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의 힘]이 왜 아직 출간되지 않고 있는지 의아해하실 분들이 좀 있을 것 같은데, 실은 문학과 지성사 편집부에서, 역주에 집어넣은 내용들 중 상당수를 <용어 해설>로 따로 묶자는 제안을 했고, 저도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역주들 중 용어와 관련된 내용들을 <용어 해설>로 묶고, 또 몇 가지 용어들을 새로 추가하고 하느라고,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나 목요일까지는 원고를 넘길 생각인데, 그 전에(또는 그 이후라도 관계 없습니다. 이 원고를 넘겨도 아직 최종 교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용을 수정할 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논평을 받고 싶어서 <용어 해설>에 들어갈 항목 중 하나를 올립니다.  좋은 제안이 있다면 최대한 내용에 반영할 생각이니,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공짜로?^^).

 

대체 보충supplément

우리가 ‘대체 보충’이라고 번역한 supplément은 데리다의 초기 작업, 특히 『기록학에 관하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 루소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에서 문자 기록écriture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언어란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기 위해 비로소 목소리를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루소는 이 최초의 언어는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조음적articulé이라기보다는 음량과 강세, 억양이 중시되는 소리였을 것이고, 자음보다는 모음을 위주로 하는 소리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단조로워지면서 자음이 증가하고, 강세와 음량이 줄어들면서 조음이 증가하게 되고, 감정표현보다는 명확한 의사전달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언어가 바뀌어가게 된다. 조음적인 언어가 등장하고 의사 소통이 언어의 주요한 기능이 되면서 사용된 것이 바로 문자 기록인데, 루소는 이 문자 기록을 ‘위험한 대체 보충물dangereux supplément’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원래 문자 기록은 목소리에 기초한 고유한 의미의 언어를 보조하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이 문자 기록은 점차 고유한 언어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루소의 이 개념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드러나는 루소의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될 뿐 아니라, 플라톤에서 루소, 후설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서양의 현전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 중심주의의 맹점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개념이다. 곧 데리다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idros』나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및 『구조 인류학』에 대한 분석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서양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문자 기록을 폄훼하고 목소리나 말 또는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여 주고받는 대화를 진정한 언어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처럼 문자 기록을 폄훼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문자 기록의 존재를 완전히 말소하거나 배제하지 못하며, 이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데리다는 이러한 양면적 태도는 사실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내재하는 아포리아의 징표라고 말한다. 곧 순수하고 충만한 현전이나 기원(목소리, 말, 대화, 로고스 등)을 인정할 경우 이를 보충해야 할 도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으며(왜냐하면 보충은 결함을 지닌 것에게만 필요하기 때문에), 반대로 보충의 필요성을 인정할 경우에는 결국 현전과 기원의 불완전성, 결핍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문자 기록의 위험성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supplément이라는 단어는 데리다에게는 존재나 구조, 또는 언어나 기타 다른 모든 체계에서 작동하는 논리를 보여주는 개념이 된다. 요컨대 우리가 현전, 기원, 중심 등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은 무한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으로부터 사후에 파생된 것이며, 이러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은 결국 기록의 경제(이는 곧 차이(差移)의 경제이기도 하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supplément 개념은 기원의 결핍과 (문자) 기록의 근원성을 보여주는 핵심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supplément은 국내에서는 ‘대리적 보충’이나 ‘보환’ 등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이 책에서는 이 개념이 담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해서 ‘대체 보충’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