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가혹함을 회개합니다

교회개혁운동가가 본 여호와의 증인과 병역거부…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권리를 존중한다


△ 지강유철/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사진/ 이용호 기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이자 여호와의 증인인 김연경님!

법률가들의 양심에 경종을 울리고, 대법원의 판결을 맹종하던 법원으로 하여금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독립적인 심판’의 첫발을 내딛게 한 역사적인 판결이 있은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이정렬 판사의 이번 판결로 우리 사회는 양심의 자유와 국가의 의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시작했고, 2001년 보수적인 기독교의 반대로 좌절됐던 대체복무제 입법 운동도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말없이 견뎌낸 연경님과 같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기쁨엔 동참하기가 어렵군요. 그러기엔 저와 제가 몸담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너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헌정 사상 초유의 일로 받아들여진 5월21일 판결의 기사와 칼럼 등을 읽으면서 저는, “과거에 대한 기억처럼 양심을 광범위하게 찌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존 스토트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5월21일의 판결 소식으로 인해 잠시 환해졌던 얼굴은, 연경님과 같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지난 수십년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가운데 당한 차별과 고통을 상상하면서 일그러졌습니다. “2002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대부분 해결된 다음에야 여호와의 증인을 중심으로 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인권 현안으로 등장한 것”을 들어 지난 몇십년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은 ‘빨갱이’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었다”는 한홍구 교수의 지적 앞에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지난 2001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실태가 <한겨레21>에 의해 공식 제기될 때까지, 감옥에 갇힌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자 수를 국방부가 실제 투옥돼 있는 1600여명과는 비교도 안 될 10여명으로 파악할 정도였다는 점은,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종교와 지식인의 무관심이 얼마나 뻔뻔한 수준이었는지를 방증하는 것 같아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이자 여호와의 증인인 김연경씨. 최근 수형생활을 마쳤다.

김연경님께서도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옆에서 거지 나사로가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갔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성서는 부자가 거지를 강탈하거나 착취했다는 그 어떤 암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부자가 이야기 속에서 매우 사악하게 언급되는 것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그 이유를 부자가 거지의 궁핍함을 경감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 다시 말해 경제적인 엄청난 불평등의 상황을 묵인했다는 점, 그러므로 그 거지는 불평등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채 죽어갔다는 점을 꼽더군요.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부자가 적극적으로 약자를 착취하거나 강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한 살인적인 무관심 때문에 지옥에 갔음을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지요.

물론 지난 60년간 양심적 병역거부나 집총 거부로 인해 온갖 수난을 겪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우리 시대의 거지 나사로였다고 말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아와 가난한 자, 억눌린 자와 외국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누가복음의 부자처럼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했고, 그러면서도 이단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여호와의 증인들을 경멸적으로 바라본 한국 기독교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악덕한 부자와 어떻게 다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정통 기독교를 주장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이 너무 완고해서 1976년 3월과 같은 해 12월에 양심적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헌병대 입창과 논산훈련소장에서 김종식씨와 이춘길씨가 맞아죽었음에도 저들과 슬픔을 나누기는커녕 그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위해 기꺼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를 조화시키는 일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열정에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신의 음성을 들은 게 아니라 유행과 첨단을 걷는 모든 문화에 편승하면서 세속적인 성공과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바꾸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박노자 교수의 말처럼 남북한 정권이 일제식의 “군국주의적·국수주의적 세뇌장치들”을 이어받아 “국가를 위한 살생도 종교적·도덕적 죄”라는 세뇌장치를 무분별하게 이용할 때, 교회가 어떻게 국가권력과 똑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정통과 이단에 관해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는 지난 5월15일에 있었던 초등학교 교사 최진씨의, “저의 병역거부는 군대만을, 전쟁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라는 발언과 지난날 한국 교회가 여호와의 증인들 앞에서 보여준 가혹함을 비교하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정말 어쩌다 한국 교회의 가슴은 젊은 초등학교 선생님의 가슴보다 작아졌을까요? 작아진 것이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연민만이라면 이처럼 기독교인이란 사실이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한국교회는 그들을 경멸만 할 것인가.(사진/ 박승화 기자)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 의하면 1969년 1만명이던 ‘증인’(단순 집회 참석자가 아닌)의 수는 2004년 현재 9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중에서 지난 4년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젊은이들이 매년 500~800명 이상임이 확인됐습니다. 특기할 만한 상황은 1993년까지 양심적 병역거부가 2년형을 선고받다가 1994년부터 3년형으로 늘었지만 거부자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2002년 서울지법 남부지원 박시환 판사에 의해 병역거부자 이경수씨가 신청한 위헌법률심판 제청 이후, 법정 최소 형량인 1년6개월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자 수는 큰 변화가 없다고 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감옥행은 물론이고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직업 선택에서 엄청난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하다면 이런 억압과 차별이 3대에 걸쳐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 수도 함께 증가한다는 사실 앞에서 저는 깊은 충격을 느낍니다. 정통과 이단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몇십년 동안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감옥에 가고, 직업 선택에 엄청난 차별을 당하고, 평생을 전과자로 낙인 찍혀 산다고 할 때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과연 여호와의 증인처럼 한국 기독교도 한해 1%에 해당하는 10만의 젊은이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을까? 만약 정통임을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기독교의 더 많은 청년들이 감옥행을 택하지 못하거나 그 비슷한 수준에 머무른다면, 과연 정통과 이단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당신들의 구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러나 저는 서둘러 제가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바의 진리와 구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이렇게 눈에 드러나는 통계에 의해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할 수 없다는 점도 서둘러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볼테르의 저 유명한,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란 말로 저의 확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 감옥행을 선택하고 평생 전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로 현재의 여호와의 증인 또는 한국 기독교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현실 탓에 부모의 눈에서 피눈물나는 것은 물론 91살의 할머니를 매월 감옥으로 면회를 오게 할 수밖에 없던 김연경님. 힘든 영창 생활이지만 근무 수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수감자인 우리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고자 했던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이 지면을 통해 전달되기를 바라셨던 김연경님. 님께서 고난의 현장에서 말한 “예수가 자기를 미워하고 증오한 사람에게도 보여준 사랑이 나를 감동시켰다”는 한마디가 솔제니친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하보다 무겁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조국이 이 사랑으로 새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어디에 계시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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