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선배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 특히 록이나 블루스, 재즈 이런 음악에 아주 미쳤는데, 어느 때부턴가는 전혀 이런 류의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기특한 사고의 전환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90년대 이후 대학가에 불어닥친 록음악 바람에 좀 심드렁한 기분이었고, 그것을 <진보>와 연관시키려는 심사도 잘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최근에는 또 재즈가 문화적인 아우라를 띠고 유행을 타는 것 같더군요. 아도르노처럼 독하게 비판할 만한 능력도, 생각도 없지만, 김규항 선배 글에는 얼마간 공감이 가서 퍼왔습니다.

 

 

한국 록에 관한 사적인 기억들

(며칠 전 컴퓨터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글. 2년 쯤 전에 지큐에 쓴 글인데 아직 날짜를 확인하지 못했다. 제목 그대로 기억나는 록 뮤지션들을 짤막짤막하게 메모한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내가 이렇게 생각했나?' 싶은 부분도 있다. 가슴 편집장 박준흠 씨가"재미있게 읽었다."는 소감을 준 걸 보면 못봐줄 정도는 아닌 듯.)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이른바 "록은 저항적인 음악"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에 대해 말이다. 한국에서 록은 대개 저항적이긴 커녕 저항적인 청년문화를 굳이 비껴가고 딴지 놓는 어떤 것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록이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70년대 말은 유신 정권의 말기다. 그 세상에서 그 록들이 내뿜는 낭만성은 참으로 한심하다. 민주화의 기대를 짓밟은 군부 파시스트들이 광주에서 양민을 도살하고 10여 년 동안 손수 한국을 통치하는 동안 대체 록이 무슨 놈의 저항을 했던가. 90년대 들어 대중문화 영역에 대거 투신한 일군의 인텔리들이 지껄여 대기 시작한 "록은 저항적인 음악"이라는 말엔, 록의 영토를 '구라'로 지배하려는 그들의 음험한 욕망과, 자신의 활동 구역에 모종의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들의 비린 허세가 담겨 있다. 록은 어떤 신령한 저항성이 담겨져 있는 음악이 아니라 단지 불량한 음악이며 그 불량함은 저항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장르의 대중음악이 그 사회적 함의가 거세된 채 수입되는(포크에서 이 즈음의 흑인음악들까지) 한국적 문화전통은 유구하고, 한국에서 록이 어떤 정신을 확보하는가는 두고 볼 문제이자 애써 볼 문제다.

좌파라는 이가 '록을 기억'한다 해서 모종의 비장한 록담론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일찌감치 다른 기사로 넘어가시는 편이 낫겠다. 이 글은 이 글의 제목 그대로 산울림에서부터 근래 발견한 몇몇 인디밴드들까지, 25년 여에 걸친 한국 록에 관한 내 사적인 기억들이다. 록의 불량함은 모든 불량한 이로 하여금 록에 대해 말하게 한다. 아유레디!

산울림 : 1977년 그들은 책이나 좋아하는 중학 3학년이던 나를 습격했다. 산울림은 내가 이른바 그룹사운드(이 시골이발소 풍의 이름은 이제 밴드로 개명되었다)에 이끌리게 된 계기였다. 카세트 테입 속 해설지엔, 그 앨범을 낸 음반사 사장인가 하는 사람이 데모 테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소감을 "AFKN에서나 들을 수 있는 사운드"라 적고 있었다. 배호 정도는 되어야 가수라 생각하는 기성 세대는 산울림을 '음치'라고 했으며 당시 기준으로 산울림은 분명히 음치였다. 하여튼 산울림은 완전한 새로움이었다. 나는 드럼이라는 악기에 본능적으로 이끌렸으며 산울림은 내게 드럼 선생이기도 했다. 두팔과 다리가 따로 노는 일은 처음엔 차력의 일종처럼 보였으나 이내 드럼 세트의 각 부분이 따로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기나긴 베이스 독주나 '불꽃놀이'의 장타령 풍 리듬이 매일 밤 나를 매혹했다. 막 배운 마스터베이션과 함께.

사랑과 평화 : 산울림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밴드였다. 최이철 김명곤을 중심으로 한 사랑과 평화는 요즘 말로 하면 전문 세션맨들의 밴드였다. 산울림이 캠퍼스적 아마추어리즘(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나 어떡해' 는 산울림의 곡이다)을 바탕으로 했다면, 사랑과 평화는 원숙한 테크닉의 밴드였다. '장미'에서 보여주는 연주의 조직력과 드럼 필인은 지금 들어도 훌륭하다. 곧 도래한 디스코 시대에 그들의 펑키한 리듬감은 뇌가 없는 댄스곡처럼 밋밋해지고, 오늘 '최장수 밴드'로 지루하게 남았다. 2집(1979)의 '얘기할 수 없어요'는 김현식의 노래들과 함께 내 불변의 십팔번이다. 듣는 것보다는 불러야 맛이 나는 곡.

활주로(송골매) : 바야흐로 밴드의 시대였다.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 같은 밴드의 성공은 대학 밴드들의 활황과 맞물렸다. 그러나 밴드 체제로 유행가가 아닌 록을 하는 밴드는 항공대 밴드 활주로가 유일했다. 1978년 해변가요제에서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로 대학가요제에서 '탈춤'으로 입상한 활주로는 나원주/이응수라는 저작자와 배철수라는 텁텁한 보컬리스트의 조합으로 한국 록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한국적인 록을 구사했다. 활주로는 송골매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데 구창모가 보컬로 들어올 무렵 원래의 색깔을 잃는다. 신중현과 산울림을 재조명한 인탤리들이 이 밴드를 소흘히 넘어간 건 건 그들의 한심한 안목 덕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밴드는 활주로의 '세상만사'로 출발한다.

작은거인 : 밴드의 이름은 바로 밴드의 리더 김수철이다. 1979년, 작은 체구에 지미 핸드릭스처럼 기타줄을 물어뜯는 김수철의 '일곱색깔 무지개'는 한국 최초의 하드록 사운드였다. 작은거인 역시 대학 밴드(광운대)였지만, 노인들에게서도 '잘 논다'는 동의를 얻을 만큼 음악적 설득력이 뛰어났다. 김수철의 재능에 대한 사회적 공인은 이 유니크한 로커로 하여금 록의 검약한 본성(록은 독특한 것이어서 편성이 간략할수록 강력하기도 하다. 작은 거인은 산울림처럼 3인조였다.)를 망각하고 교향악단을 사용하는 대작을 좇거나 민족음악에의 어설픈 경도를 낳게 했다. 아시안게임 음악은 김수철에게 어떤 만족을 남겼을까.

신중현 : '미인'이 실린 앨범 신중현과엽전들(1974)은 분명 한국록의 명반이지만, 70년대 말에 대마초(한국에 연성마약을 허하라!) 복용 혐의로 활동 중지 상태였던 신중현은 록의 선배라기 보다는 잘나가던 가요 작곡가로 여겨지곤 했다. 어쨌거나 그는 1980년 신중현과 뮤직파워로 복귀했다. 엽전들이 3인조였음을 생각한다면 세명의 관악 파트에 두명의 여성 보컬을 포함 자그만치 9명으로 조직된 대편성 밴드인 뮤직파워는 신중현의 달라진 음악적 지향을 드러낸다. 신중현에 대한 이런저런 찬사들은 대개 맞거나 좋은 말이지만, '아름다운 강산'이 한국록 불후의 명곡이라는 주장과 '록의 아버지'가 된 90년대 이후 신중현 음악에 대한 아첨에는 동의를 못하겠다. 내 생각에 '아름다운 강산'은 그저 '불후의 대곡'일 뿐이며, 그의 근래 음악들은 '록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봐주기 민망한 것들이다.

마그마 : 1980년, 대학가요제 생방송을 보며 대체 그룹사운드는 언제 나오나 기다릴 때 마그마가 나왔다. "어둠 속에 묻혀있는 고운 해야. 아침을 기다리는 애띤 얼굴.." 여리고 느린 앞부분에 낙심하는 순간, 귀를 의심케 할 만한 강력한 사운드가 폭발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회자는 "세명이서 어떻게 저런 사운드를 만들어내는지 신기하다"고 감격했다. 마그마의 사운드는 80년대 중반 시나위에 가서나 등장할 헤비메탈 사운드를 구현한 선구적인 것이었다. 충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리더 조하문은 곱상한 얼굴을 들이민 채 '이밤을 다시 한번'을 애원하게 된다.

들국화 : 라이브만 하는 대단한 밴드가 등장했다는 풍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행진' '그것만이 내세상' 같은 곡도 물론 좋지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곡자체로나 연주면에서나 가히 명곡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들국화만큼 보편적인 지지를 받은 밴드가 있었던가. 들국화는 재결합하여 새로운 히트곡이 없음에도 여전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다. 들국화에 대한 이런저런 피력들은 오히려 상투적일 뿐이다.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시나위 : 1986년 내가 입대하던 해 시나위가 등장했다. 아버지 신중현에게서 "테크닉 면에선 나보다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던 기타리스트 신대철의 밴드였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강한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리프와 솔로, 무겁고 단순한 드러밍이라는 헤비메탈 사운드의 전형이다. 헤비메탈이 록의 분방함을 벗어난 지나치게 양식화된 음악으로 보는 편인 나는, 나중에 김바다가 보컬을 맡던 시절 리메이크 된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더 좋아한다. 열린 하이해트 심벌이 촬촬거리는 소리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기분을 낳는다. 시나위는 말 그대로 한국 헤비메탈/하드록의 산 역사이며 근래 8집도 여전히 훌륭하다.

부활 : 내가 80년대의 대학생이거나 80년대의 청년이던 80년대 내내 나는 록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매판문화의 일환이었다. 나에게 3년 동안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원치 않던(난 평범한 군대 생활을 바랬다) 드러머 노릇을 하게 되면서다. 어느 날, 리드 기타를 치던 고참이 휴가길에 사온 테이프를 틀어놓곤 "기타가 죽이잖냐. 방위새낀데 존나게 노래 잘하지." 했다. 김태원의 둔중하면서 몽환적인 기타와 이승철의 끈적이는 보컬에 빠져드는 순간, 조인트를 세게 채였다. "개새끼가 고참 말에 대답도 안해."

한대수 :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히피 한대수는 감옥 같은 조국을 떠난다. 그가 1989년 14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앨범 무한대는 록이었다. 리메이크된 '하루 아침'의 가사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유일한 문명비판적 음악가의 세계관을 되새기게 한다.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하는 보컬에 이은 어쿠스틱 기타, 그 다음 "베이스 들오고" "기타 쫌 울고" "장구우 때려" 하는 한대수의 명령어에 베이스와 기타와 드럼이 차례로 들어오는 '고무신'은 한대수의 음악가로서의 위엄을 한껏 표현한다. 내 다섯 살짜리 아들 김건은 이 곡을 무척 좋아하는데, '고무신'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고 '장구때려'라 하면 얼른 알아듣는다. 그에게 한대수는 '장구때려 아저씨'다.

H2O : 내 기억으론, H2O는 재미교포 젊은이 몇몇이 만든 밴드였다. 멤버가 대부분 바뀐 H2O 3집(1993)은 음악평론 하는 후배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말에 뒤늦게 들었다. 강기영 김민기 박현준의 연주야 당연히 훌륭하고 마크 코브린인가 하는 엔지니어까지 부른 사운드는 거의 완벽하다. '나를 돌아보게 해'는 가사도 깊고 반복해서 듣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이 앨범은 대중적으론 철저하게 실패했고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크래쉬 : 나는 바하를 좋아하는 이유(구성의 명료함)와 같은 이유로 스래시 메탈을 좋아한다. 크래쉬는 대개 영어로 노래한다. 영어만이 메탈적이라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지만(덜 메탈적이더라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는 편이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크래쉬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식적 완성에 있고 나 역시 그런 차원에 한정해서 이 밴드를 존중한다.

노이즈 가든 : "저 친구 기타 정말 잘 치는군." 1996년, 노이즈 가든이 결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그들의 라이브를 구경했다. 기타리스트 윤병주는 블루스(알다시피 블루스는 록의 뿌리다)의 필을 짙게 깔면서도 강력한 사운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젊은 장인이었다. 레인보우의 대곡 '스타게이저'도 연주했는데 리치 블랙모어 정도는 오래 전에 구어 먹은 솜씨라 나는 얼마나 흐뭇했던가.

델리 스파이스 : 델리 스파이스의 보컬은 참으로 록답지 못하다.(물론 이런 말은 정당하지 않다) 특히 나는 장르를 불문하고 대중음악의 보컬리스트라면 일단 걸걸한 목소리여야 한다는 입장이다.(물론 이건 심각한 편견이다) 그런 내가 델리 스파이스의 연주에, 이를테면 '챠우챠우' 후반부에 어느덧 빠져드는 걸 보면 델리 스파이스는 만만치 않다.

허클베리핀 : 대중음악에서 지적 능력을 표현하는 결정적인 수단은 가사이며, 허클베리핀은 지적이다. 이 밴드의 특징은 여성 보컬리스트의 중성적 매력이다. 남상아(3호선 버터플라이으로 옮긴)가 그랬고 현재 이소영도 그렇다.얼마 전 나온 2집 '나를 닮은 사내'는 세련되었고 내가 운전할 때 가장 많이 듣고 다니는 음반이다.

풀린개 : 라이브를 한번 보고 나중에 가사를 얻어 본 풀린개는 말하자면 한국의 RATM이다. 이런 밴드가 있다는 건 단순한 문화적 다양성의 의미를 넘어 안도감을 준다. 음악이 아니라 메시지가 목표일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혁명 너희가 원하는 것은 시나리오/ 바꾸기를 원하는가 정말 원하는가/우리가 바랬는가 세상 뒤집는가/시나리오를 원하는가 개소리 떨지마라/그런 것 따윈 없어 너부터 바꿔봐라"

모든 록이 이런 식이라면 더도 덜도 아닌 스탈린의 세상이겠지만, 이런 록이 이렇게 없는 세상은 더욱 문제다. 세상이 불량하다는 사실엔 모두들 동의하면서, 불량한 음악 록은 왜 세상보다 덜 불량한 것일까.

Posted by gyuhang at 2004.05.23 12: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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