쪽 인사가 그들을 설득하는 방송을 해서 한국의 입장을 전달해야 하고 팔루자에서 영향력 있는 부족장이나 성직자를 찾아내 그들을 설득할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서둘러 김선일씨를 구출하는 데 애를 써야 한다. 마침 카타르 주재 정문수 대사는 6월21일 정오(한국시각 오후 6시) <알자자라>에 출연해 김씨의 석방을 호소했다. 그는 특별 인터뷰를 통해 이라크에 파병된 서희·제마부대의 인도적 지원과 평화유지 활동을 집중 설명하면서 선처를 호소했다. 방송은 정 대사의 인터뷰 내용을 약 4분간 생방송으로 내보낸 뒤 한국의 국립방송이 제작한 ‘서희·제마부대를 가다’를 약 3분에 걸쳐 내보내는 등 한국군의 평화재건 활동을 부각하는 내용을 보도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한국 정부의 파병 철회 불가 방침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했다.

이 와중에 또 다른 다행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이라크 수니파 지도자 협의체인 이슬람 울라마 기구가 21일 수니파 밀집지인 팔루자에서 납치된 김씨의 석방을 호소했다. 이 단체의 하레스 알다리 대변인은 “점령군에 협력한 사실이 명백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도적 차원에서 인질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 기구는 지난 4월 이라크 저항세력에 납치됐던 일본인 3명이 무사히 석방되는 데 기여하는 등 이라크에서 영향력이 큰 수니파 조직으로 통한다.

그렇다면 다른 김씨 구출방법은 어떻게 작동된 걸까. 사실 이곳은 거의 무정부 상태다. 무장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중앙정부가 부재한 상황에서 외교를 펼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무장세력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스스로 행동을 할 뿐이다. 지금 이들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존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한국 정부는 무장세력의 실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씨를 억류한 무장세력을 돈으로 매수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일부 있으나, 이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현지인들은 하나같이 “이들이 돈을 원했으면 ‘24시간 내 참수 경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돈을 원했으면 그처럼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 주한 중동국가 대사들이 6월21일 김선일씨의 무사 귀환을 위해 노력해줄 것을 요청받은 뒤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 청사를 나서고 있다.(사진/ 류우종 기자)

제2, 제3의 한국인 납치 사건…

애초에 한국군 파병을 결정한 것 자체가 이런 사건을 이미 예고한 것이다. 그러나 민간인이 납치돼 희생당한다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라크 사람들은 한국인들을 무척 존경했다. 잘사는 나라, 민주적인 국가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는데 어쩌다 양국관계가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 더 걱정되는 것은 제2, 제3의 한국인 인질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라크에서는 가정마다 위성방송을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다른 지역에 있는 저항세력에게도 좋은 홍보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한국군의 파병이 이렇게 이들에게 큰 사안이라면 앞으로도 충분히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이 사건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24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이곳 시각으로 21일 오후 4시(한국시각 밤 10시)께 <알자지라>가 “1시간 뒤 김씨와 관련된 새로운 테이프를 보여주겠다”는 긴급 속보를 자막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현지 시각 밤 9시(한국시각 22일 오전 3시) 현재까지 <알자지라>는 새로운 뉴스를 내보내지 않고 있다. 김씨의 생사 여부에는 관심없다는 듯 이라크의 밤은 전날처럼 그렇게 고요속에 깊어가고 있다. 그가 참수됐다는 불길한 소식만 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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