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난 김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기입inscription

기입 또는 기입하기inscrire라는 개념은 원래 어원(in-scribere)이 말해주듯 (종이나 파피루스, 널빤지 등과 같은) 물질적 매체에 무언가를 '새겨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새겨넣는 행위는 어떤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또는 어떤 것을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친구나 자손, 또는 후세 같은)에게 손상 없이 전달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입이나 기록의 행위는 일차적인 어떤 것, 곧 서로 대면하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또는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직접 수행하는 행위을 보조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느 순간 머릿 속에 떠올린 생각이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말, 누구와 한 약속 등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기입이나 기록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처럼 상식적인(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상식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기입되고 강제되어온 생각이다) 생각을 전도시켜, 기입이나 기록이야말로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 또는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맺고 있는 상호 주관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경험적인 기록과 일종의 유사-초월론적인quasi-transcendental 기록(데리다가 {기록학에 관하여}에서 원-기록archi- criture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를 구분한다면 이 주장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데리다가 espacement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잠깐 살펴보자. 이 단어는 원래 인쇄술에서 유래한 용어다. 인쇄술에서 이 용어는 인쇄면에서 여백칸을 어느 정도로 하고 본문의 크기를 얼마로 잡을 것인지 정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간격을 얼마나 두고, 줄 간격은 어떻게 하고 하는 등의 작업을 가리킨다. 이는 학문적인 논의나 심지어 언어 활동에서 매우 부차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글자 크기나 여백, 글자 간격 등의 문제에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생각해보면 이는 생각만큼 그렇게 부차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런 의미의 espacement은 우리의 언어 활동 전반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따르는 문법적인 규칙(예컨대 주어와 술어, 목적어의 순서 따위)이나 다양한 어법은 단어와 단어, 어구와 어구를 연결해 주는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가 일차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말과 말 사이의 간격두기, 곧 espacement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는 단지 단어와 단어, 말과 말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게 아니라, 자음과 모음의 결합, 기표와 기의의 결합 같은 일체의 모든 언어적 관계에서도 성립하는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espacement은 관계 맺기, 구분하기로서의 언어 활동에 전제되어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는 어떤 실정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관계,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이는 이후 구조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가 된다. 데리다가 inscrption이나  criture, 또는 espacement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지시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의 관계가 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따라서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지 않지만 차이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술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데리다가 말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로고스 중심주의는 이런 기술적 조건들을 자연적 조건들로 전위시키고 은폐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렇게 본다면 데리다가 기입이나 기록의 작용이 주체의 자기 관계나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 주관적 관계의 (유사 초월론적) 조건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그다지 허튼 소리는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분석에서 데리다는 이러한 기록의 문제 설정을 정치의 문제에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정치적 문제에 적용될 때 기록의 문제 설정은 순수한 정초와 순수한 보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준다. 정립이나 정초, 창설은 항상 자체 내에 보존과 재생산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역으로 보존과 재생산은 그 활동 자체 내에 이미 정초와 창설의 계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록으로 수록된 [독립 선언들]에서도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데리다가 본문에서 하이데거를 염두에 두면서 "되풀이 (불)가능성은 순수하고 위대한 정초자, 창시자, 입법가(이러한 정초자들의 숙명적 희생과 관련된 유비적인 도식에 따라 하이데거가 1935년에 말하게 될 의미에서, '위대한' 시인과 사상가, 또는 정치가)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도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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