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리가레의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를 같이 읽으려고 수업게시판에 올려 놓았더니, 발제를 맡은 학생들 중 한 사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곳들이 있다고 질문을 보내왔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을 해서 보내줬는데,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지 학생들만의 어려움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답변이지만, 얼마간 읽는 데 도움이 될 듯해서 그 학생이 보내온 질문 내용과 그 질문에 대한 몇 가지 답변을 같이 올립니다.

각 질문에 묻고 있는 구절은 제가 따로 원문에 밑줄과 번호 표시를 해두었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I. 질문들

1) 2p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休止)(또는 보편성과 휴지)이다(왜냐하면 이는 순수 진리를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
 : 무엇이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인지…주어를 잘 모르겠어요. =_=;; 주어를 '매장'이라고 본다면, '휴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걸리거든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이라는 보편성을 휴지(하던 것을 그치다, 라고 국어사전엔 나오던데)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매장은 보편성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환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거든요. 즉 생물이라면 누구나 죽게 된다는 죽음의 보편성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간존재의 보편성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매장을 통한 보편성의 고양이라고 (줄친 것 뒤 문장은) 읽었었는데 줄친 문장에서 말하는 보편성이 어떤 보편성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가서 문맥이 연결이 안돼요.=_=;; "보편성의 휴지"와 "보편성과 휴지"도 해석이 달라질 것 같은데 주어 문제랑 보편성 문제가 걸려서 말로 잘 설명을 못 드리겠네요.=_=;;

2) 2p  "이러한 지고한 의무가 신의 법, 또는 독특한 개인에 대한 실정적인positive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법은 독특한 개인에 대한 보호와 배려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사실 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성원은 독자적인 존립과 고유한 대자적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정신은 여기서 자신의 실재성 또는 자신의 현존재를 재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은 전체의 힘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정신은 이 부분들[각각의 성원]을 부정적인 일자(一者, un) 안으로 결집시킨다."
: 안티고네의 매장 행위(의무)가 "positive한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고 나온 것으로 보아 그것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negative를 썼다고는 생각이 되는데, (물론 선생님이 번역하신 것처럼 '실정적인'의 뜻으로 positive를 읽는다면 '부정적인'이 positive의 대구가 아닐 수도 있지만요=_=;;) 여기서 '부정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_=;; 생산적인 권력이 아니라 금지하는 권력으로 작용하는 일자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건가요? 그렇다면 '지고한 의무'가 positive로 평가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행위성의 다른 관점-하느냐/하지 못하느냐- 때문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읽어선 안 될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_=;;;; 선생님 번역하신 대로 '실정적인'이라고 읽는다면 첫 문장은 이해가 가는데, '부정적인'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3)3p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이러한 대자적 존재 tre-pour-soi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 자유로운 개체성들로 존재한다."
: 줄친 부분 이해가 안 가요.=_=;; '이러한'이 나오면 뭔가 앞에 설명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인데 설명될만한 문장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ㅠ.ㅠ 이 글에서 '대자적 존재'가 많이 나오는데 그 뜻을 명확히 파악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대자적 존재'(간단히 말해서 의식화된 존재, 라고 이해했는데)는 아닌 것 같고, 어머니와 자식 간의 이자적 존재가 아닌, 이미 상징계로 진입해서 소외된 상태인 존재들 간의 관계(원초적인 연결고리가 없는)라고 이해해도 되는 건가요? =_=? 하지만 이 정도 이해만으로는 오누이 사이에 대자적 존재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ㅠ.ㅠ

4) 3p "또는 오히려 이는 오빠와 누이가 동일한 정자를 공유하고, 이에 따라 혈족관계[근친교배]에 (또다른)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정념(수난, passion)을 통해 마법적인 정념[수난]과 균형을 맞춤으로써 결국 혈족관계가 마법적인 정념[수난]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인가?
: '마법적인 passion'이 무슨 의미인지…ㅠ.ㅠ 다른 정념은 또 뭔지…ㅠ.ㅠ "동일한 정자를 공유"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선 생명을 만드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 같고, (나아가 부권적인 혈통을 강조하는 것 같고) 이렇게 해석한다면 '마법적인 정념'이란 생명을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관점, 혹은 모계혈통(이나 모권제혈통)을 의미하고 혈족 관계가 결국 이것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얘기는 모계혈통에서 부계혈통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제가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어요.=_=;;

5) 5p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 repr sentations)만 지니고 있어서 그녀의 욕망은 이러한 징벌을 견뎌낼(지양할, rel ve) 수 없다."
: 어째서 그녀에게 사랑이 연약한 표상들만 지니고 있는지, 연약한 표상들이란 무엇을 말하는지요.=_=;;

6) 5p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se donnant elle-m me la mort) 자신의 향락의 애도(또는 이 애도는 바로 그녀의 향락이 아닐까?)를 받아들인다."
: 제가 아직, 안티고네가 주이상스를 중심으로 읽는 논의들이 잘 납득이 안 가서(중간대체 레포트에도 그 혼란이 고스란히 있지만) 이해를 잘 못 하는 걸 수도 있는데요,
① 그녀의 죽음이 주이상스를 애도하는 것, 이라 읽는다면 결국 그녀는 주이상스에 다다르지 못했고 주이상스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을 받아들이는 행위로써 죽음을 선택했다는 얘기인가요? '애도'라는 개념이 끼어든다면 죽음으로써 그녀가 주이상스와 만나는 낭만적인(?) 결과 따윈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② 애도가 곧 그녀의 주이상스라면, 그녀가 그토록 자신의 죽음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를 한 이유를 주이상스를 통해서 읽을 수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래도 혼란스러워요. 제가 그동안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주이상스 개념이 다 엉터리였던 것 같기도 하고…-_-;; 안티고네를 어떻게 주이상스와 죽음충동으로 읽을 수 있는지 가르쳐주세요.

7) 6p "더 성마르고 더 충동적이며, 노여움에 못 이겨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rouvrir les veines de son sang 인물이다."
: 핏줄들을 열어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질문이 너무 간단한가=_=;; 이 문장 자체를 이해 못했어요.=_=;;)

8) 7p "곧이어,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자아Moi)의 지위stase 안에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 이외에 다른 욕망을 지니지 않은 신이 도래할 것이다."
: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어요. 안티고네가 옹호한 신의 법, 혈족을 위하는 욕망을 뜻한다고 읽는다면, 국법보다 가족법을 우위에 둔 신이 도래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뭔가 역사가 흘러온 과정상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으니 이리가라이가 이런 뜻으로 말했다고 생각하기가 애매하고=_=;;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바로 앞 문장들은 크레온이 상징하는 공적 권력이란 것이 어떤 것들을 희생시키고 어떻게 은폐해서 이루어진, 사실은 개인적인 권력임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곧이어"라는 접속사로 따라 나올 문장들은 그러한 공적인 권력의 도래를 의미해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저 위문장을 해석해야할지 혼란스러웠거든요.

9) 8p "환원 불가능한 변증법의 히포콘드리아, 멜랑콜리아. 이는 피흘리는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응혈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변증법의 보좌를 보장해주지만, 동시에 절대 정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무(한)정한 어떤 액체의 거품이 고난의 술잔에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혈전(들), 림프(들)은, 만약 이것들이 아무런 분비물 없이도 치유될 수 있었다면, 정신을 (단지) 바위와 같은 고독과 결백함으로 남겨 놓았을 (뿐일) 것이다. 바위가 자신의 둘레 안에 여성성의 죽음을 감싸안고 입회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 여기서 얘기하는 히포콘드리아나 멜랑콜리아는 억압되어 응고된 피, 혹은 여성성(이리가라이는 피와 여성성을 자꾸 같은 것으로 놓고 읽히게 만든다고 생각되는데) 으로서 이전 단락에서 남성성이 자신을 "살아있는 자율적 주체성"으로 구성하는 변증법적 작용을 일으킬 동안 그 변증법을 지탱해주는 동시에 그것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 줄친 문장은 이해가 안 가요.=_=;;

10) 9p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현실성과 순수한 파토스로의 타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
: 왜 여기서 '죄'라는 표현을 쓰는지, 왜 여성성이 저지른 죄가 가장 순수한 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여기서 '여성성'이라는 단어를 쓴 건 선생님이 설명하신 것에 덧붙여서, 남성성/여성성의 관계가 의식/무의식의 관계와 유사점을 가진다는 이유도 있었을 거라고 이해했거든요. 이 앞 단락에 나오는 남성의 죄-유죄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상징계 내의 주체가 가지는 비극성("하지만 곧바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독특한 [남성] 존재가 유죄라거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보편적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 그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자신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범행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으로 이해를 했는데, 여성성과 윤리적 의식의 연결 관계, 그 죄에 대해서는 감이 안 잡혀요.=_=;;

11) 12~13p "그리고 만약 이 점들 안에서, 곧 정액, 이름, 온전한 개체 안에서 이것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이것들이 자신을 지양할 수 있는 대표적인repr sentatif 지주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율적으로 유동하는 피는 재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눈은 보기 위해서 (적어도 절대적으로는)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정신 역시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 눈과 정신이 여기에 나온 이유(시각중심주의나 로고스 중심주의와의 연결?), 피를 요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왜 눈과 정신이 피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문맥을 이해 못하겠어요. 아울러 피를 여성과 연결시켜 읽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그건 또 나름대로 여성들에게 가부장제가 할당해온 자리는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고요.

II. 답변들

질문이, 정말, 많네 ... ^^ 그렇지만, 이게 *** 씨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번역이 불명확한 곳도 있고, 텍스트가 워낙 난해한 데다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도(또 보부아르의 헤겔 해석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도) 텍스트 안에서 이를 명료하게 밝히지 않고 논의를 전개하는 이리가레의 죄(^^)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고.
  책을 같이 보면서 답변을 해야 좀더 친절한 답변이 될 것 같은데, 내가 책을 학교에 두고 와서 일단 번역만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답변을 해보도록 합시다.
   
  1) 이 문장에서 주어는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 ... 라고 주장함으로써"이고 술어는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라고 봐야지요. *** 씨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주어'는 여성 또는 안티고네라고 봐야죠. 그리고 "휴지"는, 지금 책이 없어서 원어가 뭔지 확실치 않긴 하지만, 아마도 "repos"인 것 같아요. 이 단어는 영어로 하면 "rest"에 해당하는데, "정지", "중단" 같은 뜻이죠. 여기서 정지되고 중단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의식이 자기 의식으로 전환되는 보편성의 운동이고, 여성은 자연적 죽음 때문에 이러한 운동을 완성하지 못한 죽은 남자가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헤겔에 따르면 매장은 자연적 죽음을 맞은 남자(폴뤼네이케스)가 우연적인 자연적 죽음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개체성을 얻게 되는 계기이죠. 여자(안티고네)는 죽음을 무릅쓰고서 이러한 매장을 수행하기 때문에, 인륜성의 필수적인 계기가 되는 거고요.  
  
  2) "실정적인"이라는 말은 "실정법"에서 쓰이는 것처럼 "한번 확립되어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도 있고, "긍정적인"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실정적인 윤리적 행동"이라는 말은 이 후자의 의미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군요. 반대로 다음 문장의 "부정적인"이라는 말은 국가의 법, 곧 크레온의 법이 이처럼 독특한 개인에 대한 매장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뜻이죠. 말 그대로 매장이 필수적인/긍정적인 윤리적 의무다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부정적인 일자"라는 말은, 전체의 힘으로서의 정신은 각각의 독특한 개인의 권리를 뒷받침하는 이러한 실정적인 윤리적 행위를 부정함으로써 전체의 고유한 권리, 전체의 통일성("일자")을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일자"는 정치적 공동체로서 도시국가를 가리키는데, "부정적인"이라는 말은 공동체의 법(공동체의 반역자인 폴뤼네이케스는 매장될 수 없다)에 따라 개인/가족의 의무(적이든 우리편이든 모두 같은 가족의 성원이므로 매장해줘야 한다)를 거부하고 억압한다는 뜻이고, "일자"라는 말은 공동체가 이처럼 개인의 다양한 요구들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죠.  

  3) "대자적 존재"는 헤겔철학의 전문 용어이고, 현재의 맥락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염두에 두고 이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헤겔에게 "즉자적 존재"란,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직 독립적인 자기로 확립되지 못한 즉물적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를 가리키죠. 따라서 어떤 존재가 즉자적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아직 독자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반면 "대자적 존재"는 독립성을 획득한 존재, 그런 상태를 가리키죠.
  그런데 이렇게 존재가 대자적 상태에 도달하면, 바로 타자의 문제가 제기되겠죠. 독립성을 획득한다는 말은, 자기 아닌 다른 것과 자기를 구분한다는 뜻이니까, 어떤 존재가 독립성을 획득하고 대자적 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자신과 다른 타자들과 직면하게 되지요. 그래서 대자적 존재는 항상 이미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이게 되고, 이 타자와의 관계를 해결해야 합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바로 두 개의 대자적 존재가 벌이는, 생사를 건 투쟁이지요. 그리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는 일차적으로 승리한 주인은 노동에서 벗어남으로써 보편적인 즉자-대자적 존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을 통해 부정의 힘을 획득한 노예가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존재로 지양됩니다.
  그런데 헤겔은 오빠와 누이동생의 관계는 이런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거지요. 대자적 존재를 주거나 받아들인다는 말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처럼) 서로가 대자적 존재로서 모종의 갈등 관계에 들어서고 투쟁을 통해 이러한 갈등 관계를 해결한다는 말인데, 오빠와 누이동생의 관계는 이런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4) "passion"이라는 말은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철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는 "정념"이라는 뜻이예요. 특히 17세기 철학에서 "관념"(idea)과 함께 정신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로 부각되고 많이 연구되는데,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미움", "희망", "공포", "열정", "회한" 등과 같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을 통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의미로는 "감정"이라고 이해해도 상관은 없어요.
  이 경우에는 "수난"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은가 합니다. "passion"은, 알다시피, "수동성"을 가리키고, 수난이라는 것은 따라서 타자로부터 겪는 고통을 가리키죠. 이 경우 "마법적인 수난"은 오이디푸스가 신들로부터, 또는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으로부터 겪는 고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다른 수난"이란 오빠와 누이 동생, 특히 안티고네가 또한 겪게 되는 고통, 크레온으로부터 당하는 고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5) 이건 번역이 잘못 되었네.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이 아니라, "너무나 숙명적인fatale 표상들(대표들)"이라고 해야겠네.

  6) 이건 이 맥락에서는 너무 어렵게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향락의 애도"라는 것은 좀더 경험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태(곧 죽음의 다른 표현)를 가리키고, 반대로 이러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어머니와의 동일시에 따라, 또는 "어머니의 아들을 구하려는" 어머니의 욕망과의 동일시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니까, 결국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하는 향락으로 읽을 수 있다는 뜻으로 보면 되겠지요.
  이러한 향락이 상징계, 상징적 질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는 문제는 이 문장 자체만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운 데다가, 부권적 혈통과 구분되는 여성의 계보의 (상징적)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도 연결이 되어야 하니까, 한 문장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7)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이라는 표현은 사실은 좀 모호한 표현이죠. 불어에서 "s'ouvrir les veines"는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정맥을 끊다"는 숙어인데, 이 문장에서는 "s'ouvrir", 다시 말해 "열다ouvrir"는 동사의 재귀형("스스로 열다/끊다")을 쓰는 대신, "rouvrir", 곧 "다시 열다"는 표현을 쓴다는 점이 다르죠.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이런 경우에는 "다시 열다"는 단어 대신 "다시 끊다"라고 번역하면 좀더 의미가 분명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 이런 경우는 폴뤼네이케스의 격정적인 행동이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가문의 파멸을 이끌게 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겠죠.

  8) 이 문장은 번역이 의미를 충분히 못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곧이어 신이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신은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 자아 의 지위 안에 응고되어버린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말고는 아무런 욕망도 지니지 않은 어떤 [남성적] 신un dieu이다." 이렇게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좀더 분명해질 것 같군요. (1)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 자아 "은 상징적 질서, 곧 국법에 따라 포섭된 (상상적) 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개인들은 국법에 의해 자신들의 원초적인 자연적 독특성(혈연관계, 피의 유대에서 성립하는)에서 분리되고 해체된 개인들이지요. (2) 이런 사태를 이리가레는 "지위 안에 응고되어 있는 피의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곧 국가의 법, 부권적인 상징적 질서는 혈연관계를 국법/상징적 질서에 포섭하고, 이렇게 포섭된 혈연관계 속에 각각의 개인을 종속시킨다는 뜻이지요.

  9) 이 문장은 정말 상당히 모호한 문장이네 ... 문법적으로도 시제상으로도. 이 문장은 좀더 생각해 봐야겠네요.

 10) 여기도 번역이 약간 잘못되어 있는데, 새로 고쳐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 말하자면 불가피하게 여성성이 저지른 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윤리적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행위성과 순수한 파토스[수동성]로의 전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지해야/인정해야 한다."
  이 문장에서 "가장 순수한 죄"라는 표현은 법과 힘을 사전에 알고 있으면서도 저지른 죄라는 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점에서 바로 윗구절에 나오는 남성의 경우와 잘 대비가 되죠. 그리고 "윤리적 의식"은 안티고네가 국법에 맞서 가족의 성원에 대해 헌신하는 것을 뜻하겠지요. 헤겔 입장에서 보면 이 윤리적 의식, 이 의식에 따른 행위는 국법에 맞선다는 점에서 허용 불가능한 범죄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죽은 남자인 폴뤼네이케스를 자연적인 무매개적 보편성으로부터 지양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계기이고, 안티고네가 바로 이를 수행한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뒤에 나오는 문단은 이를 부연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고.

  11) 눈과 피를 연결하는 것은 이 글 맨 앞에 나온 헤겔의 인용문을 가리키는 거죠. 그리고 피를 여성과 연결시키는 것 역시 헤겔의 논의의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고. 이걸 이리가레 자신의 견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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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부분을 약간 더 보충했습니다. (1)과 (2)에서 고딕체로 밑줄친 부분이 추가된 부분입니다. 추가한다고 좀더 나아질지는 모르겠지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